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shall Vian Summers
on 4월 16, 1992
1992년 04월 16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앎길에서 진보하고 세상을 배우고 자신이 공헌할 것을 찾으려면, 당신은 다른 이들에게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이것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 당신이 학생으로서 자리잡으면, 큰 이점을 얻고, 여러 면에서 자신의 파괴적 성향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다. 당신이 학생임을 주장하고 강화하면,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배울 기회를 얻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거나 위안이 되는 생각과 동일시하는 것을 방지하기가 쉽다. 그리고 자신을 열려 있게 하고, 취약하게 하고, 지각력이 뛰어나게 하고, 관찰력이 예리해지게 하고, 더 깊은 이해 없이 결론에 이르는 것을 여러 면에서 자제하게 할 수 있게 한다. 학생 신분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 특성상, 배우기 위해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만 기다리는 이 시간 동안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준비를 위한 교육 과정을 찾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매우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을 배우려면 매우 자명해 보인다. 당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어떤 기량을 생각해 보면, 분명히 당신에게는 지도가 필요할 것이고, 일종의 교육 과정이 필요할 것이며,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많은 본보기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사실이며, 아주 많은 곳에 적용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삶에서 자신의 진보를 바라볼 때 이 점을 숙고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종종 마지못해 어떤 것을 배우고, 기존 관념을 고수하려고 하고,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고, 변화나 새로운 교류나 기회 등에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면서 비틀거리며 나아간다.
이렇게 적극적인 학생의 태도로 삶에 접근하면, 당신은 매우 성실한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고, 학습에 필요한 책임감을 기를 수 있다. 이 접근 방식에 정직하다면, 당신은 자신이 실수를 하게 될 것이라는 점과 어떤 실수는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것이 시행착오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에 자신을 노출해야 한다는 것, 일을 시도해 보고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다른 접근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하거나 자기 생각을 입증하거나 자기 입장을 옹호하려는 등 진정한 학습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매우 일반적인 접근 방식과는 다르다. 진정한 학생은 실망과 혼란에 매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이 모든 것을 학습과 준비에 필수 부분으로 본다.
세상의 일부가 되고,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와 목적을 발견하려면, 당신은 적극적이고 의도적인 학생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여기서 만약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세, 가능한 한 많이 배우고 싶다는 자세를 취할 수 있다면, 이것을 통해 당신은 큰 이점을 얻는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은 삶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삶과 함께 움직일 수 있고, 내가 이 주제에서 말한 것들을 배울 수 있다. 당신은 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나는 당신이 스스로 이것들을 탐구하도록 권하고 격려한다. 비록 내가 말하는 것이 매우 정확하더라도, 당신이 스스로 이것을 깨달을 수 없다면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이 되라. 앎의 학생이 되라. 왜냐하면 앎의 발견, 앎의 출현, 앎의 안내는 당신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당신이 앎을 깨닫고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제대로 갖추어진 인간이 되고, 삶에서 큰 힘을 알게 되고, 이 큰 힘과 맺은 관계를 발전시키고, 의미 있는 관계가 생겨 그 관계의 온전한 표현을 찾을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람들과 동조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삶에서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들과 세상이 지금 당신에게 제시하는 더 큰 기회를 고려할 때, 앎이 당신의 기반이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 내면에 있는 더 큰 마음이고, 진실의 원천이며, 의미와 방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앎이 없으면, 당신은 무턱대고 헤매며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앎이 없으면, 당신은 터무니없는 가정에 따라 살 것이다. 앎이 없으면, 당신은 편안함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접근했을 때 나타난 결과는 주변 곳곳에서 당신이 보는 혼란, 양가성, 불확실성, 불행, 자기 부정이었다. 삶에서 의미 있고 진정한 모든 진보는 앎이 부추겼고,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심지어 앎이 자신의 안내자이자 영감과 힘과 용기와 동기의 원천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의식적으로 앎에 맞춘 소수의 사람은 훨씬 더 많은 것을 베풀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삶이 받아들이는 자가 될 수 있는 방식, 세상에서 큰 공헌을 하는 동기가 될 수 있는 방식으로 삶에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학생이 되는 데 필요한 부분이자 매우 큰 부분은 다른 이들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것이 포함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보다 더 진보한 이들이 당신에게 필요할 것이다. 그들이 당신 준비 과정을 돕고, 심지어 도중 어느 시점에, 특히 당신이 더 진보할수록, 직접 지도해줄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을 학생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자신이 모르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이 대부분의 일에서, 특히 앎길을 배우는 일에서 독학하려고 한다면, 당신의 진전은 느리고 불만스럽고 비효율적일 것이다. 당신은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이것에서 조금 얻고 저것에서 조금 얻으며 절충하는 접근 방식을 따르면서, 무작정 헤맬 시간이 없다. 이것은 마치 훌륭한 만찬이 당신 앞에 차려져 있는데, 식탁 밑에서 음식 찌꺼기를 줍는 것과 같다. 당신은 식탁에 앉아서 앎이 주는 선물들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찌꺼기를 줍는가? 거지가 되지 말라. 받아들이는 이가 되라. 학생이 되라.
