이 세상에 온 사람은 모두 큰 목적이 있어 왔으며, 신이 부여한 사명을 띠고 왔다. 이 목적과 사명은 개개인의 내면에 있는 깊은 지성, 즉 앎이라 불리는 지성 안에 신성하게 간직되어 있다.
세상 경험을 통해 조건화되고 형성된 개인의 이성으로는 이 사명과 목적에 다가갈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사명과 목적은 침범할 수 없는 상태로 신성하게 당신 내면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명과 목적은 당신 너머에 있는 힘들, 세상의 상황들, 핵심적이고 중요한 관계들이 당신 안에서 불러내야 한다.
여기서 부름은 세상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지, 단순히 개인적으로 깨달음을 얻거나, 최고의 행복과 만족을 누리는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사명과 목적을 일깨우는 힘은 당신 너머에서 와야 한다. 그래서 이 목적과 사명이 당신 안에서 밖으로 나와야 한다. 이 목적과 사명은 부름을 받고 당신 안에서 밖으로 나와야 한다.
많은 사람이 피하고 부정하고 싶어 하는 상황, 마주하여 맞서고 싶어 하지 않는 바로 그 상황들이 그들의 큰 목적과 사명을 그들 안에서 밖으로 불러낼 힘이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답은 당신 내면에 있지만, 부름은 그렇지 않다. 부름은 세상에 있으며, 당신을 부르고 있다.
세상에서의 당신 역할과 위치가 단순히 미래의 보상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선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악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한 행동에 대해 보상을 받고 싶어 하고, 악한 행동을 한 다른 사람들을 벌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사람은 일하기 위해 세상에 파견된다. 모든 사람은 일하기 위해 세상에 오고 싶어 하므로, 일하기 위해 세상에 온다. 당신은 평화롭고 평정심을 지니고 사는 곳을 떠나, 분열과 갈등이 있는 세상으로 들어온다. 신을 모르는 세상, 진실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개인적 두려움과 야심에 기반을 두고 삶을 사는 세상, 생존이 어렵고 자연이 가혹하고 엄격한 세상으로 들어온다.
만약 당신이 이 목적과 사명에 따라 삶을 살아간다면, 비록 그 목적과 사명이 아직 당신에게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자기 삶에서 온전함을 느낄 것이다. 당신은 지속적인 목적의식을 느낄 것이고, 은총을 경험할 것이다.
만약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않거나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면, 당신은 혼란·불안·좌절·분노·원망을 느낄 것이고, 극단적인 사상이나 정치나 종교에 매달릴 수도 있다. 당신은 과격한 단체를 지지할 수도 있고, 정치 활동에 자신을 바칠 수도 있으며, 중독이나 일탈 행위에 빠져들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의 근본적인 문제는 당신을 이 세상에 오게 한 목적에 맞추어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목적은 오직 당신 내면에 있는 깊은 지성인 앎만이 알고 있고, 당신을 위해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이 세상에 올 때 고향을 잊어버리는 것은 필수이다. 당신은 여기서 완전히 다른 현실, 정말로 완전히 다른 현실로 들어간다. 육신에 들어가, 개인적 정체성을 띠고, 사회에서 이름과 지위를 갖고, 자신의 신체적·심리적 특성과 동일시하며, 자신의 감정과 다른 사람들의 감정, 다른 사람들의 기대, 국가·종교·문화의 기대에 이끌리면서, 당신은 실제로 본연의 자신과는 매우 다른 어떤 것이 된다.
세상에 있는 것이 당신이 맡는 역할이다. 이것은 당신의 영구적 현실이 아니며, 당신의 진정한 정체성도 아니다. 당신은 온갖 다양한 정체성을 주장할 수도 있고, 이러한 역할들과 완전히 동일시하려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신의 진정한 본성과 세상에 온 당신의 목적은 그 진실이 당신 내면에 있는 앎에 간직되어 있다.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복원인 큰 깨어남은 생각하는 마음을 앎의 마음과 다시 연결하는 것이다. 즉, 문화·가족·종교에 의해 조건화되고 형성된 개인적 마음을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놓은 깊은 마음과 다시 연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놓은 지혜와 힘을 따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신의 사명과 목적은 단순히 말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가슴에 다는 이름표도 아니며, 직무 설명서도 아니다. 그 사명과 목적은 당신이 따르는 어떤 방향이다. 신비로운 방향이지만, 매우 구체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는 방향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로 이 방향이 당신을 규정하고, 당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당신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당신에게 드러낸다.
