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신과 주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놓은 깊은 지성, 즉 앎이라 불리는 당신 내면의 깊은 마음을 통해 이 관계를 주로 경험한다. 이 관계가 당신의 가장 주된 관계이자 가장 주된 책임이다. 이 관계는 일련의 믿음이나 종교 기관과 맺은 관계가 아니며, 반드시 어떤 이념이나 특정 종교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 관계는 실제로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신과 당신의 관계이다.
사람들은 이 관계를 상당히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 가족이나 개인적 관심사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종종 정치 단체나 문화 단체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국가 정체성이나 문화 정체성, 문화유산 등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 이 관계는 가장 주된 관계이며, 당신이 져야 하는 가장 주된 책임(responsibility)이다. 이 책임은 이 관계에 응답하는 능력(ability to respond)이다.
신은 앎을 통해 당신에게 말한다. 앎은 당신 양심의 원천이다. 이 양심은 사회적 양심이 아니다. 즉 특정 문화의 규범이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고 믿도록 부추김을 받거나 영향을 받은 양심이 아니다. 이 양심은 훨씬 더 깊은 양심이고, 당신 존재 안에 내재하여 있으며, 당신 인식의 기반이다. 바로 이 양심이 근본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려주며, 삶에 대한 윤리적 이해를 위한 기반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기 위한 기반을 제공한다.
당신에게는 자녀를 양육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노부모를 돌볼 의무가 있지만, 당신의 첫 번째 책임은 앎에 있다. 앎은 신과 당신의 연결이다.
물론 신은 국가의 권위나 문화·가족·친구가 미치는 지대한 영향력과는 매우 다른 권위이다. 만약 정말로 신이 당신 관계들의 중심이자, 삶에서 지는 책임의 주된 초점이라면,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나 당신의 거주 국가에 지는 의무나 책무와는 큰 대조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신과 자신의 관계를 아주 뒷전으로 밀어놓거나, 자신들에게는 특정 신념이나 사상이나 종교 기관과 맺는 관계만 있다고 여기면서 신과 자신의 관계를 개념적으로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러나 자신의 깊은 양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 경험을 통해 실제로 다른 모든 것과 확연히 대조가 되는 앎을 확립한다. 여기에는 자신의 가치관과 충성심에 대한 매우 깊은 심화 평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자신과 타협하거나 자기 내면에 있는 앎의 힘, 앎의 현존과의 연결을 잃으면, 두 주인을 섬길 것이기 때문이다.
앎과 함께하지 않으면, 물론 사람들은 삶에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위해, 또 자신보다 큰 어떤 것의 일부임을 느끼기 위해 삶에서 충성의 대상들이 있어야 한다. 앎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한다. 그들은 신념, 종교 기관, 다른 사람들, 사회 운동, 정치 운동 등에 자신을 맞춘다. 그들은 종교적 신념과 종교 기관에 자신을 맞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되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삶에서의 고립을 견딜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사람의 현실이다. 당신은 주변 어디에서나 이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실제로는 앎에 해야 하는 충성을 다른 것에 한다. 어쩌면 그들은 그 대상에 매우 헌신적이고 성실할지도 모르나, 자기 삶에 초점과 균형과 목적을 부여하기 위해 그 대상을 이용한다. 왜냐하면 목적이 삶 자체이므로, 어떤 목적도 없이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상력이 매우 뛰어난 인간에게조차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기 시작하고, 큰 지성, 당신 삶의 깊은 흐름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하여 그 큰 지성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자연스러운 필요성을 느낄 때, 그리하여 이 삶에서 당신이 진정으로 누구이고, 무엇인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실제로 이곳에서 무엇을 하기로 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느낄 때, 이것은 당신의 다른 모든 의무나 책무, 다른 충성의 대상과 대조를 이룬다.
