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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September 4, 2008
장소: Rocky Mountain Park, Colorado
사람들은 폭력을 혐오하고, 비난하며, 특정 유형의 폭력에 가담한 이들을 엄벌하려고 하지만, 정작 자기 내면에 잠재한 폭력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폭력 영화를 즐겨 보거나, 재난이나 전투나 전쟁에 매우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마치 그들은 폭력에 대한 갈망과 목마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주변에서 이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것은 신비로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보는 영화를 보라. 뉴스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을 보라.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것이 무엇인지 보라. 폭력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 그 폭력은 종종 용인된다. 만약 폭력이 부당해 보이면, 그 폭력을 비난한다. 그러나 폭력 행위에 가담한 사람의 내면에 깃든 폭력은 어떠한가? 당신 내면의 폭력은 어떠한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서 만족감이나 자극을 추구한다는 것은 당신 내면에 이러한 것들을 통해 채워져야 하는 성향과 욕구가 있다는 뜻이다. 당신은 폭력이 끔찍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혐오스러울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신은 폭력을 입에 담기도 싫어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 내면에는 폭력의 잠재성이 있는 어떤 것, 어쩌면 이미 폭력적인 어떤 것이 있다.
비난이란 통제된 폭력이 아니고 무엇인가? 남을 훈계한다는 것은 통제된 폭력이 아니고 무엇인가? 다른 민족이나 다른 국가를 배척한다는 것은 통제된 폭력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약 당신 마음이 요동치고, 들떠 있고, 흔들리며, 불안과 원한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마음은 폭력을 포함한 온갖 것의 근원이 된다.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큰 압박과 어려움을 겪을 것이며, 심지어 부유한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문명의 민낯이 드러나고, 사람들 안에 더 깊이 숨겨진 진짜 모습이 이 시기에 드러날 것이다.
교양 있고 예의 바른 사람들도 분노와 복수심에 사로잡힐 것이다. 교양이 있어 보이던 사람들도 짐승처럼 행동할 것이다. 험악한 날씨, 자원 고갈, 경제적·정치적 불안정의 심화, 분쟁과 전쟁의 위험 증가 등을 초래하며 세상을 어둡게 하는 변화의 큰 물결은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 것이다.
그들은 더이상 관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자리를 잃고, 집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며, 사회적·정치적 권력을 잃고, 점점 더 커지는 불확실성을 마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부패 사슬이 드러날 것이다. 정부·종교·상업계에서 인간의 무능함이 수면 위로 드러날 것이다.
사람들은 격분할 것이고, 좌절할 것이며, 극도로 두려워할 것이다. 너그러움은 햇빛 아래에 있는 얼음처럼 녹아 사라질 것이고, 국가 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 집단 사이의 폭력이 일어날 가능성은 고조되어, 정부의 통제가 더 많이 필요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정말로 평화를 가치 있게 여긴다면, 당신은 자기 내면에 있는 갈등의 가능성과 폭력의 현실을 다루어야 한다. 만약 당신 자신이 남들과 당신의 관계, 당신 자신과 당신의 관계, 당신 국가나 정부, 더 나아가 전 세계와 당신의 관계에서 평화나 평화로운 행동이나 평화로운 태도를 실연할 수 없다면, 당신은 이런 행동이나 태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평화를 요구하지만, 정작 자신은 평화롭지 않다. 그들이 원하는 평화란 다른 누구도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의 목표와 계획이 중단되거나 방해받지 않은 채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내가 평화를 원하는 것은 세상이 나를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은 채 내 개인적인 집착이나 사적인 일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상대적인 평화를 누리면,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중독에 빠진다. 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5분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한다. 그들은 끊임없는 자극이 필요하고, 그들의 마음은 불안과 초조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정말로 자신에 대한 깊은 감각이나 자기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감각이 없다.
상대적인 평화의 환경에서 사람들의 윤리와 행동이 어떻게 타락하는지 보라.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이 평화로울 때보다 전쟁 중에 더 훌륭한 면모를 보여준다. 더 이타적이고, 더 베푼다. 사람들은 특정 상황에서 더 자비로워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물론 전쟁은 파괴적이며,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의 씨앗을 뿌리므로, 전쟁에서 목적을 찾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목적을 찾는 것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전쟁을 겪어야만, 당신이 큰 위기 상황에 잘 대처하고, 절실히 필요한 것을 인지하며, 세상을 대할 때 더 이타적이 된다면, 그것은 불행하고 슬픈 일이다.
