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received by
Marshall Vian Summers
on 4월 18, 1992

1992년 04월 18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지혜롭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당신은 다른 사람의 지혜를 어떻게 알아보는가? 지혜로운 마음 상태가 되어 그 지혜를 쓸 준비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사람들에게는 지혜와 관련된 많은 이미지가 있다. 지혜는 종종 금욕주의, 자기희생, 외로움, 고통, 신비 등 다른 사람들의 불가사의한 특성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종종 지혜를 아주 대단히 존중하지만, 자신과는 꽤 거리가 먼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지혜를 궁극적인 마음 상태로 여기고 접근하거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인 깨달음으로 여기고 접근하지 말도록 하자. 마치 깨달음이라는 이 큰 문턱에 도달하여 완전하고 충만한 상태에 이르면 그다음은 모든 것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자. 깨달음은 전반적인 삶의 진화에서 당신이 서 있는 곳에 따라 상대적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배움에는 매우 큰 문턱들이 있으며, 삶의 현실을 배우는 데도 큰 문턱들이 있다. 문턱은 하나가 아니라 많다. 그러므로 지혜를 궁극적인 성취로 생각하지 말고, 당신이 나아가면서 기르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자.

그러므로 당신은 어쩌면 그저 몇 차례뿐일지도 모르지만, 오늘 지혜로울 수 있다. 어쩌면 그저 몇 차례뿐일지도 모르지만, 내일도 지혜로울 수 있다. 이것은 꽤 효과가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저 몇 차례만 지혜롭더라도 괜찮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훌륭하다! 이것은 큰 성취이다. 만약 오늘 당신이 몇 차례 지혜롭다면, 어쩌면 내일 지혜를 선택해서 몇 차례 더 지혜로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혜는 경험을 기반으로 쌓인다. 당신은 이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이 경험이 평상시 마음 상태와 얼마나 다른지 알려면, 이 경험을 해야 한다. 비록 지혜가 통찰과는 다르더라도 같은 방식으로 여겨져야 한다. 오늘이나 내일 당신이 진정한 통찰의 순간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한순간이다. 매 순간 통찰을 경험할 것으로 기대하지 말라.

통찰과 지혜의 차이점은, 통찰을 통해 당신은 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것의 신비를 꿰뚫어 보고, 매우 순간적이지만 그것을 의미 있게 이해한다. 지혜는 삶에 대한 접근 방식을 더 많이 다룬다. 지혜는 당신이 얻을 수도 있는 어떤 정보나 또는 특정 상황에서 끌어낼 수도 있는 어떤 이해라고 하기보다는 마음 상태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지혜를 당신보다 훨씬 높은 곳에 둠으로써 또는 큰 희생과 초인적 의지로 대단히 높은 위치에 도달한 극소수 사람에게만 해당한다고 예단함으로써 지혜를 제쳐두지 말라. 이것은 건전한 접근 방식이 아니다. 당신도 지혜를 얻을 수 있다. 큰 마음인 앎이 당신 내면에 살고 있으므로 당신도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앎과 함께 있는 것이 지혜이다. 앎과 함께 있지 않는 것은 지혜 없이 사는 것이다. 앎과 함께 있을 때와 함께 있지 않을 때는 삶을 매우 다르게 경험하고 바라본다. 이 둘은 매우 다른 인식을 낳는다. 현자가 지혜를 경험하는 동안은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르게 세상을 본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단지 몇 번만 지혜롭다. 어떤 사람들은 더 자주 지혜롭다. 여전히 소수만 지속적으로 지혜롭다.

그러므로 질문은 당신이 지혜롭기를 원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대부분은 “맞아, 지혜로운 것은 멋질 거야.”라고 말하겠지만, 지혜와 연관될 수도 있는 모든 것을 숙고하면서, 큰 두려움과 의심으로 “맞아.”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질문은 당신이 얼마나 자주 지혜롭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더 유용하고 실질적인 질문이다. 당신의 대답은 당신이 지혜를 어떻게 보는지, 또 지혜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것으로 생각하는지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지혜를 금욕주의와 관련하여 생각하므로, 자신이 대단히 몰두하는 온갖 작은 즐거움을 지혜가 모두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세상에서 박해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런 일련의 위험한 만남으로 지혜가 자신을 이끌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다지 행복한 결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도 사람들은 “오늘은 아니고, 나중에.”라고 말할 것이다.

