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shall Vian Summers
on 12월 4, 1987
1987년 12월 04일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우리는 당신이 자신에게 제공된 것의 측면에서 베풂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당신들 각자는 이 시대의 인류 진화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려고 영적 가족을 떠나 이 세상에 왔다. 당신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안고 왔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고향에 대한 기억도 이곳에 가져왔다. 그래서 당신이 떠나온 고향과 세상 사이의 차이가 줄어들 것이고,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질 것이다.
자신이 고향에서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만 베풀 수 있다. 저승에 고향이 있다는 것을 당신이 모르면, 어떻게 베풀 수 있겠는가? 당신은 상실감에 빠지며, 가난하다. 비록 돈이 있고, 차가 있고, 호화롭게 살더라도, 당신은 가난한 상태이며, 빈곤감이 당신의 동반자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은 모두 세상을 위한 선물을 가지고 고향에서 왔으므로, 모두가 공통의 헤리티지를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은 진화하는 상태이며,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곳의 삶도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행성, 별, 은하계 등 우주의 모든 것은 움직이고 있으며, 모두 어떤 것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당신들은 모두 같은 곳에서 왔으며, 모두 같은 곳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다른 길을 따르고 다른 수단을 이용한다. 당신이 세상에 왔으니, 이용할 수 있는 큰 도움이 있다. 정말 엄청난 도움이 있다. 당신을 이곳까지 오게 하는 데는 많은 계획이 필요했다. 당신은 영적 가족을 떠나왔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동안 당신은 영적 가족을 대표한다. 세상은 외롭고 불쌍한 곳이다. 그러므로 선물을 가지고 온 당신은 마땅히 주어야 한다고 느끼거나 반드시 주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당신이 어느 정도 받는지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당신이 자기 생각에 지배받지 않을 때, 당신은 자신과 함께 있는 영적 현존인 영적 가족의 현존을 느끼기 시작한다. 당신은 이곳에서 그들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의 현존은 매우 강력하다. 당신이 계속 발전하면, 당신은 현존을 느낄 뿐만 아니라, 현존을 받아들일 것이고, 현존은 당신 내면에서 움직일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고, 매우 강력하다.
앎길을 공부하면서, 사람들은 순수한 경험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지각을 섬세하게 하는 법, 감수성을 기르는 법,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배운다. 이 모든 것은 베풂의 결과로 일어난다.
당신 내면의 교사들은 베풀기 위해 이곳에 왔다. 당신에게는 이곳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어떤 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자동차나 돈이 필요 없고, 휴일이나 휴가도 필요 없다. 그리고 세계 일주 여행도 필요 없다. 그들은 언제든지 세계 일주 여행을 할 수 있으며, 이런 식으로 움직인다. 그들은 순식간에 지구 반대편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세상이 가진 것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지만, 당신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이 이곳에 왔을 때 그들이 당신에게 준 것을 당신이 베푸는 것이다.
당신에게는 당신 내면의 교사들이 매우 필요하지만, 그들 역시 당신이 필요하다. 이것은 완벽한 상호 보완 관계이다. 만약 당신과 함께하는 교사들이 당신에게 없다면, 이 세상에서 당신이 성장하는 데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길 것이고, 자신의 참된 삶에 대한 기억을 되찾을 희망도 거의 없이 이곳에서 길을 잃을 것이다. 이렇게 되지 않는 것은 바로 당신 내면의 교사들과 당신의 참된 본성 때문이다.
베풂과 관련된 관념이 많으며, 그중 일부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첫째, 당신은 무엇을 베풀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베풀어야 하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베풀면, 종종 당신은 상실감과 공허감을 느끼며, 이전보다 더 약해지고 더 고갈된다.
베푸는 것은 당신이 아니다. 바로 앎이 당신을 통해 베푼다. 베푸는 어떤 것이 당신 내면에서 움직인다. 이것이 베풂의 참된 근원이다. 베푸는 것은 바로 당신 삶이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당신에게는 약간의 돈, 약간의 소유물, 약간의 시간, 약간의 사랑, 약간의 자비심이 있다. 당신은 이것들을 유익하게 줄 수 있지만, 너무 적게 가지고 있다.
