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shall Vian Summers
on 1월 22, 1988
1988년 01월 22일
미국 텍사스 댈러스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나는 당신에게 나와 함께 말할 한 구절을 가르쳐 주고자 한다. 그 구절은 “레이 내바”이다. 지금 나와 함께 말해 보자. “레이 내바”. 이 구절은 우리 주제에 적합한 기도이다. “레이 내바”는 적어도 개략적으로 “마음을 비우다”라는 뜻이 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일반적으로 이곳에서 교육으로 간주하는 것을 넘어서는 교육 수준을 다루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이성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 사이에 중심선이 있으므로, 이 말은 또한 “마음을 갈라놓는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개인적 마음의 두 측면을 연결하는 이음매가 있으며, 이음매는 벌어질 수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빛의 씨앗이다. 전구에서 당신이 보는 그런 빛이 아니라, 세상에 당신이 있는 것의 큰 표현인 현존의 씨앗이다.
나는 앎을 염원하는 당신의 소망을 자극하는 교육, 매우 도움이 될 것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하는 교육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교육을 세 단계로 말하겠다. 첫째 단계는 세상에서의 생존이고, 둘째 단계는 개인적 자아의 개발이며, 셋째 단계는 앎의 발견이다. “레이 내바”는 앎의 발견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당신들은 모두 첫날부터 계속 배웠다. 그러지 않았는가? 당신의 초년기 훈련은 주로 세상에서의 생존을 위한 것과 개인적 자아 개발을 위한 것이었다. 당신은 세상에서 살아남았다. 축하한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개인적 자아가 있다. 축하한다! 그런데 필요한 생존 훈련은 한없이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약간은 항상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생존 훈련은 자신이 수입을 얻고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데 필요한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생물학적 배경뿐만 아니라 사회적 배경 안에서도 산다. 당신은 육체적으로도 살아남아야 하고, 사회적으로도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하려면 당신은 자신의 개인적 자아를 개발해서 사람들과 효과적으로 소통하고 함께할 수 있어야 하며, 삶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일들을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일은 계속된다. 왜냐하면 삶에 더 큰 주안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 더 큰 주안점을 수용하려면 당신은 여전히 자신의 개인적 자아를 개발하고 길러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명을 수행할 역량을 갖출 때까지는 신이 와서 당신에게 삶의 큰 사명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그래서 내가 집중적으로 다룰 교육의 셋째 영역에 당신이 들어설 때, 당신의 생존 능력과 당신의 매개체인 마음과 몸을 개발하는 당신의 능력 또한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당신의 마음과 몸은 결코 희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이 진실을 아는 심오한 능력인 앎을 경험하는 능력을 기르면 기를수록, 당신은 더 강하고, 더 일관성이 있고, 더 방향성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고, 변하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더 배워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존 훈련이 끝나지는 않지만, 이제 주된 주안점은 아니다.
앎은 진실을 인식하고 진실과 공명하는 능력일 뿐만 아니라, 저승에서의 당신 삶에 대한 기억과 이곳에 온 이유도 담고 있다. 모든 사람은 공헌하기 위해, 또 공헌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세상에 왔다. 모든 사람은 세상을 더 많이 배우려고 세상에 왔다. 세상에 온 사람 중 소수가 세상을 졸업할 것이다. 이 말은 세상을 졸업하면 그들이 이곳에 다시는 돌아올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당신은 세상을 졸업하기 위해 마스터가 될 필요는 없다. 특히 마스터의 경지란 매우 상대적인 말이므로,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세상에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서 반드시 저승에서도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이제 당신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마스터의 경지를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험일 뿐만 아니라, 다가올 당신 삶과 저승의 삶을 위한 준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 교육의 대부분은 신비롭게 보일 것이다. 