지혜를 배우려면, 지혜를 아주 조금씩이라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신은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저 “물론, 나는 지혜를 원해!”라고 말만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정말로 지혜를 원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 한, 지혜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지혜를 경험하여 지혜가 은혜롭고 복원하는 것임을 알았을 때, 당신은 지혜를 소중히 여길 것이다. 사실 큰 공동체 앎길 공부를 꾸준히 하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당신에게 주는 것은 오직 지혜뿐이라는 것을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될 것이다. 오직 지혜만이 진짜 확실성, 진정한 자존감, 사랑하는 능력을 줄 것이다. 당신이 혼신을 다해 삶을 사는 데 필요하고, 당신의 가치가 강조되고 다른 이들의 가치도 강조되는 방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데 필요한 지략과 접근 방식을 오직 지혜만이 제공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에 대해 말해 보겠다. 당신은 지혜를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신 능력 밖에 있지 않다. 내가 지혜는 앎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말할 때 내가 뜻하는 것은, 지혜는 영적 현존과 함께 머무는 것이고, 영적 현존이 삶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을 공유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혜를 두려워하거나 지혜에 대해 양가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것이 자신을 변화시킬까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변화를 원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지혜와 함께 있을 때, 당신은 삶에서 더 큰 규모의 어떤 것을 인식한다. 당신은 마치 전류처럼 인류를 관통하여 흐르는 그 진실의 불꽃을 기다리고 있으며, 진실이 당신을 통해 흐를 수 있도록, 당신이 진실을 흐르게 하고 진실을 표현하는 단자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을 연다.

지혜를 경험하는 것은 세상에서 당신이 자신을 위해 얻으려고 하는 어떤 즐거움도 훨씬 뛰어넘는다. 지혜를 경험하는 것은 당신에게 통상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필요 없게 하고, 희열이 넘치게 하며, 강력한 전기처럼 활력을 준다. 그리고 깊이 안으로 파고들고, 두려움을 몰아내며, 정상적인 사고에 스며 있는 양가성 너머로 당신을 데려간다. 지혜를 경험하는 것은 비록 순간적이더라도 뚜렷한 대조를 만들어 내므로 실제로 삶을 바꾼다. 당신은 이제 무엇이 가능한지 안다. 이 경험은 할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은 이 경험으로 돌아올 것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지혜를 경험하며, 이 경험은 매우 다르다. 이 경험은 뚜렷한 대조를 만들어 내고, 사람들이 이 경험을 피하고 싶어 하는 그런 사안과 문제들을 낳는다. 사람들은 “글쎄, 그것은 훌륭한 경험이었지만, 그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아.”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돌아오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고, 그들이 다른 일에서 찾는 모든 것이 이 마음 상태에서 달성되거나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의 경험은 심오하다. 하지만 이 경험이 엄청난 대조를 만들어 내므로 혼란스러울 수 있다. 이때 당신은 자신이었다고 생각한 것이 어쩌면 진짜 자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이 세상이라고 생각한 것이 어쩌면 실제 세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것은 엄청난 재평가를 요구한다. 사람들은 종종 이 재평가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것은 너무 불편하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현재 가정과 관념과 믿음이 차라리 안전할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여기로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큰 문이 살짝 열리면, 당신은 문을 더 열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니 당신은 돌아올 것이다. 큰 문을 조금 더 열도록 당신을 다시 데려오는 것은 마음의 근심이라기보다는 바로 가슴의 갈망이다. 당신은 보아야 하고, 알아야 하며, 확실해야 하고, 포함되어 있음을 느껴야 한다. 당신에게는 목적·의미⋅방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통해 당신은 앎으로 다시 돌아가고 지혜의 경험으로 다시 돌아가며,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앎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의 경험이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정말 대단해서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할 수밖에 없다. 말로 어떤 정의를 내려도 그것을 담을 수 없으며, 어떤 말로 표현하더라도 너무 고결해 보여서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좋은 것은 없을 거야. 그렇게 멋진 것은 없을 거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좋고 멋지다. 지혜를 경험할 때, 당신은 엄청난 전기나 전류가 흐를 수 있는 빈 관과 같다. 그러므로 마음은 복잡한 것들로 채워져 있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비어 있는 상태가 된다. 여기서 당신은 자기 주변을 더 면밀히 관찰하게 되고 인식하게 된다. 왜냐하면 마음은 자신의 욕구와 혼란에 휘말리기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하는 것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때 큰 잠재력이 있다. 왜냐하면 당신 마음은 완전히 집중할 수 있으며, 자연스럽게 이렇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당신은 현재로 들어간다. 왜냐하면 당신은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 살거나, 과거를 조화롭게 하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는 조화롭게 될 수 없다.