바로 당신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이 물질적·영적·감정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양분을 준다. 그 결과 당신은 더 강력해지고, 더 강해지고, 더 건강해진다. 왜 그러는가? 당신 앎은 베풀어야 할 곳에 베풀고, 올바른 방식으로 맞는 상황에서 맞는 사람들에게 베풀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풂의 매개체로서 당신도 선물을 받으므로 이익을 얻는다. 여기서 베풂은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활동이다.
당신은 자신의 영을 데려가 영이 어떤 것을 베풀게 할 수 있는가? 이제 당신은 개념과 생각, 정서, 믿음을 줄 수 있고, 이것들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당신에게 주는 더 큰 베풂이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주고 싶은 것보다 더 많이 주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갈등을 낳아 당신은 “음, 내가 주면, 나는 더 많이 얻을 거야. 내가 원하는 것을 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베풂에 대한 이 모든 생각은 흥정에 지나지 않는다. “음, 나는 여기에 조금 주고, 저기에 조금 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베풂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당신 내면에서 드러나고 표현되는 앎이고, 당신의 참된 존재의 힘이며, 어느 순간이 되면 그 힘이 당신에게 준다. 어떤 것이 내면을 장악하며, 그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자비롭다. 당신은 자신이 결코 말하거나 행동하려고 계획한 적이 없는 어떤 것을 말하거나 행동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맙소사! 내가 무슨 말을 했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것은 마치 삶이 당신에게서 어떤 것을 꺼낸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당신은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 베풂의 매개체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다. 큰 공헌을 했다고 축제일에 당신이 기리는 이들은 자신이 베풀고 싶은 것을 알았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베풀지 알았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계획한 것보다 더 베풀었으므로 많이 베풀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앎이 베풀었기 때문이다.
앎이 베풀 때, 모든 사람이 편안하다. 그 상황에서 당신이 충분히 베풀지 않았다고 해서 죄책감이나 비난이 없다. “아, 내가 그 사람을 도왔어야 했는데, 나는 실제로 돕고 싶지 않았어.” 또는 “이 사람을 보러 가야 하는데, 나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아.” 당신이 돕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므로 심지어 돕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에도 심한 책망이 있다.
당신은 마땅히 집에 가야 하므로 집에 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마땅히 세상에 와야 했으므로 온 것이 아니다. 우주에는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 없다. 그것은 사물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지구가 자전하는 것은 마땅히 자전해야 하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지구에 선택권이 있는가? 지구는 더 큰 어떤 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가? 그리고 당신 베풂 역시 더 큰 어떤 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가?
큰 공동체 앎길은 사람들이 자신의 위대함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친다. 사람들이 자신의 위대함을 받아들이면, 앎은 그들을 더 강력하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러면 장애물도, 방해도, 거절도, 우유부단함도, 선호도 더 줄어든다. 그래서 이 가르침은 매우 신비롭다. 이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철학적이지 않다. 베풂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철학은 없다.
그러면 우리가 말하는 이 신비로운 베풂을 당신은 어떻게 행하는가? 당신은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필수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입문자와 가식적인 사람을 가르는 것이다. 자신이 창안하지 않은 교육과정으로 기꺼이 준비하려는 이들이 자신의 기존 역량을 뛰어넘을 것이다. 훈련은 이미 준비되었고 정해져 있다. 훈련은 여러 다른 형태로 제공되며, 당신이 자신을 데려가지 않았을 길로 항상 당신을 데려간다. 훈련은 당신이 자신에게 줄 수 없던 어떤 것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당신이 가졌다는 것을 알지 못한 어떤 것을 주도록 요구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하는 우주의 힘을 알아볼 것이고, 신, 영원의 세계, 행복, 평화, 진화에 대해 묻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단지 세상의 움직임을 목격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실제로 세상의 움직임 자체가 될 것이다.