신비로 들어갈 수 있으면, 당신은 세상에서 당신을 더 효과적이게 하고 더 능력 있게 하고 더 행복하게 할 훨씬 더 폭넓은 참여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당신이 신비를 신비롭도록 허용하는 것은 신비를 숙고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아무리 잘 살아남고 개인 차원에서 아무리 능력이 있어 보여도, 당신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마치 배를 모는 법은 배웠지만, 자신이 언제 출발했고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과 같다. 그 부분은 신비이다. 당신의 출발지와 목적지에 대한 이론이나 철학은 현실과 분명 상당히 거리가 멀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규정할 필요가 없다. 규정하게 되면 당신은 생산적인 방식으로 지금 이곳에 있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셋째 단계의 교육은 앎의 발견이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의 출발지를 기억하고 돌아갈 곳을 예상하기 시작한다. 이는 당신이 세상을 얼른 떠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이곳에 있는 의미가 자신이 온 곳과 돌아갈 곳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당신이 어느 날 학교에 가서 80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한 번도 교실을 떠나지 않은 것과 같다. 얼마가 지나면 교실 밖의 삶이 어떠했는지 기억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대략 80년 정도가 지난 뒤 교실을 떠나면, 당신은 부모가 있는 집으로 간다. 다시 말해 영적 가족에게 간다. 이것은 단지 수업 시간이 매우 긴 하루였고, 그것이 전부이다. 아주 긴 덕분에 실제로 당신은 교실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었다. 만약 당신이 이승과 저승을 분리하는 얇은 막을 뚫고 들어가면, 이곳에서 사는 것에 집중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저승은 매우 매혹적이고, 매우 매력적이며, 이곳에서 자신이 되기보다 그곳에서 자신이 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이곳에서 사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기억이 상실된 상태로 세상에 들어가야 한다.
큰 공동체 앎길은 앎을 발견하는, 배움의 셋째 문턱으로 사람들을 데려간다. 이 발견은 당신을 개인의 생존과 개인적 성장에서 훨씬 더 유능하게 해 주겠지만, 매우 신비롭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셋째 문턱에서 당신은 저승의 삶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접근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무능하게 되기보다는 더 유능하게 된다.
만약 당신이 80년 동안 교실에 있으면서 집을 생각한다면, 교실에 있는 시간이 힘들 것이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 당신은 어린 시절, 학교가 끝나 집에 돌아갈 시간만을 기다리던 때가 어떠했는지 기억할 수 있다. 시계를 보면서 참을 수 없었고, 교사의 말이 들리지도 않았으며, 그냥 시간만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신비로 들어가면, 당신이 삶에 대한 이성적이고 책임감 있고 객관적인 접근을 모두 뒤에 남겨둘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은 당신에게 이제 진정한 객관성의 기반이 생긴다. 세상이 당신의 모든 현실을 만들어 낸다면, 당신이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겠는가? 세상은 매우 일시적이고 변화무쌍하며 위협적인 모습도 아주 많은데, 당신이 어떻게 여기서 객관적일 수 있겠는가? 당신이 세상만 알고 있다면,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누군가를 세탁기에 넣고 명상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만약 세탁기 안에만 있다면, 그 사람은 거대한 회전만 알 것이다. 세상은 아주 느린 세탁기와 같아 당신을 빙글빙글 돌린다. 그러지 않는가? 여기서 어떤 관점을 갖기는 매우 어렵다.
신비는 모든 곳에 아주 널려 있다! 당신의 관계는 신비롭다. 당신은 관련된 행동, 신체적 상호 작용, 개인적 습관 등 관계의 물리적 특성을 식별할 수는 있지만, 그 끌림은 정말로 신비하다. 끌림은 신비로워서 마법과 같다. 숨쉬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도 숨쉴 수 있다는 사실은 신비롭다.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신비롭다. 모든 것이 신비롭다. 사실은 모든 것이 경이롭다.
삶에서 교육의 약 99%를 차지하는 처음 두 단계의 교육은 신비를 다루지 않는다. 신비는 골칫거리이고, 다루지 말아야 할 어떤 것이다. 신비는 당신을 몽상가로 만들어 생존 능력과 개인적 자아 개발 능력을 떨어뜨린다. 인간의 잠재력을 개발하기 위해 지금 행해지는 교육의 대부분은 개인적 성장을 위한 것이다. 이 교육은 말을 더 잘하고, 더 잘 생각하고, 더 나아 보이고, 더 낫게 행동하고, 더 많이 갖고, 고통은 덜 받는 것이다. 이것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어떤 것이 있다.
우리의 현존은 당신 삶의 신비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이 온 곳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전하는 말을 당신이 받아들일 때, 당신은 자신의 한 측면, 즉 매우 생생하지만 아마도 한 개인으로서는 닿을 수 없는 한 측면을 받아들인다.