당신이 현재에 있고 당신 마음이 완전히 집중되어 있으면, 당신은 엄청난 통찰력을 얻을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사물의 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여기서 당신은 답을 찾기보다는 경험을 구한다. 여기서 당신은 진정한 고요를 연습할 수 있으며, 고요히 있을 때 마음은 집중한다. 그리고 집중은 마음의 자연스러운 기능 중 하나이므로 마음은 집중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참여자이자 관찰자로서 각각의 상황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당신이 이 상태를 이전에 안 것처럼 영원성을 느끼겠지만, 이것은 아주 오래되었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자기를 규정할 필요성을 포기할 수 있으면, 당신은 매우 집중된 방식으로 삶의 거대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상태에서 어쩌면 당신은 통찰력을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경험 자체가 중요하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마음속에 떠오른 것보다는 그 경험을 어떻게 느꼈는지의 관점에서 나중에 그 경험을 회상할 것이다.

그저 직관적인 충동을 느끼거나 통찰을 얻는다고 해서 당신이 지혜를 경험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이다. 지혜는 특정한 마음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때 통찰이 필요하면 당신에게 떠오를 것이다. 필요하지 않으면, 통찰은 없을 것이다.

이 마음 상태에서는 어떤 것을 얻고, 어떤 것을 소유하고, 어떤 것을 이해하려는 끊임없는 시도에서 벗어나는 안도감이 있다. 두려움과 불안을 상쇄하려고 애쓰는 이 시도는 사람들의 평상시 마음 상태에 있는 만성 질환이다. 당신은 여기에서 안도감을 얻으며, 이 안도감은 엄청나다. 비록 당신이 지혜를 경험하는 것이 잠깐에 불과하더라도, 안도감은 잊지 못할 경험이 될 만큼 매우 클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질문을 하지 않으며, 질문할 필요도 없다. 앎이 마음에서 일어나면, 모든 질문이 그치고, 앎이 마음에서 사라지거나 마음에 의해 가려지면, 온갖 질문이 생긴다.

지혜를 경험하는 것은 이 모든 주제에서 내가 말한 모든 것에 대한 진정한 통찰을 얻는 데 당신에게 필요하다. 내가 전에 말했듯이, 당신은 평상시 마음 상태로는 이런 것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말한 많은 것이 합리적이고 의미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더 큰 이해는 더 큰 인식과 더 큰 역량에서 나와야 한다. 순간적이거나 단편적인 경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지혜는 그저 주기적으로만 당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물론 많은 사람이 지혜를 그런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들이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정신은 맑고 그냥 현존하기만 하면, 이때 소리가 들리고, 매우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경험한다. 이것이 바로 지혜이다. 그런 다음 지혜가 스쳐 지나가거나 그들이 지혜를 떨쳐버리고 계속 가면서 “오늘 아침은 정말 멋진 순간이었어. 기분이 너무 좋았어.”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이 왜 그런 경험을 했는지, 왜 그 경험이 왔는지, 왜 그 경험이 다시 올 수 없는지 모른다.