사람들은 변화를 원한다. 그들은 국가가 바뀌기를 원하고, 도시가 바뀌기를 원하며, 문화가 바뀌기를 원하지만, 정작 자신은 바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평화도 원한다. 변화를 원하면서도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변화는 그리 평화롭지 않다. 사람들이 진정한 변화에 직면할 때, 이 변화는 마음을 뒤흔들어 불안하게 한다. 이것은 격변이며, 스트레스와 어려움과 불확실성을 동반한다.
당신은 삶에서 평정심을 유지한 채 진정한 변화를 겪어본 적이 있는가? 물론 없었다.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 진정한 변화는 어려운 일이었다. 당신은 저항했고, 고군분투했으며, 분노했고, 좌절했다. 그리고 남을 탓했고, 자신을 탓했다. 변화와 싸웠으며, 변화를 부인했고 미루었다. 이제 여기서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보라. 이것이 평화로운 경험이었는가?
사람들이 혁명을 겪지 않으면서, 또 서로에게 잠재된 폭력과 갈등을 모두 쏟아내지 않으면서, 어떻게 변화를 겪을 수 있겠는가? 상대적 풍요는 부드럽게 해주는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변화의 큰 물결에 직면하여 많은 사람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 그 풍요를 잃을 것이며, 따라서 이처럼 부드럽게 해주는 효과들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바뀔 것이며, 어쩔 수 없이 바뀔 것이다. 자신의 선호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뀔 것이다. 그들은 싸울 것이고, 몸부림칠 것이다. 그리고 탓하고 비난할 것이다. 이런 반응이 바로 진정한 변화가 사람들에게서 일으키는 것이다. 비록 그 진정한 변화가 가치 있고 필요한 결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렇다.
만약 당신이 직장과 집을 잃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 상황을 평화롭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특히 당신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고, 삶의 기반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찌하겠는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수동적인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설령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깊은 흐름에 기반을 두고 변화를 주도했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그 변화가 초래하는 격변과 혼란, 자기 의심, 좌절과 불안을 여전히 겪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큰 변화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평화로운 관계를 기대하지 말라. 만약 당신이 누군가와의 관계를 바꾸어야 하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더는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변화가 평화롭고 우아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만약 서로 깊은 애착이 있거나 한쪽이 다른 쪽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지 않다. 그것은 정말 어렵고, 고통스럽고, 마음이 상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떠나는 사람이라면, 죄책감과 수치심, 불확실성과 큰 의구심이 생길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별을 통보받은 사람이라면, 버림받고 속았으며, 어쩌면 조종당하고 이용당하고 학대당했다는 등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변화이다.
그래서 사람들 대부분은 변화를 말하지만,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변하기를 원하며, 자신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서 무엇이 드러날지 두려워한다.
사람들이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고 알면서도 바꾸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변화를 몇 년 전에 했어야 했다는 자각에 따른 자책 때문이고, 오래전에 해결해야 했을 상황에서 자신과 타협하면서 그 오랜 세월 동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자책 때문이다. 이 자책은 매우 강렬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자신의 관계와 상황에서 반드시 해야 한다고 아는 변화를 위해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이다.
많은 사람이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쉽게 굴복하고, 자신이 타협한 상태로 돌아가서 자신이 느끼는 것을 느끼지 않으려고 하며, 자신이 아는 것을 알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들은 그저 그 상황을 최대한 잘 견디려고만 할 뿐이다. 어쩌면 그 상황을 철학적으로 대하며, “신이 원하는 곳이라면 나는 그곳에 있을 거야.”라며 마치 신이 이 문제의 근원인 것처럼 말할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은 잘 돌아가지 않는 상황을 실제보다 더 좋아 보이게 만들려고 그 상황의 이점과 가능성 등을 부각하려고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모두 자기기만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에게 최선의 이익이 아닌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 내면에서 느끼게 될 것을 다루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두려워한다. 실제로 자신과 깊은 관계를 맺어본 적이 결코 없기에, 이제 그들은 자기 내면에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즉 분노, 슬픔, 통제력을 잃는 느낌 등을 두려워한다. 물론 이것은 많은 정신 질환과 인간의 무능력을 낳는 근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신 내면에 있는 깊은 지성과의 연결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두려움, 원망, 불확실성을 내면에 품고 있든, 신이 당신 내면에 창조해 놓은 이 깊은 지성인 앎의 이 깊은 기반은 확실하다. 앎은 타협으로 훼손되지 않았으며, 타협하지도 않는다.