당신은 당신 마음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앎을 이 세상에 가져왔다. 앎은 당신의 개인적 마음이 아니다. 앎은, 생존하고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멀리하고 즐거움을 얻고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당신이 아니다. 앎은 고군분투하지도, 변하지도, 심지어 성장하지도 않는다. 처음 두 단계의 교육은 성장을 다룬다. 셋째 단계는 발견을 다룬다. 앎은 성장하지 않지만, 앎에 대한 당신의 인식은 성장한다.
요즘 고등 교육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논의가 있는데, 그들은 모든 답이 당신 내면에 있다고 말한다. “당신은 자기 내면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당신은 그저 조금만 파헤쳐 보거나 아주 고요해지거나 진심으로 묻기만 하면 되며, 그러면 답이 당신에게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당신은 답에 도달할 수 없다. 당신은 답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당신 내면을 폭파할 수 없다. 당신이 지니고 있는 답은 당신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당신은 그 길을 망치로 치고 구멍을 뚫을 수 없다. 당신이 답을 받아들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준비가 되면, 그 답은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당신이 받는 메시지는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당신에게 살아 있는 현실로서 앎을 회복시키는 것은 그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당신이 이 세상을 졸업하여 이 세상이 더는 신에게서 숨는 곳이 아니면, 당신은 뒤에 남아 있는 이들을 돕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당신 그룹의 일원으로 이곳에서 아직도 일하고 있는 특정인들을 돕기 시작할 것이다. 세상에 있는 것은 광산 갱도 밑바닥에 있는 것과 같다. 당신이 주위를 둘러보면 보이는 것은 갱도뿐이다. 그래서 당신이 그곳 아래에 아주 오래 있으면 갱도는 당신이 아는 전부이다. 하지만 표면으로 돌아오면, 당신은 “아, 나는 이 모든 것을 잊고 있었어!”라고 말한다. 당신은 편하게 숨을 쉬고, 여유가 있으며, 시야가 넓어진다.
앎은 당신이 여전히 갱도 안에 있는 동안에도 갱도 밖에 있는 경험을 하게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 더 효과적이 되는 그런 방식으로 경험하게 한다. 삶에서 수도승이 되는 특정인들이 있지만, 그들은 예외이며 이곳에서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신이 당신을 부르면, 신입 수도승 같은 어떤 존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세상에서 건전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에게 중요한 어떤 일이 맡겨질 수 있다. 만약 당신이 건전하지도 믿을 만하지도 않다면, 당신의 참된 선물은 당신에게 기쁨이기보다는 더 큰 부담이 될 것이고, 실제로 당신에게 매우 위험할 것이다. 당신은 그 선물을 효과적으로 지닐 수 없고, 효과적으로 제공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야망을 품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그래서 개인적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당신이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 당신이 정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아는 것이 현명하다. 현재 많은 가르침에서 만약 당신이 가로막지만 않고 바보짓을 멈추기만 하면,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다고 크게 강조한다. 이 상황에서 도깨비처럼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만약 이렇게만 되면”이다. “나에게 그런 장애만 없다면, 나는 이런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만약 나에게 장애물과 장벽만 없다면, 내 삶은 정말 잘 되었을 텐데! 나는 별똥별처럼 빛났을 텐데!” 그것은 사실이다. 그럴 것이다. 당신은 1초 정도 빛을 내고 사라질 것이다. 당신은 휴일의 폭죽처럼 1초 정도 빛을 내다 사라지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개인적 성장에서는 움직임이 많지만, 실제 방향이 있는 움직임은 많지 않다. 많이 첨벙거리고, 경험에 기복이 심하며, “오, 내가 왜 미치광이였는지 알겠어!”라며 대단한 통찰도 많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와 다시 미치광이가 된다. 당신이 왜 미치광이인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그 이유를 알면 문제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은 항상 핵심적인 답을 찾는다. 그들이 삶에서 원하는 것은 답뿐이며, 그들은 전체 그림을 놓치고 있으므로 활기가 없다. 삶은 그들 옆을 스쳐 지나가고, 그들은 답을 찾는다. “내가 미치광이인 진짜 이유를 알면, 나는 미치광이가 되지 않겠다. 그러면 나는 타오르는 빛이 되어 모든 사람이 보는 이 멋진 존재가 되겠다.”
