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shall Vian Summers
on 3월 23, 1992
1992년 03월 23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신중함이란 무엇인가? 신중함은 언제 말하고 언제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아는 능력이다. 어떤 말을 하고 나서 그 말을 후회한 적이 있는가?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말하고 나서 그렇게 말한 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은 적이 있는가? 어쩌면 그 말은 상대방에게 잘못된 것이었거나,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드러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을 공개했지만, 그것이 적절하지 않은 적이 있는가? 아니면 당신이 어떤 말을 했는데 그 말이 부적절한 사람에게 전해지거나 잘못 해석되어 나중에 당신 뇌리를 떠나지 않은 적이 있었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자기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다른 성장 단계가 있다. 첫째 단계는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당신이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고 느끼는 때이다. 그리고 셋째 단계는 드문 경우에 특정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것을 제외하면, 자신을 표현할 필요가 없는 때이다. 이 세 단계는 인간의 성장 단계인 의존, 독립, 상호의존의 단계를 나타낸다.
첫째 단계에서는 자기 경험이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하므로,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자기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기량이 없거나, 아니면 무엇을 표현해야 할지 모른다. 당신은 너무 두려워서 그 간극을 메우지 못하고 표현해야 할 것을 자신에게서 끌어낼 수 없다. 따라서 이 첫째 단계는 자기 억압의 단계이고, 분별력과 신중함이 전혀 발휘되지 않는 단계이다.
둘째 단계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를 경험하는데, 이것은 당신이 자기 생각을 경험하고 좀 더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계에서는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거의 억제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느낀다.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고 싶어 하지, 자신을 속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전에 자신을 구속했던 모든 자제력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셋째 단계로, 이 단계에서는 매우 책임지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한다. 여기서 신중함이 매우 중요해지는 것은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모든 말에서 자신의 입장을 아주 오래 지속될 만큼 깊이 못박는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물론 책임자나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새겨질 것임을 안다. 그들은 자신이 말하는 것과 강조하고 싶은 것에 대해 훨씬 더 신중해야 한다. 여기서 자기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자신에 대한 책임,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자신을 표현한 결과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까지 따른다.
그러므로 인류의 성장 단계에는 의존, 독립, 상호의존, 세 가지 큰 단계가 있다. 사람들 대부분은 처음 두 단계에 있다. 실제로 사람들 대부분은 첫째 단계에 있으며, 많은 사람이 둘째 단계로 나아가고 있고, 셋째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거의 없다. 첫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말을 하지 못한다. 둘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와 독립의 표현으로서 말을 해야 한다. 셋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특정 목적을 위해 특정 사람들에게만 드물게 말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들은 자기표현에 따르는 큰 책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당신은 이 세 단계에서 자기 경험을 아주 깊이 이해해 나가며, 지혜를 배우고 그 지혜를 세상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의존이라는 첫째 단계에서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 경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아직 자신을 묶는 구속에서 벗어날 기량이나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독립이라는 둘째 단계에서는 구속에서 벗어나 자기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키거나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고자 하는 열망보다는 에너지를 방출하고 마음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에 더 가깝다. 이 시기에는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매우 혼란스럽다. 당신은 자신이 한 말의 결과를 아직 깨닫지 못한다. 그보다는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상호의존이라는 셋째 단계에서는 책임지고 자신을 인식하는 위치에서 관계를 맺으며 소통하기 시작하는 단계이므로 신중함이 더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신중함이 없으면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원하지 않는 결과, 종종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신은 자제력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언제 어디서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분별력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자제력이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종종 자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독립이라는 둘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억제하는 것을 종종 견딜 수 없다. 그들은 무엇이든 억제하는 것은 자신의 본성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표현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은 결국 이것이 원하지 않는 결과나 갈등을 낳고, 세상에서 큰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래서 현명하다면, 자신이 누구에게 말하고 무엇을 말할지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현명해진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무엇을 말할지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그들은 모든 자기표현이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사람의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의한다. 그들은 진정한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어 하며, 진정한 반응을 끌어내고 싶어 한다. 그들은 무책임한 자기표현에 따르는 고난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이 자제력이 자기 억압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으며, 자신의 감정, 분노, 슬픔, 기쁨, 영감, 실망 등을 표현할 수 있다. 그들은 이 기량을 계발했으며, 이제 현명하게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의존이라는 첫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경험할 수 없으므로 그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 독립이라는 둘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감정과 생각을 경험하기 시작하며, 이것들을 표현하려는 욕망이 크다. 그러나 이 욕망은 아직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현명한 사람은 항상 신중해야 한다. 여기서 현자는 자신의 깊은 경험을 많은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므로 외로움을 느끼고 배제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내면에서 경험한 것을 품고, 그 경험이 내면에서 자랄 수 있게 놓아두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에너지와 집중력이 생기며, 이것들이 힘이다. 또한 삶에서 점점 더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위치를 존중하고, 자신의 경험과 위치도 존중하게 된다.