많은 사람은 자신이 앎으로 가는 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앎이 자기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이미 정해놓은 자기 삶의 방향과는 다른 방향, 이미 충성하고 헌신한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끌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충성의 문제는 근본적이다. 당신이 앎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 삶의 중심이자, 온전함의 근원이며,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앎은 당신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고, 주변 세상의 모든 설득에서 당신을 해방한다. 앎은 악과 중독에 대한 해독제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연스럽게 앎에 끌리게 된다. 이것은 당신이 다른 모든 것이 피상적이고 실망스럽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세상의 쾌락과 고통이 당신을 만족시키거나 당신 혼에 절실히 필요한 것을 만족시킬 만큼 당신 내면 깊은 곳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통해 당신은 자기 삶을 성찰하게 되고, 당신의 가치관, 행동, 다른 사람들과 맺은 관계의 의미를 재고하게 된다.
이 끌림은 가장 자연스러운 끌림이지만, 이미 당신이 만들어 낸 삶과 맞지 않다는 것을 당신은 알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사람이나 장소, 그 밖의 것들에 자신을 더 많이 내줄수록, 이 대조는 더 두드러진다. 여기에는 저항이 있다. 앎에 대한 당신의 자연스러운 끌림에 대한 저항이 있다. 당신은 알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알기를 두려워한다. 앎이 당신의 관념, 믿음, 심지어 당신 자신에 대한 전체적인 관념에도 어떻게 도전할지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앎은 이런 것들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앎이 당신의 환경, 재정적 안정, 사회적 인맥, 정치적 충성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두려워할 수도 있다.
앎은 이런 것들에 얽매이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앎은 자유롭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다. 당신이 자유로운 어떤 것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당신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은 자유로운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겁을 먹고, 불편해한다. 자유로운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자신의 제약과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자유롭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다.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고,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시작할 때, 당신은 이 사실을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당신은 자유로운 국가에 살면서, 자신이 하는 일, 가는 곳, 어울리는 사람을 선택하는 데 개인적 자유를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앎과 비교하면, 당신은 자유롭지 않다. 당신은 묶여 있고, 제한되어 있으며, 방해받고 있다.
만약 당신이 나이가 많다면, 어쩌면 당신은 이 세상에 온 큰 목적과는 무관한 수많은 것에 이미 자신을 헌신했을지도 모른다. 앎은 당신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큰 목적, 당신 내면에 있는 큰 목적에 헌신한다. 앎은 자유롭지만, 앎이 본연의 모습대로 있는 자유, 당신 삶이 본래 의도된 대로 되도록 지지하는 자유의 의미에서만 자유롭다. 그리고 이 자유는 당신이 지금까지 구축한 것과는 매우 다를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삶에 불만이 있다면, 당신은 앎을 향해 나아가려는 동기를 가질 것이다. 당신은 자유와 목적을 찾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여전히 자기 삶이 괜찮다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까지는 자기 삶에 편안함을 느끼면, 앎은 큰 위협처럼 보일 것이다. 당신은 앎을 피할 것이며, 이것은 비극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을 회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가장 깊은 감정, 정서적 정직함, 온전함, 가장 깊고 근본적인 가치들을 피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그들은 외적인 것들과 동일시하지만, 내적으로 자기 자신과는 거의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들은 자유롭지 않다. 그들은 본연의 자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자유가 없으며, 가장 깊은 성향을 따를 자유가 없다. 설령 그들이 외적으로 자유롭고,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자유인 정치적·사회적 이동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자유는 자신의 본성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유롭지 않다.