이 세상에서 진보한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숨어 지낸다. 당신은 그들을 자주 발견하지 못하며, 만약 그들을 발견한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왜 그러는가? 왜 그들은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자신의 빛을 모든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가? 왜 그들은 밖으로 나와 자신의 삶을 통해 신의 위엄을 분명히 보여주지 않는가? 왜 그러는가? 개인적 성장의 목적은 눈부시고 장엄한 본보기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진보한 이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왜 그들은 세상 깊숙이 숨어 지내는가?
앎에는 지혜가 동반되어야 하므로 생존과 개인적 성장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앎이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며, 지혜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당신은 틀림없이 삶에 대해 어떤 것을 알며 실제로 활동을 해 나가면서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혜이다. 지혜는 어떤 것을 해내는 법을 아는 것이다. 지혜는 세상을 살면서 실제로 경험한 결과이다. 그래서 당신 삶의 첫째 주요 부분은 생존과 개인적 성장이다. 여기서 당신은 잘하면 효과적으로 일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당신은 아직 당신 삶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아내지 못했지만, 일단 알아내고, 첫 두 단계에서 성장하면,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재앙을 만들지 않고 어떤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진보한 사람들이 자신을 과시하며 돌아다니지 않는 이유는 그들에게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별똥별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선풍을 일으키기보다는 이 세상에서 변치 않는 현존이 되기를 원한다. 그들은 셋째 단계의 교육인 앎에 준비된 학생들을 찾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정보를 널리 알려주어 개인적 성장과 개인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그들은 앎의 학생들을 찾는다. 그들은 사람들이 신을 두려워하므로 신이 세상에서 비밀리에 일한다는 것을 안다.
왜 당신이 정말 슬프고 우울한지, 또 왜 그런 감정들이 당신에게 생기는지 알고 싶은가? 그것은 당신이 신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모든 불행의 이유이며, 모든 기쁨의 씨앗이기도 하다. 신은 신비롭게 일한다. 신은 야외 연회장이나 옥외 광고판이 없는 큰 끌림과 같다. 신은 당신을 끊임없이 끌어당긴다. 일이 잘되면, 당신 삶에 있는 과도한 짐은 충분히 치워질 것이고, 그리하여 당신이 끌림 자체를 차츰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랑하는 이를 부르는 사랑의 부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들이 서로 재창조하려는 것인 깊은 사랑과 끌림이다.
앎은 당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 당신을 신에게 데려가지만,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앎의 주안점은 마법을 쓰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앎은 모든 우주의 1600만 개 수준과 우주론에 관해 모든 것을 배우는 형이상학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만 하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삶에서 그들의 역할과 특별한 관련이 없는 한 이런 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심지어 이런 것들마저도 일시적인 방편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신비 우주론을 알고 싶어 하면, 어쩌면 교사가 당신에게 훨씬 더 큰 어떤 것을 줄 때 당신 관심을 끌려고 이것들을 알려줄지도 모른다. 당신은 하루에 신비 우주론을 이해하지 못한다. 혼자서 자기 생각에 빠져 비참할 때 당신은 신비 우주론에 다가가지 못한다. 신비 우주론은 단순히 더 넓은 범위의 추측일 뿐이며, 당신이 개인적으로 어려울 때 잠시 휴식이 될 수는 있지만, 자유로 가는 열쇠는 아니다.