성자는 왜 그렇게 강력한가? 왜냐하면 그들은 움직임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것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다. 이것은 어느 날 나타나서 그들을 쓸어버린 어떤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정신적·정서적·육체적으로 준비했다. 왜 그러는가? 왜냐하면 이것이 준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앎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앎의 매개체가 되기 위해 당신 몸과 마음을 준비한다.
우리가 여기서 영적 연습을 말하고자 하는 까닭은 영적 연습이 주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연습할 때, 그것이 어떤 명상이든, 혹은 글쓰기 연습이나 관찰의 연습이든, 그 연습에 자신을 바치겠다는 생각으로 연습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당신은 연습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얻으려고 이것을 한다면, 당신은 혜택을 받기 위해 필요한 인내심이나 열린 마음, 수용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눈을 감고 명상하면서 “나는 교사들과 접촉하고 싶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싶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다. 나는 황홀한 경험을 하고 싶다. 나는 지금 현재 상황을 벗어나 멋진 기분을 느끼고 싶다. 나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라고 말하면, 당연히 당신은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바로 실망하고 “음, 아마도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포기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거야.”라고 말하며, 원하는 것이 계속된다.
하지만 당신이 명상 연습을 할 때, 당신은 그 명상에 자신을 내주기 위해 오고, 당신의 교사들도 그들 자신을 내주기 위해 오므로 응답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접촉이다. 그곳에서 당신들은 서로 접촉한다. 교사들은 당신에게 내주고, 당신은 교사들에게 내주며, 서로 내주는 것을 공유한다. 사람들은 종종 명상에는 많은 영역과 수준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는 오직 관계만 있다. 당신이 무엇을 경험하든, 그 경험은 당신 마음과 다른 마음이 어떤 식으로 결합하기 때문에 있다. 영역과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관계가 중요하고, 친밀감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앎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고향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당신이 이곳에 있는 동안 특사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 이유로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아니면 당신이 왜 여기 왔겠는가? 이곳은 휴가로 오기에는 너무 어려운 곳이다. 당신은 단순히 기존의 잘못을 고치려고 이곳에 오지 않았다. 그것에는 충분한 동기가 없다.
당신들 대부분은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이미 안다. 이것은 단지 누가 당신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은 자신에게 좋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어쨌든 그것을 한다. 당신은 어떤 음식을 먹으면 느낌이 좋지 않으므로 먹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어떤 장소에 갈 때마다, 당신에게 좋지 않다. 당신은 그것을 알지만, 어쨌든 계속한다. 왜 그럴까? 만약 당신이 자신에게 유리한 어떤 것을 본다면 지체 없이 붙잡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은가? 당신이 진정으로 동기를 부여받으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앎에 대한 이 양가성, 관계에 대한 이 양가성, 친밀감에 대한 이 양가성이 왜 있을까? 아마도 이것을 바라보는 한 가지 방법은 만약 자신만을 위해 자신을 연마하겠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어쨌든 삶은 짧다.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당신은 저승에서 무엇이 당신을 기다리는지 정확히 잘 모른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세상에 자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자신을 연마한다. 자신이 세상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왜 사람들이 이 모든 성장 과정을 겪고, 이 노력을 기울이고, 자신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이러한 작은 희생을 하겠는가? 단순히 방종한 사람들이 준비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이것은 개인적 목적으로 하기에는 너무 크다.
앎이 세상에 계속 살아 있게 하는 데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오직 온전히 응답하는 상당히 소수 사람만 여기서 앎을 계속 빛나게 할 수 있다. 그들의 삶은 앎이다. 비록 그들이 개인적 문제, 개인적 생각이나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일지라도, 이제 큰 힘이 그들 내면에 있다. 이것은 분명하다. 이 현존을 지니려면, 개인으로서 그들은 자신을 성장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이 현존을 지니려면 매우 현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정화되고 깨끗해야 하며, 당신 마음은 온전해야 한다. 당신은 상반된 충동과 의지를 가져서는 안 된다. 당신의 행동은 이 온전함을 표현해야 한다.