힘이 현명하게 이용되고 유익한 영향을 미치려면, 힘에는 책임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것은 자기표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앎은 당신의 안내자이다. 왜냐하면 앎이 당신을 특정 사람들에게는 말하게 하고,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는 침묵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앎을 향해 나아가고, 앎과의 관계를 쌓고, 앎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면서, 당신도 특정 사람들에게는 강력한 것을 표현하고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는 침묵할 것이다. 이때 판단이나 비난 없이 할 것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은 가치 있고 어떤 사람은 무가치하다고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당신은 단지 당신의 자기표현을 건설적이고 유익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느껴지는 특정 사람들에게 특정한 것들을 표현하도록 요청받을 뿐이다. 그 밖의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당신 내면에 자기표현을 품은 채, 그 힘이 커지게 놓아둔다.
독립이라는 성장의 둘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자신의 날개를 펼치기 시작하면서 매우 강력한 힘을 느끼지만, 무책임한 자기표현을 통해 항상 자신의 힘과 집중력을 낭비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들에게 자기표현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밖으로 쏟아냄으로써 마음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것에 가깝다. 그들은 자기 경험을 담아두고 싶어 하지 않으며, 담아두는 것은 일종의 자기 억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의존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므로, 어떤 것을 억제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억제해야 할 때는 매우 모욕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일은 청소년기의 발달 단계에서 일어난다. 청소년기는 힘에 대한 새로운 표현과 경험이 부각되지만, 힘을 지니거나 현명하게 이용하는 지혜와 책임감은 없다.
성장의 둘째 단계는 미성숙한 성년기와 같다. 많은 사람이 둘째 단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이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많은 사람이 이 단계를 가르친다. 이 단계에서는 자신을 표현할 권리를 부정하는 어떤 것이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갖고 그것을 하고 그것이 되는 권리를 부정하는 어떤 것에도 매우 비판적이다. 사람들이 이 단계를 배우려고 하므로 가르치지만, 그들은 이 단계 너머에 광대한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사실 상호의존이라는 셋째 단계는 앞의 두 단계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그것들은 서로 비교가 안 된다. 당신은 성장의 셋째 단계를 결코 졸업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거쳐야 할 많은 성장과 진보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힘을 원하고 힘과 관련된 모든 것을 원하지만, 그 힘에 수반되어야 하는 책임을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책임에는 분별력, 신중함, 자제력이 필요하다. 독립을 즐기는 사람들이 이 자제력을 자기 억압의 한 형태로 보지 않고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자신의 힘에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깨달을 때만 가능하며, 자기 주변에 혼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으려면 자신의 능력을 더 신중하고 주의 깊게 사용해야 함을 깨달을 때만 가능하다. 이렇게 할 때, 신중함을 지니는 준비를 한다.
많은 사람이 신중함은 단순히 입을 다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지 말라. 그런 것을 말하지 말라. 참으라. 누구에게도 어떤 것도 말하지 말라. 당신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 더 안전하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이 신중함을 생각하지만, 이것은 신중함이 아니다. 신중함은 말해야 할 때와 말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알고 이것을 충실히 따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신중함이다. 신중함에는 당신의 힘과 능력이 필요하고, 높은 수준에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자신과 싸우는 관계에 있다면, 당신은 어떤 것에도 지혜를 지니고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자신을 배반한다는 느낌 없이 자기표현을 억제할 수 있고, 자신을 배반한다는 느낌 없이 누군가에게 중요한 것, 어쩌면 위험해 보이는 것을 말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 사실, 실제로 유일하게 자신을 배반하는 것은 당신이 앎을 거스를 때만 일어난다. 그렇지만 언제 앎을 향해 나아가고 언제 앎에서 멀어지는지 알려면 앎을 충분히 경험해야 한다.