앎은 당신이 누구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피해야 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안다. 앎은 당신 내면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당신이 이 큰 지성에 다가가고 이 지성과의 의식적인 연결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수많은 단계를 밟아갈수록, 당신 내면에 있는 두려움·분노·폭력의 영향력은 줄어들 것이다.
문명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위험한 성향이 억제된다. 사회 구조를 통해서나 시민 의식을 통해서, 심지어 어느 정도의 풍요를 통해서 사람들의 위험한 성향은 억제되고, 보복을 통해서나 실패의 결과를 마주하는 것을 통해서도 억제되며, 감옥에 갇히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것이라는 위협을 통해서도 억제된다.
따라서 문명이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전반적으로 문명은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비록 겉으로 드러난 폭력적 표현이 억제된다 하더라도, 실제로 당신 내면에 있는 폭력의 진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여전히 내면에서 당신을 괴롭히고, 위험에 빠뜨리며, 자멸적 행동으로 이끌고, 삶에서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게 한다. 당신은 자기 내면에 있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악과 싸우면, 악은 더 강해진다. 악은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고, 관심을 먹고 자란다. 악은 사실 그 자체로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악에 더 많은 관심을 쏟을수록, 또한 관심의 또 다른 형태로 악에 더 많이 저항하고 악을 더 많이 거부할수록, 악은 오히려 강한 상태로 남게 되며, 강력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닌다. 만약 당신이 내면에 있는 악과 싸우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악과 싸우는 행위 자체가 악을 키우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악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당신 내면에 있는 폭력적인 성향은 결국 당신이 큰 근원에서 분리된 결과로 생긴 두려움과 불확실성의 산물에 불과하다.
당신은 이곳 세상에 홀로 있다. 당신은 스스로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 버티며 살아가고, 수많은 예상치 못한 위험을 피하며, 당신을 지지하지 않거나 심지어 반대할 수도 있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당신은 신이 당신 내면의 깊은 앎 안에 심어놓은 힘과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이 상황에 처해 있다. 그 결과 당신은 공격적이거나 굴종적이게 된다. 당신은 미워하지만, 사랑하는 척한다. 당신은 불확실성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것에 짜증이 난다. 만약 삶이 당신의 이점을 너무 많이 빼앗아 가면, 당신은 폭력적이고 위험해진다. 당신은 자멸적인 행동에 빠지고, 다른 사람들을 질책하고 거부한다.
사람들이 보여주는 가식이 무엇이든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당신도 지금 세상에서 당신이 보는 그들 모습과 같다. 당신 내면에는 이런 모든 병적인 것이 있다. 비록 당신이 깨어 있고 영적이며 깨달았다고 주장하면서, 겉으로는 자신을 아주 잘 통제하고, 세련되어 보일지라도, 이 모든 병적인 것이 여전히 있다.
당신은 이것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당신은 어떻게 이것을 약하게 만들어, 이것이 당신 삶에 널리 스며드는 영원한 먹구름을 드리우지 않게 하고, 당신 결정을 좌우하지 않게 할 것인가? 또한 당신의 관계를 망치지 않게 하며, 현재의 삶을 즐기고 미래를 현명하게 대비하는 당신 능력을 망치지 못하게 할 것인가?