앎은 매우 강력하며, 다른 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당신은 앎에 이상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당신이 이 현존을 원하지 않는 이들에게 주면, 그들에게 단지 세 가지 선택권만 준다. 당신과 합류하거나, 당신에게서 도망치거나, 당신을 공격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다. 그들은 거의 무관심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지혜롭게 베풀 수 있도록 당신은 성장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자신을 지탱할 수 있고, 자신의 베풂이 맞는 장소에서 맞는 이들에게 확실히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영적 가족을 받아들이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들은 오랜 성장 기간을 겪을 것이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다른 이유들 때문으로 보일 것이다. 당신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어떤 것들을 공부하고 생각하며,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삶은 더 나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삶은 단순히 당신을 어느 위치로 데려가 어느 시점에서 당신이 고향을 들여다보는 창을 가지는 방식으로 당신과 함께 있는 현존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이 모든 개인적 성장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것은 단순히 당신이 앎을 경험할 수 있는 위치로 당신을 데려간다. 그것이 개인적 성장의 유일한 가치이다.
당신이 세상에 베푸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교사들이 당신에게 배정되었다. 여기에서는 그것이 행복이다. 여기서 행복은 당신이 이곳에 있는 동안 고향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당신 고향의 유일한 자취는 당신의 베풂이며, 이 베풂은 앎에서 나오고, 당신이 준비되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당신은 “나는 더 많이 베풀어야 해. 더 많이. 더 많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 내면의 교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당신 역시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어떤 시기가 되면 당신은 베풀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며, 이 시기가 중요하다. 이 베풂은 의무나 죄책감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며, 전적으로 자연스럽다.
먼저 당신은 준비해야 하고, 당신의 준비는 모두 자신을 내주는 것이다. 명상할 때, 자신을 내주라. 교사들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때만 나타날 것이다. 당신은 그들을 끌어들일 수 없다. 당신이 준비되면 당신에게 통찰이 일어날 것이다. 요청한다고 해서 통찰이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은 통찰이 아니다. 앎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생각이 아니다. 당신이 자신의 행동이나 사고를 탐구할 때, 또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읽어볼 때, 그것에 자신을 내주라. 이것이 바로 베풂이다. 그때 당신 내면에 큰 통로가 있다.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당신은 그것에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만약 이 베풂이 지속적으로 허용되고, 당신이 흠잡을 데 없는 인격을 지닌 사람이 되면, 개인적으로 당신에게는 거의 위험이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이점을 주는 방식으로 베풂이 일어날 수 있다. 당신은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기적적인 사건의 목격자가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일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 삶이 큰 선물을 위한 그릇임을 아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예술가, 음악가, 운동선수들은 자신의 기량을 연마해야 하며, 오랫동안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 한다. 그들의 보상은 무엇인가? 그들의 보상은 자신의 기량을 모두 쏟아붓는 순간, 그들이 내면에서 움직이는 큰 힘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거의 그 일에 편승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노력하지도 불안해하지도 않으며, 그냥 휩쓸린다. 그들의 매개체는 준비되었으므로, 이제 그들은 그 메커니즘을 초월할 수 있다. 그것은 매우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매우 총체적인 경험이다.