때때로 사람들은 지혜를 아주 깊이 경험하고 나서, 그 경험을 다시 하려고 같은 장소로 돌아가 같은 것을 하기도 하고, 같은 대화를 하거나 같은 자극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경험을 다시 할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은 명상을 하면서 이런 순간을 경험할 수도 있으므로, 매우 열심히 다시 연습하지만, 그 경험을 다시 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 순간들이 그저 당신에게 갑자기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무언가가 당신을 자극한다. 그 경험은 평범한 것이 아니다. 그 경험은 당신이 머문 아름다운 곳에서 얻은 것도 아니고, 당신이 먹은 놀라운 것에서 온 것도 아니며, 당신과 함께한 매력적인 사람에게서 온 것도 아니다. 그 경험은 다른 자극이다. 그 경험은 당신의 앎을 자극하는 다른 이의 앎이다. 어쩌면 그 상대는 물질계 삶에 있는 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영적 현존일 수도 있는가? 지구 반대편에서 그 상태에 들어간 사람일 수도 있는데, 당신도 그 사람과 함께 그 상태에 들어갔는가? 당신은 어떻게 이 영향을 설명할 수 있는가? 또 어떻게 이 영향을 재현할 수 있는가? 당신은 할 수 없다. 마음이 어떻게 마음에 영향을 주는지는 큰 신비이다. 더 미묘한 형태로 나타나는 정신 환경의 자극은 깊이 스며들고 매우 복잡해서 세상에 있는 누구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정신 환경을 마치 무수히 많은 방향으로 전기가 흐르는 고전압장과 같다고 생각해 보라. 그것은 임의적이고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삶의 자연스럽고 중요한 패턴을 따른다. 또는 정신 환경을 거대한 전자 회로 기판으로 생각해 보라. 이 전자 회로 기판을 통해 전기는 미리 설정된 방식으로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흐르지만, 관찰자에게는 이 전자 회로 기판이 혼란스러워 보일 것이다.

지혜를 온전히 경험하려면, 순간적이고 임의적인 경험만으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큰 문으로 돌아가서 자신을 위해 그 문이 조금 더 열리게 하고 싶을 것이다. 한꺼번에 열리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므로 한꺼번에 열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한 번에 약간의 틈만 열릴 것이다. 당신은 이 경험을 통해 자양분을 얻을 것이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항상 이 경험으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연습 방법과 준비 방법을 찾게 될 것이며, 이 방법들을 통해 이 경험에 대한 기회와 수용력을 길러서 서서히 자신의 현재 삶과 필요한 것들에 관련된 방식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조만간 당신은 연습해야 한다. 마치 취미로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 좌절감을 느끼기는 하지만 기쁨을 느끼는 순간도 갖게 되며, 그리하여 조만간 “정말로 이 악기 다루는 법을 배우고 싶다! 이 악기를 연주하고 싶지만, 아직 연주할 수 없어.”라고 자신에게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은 준비를 모색할 것이다. 그 사람이 영리하다면, 독학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지도를 받으려 할 것이고, 도움을 구할 것이며, 교정받고자 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삶의 큰 신비와 은혜에 이끌린다면, 당신 역시 조만간 진정한 준비를 모색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진정한 준비를 통해 지혜와 앎에 가장 잘 접근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통찰이 매우 정확하고 진실하다고 입증되더라도, 큰 통찰을 얻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고 내가 말한 것을 잊지 말라. 앎은 당신이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경험할 수 있든 없든, 당신을 통해 표현할 길이 있든 없든, 당신 내면에 산다. 앎은 거기에 있다. 앎은 당신이 왔다갔다해도 왔다갔다하지 않는다. 앎은 당신 눈이 멀거나 정신이 팔려도 사라지지 않는다. 지혜는 앎을 알아보는 법, 앎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궁극적으로 앎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혜이다.

준비는 매우 중요하다. 준비는 당신이 지혜가 있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고, 또 삶에서 지혜가 커질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앎의 인식과 표현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깨닫고 알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잘못 배운 것을 버리는 것은 배우는 것만큼 중요하다. 당신은 계속 당신을 사로잡고 자기 생각에 빠지게 하는 제약과 복잡성으로 엉킨 것을 풀고 싶은가? 당신은 이런 방식으로 그것을 푼다. 이런 식으로 내면에서 당신을 계속 꼼짝 못하게 하는 모든 것, 어떤 일관된 기준으로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에 직접적으로 관계를 계속 맺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풀거나 분리하기 시작한다.