따라서 신중함은 말하는 능력이자 말하지 않는 능력이다. 지금 많은 사람이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들어줄 사람, 자신에게 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온갖 것을 끊임없이 말한다. 이것은 성장의 초기 두 단계를 나타내지만, 어느 쪽도 성숙한 단계를 나타내지 못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 중 어느 것도 진정한 관계를 돈독히 하거나 세상에서 일을 조화롭게 성취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 그래서 당신은 “내가 언제 말하고 언제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앎이 당신을 자극할 것이므로 당신은 알 것이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데 제지를 느낀다면 말하지 말라. 만약 제지하는 느낌이 당신 내면 깊은 곳에 있다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 하지만 만약 표면 마음에서 제지하고, 당신 내면 깊은 곳에서는 당신이 어떤 것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 당신은 구실을 대지 말고 위험을 감수하며 전할 말을 찾아야 한다.
당신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것과 표면에 있는 것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앎이 없다면 이것을 분별할 수 없다. 당신은 어떤 충동이든 진실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어떤 충동이든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앎의 학생이 된다는 것은 당신의 가장 주된 관계인 앎과의 관계를 쌓는 것이다. 이때 당신은 신중함의 진정한 의미를 배울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앎이 특정 시기에만 말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앎은 조건이 맞고, 듣는 이가 맞고, 필요성이 있는, 그런 준비된 순간을 기다린다.
큰 공동체 앎길을 공부하며, 고대 전통에 따라 이곳에 전해지는 앎길의 연습을 따르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항상 앎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내 목적을 말해달라.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달라. 이 직업을 가져야 하는가, 아니면 저 직업을 가져야 하는가? 이 사람과 함께 가야 하는가, 아니면 함께 가지 말아야 하는가? 마음을 열어야 하는가, 아니면 닫아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평화를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평정심을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저 상황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렇게 끊임없이 묻고, 90%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에 무엇을 경험하는가? 그들은 침묵을 경험하거나, 그저 자신의 선호와 혼란 등 자신의 마음이 말하는 것만 듣는다. 그들은 ‘맞다, 아니다, 이것을 해, 저것을 하지 마’ 등 이런 온갖 것을 듣는다. 그렇지만 이것은 모두 표면 마음에 있다. 마음 깊은 곳에는 고요함이 있다.
이것은 앎을 나타낸다. 앎은 그 자체로 실현되므로 매우 오랫동안 자제할 수 있다. 실제로 아는 것을 경험하는 것과 아는 것을 표현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보통 이런 경우가 많다. 당신이 어떤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일이 일어나는 데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떤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혹시 그것을 그 사람에게 표현한다 하더라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이것이 자기 억압인가? 아니다. 이것은 앎이다.
앎의 수준에서 일하려면 앎과 당신의 관계가 발전해야 한다. 의존성과 씨름하는 대다수 사람에게는 이것이 의미가 없다. 그들은 신중함을 그다지 경험하지 않으며, 자기 억압을 경험한다. 그들은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종종 자신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모르며, 안다 하더라도, 그것을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러는가? 그것은 그들이 의존하는 것들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독립을 주장하고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하면, 자신이 의존하는 것들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만약 당신이 독립을 주장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독립을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준비가 되었다면, 당신은 독립이라는 성장의 둘째 단계로 진입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당신이 독립의 자유를 누리고 독립의 책임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더 큰 맥락에서 신중함에 대한 개념을 알려준다. 이 개념은 큰 공동체 앎길에서 다른 모든 것을 배우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적절할 때 말할 수 있고 적절하지 않을 때 말하지 않으려면, 더 큰 성장이 필요하다. 당신 자신, 당신의 본성, 관계의 역동성에 대한 더 큰 이해가 필요하고, 내적 삶에 대한 강한 충성심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당신 성장의 더 큰 영역을 나타낸다.