그래서 셋째 단계의 교육에는 깊은 정직이 필요하며, 이때 당신은 정직과 일관성으로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신은 지금 멋진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며, 악당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되려고” 노력하는 자체를 하지 않는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려는 시도에서 해방되었다. 이것은 당신이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유이다. 어떤 면에서는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기 전에 어떤 사람이 되려는 추구를 포기해야 한다. 앎은 당신이 당신의 기준에 따라 모범적이 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앎은 당신 삶의 마스터이므로, 당신은 “나는 앎을 이용하여 이것을 더 많이 갖거나 저것을 더 적게 가질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앎이 당신을 움직인다. 당신은 돛을 올렸고, 신은 이제 바람을 일으켜 세계를 가로질러 당신을 나아가게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돛을 올린 사람이다. 그는 조선소에서 수리하고 있지 않다. 그는 물 위에 있으며, 움직이고 있다. 그는 삶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의 유일한 주안점은 돛을 유지하고 그를 움직이는 움직임에 따라 돛을 조정하는 것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 프로그램에서는 학생이 집중해야 하는 두 측면이 있다. 첫째 측면은 당신이 지금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알 수 없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둘째 측면은 당신 내면의 교사들과 접촉하는 것이다. 당신에게는 새로운 영역으로 안내하는 안내자가 필요하고, 당신은 심혈을 기울여 이 안내자에게 의지해야 한다. 당신의 교사들은 당신이 그들에게 너무 의지하지 못하게 할 것이고, 그들을 대단한 영웅으로 여기도록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은 적절하지 않다. 모든 진정한 교사들처럼, 당신 내면의 교사들도 그들이 있을 필요가 없게 하려고 여기에 있다. 그들은 당신이 돛을 올리고, 돛을 튼튼히 하고, 돛이 부러졌을 때 수리하는 법을 배우고, 삶에서 신의 움직임인 바람을 따르도록 돕는다. 그들은 당신에게 항해하는 법을 가르친다.
이것은 좋은 비유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배를 책임지는 사람들은 엄청난 능력과 책임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의 움직임은 큰 힘의 안내를 받는다. 그들은 자신을 움직이는 힘에 깊은 경외감을 느끼고, 세상을 지배한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단지 자기 임무를 완수하려고 세상을 이용할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삶에서 마스터의 경지를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을 때 우리는 그다지 흥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 대부분은 마스터의 경지를 삶 자체를 배제한 개인적 자아의 완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모든 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완벽함을 과시하려고 하고, 모든 것을 멋지게 만들려고 하며,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하는데, 삶이 당신이 이룬 일을 매 순간 서서히 파괴한다면, 당신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행복한 삶이 될 수 없다.
당신은 돛을 올려야 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바람을 탈 수 있다. 우리는 해안에 묶여 있지 않다. 우리는 삶이라는 물에 빠지지 않으므로, 당신과 함께 간다. 교사들의 영향을 받게 되면, 진정한 도움이 있다는 느낌이 들고, 당신 삶이 당신의 노력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당신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당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때로는 앎을 추구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모욕적임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이 정말 작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나는 내가 마스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렇다고 당신이 자신의 책임까지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당신의 교사는 당신이 자신의 책임을 주장하되, 자기 역할을 넘어서는 책임은 주장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당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자신의 역할과 자신의 역할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심지어 개인 차원에서도, 삶에서 하면 안 되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성숙해지는 것의 일부이다. 성숙한 사람이 되는 데 아주 큰 부분은 당신이 몇 가지만 정말 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점차 긴장을 풀며, 다른 역할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진정한 역할을 요청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삶은 매우 공정하고 정직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가혹한 경험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돛을 펴고 넓은 바다로 나갈 때, 준비되지 않으면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고, 항해할 수 없다면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앎은 당신을 넓은 바다로 데려간다. 앎은 당신이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게 하여 세상에서 더 큰 관점과 지혜를 갖게 한다. 앎은 부적절한 야망을 누그러뜨리고, 적절한 야망을 장려한다. 앎은 당신 삶에서 모두를 대등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앎이 평화의 기반이다. 앎은 모든 것을 맞는 비율로 할당한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에게 특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서 자신과 싸웠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 당신은 자신의 특성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그 특성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운다. 삶은 그에 따라 당신을 바꿀 것이다. 당신은 추가로 자신을 바꿀 필요는 없다. 삶이 당신을 바꾸는 방식이 당신을 가장 많이 바꿀 것이다.
셋째 단계의 교육이 처음 두 단계를 완성하는 것이지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나는 당신에게 아주 확실히 알려주고자 한다. 셋째 단계는 단순히 진정으로 의미 있는 큰 맥락을 처음 두 단계에 제공할 뿐이다. 그러면 당신은 자신이 왜 세상에 생존하는지 알며, 왜 개인적 성장을 하는지 안다. 이제 이유가 있다. 당신 삶은 자신의 야망보다 더 중요하다.