이 세상을 떠나면, 당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당신의 단체를 만나며, 그들을 보고 “내가 전부 주었는가? 내 가방이 비었는가? 내가 모든 것을 전달했는가?”라고 묻는다. 만약 당신의 가방이 비어 있지 않다면, 당신은 다시 오고 싶을 것이다. 아무도 당신에게 돌아가라고 지시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 내가 왜 이것을 못 봤지? 이제는 나에게 아주 명백해! 나는 집에 왔으며, 이것은 아주 명백하다! 나는 왜 그렇게 비참한 사람이었을까? 나는 단지 몇 년 동안만 그곳에 있었을 뿐이다. 내가 당신 모두와 함께 있었던 것이 마치 어제 같다. 돌아가고 싶은데, 언제 돌아갈 수 있지?” 그리고 당신은 조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아주 명백하다. 해야 할 일은 당신이 고향에 있을 때 당신인 사람으로 세상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해야 할 일이다. 일단 그것이 이루어지면, 당신은 여기 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당신이 내면의 교사들처럼 베풀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정원과 같다. 정원은 정원사가 돌본다. 당신 마음은 흙이고, 지혜의 씨앗이 심어진다. 우리가 이 정원을 가꾸는 것은 오직 마음을 가꾸는 마음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성자가 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행동을 모방하거나, 자신이 베풀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베풀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준비가 아니다. 앎의 학생들이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특유한 성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제대로 인식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자기 내면에서 큰 통로를 준비하며, 거기서 그들의 고향이 그들을 통해 드러나고 표현된다. 그 순간에 그들은 고향에 있으며, 고향을 잃은 이들이 오는 세상에서 고향의 연장선이다.
삶은 아주 짧은데, 왜 명상하는가? 당신은 단지 몇 년만 여기 있다가 반송된 소포처럼 다시 돌아간다. 왜 이 모든 시간을 연습하는 데 쓰는가? 베푸는 것이 당신의 본성이므로 꼭 그렇게 해야 한다. 당신은 베풀도록 되어 있다. 당신이 선물이다. 베풀지 않으면, 삶은 비참하다.
당신들 각자에게는 필요한 것이 있고 때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베풀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만약 당신이 내면의 교사들과 접촉하면, 이것은 매우 분명하다. 그들은 베풀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이 베풂을 경험할 수 있고, 그들의 기쁨을 당신과 나눌 수 있도록, 어느 시점에서 당신에게 어떤 것을 하라고 요청한다.
위대한 이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축적했는가? 그것은 단 한 가지, 관계이다. 떠날 때 무일푼이었든 부자였든, 그들은 고향에 무엇을 가져갔는가? 그들은 관계를 가져갔다.
당신 삶이 공헌을 위한 것이면, 당신은 당신과 함께할 사람들을 찾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당신의 문제는 함께할 맞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다. 당신은 좋은 직업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삶은 베푸는 이에게 향하며, 이곳 삶은 베풂에 매우 목말라 있다. 현존이 당신과 함께 있으면, 사람들은 자석처럼 당신에게 끌려올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개인적 야망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신은 매우 깨끗해야 하지만, 당신을 정화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며, 앎이 당신을 정화한다.
사람들이 더 좋아지는 것에 양가적이므로 세상은 베풀기 매우 힘든 곳이다. 이곳에는 가혹함과 분노가 많다. 그러니 당신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베푸는가? 화내고 분노하고 불행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베푸는가? 베풂이 금지된 것처럼 보이는 곳에 어떻게 베푸는가? 위험하거나 폭력적으로 보이는 상황에 어떻게 베푸는가? “어떻게” 베푸는지에 대한 질문이 많고, 그 질문들은 꽤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 대답은 다소 신비롭기는 해도 매우 간단하다.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어떻게, 언제, 어디에 베풀어야 하는지는 당신을 통해 베푸는 것이 안다. 왜냐하면 당신은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모두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 사회에서 추종자가 되는 것을 매우 하찮게 보는 것은 상당히 이상한 일이다. 추종자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낮추어 보는 어떤 것이다. “오, 당신은 추종자인가? 당신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모든 사람은 선장이나 장군, 제독, 기업의 대표, 예술의 대가 등 지도자가 되어 지휘해야 한다. 여기서 추종자가 되는 것은 한심한 것이다.
당신들은 모두 추종자이므로 추종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는 지도자가 없다. 지도자로 보이는 사람들은 앎을 따르거나 아니면 자신의 야망을 따른다. 그들은 그들이 따르는 것에 결속되어 있다. 올바른 부름을 선택하고 따르는 것 말고는 자유가 없다.