이제 당신은 “나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신중함을 기를 수 있는가?”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나는 “앎의 학생이 되라.”라고 말한다. 만약 당신이 앎과 동질감을 경험하고 이 세계 너머의 삶을 나타내는 큰 공동체와 동질감을 경험한다면, 큰 공동체 앎길이 당신의 길이다. 그 길이 당신의 길인지 당신이 어떻게 아는가? 당신이 그 길을 알기 때문에 안다. 당신이 그처럼 안다는 사실이 당신을 그 길에 계속 머물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할 유일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당신에게 부, 힘, 사랑, 편안함, 즐거움, 영광, 신의 개입, 천사의 접촉, 이런 모든 것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당신은 큰 공동체 앎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큰 공동체 앎길을 따른다. 이것이 당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조만간 다른 모든 야심과 동기는 사라진다. 이것들이 사라지면서, 당신은 대부분의 대화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이 자신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단지 자신의 불안감을 상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이 하는 말이 모두 가치가 있거나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편안한 마음 상태일 때조차 당신은 의미를 만들려고 하지 않고도 그 상태가 의미 있는 경험이기를 바란다. 여기서 당신은 더 자연스러워진다. 당신은 어떤 일이 일어날 때를 제외하면, 고요하고 조용한 자연계를 더 닮아간다. 고요하고 침묵하는 사람은 깊이가 있으며, 특히 그 사람의 침묵이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서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앎의 회복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삶의 신비를 경험하기 시작하며, 자기 내면에 신비를 지니고 있음을 경험한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신비의 현존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무의미한 대화, 분석, 추측으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을 내면에 품으므로, 그것은 점점 커지고 더 강력해진다. 그들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을 쏟아내기 위해 친구들에게 달려가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말하거나, 자신의 가장 깊은 경험을 모두 공유함으로써 전하고자 하는 말을 끊임없이 낭비하지 않는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이 더 강해지고 더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자신의 내면에 그것을 품는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에너지를 품고 싶어 한다. 자신의 에너지를 경험하자마자 쏟아내기보다는, 그 에너지를 안으로 끌어모아, 그 에너지에 집중하고 싶어 한다.
현명한 사람들은 신중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했으며, 신중함을 효과적으로 연습한다. 그들은 신중함이 필수임을 알기 때문에 신중함을 연습한다. 그것이 그들의 동기이다. 보복의 두려움, 반격의 두려움, 사랑이나 돈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동기가 아니다. 그들의 동기는 자기표현이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자기표현이 실현되려면 맞는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들은 올바른 단어를 사용하고 종종 가능한 한 적은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이 중요한 것을 말할 때, 말을 많이 할수록 그 메시지는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동기는 자신을 배신하지 않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자신을 존중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큰 공동체 앎길을 배우며, 이 배움을 통해 때맞추어 특정 사람들에게 특정한 것을 말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고요와 침묵을 유지하며, 오직 살면서 꼭 필요한 것들을 다루기 위해서만 대화를 이어간다.
큰 공동체 앎길의 학생들은 자신이 항상 고요를 연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당신에게는 고요가 자제력이나 자기 억압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환상, 작은 드라마, 추측, 분석, 과거의 기억, 미래에 대한 예측 등 자신의 모든 생각에서 계속 빠져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고요를 연습하라. 당신이 신중함을 지니려면 고요가 필요하다. 당신이 분별력을 경험하려면, 고요가 필요하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려면, 고요가 필요하다. 당신이 올바른 관계를 선택하고 자신을 배반하지 않는 올바른 길로 나아가려면, 고요가 필요하다. 당신이 지혜롭게 말하고 행동하려면, 고요가 필요하다. 고요는 필요하다.