자신의 현실을 창조한다는 개념은 오직 당신이 앎을 따르고 앎이 당신의 참된 본성과 세상에 온 목적을 당신에게 드러내도록 허용할 수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을 위한 새로운 진로를 설정해야 하며, 사회와 문화의 압도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하여 당신 내면에서 앎이 드러날 수 있는 개인적 현실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을 위한 새로운 환상을 지어내는 데 현실을 창조한다는 개념을 사용한다. 즉 자신을 다시 창조하려고 하고, 새로운 사고 과정, 새로운 경험,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창조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바로 이런 동기가 애초에 신과의 분리를 낳았다.
신이 이미 당신을 창조하였는데, 왜 자신을 다시 창조하려고 하는가? 당신이 발견하여 따르고 경험하기를 기다리는, 삶의 진정한 본질과 방향을 신은 이미 당신에게 주었는데, 왜 삶의 본질과 방향을 결정하려고 하는가? 당신 내면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본연의 당신, 당신의 본질,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신은 이미 창조했는데, 왜 이 모든 것을 다시 규정하려고 하는가?
대단한 사람이 되려 하고, 어떤 것을 가지려 하고, 대단한 일을 하려 하고, 인정을 받으려 하고, 사람들이 당신을 믿거나 사랑하거나 따르게 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은 너무 절망적인 시도이며, 당신의 참된 본성과는 매우 동떨어진 것이다. 부를 얻으려는 투쟁, 인정을 받으려는 투쟁,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투쟁, 이 모든 필사적인 투쟁으로 사람들은 삶과 에너지를 소모하지만, 정작 그들의 참된 본성과 참된 목적은 여전히 발견되지도, 표현되지도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러므로 비록 당신이 큰 역경과 대단한 결단력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공허하며 자신과 단절된 상태로 있다. 당신은 여전히 화가 나고, 좌절하고, 혼란스럽다. 당신이 신념이나 이념을 굳건히 고수하고, 목표를 이루거나 자기 생각을 실현하려는 시도가 아무리 완고해도, 당신 삶은 여전히 발견되지도, 경험되지도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분리는 당신 내면에서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즉, 시간의 99%를 보내는 생각하는 마음과 앎의 깊은 마음 사이의 이 분리가 해소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종종 앎을 직관으로 경험한다. 통찰을 얻고, 어떤 일들을 미리 알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한다. 또한 어떤 것에는 끌리고, 어떤 것에서는 멀어진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끌림을 가치 있게 여기거나 따르는 경우는 드물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끌림은 신이 당신을 돕고, 안내하고, 오류에서 당신을 보호하려는 것이며, 또 삶에서 추구하려는 다음의 큰 목표에 당신을 내주지 않도록 조언하고, 당신 삶에는 이미 진정한 의미와 방향, 진정한 목적과 표현이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일깨워 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앎이 당신 내면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당신은 길을 비켜주어야 한다. 당신은 인내심을 가지고 귀 기울이기 시작해야 하며, 결과를 규정하거나, 방향을 결정하거나, 과정을 통제하려고 하는 일 없이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이 제공하는 단계를 밟아야 한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신에게 기도한다. 그들은 안전을 원하고, 보호받기를 원하며, 목표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업이 성공하기를 원하고, 결혼 생활이 원만하기를 원하며, 자녀가 성공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삶에서 신이 일하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런 온갖 것을 원하면서도, 자신이 그 과정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어떻게 일어나고, 그 결과가 무엇일지 자신이 주도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이 말은 당신이 자기 삶에서 수동적 관찰자가 된다는 뜻인가? 물론 아니다. 앎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 내면에 깊이 집중하고, 대단히 절제하는 것이다. 당신을 나약하게 하고 사람들이나 활동에 부적절하게 휘말리는 성향을 멀리할 것을 앎은 당신에게 요구한다. 바로 이 힘이 당신의 중독을 끊어낸다. 바로 이 힘이 무의미한 것들을 좇거나 해로운 관계에 당신 삶을 내주는 것을 막아준다.
