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received by
Marshall Vian Summers
on 10월 30, 1987

1987년 10월 30일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우리는 영적 공동체를 말하고자 하며, 당신이 관계의 본질과 목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 공동체 개념을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공동체는 개인이 진정으로 성장하는 데 필수 기반이자 완전한 공헌을 위한 완벽한 환경이다. 공동체와 관련하여 많은 추측, 많은 판단과 관념이 있다. 세상은 진정한 공동체의 예가 거의 없다. 좋은 예를 찾을 수가 거의 없으므로, 많은 부적절한 것을 연상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공동체에 대해 건전한 개념을 갖기가 어렵다.

우리가 진정한 공동체를 결혼처럼 대하는 까닭은 진정한 공동체는 결혼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결혼하게 되면,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 결합만은 아니므로, 당신은 여기에서 “나는 당신에게 강하게 끌리고, 우리는 공통점이 많으니,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나도 당신과 함께 가겠다.”라고 말할 수 없다. 결혼은 그보다 훨씬 더 크다.

만약 순전히 개인적 끌림에만 기반을 두면, 그 결혼은 시들할 것이다. 결혼은 더 큰 것을 내주어야 하고 아이들이든 다른 구성원이든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결혼의 목적이고, 결혼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결혼이 성장할 수 있는 더 큰 맥락을 지니며, 이 공동체가 없었다면 당신을 지배할 수 있는 개인적 딜레마에서 당신은 벗어나는 길을 찾는다.

그러니 영적 공동체를 결혼처럼 생각해 보자. 왜냐하면 결혼은 인지와 진정한 참여와 헌신을 기반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결혼은 기반이 필요하다. 두 사람을 넘어 확장된 결혼으로서 공동체도 동일한 것들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참여할 수 있는 적절한 동기가 있어야 하고, 참여에 대한 이해와 참여를 위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확실히 이곳에서 성사되는 결혼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경우가 많으므로, 이런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내가 공동체를 말할 때, 결혼도 함께 생각하라. 왜냐하면 당신은 삶에서 어떤 것과 결혼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원대한 관점, 더 영적인 관점을 가지고 단순히 구경꾼이 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당신은 여전히 고립되어 있다. 그 고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당신의 곤경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삶에는 참여할 것들이 많다. 정치 운동, 사회 운동, 사교 클럽, 팬 클럽, 온갖 종류의 클럽 등이 많지만, 이것은 내가 말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체는 당신이 자신을 온전히 바칠 수 있는 환경, 자신의 마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는 환경이다. 자신의 마음에서 벗어나는 자유 말고 당신에게 무엇이 자유인가? 당신 자신의 마음 말고 무엇이 신에게서 당신을 분리하는가? 당신을 억압하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인데, 사실 그 마음은 당신의 종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리되려면 당신에게는 당신을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당신이 인지할 수 있는 세력도 필요하고, 보이지 않는 세력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곳의 당신 삶은 저승의 삶을 위한 준비이므로, 저승에서 온 세력이 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이 삶은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이다. 이 세상에 들어오기 위해 당신은 한 삶에서 나와 다른 삶에 태어났다. 당신은 이 삶을 통과하면, 또 다른 삶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이 행성에 방문하는 권리의 관점에서만 일생을 생각하지만, 당신은 삶에서 삶으로, 맥락에서 맥락으로 이동한다. 왜 미래가 이곳과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영적인 것들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어린 시절이 성인기를 위한 준비인 것처럼, 이 삶도 준비이다. 성인기는 당신의 영적 가족을 위한 준비이고, 영적 가족은 당신이 이 두 삶의 영역을 가르는 얇은 막을 통과하여 도착할 때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공동체를 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분리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완전히 자활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거창한 생각이며, 사람들에게는 큰 이상이다. “나는 아무도 필요 없어.”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은 나약하다는 표시가 아닌가? 그래서 개인적 성취는 세상에서 작은 신이 되려는 큰 추구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작은 신이 되는 것은 그들의 뜻도 아니고, 그들의 앎도 아니다. 당신이 자신의 앎을 이해하고 따르려면 자활해야 할 것이다. 확신하건대, 이것을 통해 당신이 원하는 모든 개인적 성장이 이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개인적 측면은 당신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성장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 측면은 더이상 지배적인 요소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여기 이 세상에 혼자 왔다. 당신은 영적 가족을 찾고 있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당신이 영적 가족에게서 왔고, 영적 가족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영적 가족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우니 여기에서도 찾는다. 그리고 당신은 이 세상에서 매우 어려운 학습 상황에 봉착한다. 왜냐하면 개체성과 공동체는 매우 이상한 연합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친교를 추구하지만, 오히려 더 개인이 될 수 있도록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추구한다. 그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 결합할수록, 당신은 덜 개인적이 되고, 그 관계에서 하는 역할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합류할 곳과 합류할 이들을 잘 분별해야 하지만, 성향은 여전히 그곳에도 있다. 만약 자기 생각 속에 산다면, 당신은 삶과 결합할 수 없으며,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이들이 필요하다. 당신은 자신의 앎을 불러낼 특정인들을 만나려고 이곳에 왔다. 당신은 삶에서 자신의 진정한 공헌을 발견하고 분별하여 충분히 성장할 수 있도록 이 특정인들을 만나며, 그리해야 그 공헌을 인지하여 세상에 내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의 시작이다.