당신은 어떻게 진정한 신중함을 기르는가? 지금 몇 가지 지침을 알려주겠다. 우선 당신이 큰 공동체에 동질감을 느낀다면, 큰 공동체 앎길의 학생으로서 시작하라. 만약 동질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다른 길, 다른 형태의 성장을 선택하되 당신이 직접 만들지 않은 준비를 항상 선택하라. 이것 조금, 저것 조금, 이것 중에서 당신 마음에 드는 부분, 저것 중에서 당신 마음에 드는 부분을 선택하여, 그것을 모두 합치는 취사선택의 접근 방식을 취하지 말라. 취사선택의 접근 방식을 취할 때 당신이 무엇을 갖게 될지 아는가? 당신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가질 것이고, 그것은 당신을 어디에도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당신을 위로하고 당신이 지금 있는 곳만 확인해 줄 뿐이다. 실제로, 큰 공동체 앎길에서 당신은 자신의 선호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선호를 초월하는 법을 배운다. 앎길은 선호를 넘어 아는 것으로 당신을 데려간다. 취사선택의 방식으로 성장에 접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선호를 강화할 뿐, 결코 그 선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자유롭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했다고 느끼므로, 계속 괴롭고, 안도감도 거의 찾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만들지 않은 준비를 선택하라. 당신이 지금 있는 곳을 넘어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을 선택하라. 이것이 교육이고, 이것이 성장이다. 물론 자기 강화는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지금 있는 곳을 넘어서 나아가야 한다. 취사선택의 접근 방식을 선택한다면, 당신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을 넘어서 나아가지 못할 것이고, 지금 자신이 있는 곳만 강조할 것이며, 자신에게 더 많이 투자할 것이다. 그래서 그 방식은 어디로도 이르지 못하게 하는 큰 길이다. 당신이 앎길의 진정한 학생이 되려면, 당신에게 맞는 준비지만 당신의 선호와 감정에 시시각각 지배받지 않는 준비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연습하고 싶은 날에도 연습하기 싫은 날에도 연습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연습 주제가 마음에 들 때도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그 주제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량이 자신의 목표를 충족시키는 것처럼 보일 때도 그렇게 보이지 않을 때도, 그 기량을 연마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학생이 된다는 뜻이다. 즉,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전에 가보지 않은 곳에 가고, 새로운 생각을 품고, 다시 생각하고, 새롭게 하고, 활기를 되찾고, 재발견한다는 뜻이다.
만약 당신이 준비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고 여겨지면, 앎길에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앎길은 당신의 모든 측면을 기를 것이고, 진정한 신중함이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사이 몇 가지 지침을 당신에게 알려주겠다. 이것들은 단지 지침일 뿐이며, 이 말은 당신이 이 지침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상황에서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이 지침들은 결코 변하지 않는 규칙이거나 모든 상황에서 동일한 규칙이 아니다. 실제로 현명한 사람은 잘 변하고 바뀔 수 있으며,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지혜를 적용할 수 있다.
초보 학생은 모든 것을 흑백 논리로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준비에서 “이렇게 하라.”라고 하면, 그들은 모든 상황에서 그렇게 하려고 하면서, 그 상황들이 얼마나 서로 다른지, 다양한 상황에서 어떻게 다르게 적용해야 하는지 분별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는 이런 성향을 고려하여, 나는 “가능한 한 적게 말하라.”라고 말한다. 당신이 신뢰하고 당신을 높이 평가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당신에게 자신의 전망점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당신의 영적 삶을 존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라. 당신이 어떤 것을 꼭 말해야 할 때, 간단하게 말하라. 모든 것을 설명하고, 무수히 많은 예를 들며, 더는 할 말이 없을 때까지 말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말한 것을 사람들의 구미에 완전히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그들이 그 말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하라. 만약 당신이 어떤 것을 표현해야 한다고 느끼지만, 기회가 없거나 맞는 사람들이 없다면, 당신 내면에 이것을 간직하라. 당신 내면에 불이 더 뜨겁게 타오르게 하라. 이런 압력이 있는 것은 괜찮다. 이 에너지를 담고 있으라. 그것은 성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욕을 느낄 때마다 즉시 해소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서 성관계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미친 짓이다. 이것을 생각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이것이 미친 짓임을 알 것이다.