지혜의 보상을 얻을 때, 당신은 본질적인 미덕을 배우며, 무엇이 다른 사람들 안에서 지혜를 막는지 인식하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과 효과적으로 일하고, 또 그들에게 공헌할 수 있고 그들의 공헌도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과 관계를 맺으려면, 당신은 이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때 당신의 인식이 바뀔 것이고, 당신의 이해도 바뀔 것이며, 당신의 능력이 드러날 것이다. 당신은 자기 행동을 조정하는 법과 의식적인 마음을 통제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당신은 통찰과 이해를 얻을 것이며, 여기에 이러한 자비심도 함께할 것이다. 준비는 당신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당신이 알게 될 것이므로 자비심이 생길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주말에 배우는 어떤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은 자비심이 생길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자비로워야 함을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신은 끊임없는 비평가, 즉 많은 것을 요구하고 짜증을 잘 내고 가혹하고 비판적인 비평가가 되기보다는 자신에게 훌륭한 교사, 신뢰할 수 있는 친구가 되는 법을 배운다. 당신이 인내, 끈기, 열린 마음, 수용, 앎으로 복귀와 같은 중요한 것들을 상기하는 법을 배우면서, 당신 내면에 있는 비평가는 결국 상주 조언자로 대체된다. 당신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지혜로운 조언자나 교사가 당신에게 알려주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알려주는 법을 배운다. 여기서 당신은 자제력, 관용, 자신에 대한 다정함 등 자비를 배울 것이다. 이것들은 필요한 자질들이다. 이 자질들을 통해 당신은 세상에 베풀 수 있으며, 자신과 의미 있고 함께 일할 수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준비가 이것을 해낸다. 조만간 당신은 자신의 의미⋅목적⋅방향의 근원을 찾고 싶어 할 것이므로 준비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앎으로 복귀할 것이다. 왜냐하면 본능에 따른 위대한 귀향처럼, 앎은 당신을 다시 끌어당길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점점 더 세상에서 즐기는 것들이 순간적이고 재미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 삶에는 당신을 끌어당기고 당신을 부르는 다른 어떤 것이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자연스럽다. 이것은 당신 내면에 있는 위대한 영적 출현이다. 영적 출현은 매우 서서히 점진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야 당신은 자기 역량 안에서 영적 출현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당신이 시간을 두고 자기 역량을 개발할 수 있도록 적절히 조정할 수 있다.

삶의 큰 문은 갑자기 열리지 않는다. 삶의 큰 문은 아주 매우 점진적으로 열린다. 왜 점진적으로 열리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지혜와 현자들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현자들이 배우고, 배운 것을 버리고, 평가하고, 재평가하고, 받아들이고, 감내하고, 베푸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숙고해 보라. 그들은 이곳의 배움에 대한 것을 안다. 그들은 배우는 법을 배웠으며, 이것이 그들 지혜의 일부이다. 따라서 지혜는 단지 앎과 함께 있는 것만이 아니다. 지혜는 앎의 매개체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앎과 함께 있고, 앎이 당신을 통해 표현되도록 하고, 앎의 고요 속에서 결합하고, 앎의 인식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훌륭한 교육이다. 이것이 바로 고등교육이라고 지혜롭게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에 이 교육을 매우 두려워하고 주저하면서 배운다. 심지어 자신이 그것을 배워야 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이 교육은 매우 이상하면서도 매우 훌륭해 보인다. 그들은 어쩌면 자신이 헌신한 것에 흥미를 잃을까 봐 두려워할지도 모르며, 가치나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일에 삶⋅시간⋅에너지⋅자원을 쏟아부으면서, 이전에 형편없고 무지하게 투자했음을 깨달을 때 당연히 일어날 것이 틀림없는 죄책감과 낭비의 느낌을 두려워한다. 이것은 직시하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신은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을 추구해야 하므로 직시할 것이다.