여기에는 당신이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더 큰 자기 단련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자제력이 필요할 것이고, 자기 성찰이 필요할 것이며, 자기 일을 적절하고 올바르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상관없이, 현재 사람들 대부분의 삶은 그들이 효과적으로 앎을 경험하고 따르기에는 너무나 통제 불능 상태이다.
당신 삶이 제대로 표현되고 창조적이고 강력해지려면, 삶은 매우 단순해져야 한다. 당신은 동시에 스무 가지 일을 관리해서는 안 된다. 새 메시지는 삶의 네 기둥, 즉 관계의 기둥, 일과 부양자의 기둥, 건강의 기둥, 영적 성장의 기둥을 세우고 유지하는 것을 통해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매우 명확하게 알려준다.
마치 탁자의 네 다리처럼, 이 기둥은 당신을 지탱하고, 유지하며, 당신이 세상에서의 큰 책임과 큰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한다. 이 기둥들을 세우려면 엄청난 자기 단련, 고도의 집중력, 많은 개인적 책임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당신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신이 당신 삶을 관리하고 통제하도록 맡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터무니없다. 신은 당신 삶을 관리하는 일보다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신은 당신 삶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내면에 깊은 지성을 심어놓았다. 이 깊은 지성은 당신이 세상에 온 당신의 사명과 목적을 알며, 다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다. 그리고 혼란스러워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세상에 반발하지도, 야심에 사로잡히지도, 기만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지성은 바로 당신의 사명을 띠고 이곳에 왔다.
신은 당신이 세상에 들어오면, 앎 없이는 결코 당신의 사명을 찾을 수 없을 것임을 안다. 당신은 세상 속에서 길을 잃고, 세상에 휩싸이고, 당신의 생각·행동·감정까지 세상에 지배받을 것이며,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 세상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나 남들의 반응에 휘둘릴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혼란과 괴로움, 분노와 야심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이다.
그래서 완벽하게 안내하는 지성인 앎이 당신에게 제공되었다. 그러나 앎이 출현하도록 하려면, 당신 삶에 질서가 있어야 한다. 당신의 활동들은 서로 일관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당신의 관계들은 이 출현을 지지해야지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앎에 응답하고 앎을 경험하도록 준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개인적 책임을 받아들이고 개인적 자유를 실천하는 엄청난 행위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앎과 함께하지 않고 앎을 따르지 않는다면, 당신은 다른 힘들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들에 얽매인 노예이고, 자신의 소유물에 얽매인 노예이며, 안전을 갈구하는 마음의 노예이다. 그리고 특정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들에 얽매인 노예이고, 자신의 두려움과 욕망에 얽매인 노예이다.
그 결과 당신은 정말로 처량하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당신은 영적으로 가난하다. 당신은 상실감에 빠져 있고, 공허하다. 당신은 신에게 충성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고, 신을 믿는다고 말할지도 모르며, 당신 종교의 교리를 열렬히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 가슴은 닫혀 있으며, 당신 생각은 고착되어 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오늘날에도, 자신이 종교적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신앙에는 독실하지만, 앎의 안내를 받지 못한 사람이 많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종교, 자신들만의 종교적 초점을 창안했다. 그들은 믿음 체계와 원칙들은 고수했지만, 신이 그들 내면에 심어놓은 지혜는 따르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 문제는 근본적이다. 그들은 앎이 아닌, 믿음에 따라 행동한다. 믿음은 취약하고, 오류에 빠지기 쉬우며, 다른 사람들의 온갖 조종과 통제에 쉽게 휘둘린다. 당신은 믿음을 통해서는 신을 찾을 수 없다. 당신은 자기 마음의 방향을 올바르게 잡기 위해 어느 정도의 믿음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겉보기에 분리된 삶과 당신 삶에 있는 신의 현존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은 앎이다.