그들은 자신에게 실제로 있는 것을 보고, 알고, 느낄 자유가 없다. 그들은 자기 생각에 얽매여 있고, 자신의 헌신에 얽매여 있으며, 믿음과 연상에 얽매여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선호와 욕망에 얽매여 있고, 자신이 속한 그룹, 문화, 가족의 주안점과 신념에 얽매여 있다. 따라서 설령 그들이 얻기 어려운 외적 자유를 얻었더라도, 그들은 내적으로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이것이 실제로 모든 고통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참 자아에 이방인이라면, 당신은 진정한 행복이나 만족을 결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 내면에 있는 이 참 자아는 당신의 이성, 믿음, 관념, 습관, 당신 성격의 속성을 훨씬 뛰어넘어 깊은 곳에 있다. 당신의 진정한 본성은 이보다 훨씬 더 깊다. 그래서 당신은 행복을 추구하면서 어떤 삶을 구축하지만, 그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며, 당신이 온전히 헌신하는 삶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당신 마음이 그 삶에 집착하더라도 당신 혼은 그 삶에 헌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기 시작하고, 앎에 대한 자연스러운 끌림을 느끼며, 이 끌림에 응답한다는 것은 당신이 만들어 낸 다른 것들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앎은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신이 아는 당신 삶의 아주 작은 부분만이 실제로 당신의 깊은 본성을 강조하거나 나타낸다. 그렇다면 남은 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미 하겠다고 한 일들이 있고, 책임이 있다. 어쩌면 돌봐야 할 가족이 있거나 운영해야 할 사업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당신은 앎이 당신을 안내하도록 앎을 신뢰해야 할 것이다. 앎은 당신이 알고 있는 삶 자체를 파괴하지는 않을 것이고, 당신이 이루어 온 삶을 무너뜨리지도 않겠지만, 당신이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 당신의 모든 기량, 삶에서 쌓은 모든 지혜를 당신 삶의 진정한 방향을 설정하는 데 활용할 것이다. 이것은 종종 다른 이해, 더 깊은 가치관을 가지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당신은 삶의 신비를 따르기로 선택할 때, 두려움과 불확실성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앎은 항상 매우 신비로워, 당신 이성으로 이해하거나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앎은 당신이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재정립할 것이며, 장소, 소유물, 문화, 가족, 정부, 온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재정립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 과정이 드러나도록 허용해야 한다.
당신은 이성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자신의 욕망이나 갖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온갖 것을 평가했지만, 앎은 완전히 다른 주안점을 가지고 있다. 앎의 목적은 당신의 큰 목적과 세상에 대한 봉사가 실현될 수 있는 사람들, 장소, 상황으로 당신을 이끄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당신 삶의 방향과 본질을 바꿀 것이고, 이 큰 목적을 나타내지 않는 모든 의무와 요구에서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앎은 혁명적이다. 앎은 당신 내면에서의 혁명이자 외적 삶에서의 혁명을 의미한다. 이 혁명은 당신의 가치관이 변하고 우선순위가 변하면서 일어나며, 이 변화는 당신이 자기 삶에서 외부보다는 내부를 더 지향하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앎의 힘과 현존에 집중해야 한다. 당신은 삶에서 헌신해야 할 다른 것도 있겠지만, 그 헌신은 앎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당신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할 것이며, 세상에서 직업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나 단체에 속한 이들과 교류할 것이고, 여전히 국가의 시민일 것이며, 가족의 일원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차이점은 당신의 전반적인 인식과 주안점이 마침내 있어야 할 자리인, 당신 삶의 중심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이 일어나려면, 당신 삶이 나아가야 할 진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당신을 도울 수도, 지지할 수도 없는 많은 것과 많은 사람에게서 벗어나야 할지도 모른다.
이 전환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당신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 전환이 당신의 자녀는 물론 다른 사람들과 당신의 관계에 가장 큰 공헌이 될 것이다. 바로 이 전환을 통해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세상에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이 전환은 당신 내면에서 일어나는 큰 혁명이자, 당신 삶의 주안점이 크게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전환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당신 삶에 들어올 것이며, 당신의 진정한 방향을 지지할 수 없는 사람들, 실제로는 당신의 깊은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자기 내면에 있는 큰 끌림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마주할 의지가 없는 사람들에게서 당신을 멀어지게 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당신이 해야 할 여행과는 다른 여행을 삶에서 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그들을 비난하거나 탓하지 말고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한다. 당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깊은 힘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당신의 국가는 국방을 위해서나 자국 스스로 정한 이해관계 안에서 분쟁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당신에게 군 복무를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참여할지 말지 당신을 안내하는 것은 앎이어야 한다. 당신 가족은 당신에게 그들의 가치관과 사회 활동에 순응하기를 바랄 수도 있지만, 당신 내면에 있는 앎만이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앎은 어떤 경계들을 정할 것이다. 앎은 당연히 당신 삶을 완전히 제한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정말로 세상에서 살기 위해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고, 삶에 공헌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러나 앎은 어떤 경계들을 정할 것이며, 당신은 이 경계에 다다를 때 내면에서 매우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마치 당신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어떤 것이 당신을 붙잡아 어떤 것을 말하거나, 행동하거나, 부적절한 어떤 것에 헌신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처럼 강한 억제력을 느낄 것이다.