지혜와 앎의 추구는 멈추는 일이 없다. 세상에서의 이번 임무 여행에서 지혜와 앎의 추구를 완수하지 못하면, 당신은 분명히 다시 돌아올 것이다. 고향에 있는 영적 가족에게 돌아가면, 이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임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돌아가면, 당신은 “저 아래에서 나 자신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라고 자신에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돌아와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고 다시 한번 인간이라는 맥락 안에서 자기 회복 과정을 거칠 것이다. 인간이라는 큰 외피를 쓰지 않았다면, 이것은 매우 명확하게 이해되지만, 이 이해가 이곳에서 공헌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려면, 당신은 인간 경험을 하는 동안, 이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지혜는 물론 앎에 다가가는 것은 큰 교육이 된다. 이곳에서 하는 여행은 필수적인 것이다. 지혜는 단순히 삶이 주는 최후의 큰 보상이 아니다. 지혜는 일어나는 삶 그대로 삶과 함께하는 능력이고, 직접적이고 의미 있게 삶에 참여하는 능력이며, 이전에는 단지 생각이나 잠재력으로만 여기던, 당신이 내면에 지니고 있는 앎을 끌어내는 능력이다.

어떤 시점에 이르면, 지혜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매우 공식적인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앎으로 가는 계단을 연습하는 사람들은 지혜를 얻으려고 준비한다. 어쩌면 그들은 사랑, 부, 인정, 안전보장과 같은 다른 것들을 얻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준비 과정을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천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세상을 초월하여 세상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준비 과정이 실제로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앎길은 그들을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어쩌면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산은 앎이 그들을 데려가는 산과 같은 산일지도 모르지만, 그 길은 다른 쪽으로 나 있다. 그들은 “나는 우리가 이리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하지만, 그 준비 과정은 그들을 다른 방향으로 데려간다.

당신은 앎에 다가가는 것이 호기심이 아닌 필요성에서 나온 일련의 중대한 재평가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의 위치와 가정을 재평가하거나 재고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으므로 이러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당신이 이 재평가를 하도록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다. 당신은 단지 이렇게 해야 하는 위치에 도달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삶의 새로운 위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새로운 위치를 보고 느끼고 알 것이며, 당신 삶에서 그 위치가 드러날 것이다. 이것들은 지금 당장은 커 보일지라도, 작은 문턱들이다. 심지어 대격변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작은 문턱들이다. 비록 이것들이 작은 문턱이더라도, 당신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하고 매우 중요하다.

마음에 지배받기보다는 마음을 이끄는 법을 배우고, 정신 환경을 이용하는 법, 정신 자원을 이용하는 법, 단순히 물질 환경과 물질 자원에 빠지기보다는 그것들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준비의 어떤 측면은 상당히 이치에 맞지만, 어떤 측면은 매우 혼란스럽고 불가사의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고요를 강조하는 것에 대해 궁금해한다. 그들은 “나는 어떤 것을 해내려고 노력하고, 어떤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앎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어떤 것을 알아내려고 노력한다. 왜 고요를 다루지? 음, 좋아, 고요를 연습하겠다. 고요를 연습하면, 답을 얻겠지. 그렇지?”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당신은 고요를 얻는다. 사람들은 고요 그 자체가 보상임을 알지 못하며, 고요를 어리석고 수동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고요를 강조하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사람들에게 고요가 주는 유일한 가치는 아마도 고요히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얻고 소유하고 획득하는 것에 열중하며, 자신의 광기를 준비에 가져와 그 광기를 충족하고 그 광기가 요구하는 것들을 충족하려고 준비를 이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준비는 그 광기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광기에서 당신을 해방해 줄 것이다. 광기는 충족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이 광기이다.

실제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그리고 한동안은 학생들이 준비 자체와 상충한다. 어쩌면 그들은 준비가 멋지다고 생각하면서 따라가겠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정말로 궁금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종종 이 준비를 그만두고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들은 “이것으로는 어디에도 가지 못해.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나에게는 결과가 필요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준비를 포기하고 다른 것을 찾으러 간다. 여기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이나 삶이나 준비에 접근하는 방식, 이것은 모두 같은 방식인데, 이 방식이 준비 자체와 상충한다는 점이다.