신은 인간은 물론 우주에 있는 모든 지각 있는 존재들이 내린 정의나 이들이 지닌 지적 역량 너머에 존재한다. 그러나 당신은 신을 알아차릴 수는 있으며, 당신 내면과 세상에 있는 신의 현존을 알아차릴 수는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직접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을 경험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 내면에서 일하는 앎을 경험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 경험을 하기 위해 심지어 종교인이 되지 않아도 된다. 종교인이 되지 않아도, 당신은 신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으며, 당신 삶에서 움직이는 신, 즉 당신 삶을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내면의 절박감, 당신이 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 되고, 해야 하는 어떤 것을 하고, 필요하다면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내면의 절박감을 경험할 수 있다.
당신은 이 경험을 하기 위해 종교인이 되지 않아도 된다. 종교인이 되지 않아도, 당신은 종교적 경험을 한다. 다시 말하지만, 사물의 형태와 본질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종교적이고, 심지어 신앙심이 매우 깊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영적 연결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반면에 어떤 종교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고 완전히 세속적으로 보이지만 종교적 경험을 하는 이들이 있다.
예수가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아무도 앎을 통하지 않고는 신을 경험할 수 없다는 뜻으로 말했다. 그 당시 그는 앎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있었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고, 그 말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물론 이 가르침이나 세상의 다른 위대한 성인들과 예수에 관한 다른 많은 가르침은 잘못 해석되었으며, 정치 세력과 야심가들이 권력을 얻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렇지만 이보다 앞서, 앎의 거대한 흐름이 있다. 마치 바다 깊은 곳 대양의 해류처럼, 세상의 물을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바다 표면은 요동치고 기상 조건에 완전히 지배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깊은 곳에서는 더 큰 어떤 것이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당신 삶에 대한 좋은 비유이다. 왜냐하면 당신 마음이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며 요동치는 동안에도, 그 아래에는 더 깊은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깊은 흐름이 신의 움직임이자,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놓은 지성이다. 이 지성이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며,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지닌 큰 삶을 살도록 당신을 준비시킨다. 이것이 실현이다. 당신은 세상에 봉사하기로 되어 있으므로, 세상은 그것을 당신에게서 불러낸다. 그러나 당신은 응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에 당신 삶이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면, 당신은 상황과 의무, 기대와 관계에 묶여 있다. 만약 당신 삶이 혼란스럽고, 삶의 네 기둥이 전혀 세워지거나 확립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큰 부름에 응답할 수 없다. 당신에게는 부름에 응답할 힘이 없고, 응답할 자유도 없으며, 응답할 만큼 자신에 대한 신뢰도 없다.
당신은 그 부름을 느낄 수도 있고, 그 부름이 당신 혼을 뒤흔들 수도 있지만, 당신이 용인하여 주변에 형성된 삶, 혹은 스스로 적극적으로 구축한 삶에 갇혀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이 부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편이 더 낫다. 이 부름을 알아차리면, 당신에게 큰 갈등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가능한 한 안전하고 순조롭게 당신을 자각으로 이끌고자 하므로, 계시는 서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신이 맨 처음 하는 일은 당신 짐을 벗기는 것이고,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이 드러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나 환경에서 당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나 장소와의 관계, 사물이나 활동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앎의 현실과 앎의 안내를 경험하는 대신, 자신이 직접 삶 전체를 구축한다. 그들은 의무와 책무와 활동으로 자신을 에워싼다. 그들은 세상에서 본연의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기 전에, 다른 이들과 결합하고, 단체에 가입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등 모든 것을 한다. 이런 일의 실상은 당신 주변에 널려 있다.
영적 갈망을 누그러뜨리려고 사람들은 종교를 믿지만, 종교를 믿는다고 그 간극이 메워지지는 않는다. 종교적 믿음이 반드시 당신을 앎으로 이끄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앎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은 여전히 길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며 실현하지 못한 채로 남는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실현은 당신의 소망이나 욕망, 즉 쾌락·부·인정·안락·안전·안보에 대한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혼에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 당신 혼에 필요한 것은 당신의 사명을 찾아 완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사명을 인지하고 실제로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사명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앎과 다시 연결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앎만이 사명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신은 당신에게 이 세상에서 성공할 기회를 주기 위해 당신 내면에 앎을 심어놓았다. 신은 앎을 통해 당신에게 말한다. 신의 뜻은 앎을 통해 당신에게 전달된다.