당신이 앎에 가까워질수록, 당신은 이러한 제지가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여전히 과거에 하던 일들에 끌릴 것이며, 동일한 욕망과 불안감도 여전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자극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앎이 당신을 제지하고, 가로막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움직임을 분별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며, 여기에는 기량과 준비가 필요하다. 이것은 일순간에 되지 않는다. 신이 당신에게 마법을 걸어 당신이 갑자기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조금이라도 영적 연습을 한다면,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당신의 영적 연습은 앎으로 가는 다리를 놓는 일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앎과 당신의 개인적 마음은 함께 일해야 하며, 개인적 마음은 앎의 매개체로서 앎을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신 내면에 있는 힘의 진정한 위계질서를 나타내며, 가장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형태이다.
여기서 당신의 깊은 양심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당신에게 알려줄 것이고, 당신은 자기 삶에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음을 느낄 것이다. 위험한 활동, 위험한 유혹, 위험한 헌신 등 이것들이 당신을 끌어당기고, 유혹할 수 있으며, 당신은 이것들을 따라야 할 의무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당신을 제지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 결과를 기꺼이 마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 내면과 삶에 있는 앎을 해치는 것인 악은 당신에게 없는 것들이나 당신이 원하는 것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항상 제공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러한 유혹에 굴복한다.
그러나 당신 내면에서는 앎이 당신을 일관된 길을 따라가게 할 것이다. 앎은 그런 것들에 흔들리지 않는다. 부·미모·권력은 앎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유혹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삶에서 비할 데 없는 자유를 얻는 것이다. 당신이 이렇게 자유로울 때, 다른 모든 사람이 쇠사슬에 묶인 노예처럼 보일 것이다. 그 사슬이 쇠로 만들어졌든 금으로 만들어졌든, 그것들은 모두 똑같다.
신은 당신을 자유롭게 하여, 당신이 세상에 있으면서 이 세상에서 표현하도록 신이 당신에게 부여한 힘을 지닐 수 있게 한다. 그래야 당신의 참된 선물이 드러나서, 당신이 그 선물을 어디에 주어야 하는지 알고, 그 선물을 베푸는 데 당신을 도와줄 사람, 그 선물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
당신은 일상 활동을 하면서 일상사에 참여할 수도 있지만, 앎의 현존에 민감하다. 그리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면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법을 배울수록, 당신은 삶의 모든 굽이마다, 예상치 못한 도전마다 앎이 당신에게 제공하는 안내를 느끼고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 삶이 아무리 복잡해지고 주변 환경이 아무리 불확실해지더라도, 앎은 이러한 것들을 헤쳐나갈 수 있다. 앎은 당신 삶의 조종사이며, 내면의 나침반이다. 앎을 소홀히 하면, 세상 영향력의 노예가 될 것이고, 세상에서 길을 잃게 될 것이다. 쾌락과 고통이 있는 세상에서 길을 잃고,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에서 길을 잃어 자신에게 이방인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방인이 될 것이다.
먼저 신은 당신에게 큰 여행과 삶의 큰 성취를 제공하기 위해 현재의 상태에서 당신을 구원해야 한다. 당신은 단순히 지금의 당신 삶에 높은 목적을 추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큰 목적을 따를 자유가 없으므로, 지금의 당신 삶은 큰 목적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목적을 따르는 데는 완벽함이나 깨달음은 필요하지 않지만, 당신 내면의 변화, 두려움과 욕망에서 벗어나 당신 내면에 있는 큰 힘에 충성하는 변화는 필요하다.