물론 당신은 특정 유형의 행동에 관해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 문제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자멸적인 행동에서 벗어나 자신이나 남들에게 건설적으로 행동하는 특정 절차와 방법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방법들을 찾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은 자기 삶을 회복하고 삶에 큰 힘과 균형을 부여하는 데 도움을 줄 매우 유능한 교사나 교사 그룹을 만날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은 종교로 눈을 돌려 신을 숭배하면 당신에게 힘이 생기고 신이 축복과 순수함을 불어넣어 줄 것이라고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문이 생긴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악의 잠재력을 극복할 힘을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단순히 그 악의 잠재력을 억제하는 것을 넘어, 당신이 궁핍하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자신을 지배하지 못할 정도로 악을 현저히 약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방법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훌륭한 가르침을 찾았다. 이 가르침에는 수련법이 있으며, 나는 이 수련법을 따를 것이다. 이 가르침에는 방법론이 있으며, 나는 이 방법론을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에게 그것을 실행하고 꾸준히 적용할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그들의 배에는 돛은 있지만 바람이 없다. 그들 내면에는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할 힘이 없다.
그래서 당신이 아무리 건전한 활동을 하고 더 긍정적인 태도를 갖춘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의 근원에서 당신은 여전히 자기 내면에 있는 앎의 힘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앎이 지닌 힘과 확신과 헌신만이 당신을 옭아매는 사슬을 끊고, 악과 폭력의 잠재력을 약하게 하며, 끊임없는 짜증과 끊임없이 내적으로 억눌린 느낌에서 당신을 해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 내면에 있는 힘과 안내의 근원을 찾지 못하면,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력에만 의존하게 되며, 그들 대부분은 이 의지력이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소수만 자신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자신을 위한 새로운 기반을 구축할 수 있겠지만, 이 기반조차도 변화의 큰 물결을 마주할 때 실제로 성공적이지 못할 것이다. 성공적으로 해내려면 당신에게는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놓은 힘이 있어야 한다.
순전히 당신 개인이 지닌 힘만으로 자신을 옭아매는 사슬을 끊고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 삶에서 진정하고 건설적인 변화를 겪으려면 당신의 모든 힘이 필요하겠지만, 당신의 행동을 촉진할 앎의 힘이 필요할 것이다.
당신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거나, 당신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고 신이 모든 것을 다 해줄 것이라는 생각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 마치 은총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즉 새는 지붕을 고치고, 깨진 관계를 회복시키며, 손상되고 방치된 건강을 회복시키고, 당신이 자신의 집착·강박증·중독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줄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당신을 벽에 묶고 당신 마음을 끊임없이 괴로움에 빠지게 하는 사슬을 끊으려면, 당신의 의지력, 당신 개인의 힘, 육체적 힘, 개인적 결단력이 필요하며, 더불어 중독과 집착을 깨뜨리는 앎의 힘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앎은 중독되지 않으며, 집착하지도, 분노하지도, 폭력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경험을 통해 앎의 현실과 개인적 마음 상태 사이의 차이를 볼 때, 당신은 그 큰 차이를 매우 분명히 볼 것이다. 당신은 누가 주인이 되어야 하고 누가 종이 되어야 하는지 알 것이다. 당신은 자기 내면에 있는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이며, 마음의 나약한 상태와 삶의 위태로운 상태를 볼 것이다.
당신이 삶에서 현재 있는 곳이 신이 당신에게 원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당신에게는 올라야 할 산이 있다. 당신은 자기 내면과 주변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변화가 있다.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 그들은 길가에서 잠들어 있거나, 산기슭에 자신만의 저택을 지었다. 그리고 이제 그곳에서 행복하고 편안하며 만족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진정한 선물을 찾고, 어려움에 처한 세상에 진정으로 공헌해야 할 것을 찾기 위해 올라야 할 산이 있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사람들은 발목이 잡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환경적으로 제약을 매우 크게 받지만, 부자들도 매우 다른 방식으로 제약을 받는다. 부자들은 더 비극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큰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환상에 빠지기가 더 쉽다. 그들에게는 끊어야 할 중독도 더 많고, 벗어나야 할 집착도 더 많으며, 물러서야 할 망상도 더 많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정직하지 못하며, 삶의 현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부자들이 분노하면, 국가는 전쟁을 일으킨다. 제법 많은 가난한 사람이 분노하면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그 혁명은 대가가 크고 파괴적이며, 내세운 목표를 거의 달성하지 못한다. 단지 한 지배층이 다른 지배층으로 바뀔 뿐이다.
당신의 임무는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이 유익한 일을 할 때마다 앎의 현존이 힘을 줄 것이며, 유익하지 않은 일을 할 때마다 앎의 힘과 현존이 제지할 것이다.