만약 당신이 내면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외부를 지향한다. 당신은 사람들, 가족, 종교, 사회적 의무와 관습 등 세상의 지시를 받는다. 당신은 다른 힘들의 노예이다. 설령 그 힘들이 매우 유익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그 힘들의 노예이며, 양이나 소처럼 충실히 따라야만 한다.
신은 이런 것들에 꼭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깊은 지성을 당신 내면에 심어놓았다. 이 지성은 이런 것들 안에서도 일할 수 있고, 밖에서도 일할 수 있으며, 전통 종교를 통해서도, 전통 종교 밖에서도 일할 수 있다. 당신은 이 지성의 본질을 통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운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 운명은 당신이 창조하지 않았으며, 이 현실은 당신이 창조하지 않았다. 이 현실이 당신을 창조했다. 그러므로 당신의 현실을 창조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당신을 창조한 현실을 찾으라. 이 현실은 지금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중대하고 심각한 변화를 마주하고 있는 위험한 세상에서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있다.
앎은 당신을 세상으로 데려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세상에 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만의 독특하고 정해진 방식으로 인류를 도와야 한다. 어쩌면 당신은 한두 사람만 돕거나 한두 사람만 돌볼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신은 야생동물이나 환경을 돌볼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신은 지역 사회나 지역 교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신은 자신의 국가나 국제 사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수도 있다. 이것이 무엇이든, 당신은 이것을 위해 설계되었다. 당신의 성격, 특성, 강점, 한계, 타고난 성향, 이 모든 것은 이 목적을 위해 설계되었다.
그러나 만약 이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당신은 자신의 설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은 자신이 왜 지금과 같은 모습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맥락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디에도 맞지 않는다. 그래서 당신은 모두가 생각하고 원하고 믿는 것에 자신을 맞추거나, 아니면 끝없는 불편함과 소외감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일종의 따돌림 받는 사람이 된다.
그렇지만 상황이 아무리 혼란스러워 보일지라도,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을 때, 당신은 자신의 의식 속에 이 확신이 서서히 드러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당신은 그 확신이 당신의 발걸음을 안내하도록 허용한다. 어쩌면 처음에는 그저 아장아장 걷는 걸음마이겠지만 그것은 실질적인 발걸음이다.
당신은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산 정상에 휙 오르는 것이 아니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상까지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서 저기로 가는가?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숲과 언덕의 경계 너머를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산 정상까지 어떻게 오를 수 있는가? 산을 오름으로써, 발걸음을 내디딤으로써 가능하다.
만약 당신이 계속해서 올라가면, 당신은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곳, 성취를 이루는 곳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과 삶에 독특한 형태로 봉사할 것이다. 이것을 통해 당신은 삶이 올바른 길로 가고 있음을 느낀다. 당신 삶은 여전히 규정할 수 없고 신비롭지만, 올바른 길로 가고 있음을 느끼며, 이 느낌은 소중하다.
이 느낌이야말로 사람들이 부와 쾌락, 안락함과 안전을 추구하면서 얻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삶을 올바른 길 위에 올려놓으려고 하지만, 올바른 길 위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앎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신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당신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기 시작할 때, 다시 말해 당신이 정말 해야 하는 것을 앎이 당신에게 계시하도록 허용하기 시작하고, 당신이 믿거나 원하는 것 대신 아는 것에 호소하기 시작할 때, 당신 삶은 재조정되어 더 큰 질서와 단순함을 가져오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점점 더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오늘날 세상에서 실제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에는 불편함이 있고, 좌절감이 있다. 그리고 평화와 만족감이 결여되어 있고, 분노가 있으며, 갈망이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부유해지거나 쾌적한 환경에서 산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세상 사람에게는 단지 생존을 위해 기본적인 것들이 필요하다. 그들은 먼저 그 기본적인 것들을 충족하고 나서야 큰 의미와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사람들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불편해하고, 안절부절못하며, 무모한 것들에 자신을 내맡긴다.