당신이 이 전환을 이루었을 때, 심지어 전환하는 과정 중에도, 당신은 세상을 매우 다르게 볼 것이며, 매우 다른 전망점을 가질 것이다. 마치 산 위로 높이 올라 주변에 있는 것을 실제로 보는 것과 같다. 이전에 당신이 계곡 아래 숲속에서 헤맸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앎은 당신이 정치 운동이나 사회 운동에 참여해야 하는지를 알려줄 것이고, 이 운동이 당신의 교육과 운명의 일부인지를 알려줄 것이다. 앎과 함께하지 않고 이런 운동에 헌신하는 것은 당신이 누구이며 당신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실제로 알기도 전에 자신을 삶에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 두려움과 분노에 이끌려 참여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그들의 행동에 저항하기 때문에 참여할 것이다. 이것은 어떤 것에도 진정한 해결책을 가져다줄 동기가 아니다.
비록 당신의 명분이 고귀하고 정당해 보일지라도, 만약 당신이 분노나 원한이나 두려움 때문에 참여한다면, 당신이 그 상황에 공헌하는 것은 그 감정들이다. 그러면 세상에 반목과 더 많은 갈등만 일으킬 것이다. 이제 당신은 원하는 어떤 것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 어쩌면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고, 합법적인 말과 행동만 할 수도 있지만, 당신은 그 상황에 더 많은 원한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그것들은 인간 가족에게 더는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삶에서 당신이 참여하는 것이 정말로 효과적이려면, 당신 내면에 있는 큰 힘이 당신의 참여를 통제해야 한다. 당신 의도가 명확하고 앎의 안내를 받는다면, 심지어 당신을 반대하는 이들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당신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신을 존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이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그들이 잘못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그들을 정복하거나 몰아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치 행위나 운동, 심지어 사회 정의를 강조할 때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당신은 세상에서 혁명이 단지 다른 억압 세력으로 이어지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가? 어쩌면 철학은 다를지 모르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들은 이전 권력자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들은 단지 사회나 국가의 지지 기반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혁명의 대가는 끔찍하다.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는다. 이제 많은 사람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권력에 의해 억압받게 된다.
어쩌면 당신의 운명이 사회 운동가가 되거나 정치 무대에 입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는 반드시 앎의 안내를 받아야지, 적대감과 분노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당신이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가슴을 열고, 증오심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뜻이다. 설사 매우 심각한 상황에서 타국의 침략이나 개입에 맞서 국방 의무를 수행하라는 부름을 받더라도, 여기서 당신은 적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인류는 외계에서 온 종족들의 개입에 직면해 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며, 당신과 같은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당신을 차갑고 냉담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을 창조한 동일한 신이 창조한 지각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그들은 앎 없이 행동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이곳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앎의 주안점은 매우 다르다. 개인적 권력 추구, 개인적 부의 추구, 개인적 매력이나 미의 추구, 이러한 추구를 위협하는 이들에 대한 증오, 이것들은 앎의 주안점이 아니며, 당신의 깊은 본성에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오직 당신 내면에 있는 앎만이 당신이 삶에서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는 다른 목적을 위해 다른 방식으로 활동할 수 있는 법을 안다. 여기서 당신은 특히 처음에는 기꺼이 혼자 여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의 기존 친구들이나 가족 중 대다수는 당신을 지지할 수도, 당신이 하는 일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기 내면에 있는 앎에 응답할 자유를 얻기 위해 적어도 한동안은 그들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 당신은 자기 내면에서 이 혁명을 겪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신이 당신 삶을 구원하고, 당신 자신만의 감옥과 괴로움에서 당신을 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당신은 자신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원하는지 실제로 모른다. 당신은 평화와 번영과 행복이 넘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믿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어떤 모습일지, 심지어 그것을 즐길 수 있을지조차 모른다. 당신이 자신이나 세상을 위해 무엇을 원하는지 실제로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자신에게 매우 깊이 정직한 것이며, 당신 내면에서 진정으로 자신과 대면하는 것이다.
만약 평화와 번영이 있다면, 지구 자원은 고갈하고 인류는 파멸할 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만약 세상 모든 사람이 높은 생활 수준을 누려야 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매우 짧아질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가난이나 억압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다만 당신이 품은 열망이나 세상에 대한 믿음이 실제로는 앎에 기반을 두지 않았으며, 아마도 그 안에 지혜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당신은 분리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려고 이곳에 온 것도 아니며,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이곳에 온 것도 아니다. 당신은 사람들의 안녕과 생명의 안녕에 공헌하고, 인류 미래를 위한 씨앗을 심기 위해 이곳에 왔다.