신은 어느 날 갑자기 내려와 엄청난 은총의 행위로서 당신의 모든 죄를 씻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신은 당신의 환상과 망상, 중독과 비극을 없애 주지도 않을 것이다. 신은 당신 내면에 완벽하게 안내하는 지성을 심어놓았다. 이 지성이 없으면, 당신은 길을 잃는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당신은 길을 잃는다.
당신 삶이 즐거움과 집착과 재물로 가득 차 있든, 아니면 이런 것들이 결핍되어 있든, 당신 삶은 공허하다. 당신은 세상에 휘둘리고, 열정에 휘둘린다. 실질적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보면, 당신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당신은 권력이나 쾌락에 중독되거나 이런저런 신념에 중독되어 있다. 혼의 차원에서 보면 당신은 가난하다.
그래서 비록 인류를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개개인을 복원하고 인류의 중대한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하며, 이미 세계 곳곳을 강타하고 있는 변화의 큰 물결에 대비하기 위해 엄청난 협력이 필요하지만, 그 핵심에는 당신이 앎에 기반을 두어야 하고, 앎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이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30년 동안 명상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앎은 세상에서 당신을 안내할 것이기 때문이다. 앎은 당신의 집착을 약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딜레마를 서서히 그러나 깊이 있게 풀어낼 것이다. 당신이 앎에 더 가까워질수록, 앎은 당신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고, 당신은 자신의 깊은 본성에 안착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당신 마음은 앎이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할 것이며, 당신은 이 갈등, 이 딜레마를 마주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나 장소, 그 밖의 것을 원한다. 앎은 그곳으로 가지 않으며, 당신은 거래할 수 없다. 앎과 거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앎은 그곳에 관심이 없다.
여기서 이해가 되는가? 만약 당신이 앎과 함께 선택한다면, 당신은 자신의 열정, 집착, 환상을 거역하는 것이다. 당신은 다른 것을 선택할 것이며, 그 선택에 확신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며, 심지어 갈망하던 사람이나 장소, 그 밖의 어떤 것이든 그것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큰 상실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앎에 힘을 내주었다.
왜냐하면 오직 신만이 당신을 복원하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은 모른다. 당신 혼자서는 복원할 수 없다. 당신 혼자 힘으로는 도약할 수 없다. 여기서 당신은 받아들이고 선택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며, 앎과 함께 내린 올바른 선택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약 앎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이 사람이든 장소든 다른 어떤 것이든, 당신 역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앎은 삶에서 당신을 어떤 곳으로 데려가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앎은 당신을 특정 상황으로 데려가 특정인을 만나게 하고, 특정 경험과 깨달음을 얻게 하려고 할 것이다. 이 경험과 깨달음에서 당신이 세상에 온 큰 목적이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데 그 목적은 현재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하고 있는 것에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신이 세상에 보낸 새 메시지 가르침은 그 핵심 가르침의 일환으로 앎으로 가는 계단을 제공한다. 변하는 세상에서 성공적이고 조화로운 삶을 살도록 여기에서 많은 것의 방향을 알려주고 많은 것을 권장하지만,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반드시 이 근본적인 연결이 있어야 한다. 마치 이것은 바퀴의 중심축처럼,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이 중심에서 발산되고, 이 중심의 영향을 받는다. 즉 당신이 누구와 함께 있어야 하는지, 당신이 하는 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어려움과 실패에 대응하는 방식, 변화를 마주하는 방식,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힘과 지혜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지 등 이 모든 것이 영향을 받는다. 이 모든 힘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에서 나온다.
앎이 없다면, 당신은 나약하고, 대부분의 경우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실질적 장애물을 극복할 힘이 없다. 신은 당신이 혼자서는 이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당신에게 앎을 주었다. 어쩌면 당신이 매우 열심히 노력할 수도 있지만, 앎이 없다면 당신은 끊임없이 세상에 휩쓸리고, 이런저런 힘, 이런저런 감정, 이런저런 반응에 계속해서 휘둘릴 것임을 신은 안다.