당신에게는 지도가 필요할 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진보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을 찬양하거나 신격화하거나 자신의 유일한 목표로 삼지 않으면서, 그들에게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그들을 지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교사에게서 배우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된다. 여기에는 받아들이고, 평가하고, 적용하는 것이 포함된다. 또한 당신이 그 교사에게 베푸는 형태인 그 교사를 지원하는 것도 포함된다. 특히 앎길에서는 앎의 진정한 교사들이 이 지원에 의존한다. 그들은 이 봉사에 자기 삶을 바치고 있으므로 넉넉하게 지원받을 자격이 있다. 당신의 지원과 흥정하지 말고, 당신이 베풀어야 한다고 아는 것을 베풀라. 그러면 관계에 불평등도 없고 불확실성도 없을 것이다.
배우려면, 당신은 자신보다 더 진보한 이들과 어울려야 하고, 자신보다 덜 진보한 이들과도 어울려야 한다. 물론 이것은 세상에서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이 매우 다른 성장 단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동등한 인식, 동등한 기량, 동등한 기회를 가지려고 애쓴다. 당신의 배움에 특정한 초점이 있다면, 이것은 매우 명백해진다. 당신의 배움에 특정한 초점이 없다면, 구분하기가 어렵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기량과 인식과 능력에 대해 터무니없는 선언을 한다. 그리고 기량이 더 뛰어난 다른 이들은 종종 자기 능력을 부정한다. 따라서 매우 혼란스러워지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 엄청나게 많다. 그런데 운동선수나 음악가, 과학자, 엔지니어, 의사가 되는 것과 같은 특정한 어떤 것을 시도할 때, 당신은 단순히 정보를 얻으려고 돌아다니기만 하지는 않는다. 당신은 훈련과 준비에 전념한다. 당신이 여기에 특정한 초점을 두므로, 당신은 이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은 이러한 형태의 봉사나 공헌을 이행하는 데 필요한 기술, 경험, 이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당신이 학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 당신에게는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라. 이 모든 것은 명백하므로 당신은 이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은 앎길을 배우는 데에도 해당한다. 앎길을 배우는 것은 의사나 엔지니어나 운동선수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왜 그러는가? 왜냐하면 이것은 개인적으로 더 도전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많은 변화와 재평가가 필요하다. 앎길을 배우는 것은 단순히 자신에게 어떤 것을 추가하기보다는 삶에 대한 자기 관점 전체를 바꿀 것이다. 여기에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활동들도 실제로 매우 특별할 수 있으므로, 나는 다른 활동들을 폄하하지 않는다. 하지만 앎길은 더 크며, 심지어 마음은 더 열고 가정은 더 적게 한 상태에서 더 집중하는 학생의 자질이 필요하다.
앎길은 결과가 어떻게 될지 당신이 확신하지 못하므로 더 어렵다. 의대에 진학하여, 시험에 합격할 수 있으면, 의사가 된다는 것을 당신은 안다. 음악가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끈기 있게 노력해 시험에 통과한다면, 적어도 자신의 기량이 능숙해질 것임을 당신은 안다. 하지만 앎길을 따르면, 당신이 어떤 모습이 될지 확신하지 못한다. 당연히 당신은 경력을 쌓지 못할 것이고, 앎의 전문가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여기서 더 큰 불확실성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하므로 더 어렵다. 부, 명성, 인정, 성취를 통해 동기를 부여받기보다는 당신 내면 깊은 곳에서 이것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어떤 것을 통해 동기를 부여받아야 한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에 무엇이 필요한지, 당신이 어떤 이점을 얻을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간다.