씨앗은 아주 작은 것이고, 전혀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작은 씨앗을 손에 쥐고 "이것이 무엇을 할 수 있겠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씨앗은 거대한 나무로 자랄 수 있고, 식량으로 자랄 수 있다. 당신 손에 든 그 작은 것들은 힘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그것들은 미래 혜택의 근원이다.
당신은 세상을 위해 무엇이 효과를 발휘할지 모르며, 실제로 당신 사회에 무엇이 필요한지조차 모른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앎의 안내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의도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당신은 사람들에게 정의를 강요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면 또 다른 억압 세력이 될 뿐이다.
이것은 난제이다. 이성으로는 이것을 제대로 알아낼 수 없다. 그러나 정의는 필요하고, 평화도 필요하고, 사람들의 안녕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필요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성취하는지는 큰 힘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신만이 이것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당신의 온갖 아이디어나 정치적 식견을 다 동원해도, 당신은 이것을 제대로는 알아낼 수 없다.
당신이 모른다는 사실이 당신을 자유롭게 하며, 당신의 힘과 능력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당신은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믿을 수 있고, 무엇이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자신을 내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앎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당신은 자신에게도 이방인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방인이다.
신은 세상에 필요한 것을 안다. 신은 세상에 무엇이 다가오는지 안다. 신은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을 알고, 지적 생명체로 이루어진 우주 큰 공동체 안에서 인류의 미래와 운명을 안다. 신은 외계에서 온 종족, 인간사에 개입하는 종족들의 특성과 의도를 안다. 신은 인간의 상황을 안다. 신은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안다. 신은 당신에게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이 시기에 세상에 온 큰 목적을 주었다.
당신은 신이 아는 것을 알아낼 수 없다. 당신은 오직 따르고 배울 수만 있다. 신은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며, 삶에서 더 큰 성취로 이끌기 위해 당신 내면에 앎을 심어놓았다. 당신 이성은 앎을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당신은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큰 어떤 것의 표현이며, 이 표현이 되는 것이 가슴과 혼에는 가장 큰 기쁨이다.
그러나 당신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아야 한다. 당신은 단순히 자기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되며, 단순히 이곳에 온 진정한 목적에 맞게 살고 있다고 가정해서도 안 된다. 또한 당신의 생각과 신념이 당신의 깊은 본성이나 삶의 진정한 진실을 나타낸다고 가정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당신은 헌신하고 겸손해야 한다. 그리하여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고, 이 큰 힘이 당신 내면에서 드러나도록 하며, 당신의 모든 기량과 이성의 모든 힘을 이용하여 앎의 큰 하사품을 받아들이는 데 당신을 도울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부름이고, 힘이며, 당신의 근본적인 책임이다. 세상에 자신을 내주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하기 전에, 또 자기 삶을 결정하기 전에, 당신은 앎에 다가가야 하고, 앎과의 연결을 구축해야 하며,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아야 한다. 그래서 당신은 먼저 앎이라는 왕국을 찾아야 한다.
당신이 세상에 나가기 전에, 앎은 밟아야 할 계단과 나아갈 길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귀 기울이는 법, 끊임없는 활동과 분주함과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 삶의 더 깊은 흐름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하고, 이것을 매일 연습하고 일상생활의 일부로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영적 연습의 주안점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영적 연습을 하는 것은 행복을 얻거나 번영을 보장받거나, 이 세상을 초월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영적 연습을 하는 것은 당신 삶의 깊은 흐름, 끊임없이 흐르며 방향이 있고 가야 할 곳이 있는 흐름과 연결하려는 것이다.
당신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지만,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당신이 가야 할 곳을 안다. 당신이 그것을 깨달을 때, 당신 자신은 물론 당신을 알게 될 모든 이에게 근본적 변화를 불러올 참된 연결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