진정한 학생이 되려면, 당신은 추종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학생이 된다는 것은 당신이 전에 배운 적이 없는 것들을 배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이 거의 알지 못하는 영역에 들어가고 있으며, 안내자나 지도교사에게 자신을 맡겨야 한다. 당신이 앞장서서는 안 된다. 만약 독학하려고 하면, 당신은 그저 기존 정보만 다시 되풀이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크게 발전하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같은 영역을 돌아다닐 것이고, 많은 돌파구를 거치고 나서 결국 같은 장소에 오게 될 것이다. “음, 다시 또 여기 왔어!” 그러므로 당신은 추종자가 되어야 한다.
앎을 훌륭히 잘 받아들이는 이들, 지도자 역할을 하는 이들, 이들의 삶은 앎에 결속되어 있다. 이들은 앎을 따르고, 앎에 내주며, 앎의 지시를 받고, 앎에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당신은 삶에서 자신의 독립 말고 무엇을 양보할 수 있는가? 자유가 앎에서 당신을 분리한다면, 자유가 축복인가? 유일하고 진정한 자유는 앎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진정으로 자신이 되는 데 자유롭다. 그러면 당신의 공헌은 최대한으로 제공될 수 있고, 당신은 성취된다.
당신은 교사들을 따라야 한다. 왜 그러는가? 왜냐하면 당신 내면의 교사들이 교사들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이가 자기 고향으로 가는 길을 찾는다. 저 밖에서 혼자 자신의 길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다. 모두가 모두를 끌어당기며, 앞에 가는 이를 따르고 뒤에 오는 이를 이끈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이가 줄지어 신에게 돌아간다.
당신은 이승에서 자신을 바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곳에서 당신 삶을 결코 경험하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가서야 기회를 완전히 놓쳤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당신이 고향에 있을 때는 세상에 오는 일이 매우 고무적이다. 당신이 고향에 있기 때문이다. 고향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아주 분명하고, 몇 년 동안 세상에 내려가는 것이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 들어가면,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잊는다. 그러면 당신은 세상 사람이 되고, 생존과 만족이 당신의 관심사이다.
당신의 참된 선물은 앎을 공헌하는 것이므로 자신을 위해 앎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은 이렇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배워야 하는 당신의 일부분은 세상에 속하는 당신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성격은 세상에 속하며, 당신의 몸도 세상에 속한다. 세상을 떠날 때 당신은 그것들을 가져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 고향에서는 그것들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격과 몸은 매개체로 길러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것들은 앎을 지닐 역량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결코 발아하지 않는 씨앗이 될 것이고, 당신 씨앗이 발아되지 않은 채 고향에 갈 것이다.
자신을 추종자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항상 어떤 것을 따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따를 수도 있고, 자기 믿음을 따를 수도 있으며, 자신의 감정 상태를 따를 수도 있다. 당신이 지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당신이 따를 것에 대한 결정이다. 그 지점이 바로 당신이 통제할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앎을 따르겠다.”라고 말하면, 앎을 이끌어서는 안 된다. 앎은 매우 강력한데 당신이 어떻게 이끌 수 있겠는가? 당신이 앎을 어디로 이끌 수 있겠는가? 앎은 가야 할 자기 위치가 있으며, 당신이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배우자가 당신에게 필요하면 배우자를 당신에게 찾아줄 것이고, 자녀가 당신에게 필요하면, 당신에게 자녀를 줄 것이다.