마찬가지로 특별히 어떤 사람에게 혹은 모든 사람에게 아주 널리 말해야 할 어떤 것이 당신에게 있는데, 기회가 없거나 기회가 적절하지 않거나 때가 맞지 않다면, 그 말을 내면에 담고 있으라. 그것이 커지게 놓아두라. 이것이 바로 당신이 내면의 깊이, 힘, 통찰력, 자기 인식을 기르는 방식이다. 압력을 느끼면, 그 압력이 있게 놓아두라.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든 표현할 기회가 있으면, 엄청난 힘으로 표현될 것이다. 활을 뒤로 당기는 것처럼, 그 압력은 세상을 향해 화살을 쏘는 힘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표현에 힘을 주는 것이다. 항상 끊임없이 계속 말하는 사람은 자기표현에 아무런 힘이 없다. 그들 내면에는 아무것도 쌓이지 않았다. 화살은 그들 바로 앞에 떨어지고,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 하지만 당신이 당신 내면에 당신의 메시지가 자라게 놓아두면, 그 메시지에는 힘이 있고, 메시지가 표현될 때, 거기에 힘이 있다.
그러니 압력을 느껴보라. 불이 커지게 놓아두라. 만약 당신이 현명하게 이것을 하면, 통찰력과 자제력이 커질 것이다. 성숙한 인간이 되려면 반드시 이 능력이 커져야 한다. 오직 미숙한 청소년들만 거칠고 무모해서,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아무에게나 무슨 말이든 하고 다닌다. 그리고 그들은 왜 자신의 삶이 갈등과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현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조용히 보낸다는 것은 사실이다. 앎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앎이 화살을 쏘면, 삶을 완전히 바꿀 수 있고, 세상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의존 상태에서 씨름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볼 수 없다. 이것은 그들의 딜레마를 어둡게 하고 깊어지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성장의 둘째 단계에서 새롭게 발견된 독립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개념들이 그들을 퇴보하는 방향으로, 다시 의존 상태로 데려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새로운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독립하는 시기가 바로 청소년기이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어떤 것에도 방해받거나 제한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청소년기에는 지혜가 거의 없다. 즉, 많은 탐험과 실험, 많은 재난과 실망, 끔찍한 실수는 있지만, 지혜는 거의 없다.
지혜를 얻고 싶다면, 당신은 신중함을 발휘해야 하고, 신중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신중해지는 법을 배우려면, 앎길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한 가지 기량을 배우기보다는, 당신은 모든 기량을 배워야 한다. 한 가지 덕목만 배우기보다는, 당신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 가지 힘을 얻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당신은 강해져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신중함을 배우는 것은 온전하고 통합된 사람이 되는 것이며, 내면에 있는 앎의 현존을 느끼는 사람, 자체적으로 생성시키는 현존을 느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당신이 깨닫는 것은 당신 삶과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관계망을 통해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 관계망에서 당신은 맞는 사람들과 함께 맞는 목적을 가지고 천천히 성장하기를 원할 것이다. 당신은 한 개인이지만, 당신의 개체성은 관계의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당신의 개체성은 당신이 공헌할 수 있는 것의 관점에서만 의미가 있다.
여기서 나는 당신이 책임감 있는 한 개인으로서 관계에 다시 들어가는, 상호의존이라는 성장의 셋째 단계를 설명하겠다. 여기서 당신은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당신은 자기 경험을 설명할 수 있으며, 자신이 어떤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목적이 있는 방식으로 삶에 다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사실 독립 단계는 자유를 새로 찾았다는 점에서 설레고 신나는 일이지만, 본질적으로 외롭고, 고립되어 있다. 이 단계는 비효율적이고 큰 성과를 낼 수 없다. 결국 당신은 자신의 독립을 오랫동안 공언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삶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삶에서 중요한 일을 하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조화롭게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은 힘을 공유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자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타협이 필요할 때 타협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분별력을 배워야 한다.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을 배워야 하며, 이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역동적이고 진정으로 소통하는 단계인, 성장의 셋째 단계를 대비한다. 여기서 당신이 자기 삶과 자기표현의 중요성을 깨달음으로써 신중함의 필요성은 더 커진다. 여기서 당신은 대부분의 대화는 불필요하며 사람들의 불안감을 상쇄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서 침묵을 선호하는 것은 침묵 속에서 당신은 자신의 현존, 다른 사람들의 현존, 당신 관계의 의미를 경험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