앎의 학생이 된다는 것은 매우 집중하는 학생이 된다는 뜻이다. 당신은 지도가 필요할 것이다. 당신은 혼자서 앎길을 배울 수 없다. 세미나에 가거나 책을 읽거나 절충하는 방식으로 앎길을 배울 수 없다. 이렇게 하면 당신은 계속 바깥에 머물게 되고, 거기서 안뜰로 들어갈 수 없다. 이렇게 하면 당신은 계속 관찰자로 남아 있게 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준비하고 성취한 온갖 사례를 수집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다양한 종교에서 어떻게 더 큰 이해를 얻었는지 연구하는 학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직접 그 길을 여행할 수 없다면, 그저 관중석에서 깃발을 흔드는 팬, 관심은 있으나 기꺼이 직접 여행하려고 하지 않는 자가 될 뿐이다.
앎의 학생이 되는 것은 신비의 학생이 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준비가 신비롭다는 뜻은 아니다. 준비의 대부분은 매우 구체적이다. 여기서 당신은 일관성 있고, 균형 잡히고, 실용적이고, 책임감 있고, 매우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매우 현실적인 형태의 개발이 필요하다. 당신은 몽상가가 되어 앎길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실 앞으로 나아갈 때 당신의 꿈 대부분은 쓸모가 없고, 심지어 불필요한 것으로 판명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자신의 더 큰 원천과 동기로 삼아서 의지해야 할 것인가? 삶의 굴곡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 앎길을 따를 수는 없다. 앎길은 당신이 그 굴곡을 직면하여 맞서고 이해하도록 바꿀 것이다. 당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앎길을 따를 수는 없다. 이상의 대부분은 당신을 가로막는 진짜 장애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망이 있을 것이므로 더 강한 동기부여가 있어야 한다. 당신은 삶에서 원하는 것을 가지려고 애쓰기보다는 자신이 아는 것을 따를 수 있고,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을 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당신에게 더 큰 의미가 제공될 것이고,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더 큰 의미도 볼 것이다. 이때 자비심이 필요하다. 당신은 엄청난 혼란의 시기를 겪을 것이고 어느 시점에서는 실망을 겪을 것이므로 자신에게 접근할 때 자비심이 필요할 것이다.
자신의 동기와 현재 이해를 재평가하는 법을 배우면서, 당신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이 한계를 알아보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지적받고 싶어 하지 않으며, 이러한 지적을 자신의 자부심과 성취감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긴다. 그렇지만 진정한 배움에는 당신이 있는 곳을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처음에 당신이 있는 곳은 배우고는 싶지만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초보자가 되는 것이다. 당신이 아는 다른 형태의 교육에서는 이것이 매우 분명하지만, 신비를 배우는 데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어렵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책에서 읽은 모든 것과 작은 경험들을 모두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아, 맞아. 나 이거 알아!”, “아, 맞아. 나 저거 알아!”, “아, 나 이 교사에 대해 읽었어.”, “나 이 학파에 대해 알아.” 그들은 초보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초보자임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므로 심지어 초보자도 될 수 없다.
초보자가 되라. 앎의 학생이 될 뿐만 아니라, 초보자가 되라. 이때 당신에게 배움에 대한 가장 큰 동기와 기회가 생기고 학습 능력이 생긴다. 이때 당신은 지도받을 수 있고, 자화자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다. 왜냐하면 사실 당신의 자부심은 지혜와 앎의 현존에 비하면 하찮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앎길에서 학생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며, 아무 의심없이 대부분 받아들인 온갖 가정에 자기 삶의 기반을 둔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가정한 것을 대부분 알지도 못한다. 그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을 따르고 이런저런 가정을 했을 뿐인데, 삶에서 왜 그렇게 불안하고 불확실하고 괴로웠는지, 또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은 변하는 상황과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왜 그렇게 쉽게 공격당했는지 궁금해하였다.