세상은 사회 운동, 정치 운동, 개인적 고뇌, 가족의 통제, 사회적 의무, 종교적 명령 등 이런 온갖 신념이나 설득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것이 외부에서 당신을 끌어당기고 있다. 당신은 어디에서 신과의 진정한 연결을 찾고, 신이 당신에게 준 힘을 찾을 것인가? 당신이 이 연결과 힘을 알아차리고 여기에 협력할 때, 바로 이 연결과 힘 그 자체가 당신 내면에 있는 갈등의 씨앗을 해소할 것이다.
물론 당신에게는 여전히 감정과 느낌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어떤 일에는 여전히 신경이 쓰일 것이다. 당신은 죽은 것이 아니므로, 여전히 세상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비극을 느낄 것이고, 폭력에 분노할 것이며, 사람들의 고통에 괴로워할 것이다. 당신은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잔혹함에 짜증이 날 것이다. 하지만 차이점은 이런 모든 반응과 감정이 당신 삶의 경로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당신 삶의 경로는 큰 힘이 이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은 대단히 인내해야 한다. 인내는 당신의 들뜬 마음이나 짜증이나 조바심을 해소하는 과정의 일부이다. 인내해야 하는 까닭은 이 여행이 느리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당장 여행이 끝나기를 원한다. 마치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것처럼 지금 당장 결과를 원한다. 당신은 돈을 지불하고, 원하는 것을 얻고 싶어 한다. 당신은 힘을 원하고, 확실성을 원하고, 삶의 진정한 방향을 원한다. 당신은 지금 당장 이 모든 것을 원한다. 그렇지 않은가? 여기서 솔직히 말해보라. 당신은 지금 당장 이 모든 것을 원한다.
당신은 그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 여행이 노력을 요구하므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 여행을 통해 지혜와 힘과 능력을 얻고, 앎이 어떻게 일하는지 알게 되며, 미래에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기량을 기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삶에서 치유되거나 본연의 자신이 되는 것이 신의 특혜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 가능성은 항상 그들 내면에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과 같다. 그들은 삶의 경로에서 너무 멀리 벗어났으므로 되돌아가는 길을 되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길을 잃었다면 되돌아갈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돌아가는 과정에서, 당신은 이전에 저지른 실수를 되돌아보고 인지하기 시작하며, 처음부터 길을 벗어나게 했던 동기를 원상태로 되돌리기 시작한다. 당신은 도중에 저지른 실수들을 깨닫고, 그 실수들을 저지른 원인이 무엇이며, 왜 그 실수를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지혜를 쌓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여행은 단순히 당신을 곤경에서 벗어나게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세상에 봉사할 수 있도록 당신을 강력하고 지혜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마치 당신이 복지 혜택을 받는 것처럼 당신에게 마법의 지팡이를 흔들어 모든 문제를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당신은 되돌아가야 한다. 당신 삶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 경로를 벗어났다. 당신은 노력하여 되돌아가야 한다. 마치 큰 도시나 광야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당신은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자신이 확신을 잃은 지점을 찾아야 한다. 그 지점을 지나서부터 당신은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당신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만약 당신이 되돌아가지 않으면, 자신이 지금 있는 곳에 이르게 된 경로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심지어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어디서 잘못된 결정을 내렸는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사실 잘못된 결정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다. 그리고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당신은 점점 더 자신과 단절되었고, 점점 더 자신과 멀어졌으며, 세상에 휩쓸려 길을 잃었다.
사람들은 우연히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결정과 상황이 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는 되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되돌아가는 동안에도, 당신은 지혜와 명료함과 힘을 쌓을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되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있는 곳에서 계속 나아가고 싶어 한다. 그들은 지금 당장 깨달음을 얻거나 강해지거나 성공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지금 있는 자리에서 관계를 치유하거나 정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어 하지만, 그들은 길을 잃었다. 그들은 자신이 있었던 곳으로 되돌아가, 매우 의식적인 방식으로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지금 있는 곳에서 확실성을 얻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한참 전에 확실성을 잃었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잃었는지를 모른다.