당신 삶이 모두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당신이 깨달으면, 당신은 세상에 자신이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만약 당신 삶이 당신에게만 가치가 있다면, 당신은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지 않는가? 대가가 너무 커 보인다. 그렇지만 당신 삶이 당신과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중요하다면, 당신은 자신에게 매우 좋은 일을 하는 데, 또 당신을 비하하거나 해치는 것들을 제쳐 두는 데 진정한 가치와 진정한 명분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때 자기 사랑이 가능하다. 게다가 만약 당신 삶이 공헌에 관한 것이라면, 당신은 밖에 나가서 자신을 해칠 시간이 없다. 당신 모두는 삶에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다.
당신들 모두는 자신이 특정한 것들을 먹어야 하고 더 자주 운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며, 어쩌면 어떤 영화들은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 것이다. 그러지 않는가? 하지만 당신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왜 그러는가? 당신의 어린 시절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인가? 당신에게 좋다고 아는 것을 왜 하지 않는가?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가? 그래서 사랑 타령을 하고 다니는가? “나는 끊임없이 사랑을 말하는데, 여전히 내가 해야 한다고 아는 일을 하지 않는다. 나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여전히 사랑에 빠져 있다.” 정신 차려야 한다. “나는 여전히 배탈이 나는 음식을 먹는다.” 왜 그러는가? 동물들은 자신에게 좋은 것을 할 것이다. 새는 소화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돌을 먹지 않는다. 새들도 분별하는데 당신은 왜 분별하지 못하는가?
사람들이 앎의 인도를 받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놀랍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숨어 지내고, 자신이 일해야 할 영역에서만 일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진보했다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을 만큼 충분히 배웠을 것이다. 세상은 앎을 상당히 혼란스럽게 바라본다. 세상은 앎이 제공할 수 있어 보이는 힘 때문에 앎을 원하지만, 앎이 제공할 것으로 보이는 신에 대한 기억 때문에 앎을 싫어한다. 그래서 위대한 교사들을 신격화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 교사들은 잊기에는 너무 훌륭하지만, 함께 살기에는 너무 도전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죽이며, 그러고 나면 그들에 대한 경이로운 기억을 간직할 수 있다. 그래서 현자들이 숨어 지낸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한다. 그것이 마스터의 경지이다. 그것이 현실적인 마스터의 경지를 보여 주는 한 형태이다.
셋째 단계의 교육이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는 신비롭기 때문이다. 이 교육은 당신의 개인적 야망이나 완벽하기를 바라는 욕구에 맞지 않는다. 당신은 자신이 그 문으로 들어가고 싶은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 교육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보장할 수 없다. 당신이 그 문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행복이 그곳에 있고 당신의 본성과 존재에 대한 확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들어간다. 나는 오래전에 교사와 함께 준비에 들어갔을 때, “어디 보자. 그 준비에 전념하기 전에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부름을 받았고, 응답했다. 나는 다시 부름을 받았고 다시 응답했으며, 또 부름을 받았고 또 응답했다. 바로 이 부름과 응답이 당신 삶에 있는 앎이다. 당신이 그 상황에서 어떻게 이익을 얻을 것인지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앎으로 가는 계단 프로그램이나 이와 유사한 교육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삶에 부름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이제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참여하기로 한 그들의 결정은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오며, 앎에서 나온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여기 있어야 한다.” 이것은 놀라운 가치를 지닌 표현이다. 깊은 힘에 응답하는 이와 같은 능력이 바로 당신 삶을 구할 것이고, 계속해서 당신 삶을 구해 주었으며, 당신을 어떤 것에서 멀어지게 했거나 위험한 것에서 끌어냈다. 나중에야 당신은 되돌아보고 “오, 세상에! 그 관계가 잘 풀리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 또는 “그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 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라고 말한다.
아무도 이곳에서 집에 있지 않다. 이곳은 미용 학교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외모를 향상하기 위해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이용한다. 이것은 매우 외롭다. 어떤 경이로운 체념이 있으면, 이 체념으로 당신은 진정한 기반 위에 안착하게 된다. 이것은 다정한 부모의 위로이며, 다정한 신의 위로이다. 이때 당신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되지 않아도 되며, 당신은 깊이 안도하게 되므로 눈물을 흘린다.
내가 제공하는 것은 내 삶이 앎이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다른 삶이 없다. 나는 세상에서 당신을 돕기 위해 당신 삶이 더 풍요로운 곳에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