만약 자기 삶을 가정에 기반을 두고, 또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를 가정에 기반을 두면, 당신은 나약하고 취약하고 쉽게 공격당한다고 느낄 것이며, 방어적이고 원망하고 불확실하고 화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부정직하므로 부정직함을 두려워할 것이다. 이것은 기반이 없어서 생긴 결과이다. 앎의 학생이 되는 것은 진정한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다. 즉, 상상의 기반, 공상의 기반, 세상에서 자라면서 그저 우연히 알게 된 기반이 아니라, 당신이 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 기반은 자신이 아는 것의 진실을 의미하며, 세상에서 실제로 실연될 수 있다고 당신이 깨달은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실연되려면, 당신은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살펴보아야 하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삶에서 하지 말아야 할 온갖 것을 당신에게 가르친다. 왜 그들을 비난하는가? 그들은 당신의 교육에 필요한 부분이며, 당신에게 시간을 절약해 준다. 왜 그들을 비난하는가? 당신이 그들을 비판이나 비난 없이 볼 수 있다면, 자기를 해치는 온갖 형태, 온갖 환상의 표현, 온갖 맹목적인 가정을 그들이 실연하여 당신에게 보여준다. 비판이나 비난은 쉽다. 비판과 비난은 자부심을 지키고 자신이 가정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감사와 자비와 이해로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지극히 근본적인 당신 교육의 이 일부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더 빨리 배울 수 있는데 왜 온갖 흔한 실수를 저지르면서 삶을 낭비하는가? 당신은 여전히 어떤 실수를 할 것이며, 여전히 어떤 것들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여전히 로맨스와 개인적 힘, 세상에서 미화되는 온갖 것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것들이 얼마나 속이 비어 있고 결핍되어 있는지 알 것이다.
자신의 동기와 가치관에만 의존하지 말라.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라. 당신은 그들과 매우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도 그들과 동일한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어쩌면 당신은 “아, 그런 일은 나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난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 놓이거나 같은 자극을 받으면, 아마 같은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모든 것을 겪는가? 왜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실연하는 것을 재연하는가? 그러나 당신은 판단 없이 자비심으로 그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때만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다. 그들은 당신에게 도움을 주는 원천의 일부이지만, 당신이 진정한 학생의 입장을 취해야만 그들의 실연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학생의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좋고 저 사람은 나쁘고, 이 사람은 멍청하고 저 사람은 똑똑하다고 당신은 말할 것이다. 교육에 전념하지 않는 사람은 이런 가정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하는 것은 쉽고 자신을 만족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은 다른 접근 방식, 훨씬 더 현명한 접근 방식을 택할 것이다.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오직 이렇게 접근할 때만 중요하다. 비난하기는 쉽지만, 분별하기는 어렵다. 구분 짓기는 쉽지만, 어떤 것을 설명하지 않은 채로 남겨두기는 훨씬 어렵다. 자기 의견을 주장하기는 쉽지만, 그 의견을 바꾸기는 훨씬 어렵다.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쉬운 것을 선택하고, 배우고 싶은 사람은 그것이 쉽든 어렵든 옳은 것을 선택한다.
앎이 인도하지 않는 당신의 모든 성향에 대한 결과를 세상이 당신에게 가르쳐주는데, 어떻게 세상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해치는 극단적인 표현을 할 때조차, 당신에게 가르친다. 이것은 자비심과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그들이 당신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관념을 믿거나 어떤 강박 충동을 따르거나 어떤 도피 형태를 추구하거나 어떤 관심사에 빠지려고 하는 등 다르게 선택한 결과를 당신에게 보여준다. 당신이 그들을 관찰할 수 있다면, 그들은 당신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어떤 직업에 종사할 때, 어떤 역할을 맡을 때, 어떤 일을 할 때, 어떤 관계를 맺을 때, 어떻게 될지를 가르쳐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삶에서 실연되는 수많은 것에서 배울 수 있다면, 당신의 비전과 자아 관념이 세련될 것이고,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때때로 당신은 불쾌감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대응하겠지만, 이것은 반드시 당신이 그들을 비난한다는 뜻은 아니며, 앎의 수준에서 보면 당신이 그 상황에서 물러날 것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이것은 당신이 모든 것에 대해 사랑하고 기뻐하고,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며, 당신이 대응은 하되 판단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당신이 관찰하는 어떤 사람을 비난하지 않아도 당신은 매우 위험하거나 해롭다는 것을 알므로 어떤 것에서 물러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어떤 사람들을 찬양하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아도 그들에게 다가가는 자연스러운 성향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당신이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운 끌림과 저항을 나타낸다. 이것을 통해 당신은 앎이라는 본능적 감각을 얻는다. 여기에는 어떤 판단이나 비난도 필요 없다. 이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예’나 ‘아니요’이다. 옳고 그름은 어떤 것의 현실을 경험할 수 없을 때나 자신의 대응을 정당화해야 한다고 느낄 때 하는 말이다. 정당화하기보다는 그냥 대응하라. 반응하지 말라. 어떤 것을 향해서는 나아가고 싶고, 어떤 것에서는 멀어지고 싶을 것이다. 다른 많은 것에는 그냥 중립을 느낄 것이다. 뒤로 물러서서 이 대응을 느껴 보는 것은 다른 사람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길을 찾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통해 당신은 앎이 어떤 것인지 경험할 수 있다.