만약 당신이 신을 섬기고자 한다면, 먼저 신이 당신에게 봉사하는 것을 용인해야 한다. 당신은 그 연결을 맺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을 떠나서는 어떤 실현도 없고, 어떤 진정한 만족도 없다.
당신은 앎과 단절된 채로 자신에게 진실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앎이 바로 당신 자신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앎은 당신 고향에 대한 기억이고, 당신이 목적이 있어 이곳에 파견되었다는 감각이다. 당신은 살아가면서 이 목적이 점진적으로 그 자체를 당신에게 드러내도록 허용해야 하며, 이 신비가 당신 삶에 존재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가정하고 규정하는 것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근본적으로 당신에게는 확실성이 없다. 당신은 그저 확실한 척하고 있을 뿐이다. 앎에 다가가는 것은 삶에 대한 가정을 내려놓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가정들은 신에 대한 대체물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것들에 대한 믿음에 확실성을 두고 있다. 신과 당신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고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앎이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게 하려면, 이 큰 취약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사람이 한 방향으로 가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앎은 당신이 다른 방향으로 가기를 원한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원하거나 하는 것에 이끌리고 의존한다면, 어떻게 앎을 따를 힘과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집단에 휘둘릴 것이며, 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재앙일지라도 그들과 함께 갈 것이다.
실현이란 무엇인가? 실현이란 당신이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것을 이루는 것이다. 당신이 이곳에 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오직 앎만이 안다. 왜냐하면 앎은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수년 동안 영적 수행을 했더라도 초보자로서 시작해야 한다. 비록 당신이 자신의 종교에 깊이 몸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앎길에서는 초보자이다. 만약 정말로 배우고자 한다면, 당신은 다른 어떤 성취도 내세워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참된 학생은 초보 학생이기 때문이다.
초보 학생이 된다는 것은 지극정성을 다하는 학습자가 된다는 것이고, 겸손함을 지니는 것이며, 재고하기 위해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진실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진실은 당신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진실은 앎에서 비롯된다. 진실은 진정한 행동, 진정한 봉사, 진정한 베풂, 진정한 관계, 진정한 활동, 진정한 성취에서 비롯된다.
당신은 삶을 이해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삶에 봉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리고 앎 안에는 당신이 봉사하고 공헌하는 방식이 이미 정해져 있다.
이것이 어떻게 실현될지는 세상에 있는 많은 것에 달려 있으므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다. 당신의 방향은 미리 정해져 있다. 당신의 선물은 미리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그 선물이 어떻게 표현될지, 어디서 표현될지, 심지어 표현되기나 할지는 세상의 상황에 달려 있다. 그것은 당신 봉사의 일부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다른 사람들이 당신과 만나게 될지 여부에 달려 있다. 또한 삶의 조건들에 달려 있고, 대부분 당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수많은 것에 달려 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뿐이다. 만약 당신의 역할을 다한다면, 당신 삶이 올바르게 가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어떤 형태의 쾌락이나 자극이든, 어떤 원천의 쾌락이나 자극이든, 그것보다도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종의 확인이다. 심지어 영적 황홀경도 삶이 올바르게 가고 있다는 느낌과는 견주거나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과 가슴이 지금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함께 일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당신의 모든 부분이 참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당신은 서로 다른 것에 연결되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는 분리된 개인의 무리가 아니다.
당신이 자신의 사명과 목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이것이 어디서, 어떻게 표현될지, 또 표현될 수 있기나 하는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당신의 목적은 그 상황에 맞게 표현되도록 조정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세상의 변화는 이제 더 빨라질 것이다. 큰 변화가 세상에 닥치고 있으며, 이는 힘든 변화이다. 이 변화의 힘에는 당신에게서 목적을 불러낼 힘이 있지만, 당신은 응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당신은 손을 벌리고, 열린 마음, 열린 가슴으로 앎에 다가가야 한다.
만약 당신이 삶 주변에 쌓은 모든 것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면, 당신은 마치 죄수와 같다. 당신은 응답할 수 없으며, 응답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 만약 앎을 경험하면, 당신은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앎이 망쳐놓을까 봐 두려워할 것이며, 앎이 당신의 생각·의무·가정 등을 뒤흔들어 놓을까 봐 두려워할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 성취가 가진 문제이다. 개인적 성취가 진짜이고, 확실하며, 건설적인 것이 되려면, 앎을 따라야 한다. 만약 그 성취가 앎보다 앞서면, 엄청난 걸림돌이 된다.