준비는 광기의 치유책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광기의 치유책이며, 이 광기는 세상 모든 사람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니고 산다. 지혜를 갖고 싶은가? 당신은 광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당신은 광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기에 무엇이 필요한지, 광기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여기서 사람들은 금욕주의의 이미지를 갖는다. “광기를 버리는 것은 그릇 하나를 가지고 오두막에서 사는 것이다. 나는 절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래서 지혜를 추구하기보다는 그냥 지혜로운 사람 곁에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들에게서 답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이것은 터무니없다. 지혜가 지속적으로 당신과 함께 있는데, 당신은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전혀 모른다. 당신은 자신이 광기를 버려야 하는지에 대해 양가적이다. 당신은 여전히 광기가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광기에 참여한다. 광기는 떨쳐버릴 수 없는 질병처럼 물려받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들은 광기에 투자했고 계속해서 투자한다.

혼란스럽고 설명할 수 없고 어쩌면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는 앎의 준비 과정은 진정한 지혜를 기를 것이다. 왜냐하면 준비 과정은 앎이 무엇인지, 앎과 어떻게 함께 있을 수 있는지 가르쳐 줄 것이기 때문이다. 준비 과정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당신이 아는 것을 주려고 이곳에 왔다. 당신은 자신이 아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으므로, 이것은 시간을 두고 당신에게 입증되고 판명되어야 한다. 이것은 오랜 준비가 필요하다.

당신의 광기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원하고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을 원하기 때문에 생긴다. 이것은 세상의 광기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류를 계속 오랫동안 비참한 상태로 있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사는 고통의 일부는 죽음과 해악이 바로 현존하고 가능한 물질적 삶을 사는 데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고통 대부분은 마음에 있다. 이것이 바로 광기이다. 이 광기를 직시하면, 당신은 더 큰 질문을 하고 더 큰 위안을 구할 것이다. 위안을 구하는 것은 당신이 앎을 향하도록 동기 부여하는 것의 일부이다. 하지만 이것이 당신의 유일한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당신이 적어도 현재의 이해에 따라 앎이 소유하는 것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앎으로 도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앎이 당신을 다시 삶으로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앎은 변화와 노력이 필요하므로 당신은 앎에서 단지 편안함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앎에서 단지 확인만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이 확인받으려고 하는 것보다 당신 내면의 다른 어떤 것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앎은 휴일이 없다. 앎은 당신을 세상으로 데려와 세상에서 지혜롭게 사는 법을 당신에게 가르친다.

당신은 고요히 있는 법을 배운다. 고요하면 당신은 상황을 알 수 있고, 인식을 통해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며, 상황을 자기 것으로 완전히 흡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요하면 당신 마음은 현존하게 되어 유익한 것과 유익하지 않은 것을 인지할 수 있으며, 비난 없이 인지할 수 있다. 고요하면 당신은 평화를 누릴 자유를 얻지만, 행동할 수 있는 힘도 얻는다. 여기서 당신은 정신 자원과 에너지를 비축한다. 앎은 궁수와 같다. 화살을 놓는 순간이 되면, 화살이 진정한 힘과 방향을 얻도록 활을 당기는 데 힘을 쏟는 궁수와 같다.

그러므로 앎이 어떻게 일하는지 알면, 당신은 앎과 머물 수 있고, 세상에서 앎을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이다. 지혜는 산꼭대기에 있는 현자처럼 모든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어떤 답을 줄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없어 보이는 경험을 한다. 지혜가 있다고 해서 항상 행복하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실제로 세상의 고통을 매우 신랄하게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가 있으면, 당신은 항상 베푼다. 당신은 자신이 어떻게 베풀지 알지 못하지만, 베풂이 일어날 수 있는 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특정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며, 그 일을 하려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을 통해 어떻게 베풂이 이루어지는지는 신비이고 은혜로운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