자신에게 이 자유를 주라. 관찰하고 객관적이 되면, 당신은 자신의 더 깊은 성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당신은 이 성향이 무엇을 의미하고,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지 등 이 성향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방향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당신이 목적이 있어서 이곳에 왔고 어떤 것에 도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삶을 직시하면, 당신은 삶과 결합을 통해 자신의 성향과 방향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길가에 서서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당신에게 방향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떤 방향으로 가려면 당신은 움직여야 한다. 길가에 멈추어 있으면,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데, 어떻게 방향을 느낄 수 있겠는가? 당신은 일어나서 무언가를 하고 어딘가로 가서 삶과 결합해야 한다.
어쩌면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므로 어리석고 멍청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앎에 다가가서 자신이 진정한 학생임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경험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때 당신은 자부심을 누그러뜨리고, 진정으로 마음을 점점 열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것이 되려고 하거나, 어떤 것을 하려고 하거나 가지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전반적인 초점이라면,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당신이 무엇이 되고,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가져야 한다는 자기 생각과 이미지에 얼마나 들어맞는지에 따라 평가될 것이다.
분별력은 객관성이 필요하다. 객관성은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열린 마음은 획득보다는 배움에 초점을 맞추는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여기서 당신은 단순히 세상을 이용하려고 하기보다는 세상을 마주한다. 이때 당신에게는 지도가 필요할 것이며, 당신은 인지해야 하고, 잘못의 실연에서 이득을 얻어야 할 것이다.
당신에게는 몇몇 중요한 동행자들도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사람들에게 두는 가치를 바꿔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멋지고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흥미롭고 특이한 것들은 당신이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들은 당신이 이전에 사람들에게 가진 관심사이며, 당신 끌림에 기반이 된 기준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더 깊은 대응을 기다려야 할 것이고,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들을 평가해야 할 것이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고 그들의 성향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심지어 영적 공명을 느끼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도, 당신은 그들이 당신과 함께 참여할 수 있는지, 충분히 양립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여기에는 객관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그들을 비난하거나 찬양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 당신은 그저 알 필요가 있다. 자신이 삶에서 어딘가로 가고 있고, 그들도 갈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여기서 잠재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누군가는 실제로 당신과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기꺼이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과 함께하기를 바라며 갱생을 시도하는 것은 헛수고이다. 그들은 당신의 설득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방향을 따라가야 한다. 그들이 가야 하는 까닭은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지, 당신과 함께 있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다.
앎을 통해 모든 것을 배우는 것처럼, 재평가의 큰 과정이 있고, 새로운 접근 방식이 개발된다. 이것은 모든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학생은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배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신이 무엇을 배울지,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거창한 기대와 온갖 가정을 가지고 처음에 학생이 된다. 이것의 대부분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새로운 기량을 습득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마음 상태도 다르게 가져야 한다.