사람들이 거듭날 때, 그들 내면에 있는 앎이 드러날 수 있도록 그들의 삶은 다시 구성되고, 초점이 새롭게 맞추어진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거듭난다는 뜻이다. 단순히 새로운 믿음 체계를 받아들이고 그 믿음 체계에 몰두하려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앎이 당신을 부르고 있다. 당신 내면에서는 당신이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인식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리고 당신은 주변을 둘러보며, “음, 내 삶에서 그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아. 뭔가 새롭거나 다른 어떤 것을 해야겠어. 어떤 것이 나를 움직이고 있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때 앎이 당신을 위해 할 것은 당신 삶을 다시 짜맞추고 초점을 새롭게 맞추기 위해 밟아야 할 단계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일이 일어날 때까지는, 즉 네 기둥이 충분히 견고해지고 올바르게 세워질 때까지는, 당신이 큰 삶을 살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매우 빈곤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은 자신의 처지를 크게 바꿀 수는 없다. 그래도 앎의 출현은 그들 내면에서 여전히 강력하다.
앎은 세상에 속지 않으며, 세상보다 더 똑똑하다. 앎은 신의 지성 중 당신 내면에 심어진 작은 일부를 나타낸다. 당신의 봉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즉 정치적 억압과 빈곤에 시달리는 환경이든, 부유하고 풍요로운 환경이든 상관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 어느 환경에 속하든, 사람들은 앎과 단절되어 있으며, 분리되어 있다. 그들은 혼란스러워하고, 고통받고 있으며, 분노하고 있다.
환경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혼은 여전히 가난하다. 혼에 필요한 것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앎을 통한 복원의 큰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
신의 새 메시지는 앎의 수준에 있는 당신 영성의 현실을 가르치고, 앎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복원, 앎을 회복하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음으로써 일어나는 복원을 가르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이것은 사람들이 흔히 믿거나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이것은 항상 진실이었으며, 항상 사실이었다.
위대한 성인들이나 다양한 분야에서 공헌한 사람들은 모두 앎의 안내를 받았다. 비록 그들의 개인적 행동이 모범적이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앎의 안내를 받았다. 그들은 공헌을 했고, 이 공헌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들은 기존의 사고방식, 신념, 태도의 모든 힘에 맞서 싸우며 자신만의 독특한 공헌을 했다. 즉 인류를 위해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세상에 앎이 계속 살아 있게 하며, 사람들을 영적으로 일깨우고, 물질적으로 사람들을 부양하며, 인류를 위한 더 큰 기회와 복지를 창출하는 등 모든 영역에서 노력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독특하고 특이한 존재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생각, 가정, 신념, 물질적 획득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물질적 삶을 살아갈 때 생기는 문제이다. 당신은 신을 잊는다. 당신은 자기 내면에 있는 앎을 알지 못하므로, 세상에서 자신만의 요새를 구축하려고 한다. 그 요새는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당신을 타락시키고 고립시키며 세상과 단절시킨다. 그 요새 안에서 당신의 자녀들은 자신이나 세상에 대한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못한 채, 버릇없고 무기력한 존재로 자란다.
이것이 정말로 사람들에게 훌륭한 목표가 될 수 있겠는가? 목표가 그저 무기력하고 무분별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인가? 부가 만들어 낸 결과가 이것인가? 개인의 타락, 개인의 무책임, 중독, 자기 집착이 전부인가? 모든 사람이 원하는 부가 바로 이런 것인가? 세상에 무감각해져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인가?
더 큰 부가 있다. 이 부는 항상 당신과 함께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기에 있다. 신의 눈으로 보면, 이 부가 당신의 복원이다. 당신은 자신의 문화에서 유명해질 수도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당신이 앎을 찾아 따르며, 당신이 베풀기로 되어 있는 앎의 선물을 베푸느냐 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이 세상과 우주 삶이 있는 큰 공동체 전역에 걸쳐 모든 세계에서 통용되는 실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