이것들은 반드시 알아내야 하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려면 지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자기 삶을 쇄신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때 무엇이 필요하며, 이렇게 쇄신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 삶을 쇄신하는 데 돕는 법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과정에는 많은 실수가 따르며, 이렇게 되돌아가는 것을 꺼리는 것이 그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메시지는 당신에게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법을 가르치고 이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당신이 자신의 경험과 과거를 통해서 자기 삶이 어디에서 경로를 벗어났는지, 무엇이 당신에게 현명하지 못한 결정을 내리게 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관계에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하거나, 결코 진정으로 당신을 만족하게 할 수 없는 직업에 헌신하도록 부추긴 주변 환경이나 당신 내면의 힘은 무엇이었는가?
당신은 현재와 과거 모두에서 당신 내면과 환경에 있는 이 힘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무엇이 당신을 가로막았는가? 여기서 당신은 추측해서는 안 되며, 그저 가정만해서도 안 된다. 당신은 정말로 이것을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이 당신의 발목을 잡는지 알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가는 데 그것이 계속 당신의 발목을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광야에서 길을 잃고 스스로 길을 정한다면, 오히려 더 길을 잃을 수 있다. 북쪽으로 가야 할 때 서쪽으로 가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며, 심지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설령 당신이 광야에서 오백 리를 되돌아가야 자신의 위치를 알던 지점, 자신에게 식량과 안정이 있던 지점에 도달한다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다.
당신 삶에 대한 이 심화 평가는 매우 중요하며, 가능한 한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자기 평가, 즉 자기 삶과 과거에 대한 평가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평가는 각각의 전환점에서 앎의 증표를 당신에게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이 한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징후와 예감이 있었음을 알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내면의 제지를 느꼈을지도 모르고, 다른 누군가가 당신에게 경고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기쁨에 찬 기대감보다는 깊은 체념 속에서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것은 당신에게 어떤 느낌이었는가? 왜냐하면 다음 전환점, 다음 갈림길에 섰을 때 당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힘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힘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것을 배우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면, 당신은 결국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아마도 그 상황의 겉모습은 다르겠지만, 당신은 분명 무언가에 유혹당할 것이다. 예전에는 상대가 잘생겼거나 예뻐서 결혼했겠지만, 이제는 상대가 영적으로 보이므로 결혼할 것이다. 똑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당신이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신호와 징후를 무시한 채, 의도적이든 체념 상태에서든 앞만 보고 나아간다. 이런 당신을 위해 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을 증폭시키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실례를 모두 언급하기에는 너무 많지만, 당신이 심화 평가를 하면서 자기 삶을 돌아보기 시작하면, 그 실례들을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 사람들이나 장소와의 관계, 직업과의 관계와 주로 관련된 중대한 결정을 내린 지점이 어디였는가? 그 각각의 갈림길로 돌아가 보라. 그 상황에 있을 때 느낌이 어떠했는가? 무엇이 당신의 결정을 부추겼는가? 그리고 그때는 미처 몰랐더라도 지금 돌이켜보니, 달리 행동했어야 하는 신호가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이 신호들을 인지하라. 이 신호들에 친숙해지라. 매일 그 신호들을 상기하라. 왜냐하면 앞으로도 이 신호들을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을 잘못된 길로 이끈 그 힘들도 미래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러한 힘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은 자신의 마음과 결정을 조심스럽게 보살펴야 한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나 당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대단히 조심하고 분별해야 한다. 당신은 모든 것을 앎에게 가져가야 한다. 당신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면서 이렇게 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당신이 이렇게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이것이 바로 당신의 최우선 교육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신을 찬양하고 숭배할 수는 있으나, 신은 오직 당신이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것, 이곳에 파견되어 하기로 한 것을 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당신은 신을 진정으로 공경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 삶이 경로를 벗어났다면, 당신은 큰 분별력, 큰 명확성, 큰 힘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되돌아가서 이것을 재검토해야 한다.
그러면 당신 내면에 있는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것은 누그러질 것이다. 그것을 강화하는 힘은 약해질 것이다. 이제 그 힘은 다른 방향으로 쓰일 것이다.
이때 당신은 큰 힘과 큰 확실성을 발견할 것이며, 자신의 상태를 더 잘 알아차릴 것이다. 당신은 이 세상의 유혹에 그리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쉽게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부·미모·매력에서 받는 영향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람들에게서 더 깊은 어떤 것, 즉 당신이 내면에서 발견하여 계속 살아 있게 하려고 애쓰는 바로 그 깊은 것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