진정한 공동체는 한 사람이 영적 현존을 매우 깊이 경험하므로 시작된다. 그 사람은 어떤 것에 부름을 받으며, 그 사람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이 그 사람을 부른다. 만약 그 사람이 이것에 마음을 열고 이것의 방향을 따를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이끌릴 것이고, 그들이 공동체의 씨앗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공동체이다. 공동체는 한 사람이 신에게 응답한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때 응답하는 사람은 순수하거나 고상하거나 모범적이지 않아도 된다. 응답하는 이들 중에는 매우 악명 높고 논란이 많은 아주 대단한 악당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은 때맞추어 정화될 필요가 있었다. 당신은 완벽한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

이것이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자연스럽다. 사람들이 문제에 봉착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공동체를 만들려고 할 때이다. “공동체를 만들자!” 세상은 이 공동체로 가득 차 있다. “삶에서 이런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우리는 모두 함께 뭉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은 내가 말하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체는 끌림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자신의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모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그들의 발전과 표현에 절대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이 큰 현존을 느끼는 사람이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 현존을 따르는 것이다. 따르는 능력이 이끄는 능력을 결정할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그 현존을 이용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고, 현존은 그 사람을 떠날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사람들이 자신을 따를 것으로 생각하면,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따르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있는 현존, 그 사람이 따르는 현존이다. 그것이 진정한 현존이다. 현존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현존은 보이지 않으므로 그곳에 없다고 당신이 항상 주장할 수 있지만, 현존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권한과 가장 큰 방향인 가장 큰 헌신을 만들어 낼 것이다. 현존은 무엇인가? 현존은 수증기와 같다. 아무도 현존을 붙잡아서 연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자연스러운 창조물이다. 공동체는 야망이나 철학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야망이나 철학은 헌신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망이나 철학으로 만들어진 공동체는 오직 복종하는 것으로만 결합할 수 있으며, 적대자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공동의 적이 있으므로 사회를 조직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러한 것을 자주 본다. 그것은 복종을 통한 참여이다. 그것은 앎을 내놓는 것이 아니다. 당신 앎은 당신 한 사람의 내면에서만 드러날 수는 없다. 앎은 관계의 맥락에서 드러나야 한다. 당신이 왜 여기 왔는지 당신 혼자 알아내는 것은 대단히 절망적이다. 당신이 명확히 밝힌 어떤 훌륭한 것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당신은 여전히 마음의 노예이다.