앎의 학생이 되는 것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당신은 앎의 학생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다를 것이다. 따라서 당신 자존감의 기반을 자신의 가정이 옳은지에 두려고 하지 말라. 오히려 마음을 열고 자신이 배워야 할 것, 해야 할 것, 재평가해야 할 것이 자신에게 드러나도록 진실을 구하라. 이렇게 하면 당신은 진정한 방향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맺은 관계에 의미 있는 기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학생이 되려면, 지금 당장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갖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나는 앎을 공부하고 싶지만, 꼭 결혼하고 싶고, 동반자를 갖고 싶다. 그리고 재정적으로 안정되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이 학생임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혼자 가든 함께 가든 이 여행을 계속하며, 당신 재정의 원천이 어디에 있든 받아들인다. 당신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시작한다. 요구 사항과 필요한 것을 추가하면, 스스로 멈출 것이다.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재정적으로 안정되어 있든 아니든, 앞으로 나아가야 하므로, 앞으로 나아간다. 사람들 대부분은 이것들을 원하지만, 당신은 이것들이 당신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모른 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자기 존중을 실연하는 것이고, 당신에게 진정한 온전함을 주며, 당신의 학습 능력을 열어 준다. 만약 내가 이 주제에서 제시한 많은 것에 당신이 귀 기울이고 숙고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전념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지혜를 배우고 앎을 회복하는 데만 전념하라. 그리하면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당신에게 제공될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모두 반드시 제공된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제공될 것이다. 이것은 행복과 성취의 기반이다.
세상을 둘러보라. 어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 어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사람들은 행복과 만족이 순간적이고 덧없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끊임없는 불만과 혼란에 빠져 있다. 여기서 승자와 패자 어느 쪽도 삶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리 다르지 않다. 돈을 벌고, 관계를 맺고, 지위를 얻고, 즐거움을 얻는 데 전념하는 사람들은 아주 형편없는 투자를 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당신은 그들을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당신이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특성을 실연하는가? 그들은 영감을 주는 삶, 공헌에 기반을 둔 삶을 실연하는가? 그들은 자신의 선물을 공헌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가?
그들을 비난하지 말고, 관찰하라. 그들은 실망 속에서 산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많은 투자를 했으므로 중단하기 어려우며, 여전히 다음번 경험이나 획득에서는 어떻게든 실망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자신이 가치 없는 것에 헌신한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앎의 학생들은 안팎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관찰한다. 그들은 이것이 필요하므로 이것을 배운다. 그들은 더 깊은 방향을 찾고, 이 방향이 드러나기를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한다. 사실, 성장에 가장 중요한 것은 종종 바로 그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관찰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관찰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사물을 인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것은 당신의 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내가 이 주제에서 말하는 것 대부분은 실제로 당신의 이해를 넘어선다. 내가 하는 말을 단순히 이해하려고만 하지 말라. 그리하면 당신이 이해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또 이해할 수 없다면, 내 말을 무시하거나 비난하거나, 자신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지구가 큰 공동체에 출현한다고 말할 때, 내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이해할 것을 당신에게 요청하지 않는다. 내가 불화 세력과 선한 세력을 말할 때, 또 앎길, 즉 분별력⋅신중함⋅용기⋅자비 등을 기르는 것을 말할 때, 내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이해할 것을 당신에게 요청하지 않는다. 당신이 현재 있는 곳을 고려할 때, 당신은 이것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을 받아들이라. 그러면 당신은 자신의 배움에서 진정한 출발점을 갖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이해할 것을 요청하지 않으며, 배울 것을 요청한다. 학생이 되라. 만약 세상과 당신 자신에게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으로 배우고 싶다면, 만약 누가 당신을 이곳에 보냈고, 당신이 주기 위해 받은 것을 알아내고 싶다면, 만약 자신의 본성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고, 그 본성과 함께 현명하고 효과적으로 일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면, 학생이 되라. 나는 일련의 더 큰 지혜와 더 큰 도전을 제공한다. 관찰자나 비평가나 취미 삼아 하는 사람은 여기에서 이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삶에서 자신이 학생임을 받아들이고, 계속 이 입장을 취하고 유지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명백해지는 마음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내가 보는 것을 보고 내가 아는 것을 알려면, 당신에게 내가 보는 전망점이 있어야 하고, 내가 습득한 마음의 명료함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당신은 학생이 되어야 한다. 심지어 나도 학생이다. 여기서 마스터의 경지는 상대적이다. 심지어 마스터들도 더 큰 마스터의 경지에서는 학생이다.
학생이 되면, 당신은 배울 것이고, 알 것이고,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 말고는 어떤 것으로도 당신을 참된 발견의 영역에 이르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기회는 당신의 것이고, 당신은 이제 기회를 받아들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