당신이 자신의 생각을 넘어서 마음을 열면, 당신을 부르고 끌어당기는 현존을 이해할 것이다. 현존은 당신이 이승에서 보거나 식별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더 강력하다는 것을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보다 더 강력하다. 세상이 그들에게 무엇을 내놓으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세상은 그들에게서 재산을 빼앗고 몸을 죽일 수는 있지만, 그들의 헤리티지를 빼앗을 수는 없다. 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체에 합류할 것이다. 왜냐하면 분리된 삶은 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앎을 기르면 앎이 당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관계를 당신에게 가져올 것이라고 우리가 말한다. 당신에게 정말로 필요하지 않은 이들은 여기서 아무런 목적도 찾지 못할 것이므로, 당신 삶은 부적절한 관계로 방해받고 제지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물론 부적절하게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 않은가? 모든 관계를 정당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매우 구미가 당기는 일이지만, 당신은 앎을 희생하고서 그렇게 한다. 어떤 것이 잘못되는 것을 막으려고 그것을 옳은 것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나쁘지 않게 하려고 좋게 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찾던 사람들과 진정으로 관계를 맺으면, 당신 내면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당신은 활력을 느낄 것이고, 당신이 전에 느낀 어느 것보다 더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집에 돌아온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다.

특정인들이 공동체의 씨앗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내면에서 공동체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몸은 더이상 한 존재를 위한 은신처가 아니며, 이제 만남의 장소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 몸은 한 사람의 성소가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한 성전이다. 우리는 이 공동체를 영적 가족이라고 한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가족은 본질적인 관계에 대해 당신이 이승에서 쓰는 가장 가까운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참된 공동체는 매우 작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앎의 공동체가 될 수 없다. 세상은 공동체에 합류해야 하지만, 앎은 이곳에서 선호되지 않으므로, 그 공동체는 앎의 공동체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앎에서 나온 결과는 사람들을 보살피므로 매우 절실히 필요하다.

여기 있는 보통 사람들은 앎에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인류가 거기까지 진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그리하면 당신은 그들을 다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사람들의 단체를 데려다가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만들어 주려고 하면, 당신은 결국 그들 중 절반을 죽일 것이다. 이것은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다.

신은 모든 사람이 지금 자기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함께 움직인다. 그렇지만 당신은 공헌의 불길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일이 행해져야 하고, 당신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당신을 도와줄 다른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 이 공헌의 불길은 세상을 정확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단지 야망의 측면에서만 모순될 뿐이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상황에 관계없이 자기 일을 할 것이고, 그들 삶이 끝날 때 세상이 전반적으로 더 나아지지 않더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그들은 모든 것을 주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데려가서 더 나아지지 않는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동체는 지극히 친밀하므로, 매우 작을 것이 틀림없지만, 사회라는 일반 공동체에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다. 불을 계속 타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작은 불씨들이다. 무엇이 세상에 앎을 계속 살아 있게 했는가? 인류가 한 종족으로서 진보할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숨어서 열심히 일하는 개인들의 작은 집단들 때문이다. 가끔은 공개적으로 드러내 실제로 보여주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씨를 계속 살아 있게 한 것이다.

신이 당신에게 청하여 밖으로 나가서 세상을 더 좋게 만들라고 할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렇지 않다. 당신 내면의 어떤 것이 당신을 따라잡을 것이다. 당신 마음보다 더 큰 어떤 것이 당신을 따라잡아 특정인들에게 당신을 이끌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특정 방식으로 베풀도록 이끌 것이고, 비록 당신이 베풀고 싶은 선(good)은 꼭 아니더라도 선이 세상에 베풀어질 것이다.

그것은 마치 결혼 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 결혼은 당신이 베풀어야 하는 것을 당신에게 알려주며, 보통은 당신이 개인적으로 좋은 것을 공헌하려고 계획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결혼은 당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환경, 당신을 당신 자신 밖으로 끌어내는 환경을 제공한다.

따라서 앎의 공동체는 작아야 하며, 그 자체의 내적 결집력에서 나온 매우 중요한 것을 인류에게 내준다. 그 친밀한 작은 집단 안에 있는 참여자들이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아는 일은 매우 드물다. 삶에서 내적 열림을 느낀 이가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 밝혀낼 수 있는가? 당신을 준비시킨 힘들을 터무니없는 추측 없이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매우 신비롭다.

우리는 신을 큰 끌어당김, 사람들을 끌고 당기는 힘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좋은 비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을 신의 본모습만큼 위대하고 신비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에 있는 신은 움직이는 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힘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그 힘의 속도에 맞추어 사람들을 나아가게 하며, 사람들 내면에 불을 붙이고,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사람들을 돌본다.

그렇지만 이 움직임을 느끼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매우 위험한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공동체가 앎의 공동체라면, 공동체 전체가 실수를 저지르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을 누군가는 정확하게 바라볼 것이며, 이것은 잘못에서 구성원들을 보호한다. 당신이 삶의 참된 방향을 느끼기 시작하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당신이 저지르는 잘못은 매우 중대하다. 당신에게는 반드시 일어날 자신의 잘못에 대응할 만큼 충분히 현명한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큰 계획은 잘못이 있을 것을 안다. 그래서 당신에게 제공되는 선물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제공된다. 우리는 열 명에게 어떤 선물을 주고, 그 선물이 두 명에게서 싹이 트고 자라기 시작하면, 우리는 잘한 것이다. 그러면 다른 여덟 명은 자신들의 삶을 살 수 있으며, 자신들이 실패했다는 끔찍한 느낌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당신은 공동체를 찾아야 하고, 그 공동체는 한 사람으로 구성된 공동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시작은 한 사람으로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더 큰 그룹에 합류해야 한다면, 당신 앎이 이것을 알려줄 것이다. 사실 공동체의 가치는 꼭 자기 방식이 아닐 수도 있는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개인의 발전에는 세 단계가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화내는 단계가 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그것에 대해 화내는 단계가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따르고 그것이 행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되는 단계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은 첫째 단계에 있으므로, 그들은 나머지 두 단계를 전혀 알아볼 수 없다. 둘째 단계에 있으면,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데 너무 전념하고, 또 그것을 자신에게서 빼앗는 사람에 대해 너무 방어적이어서, 다음에 오는 것을 알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어도 대단히 실망스럽다는 사실이 당신을 계속 앞으로 가게 하며, “나는 모른다”로 돌아가게 한다. “나는 모른다”고 할 때가 열리는 순간이다. 그때가 바로 내적으로 애쓰는 것을 잠시 멈추고, 당신과 함께 있는 현존을 느끼기 시작한다.

단언하건대, 이 일은 우주 모든 곳에서 진행된다. 내가 공동체를 말할 때, 나는 지극히 우주적인 것을 말한다. 앎의 공동체가 물질 삶에 존재하려면, 매우 비밀스러워야 한다. 그 까닭은 앎과 무지는 공존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의미 있으려면, 그 공동체는 매우 순수해야 한다. 왜냐하면 참된 공동체에 이끌리는 사람은 모두 다른 계획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다른 계획에 대해 매우 냉철해야 한다. 그래야 당신은 큰 실망 없이 참여할 수 있다.

자신의 이상주의가 어떤 것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왜 삶에서 폭력적이 되겠는가? 앎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것을 취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주려고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이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세상이 많은 것을 내놓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당신은 병원에 가서 “자, 모두 일어서 주목하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는 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당신은 교사들이 당신에게 주는 방식을 보면 진정한 베풂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런 깊이와 힘과 은총이 있는 관계에 마음을 열면, 다른 사람들과 겪는 친밀도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 까닭은 그 관계가 더 친밀한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여전히 저기에 있고, 당신은 여전히 여기에 있다. 당신은 물러날 수 있다. 그러나 당신 교사들은 당신의 가장 신성한 성소인 당신 내면에서 당신에게 다가온다. 그들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뒷문으로 들어감으로써 당신 삶이 지극히 열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은총과 가르침 때문이다. 사람들이 곤경에 빠지는 것은 오직 신중하지 못하고 야심에 차 있을 때뿐이다

당신은 공동체와 앎을 찾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삶의 활력을 불어 넣어주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반드시 어떤 특정한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공동체를 움직이는 힘이다. 당신은 혼자 신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가? 그들은 자기 생각 속에 극도로 고립된다. 신은 결합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당신을 완전히 등록한다. 당신은 저승에 있는 더 큰 삶을 준비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결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이승을 떠나면 당신은 결합을 제공한 자신의 거주지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근본적이다.

그때는 당신을 괴롭히는 개인적 마음은 당신에게 없겠지만, 당신은 아직 끝마치지 않았다. 당신 단체는 완전히 진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신 단체는 다른 단체와 합류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단지 자기 개인의 성장이나 성취를 위해서만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당신은 자신의 단체를 위해 이곳에 왔고, 이 단체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 구성원 중 일부는 당신과 함께 이 세상에 있다. 당신은 이 세상 삶에서 어떻게 졸업하는가? 당신이 완벽하게 공헌을 마치면, 당신은 이곳에서 끝마치겠지만, 당신 단체 전체가 끝마칠 때까지는 이곳에 있을 것이다. 당신 단체 전체가 끝마치고 나면, 당신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으로 넘어갈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줄곧 단체 학습이고, 줄곧 공동체이다. 이승에서 영적 공동체는 단순히 영적 가족이 확장된 것 말고 무엇인가? 저승의 삶은 이곳에 반영되어야 하지만, 끝마치는 데는 아주 작은 맥락에서만 반영된다.

앎이 당신 내면에서 강해지면, 당신은 어떤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고, 다른 야망들은 사라질 것이다. 당신은 그 야망들을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제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 없을 만큼 아주 크고 매우 방대한 어떤 것의 구성 요소이지만, 그것이 당신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제 결혼에 대해 말하겠다. 나는 당신에게 이 제안을 하고 싶은데, 이것을 실제로 하는 것은 매우 힘들 것이다. “누구와도 결혼이 실현되게 하려고 하지 말라. 결혼이 당신에게 일어날 것이다.” 결혼하려는 마음에서 맥이 빠져야 한다.

당신은 우주에서 원인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 개인적 우주에서만 원인일 뿐이며, 개인적 우주는 우주가 아니다. 결혼이 당신에게 일어나게 하라. 마치 누군가가 당신을 뒤쫓아 결국 당신을 지치게 한 것처럼, 그래서 아마 당신이 멈추었기 때문에 결혼이 당신을 따라잡을 것이다. 이것은 세상 이치와 세상 움직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이 당신에게 오면,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 결혼은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엄청난 흥분의 도가니인 감정은 아닐 것이다. 당신은 결혼으로 멍해지지 않을 것이다. 결혼은 당신 마음을 진정시킬 것이다. 그것이 매우 특별한 어떤 것과의 결혼이다.

당신은 결혼을 찾을 필요가 없으며, 앎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앎이 당신 결혼을 당신에게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당신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지만,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신은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당신 앎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삶에는 다른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결혼이 자신에게 맞지 않아 그들은 자기 삶을 실망으로 몰아넣는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결혼하지 않으면, 나는 행복하지 않을 거야!” 만약 그들에게 결혼이 올 수 없다면 어떻겠는가?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실망만을 드러낼 수 있는 매우 어려운 학습 상황을 설정했다. 그러므로 결혼을 찾지 말라. 결혼은 일어날 것이다. 당신은 이끌릴 것이고, 결혼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참된 공동체에는 규칙과 제약과 제한사항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그들의 에너지를 건설적으로 함께 모으려면 이러한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질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구속하는 힘이 앎일 때이다. 이때 당신은 규칙을 환영한다. 왜냐하면 이 규칙은 당신이 더 효과적으로 공헌하도록 돕고, 일을 해내는 방법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만약 앎의 힘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집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규칙에 반응할 것이다.

영적 공동체는 사회와 상당히 구별된다. 이 둘을 혼동하지 말라.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생존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우 특별한 진보를 위한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영적 공동체가 필요하지 않다. 영적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는 당신 앎이 앎을 밖으로 꺼내려고 당신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앎은 임신하는 것처럼, 평생 임신하는 것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앎은 진통을 겪고 분만하고, 진통을 겪고 분만한다. 앎이 진통하면, 당신은 앎이 나올 수 있도록 열어야 한다. 이것은 때때로 어렵지만, 세상에 삶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