앎의 학생들은 여전히 자신의 앎을 가지고 어딘가로 가려고 하므로 앎은 그들에게 어렵다. “나는 앎을 이용하여 이것이 되거나 저것을 가질 거야.” 하지만 앎의 생각은 아마 조금 다를 것이다. 당신은 앎과 흥정할 수 없다. 앎은 힘이다. 앎은 협상하지도 타협하지도 않으며, 일을 의논하지도 않는다. 앎은 단지 가야 할 곳으로만 가며, 그곳에 갈 수 없다면, 당신 내면에 숨어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교화하는 우리는 당신이 자신에게 매우 친절하기를 바란다. 당신은 자신을 정화할 수도, 깨끗하게 할 수도, 끌어올릴 수도 없다. 진정한 준비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시 영역에 있는 영적 가족, 그리고 이곳에서 사는 이들과 함께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어떤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당신은 이 방식에 참여해야 하므로 참여한다. 이것이 맞는가? 물론,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무엇에 참여하는지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들의 앎이 성취되면 무엇을 할 것인지 말하려고 하면, 모든 사람은 “내게는 다른 계획이 있어!”라고 말하며 도망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당신이 이것을 하면, 당신은 엄청나게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당신의 특성은 보완될 것이다. 당신은 더이상 이상적인 상태에 있으려고 하거나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에게는 헤쳐 나가야 할 미래가 없으니, 당신은 그 순간에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이미지 너머를 볼 것이고, 말로 표현하는 것 너머를 들을 것이며, 겉모습 너머를 느낄 것이다. 삶은 이 세상에서 당신에게 투명해질 것이고, 당신은 그 투명함을 통해 당신의 고향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앎의 학생이 되기 위한 준비의 일부는 자신의 특성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한계가 있으므로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때 당신이 자신에게 정직해진다. 그것은 성장의 일부이다. 당신이 삶에서 진정한 공헌자가 되려면,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당신은 이 모든 것에 대한 가치 판단 없이 자신이 어떻게 일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의 정신적·육체적 매개체와 함께 가장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다.
당신의 몸에는 특정한 모양과 특정한 특징이 있다. 당신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의 특성을 초월하는 것은 당신의 역할이 아니다. 여기서 당신의 특성은 일시적이므로 그 특성을 공헌의 매개체로 이용하는 것이 당신의 역할이다. 왜 일시적인 것을 완벽하게 하는가? 당신에게는 일시적인 것을 완벽하게 할 시간이 없다. 당신은 일시적인 것이 완벽해지기 훨씬 전에 그것을 잃는다. 그것은 마치 식사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과 같다. 식사 준비가 끝날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상해 있다. 당신의 마음과 몸과 성격은 앎의 매개체가 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다.
물론 바로잡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물론 자기 행동을 바꿔야 하고, 어떤 식으로 자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이 항상 아주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자신에게 감사할 수 있겠는가? 당신에게는 당연히 두려움이 있을 것이고, 일하는 특정 방식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이것에 제한받을 필요는 없지만, 이것이 당신의 특성이라는 것은 이해해야 한다.
일단 당신 앎이 어느 정도 길러지면, 당신에게 오는 소임을 통해 삶에서 자신의 특성을 완전히 보완하는 역할이 당신에게 올 것이다. 당신이 만들어진 그대로 있기를 신이 원한다는 것은 매우 큰 축복이다. 당신의 특성은 당신의 소임에 완전히 딱 맞지만, 그 특성이 당신의 소임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지 못하므로 당신의 특성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당신은 자신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어떤 것에 맞추어져 있다. 당신이 자신의 소임을 발견하면, 당신 삶은 자신의 특성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특성을 더 존중하게 된다. 그러나 당신은 그 특성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유리한 점뿐만 아니라 불리한 점도 있으며, 당신은 불리한 점을 정당화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의 특성을 받아들여 현명하게 이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선택할 여지가 없이 베푼 이들, 베풂 그 자체를 베푼 이들을 존중하자. 그리고 베풂이 그렇게 일어났다는 것에 감사하자. 왜냐하면 앎이 세상에 계속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앎은 건조하고 메마른 땅의 오아시스이다. 신학자들이 와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훌륭한 믿음 체계를 구축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앎을 베푼 결과로 사고 체계가 굳어져 사람들을 구속하게 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있는 일이다. 앎이 사라지면 생각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알 수 없을 때, 자신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일시적인 안정을 주는 것을 고안한다. 앎이 없으면 불안만 있기 때문이다.
베풂 그 자체를 베푸는 이들을 존중하자. 그들은 베풂에 방해되지 않도록 자신을 성장시켜야 했다. 그들은 다른 목적으로 베풂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여기에 온 이유를 존중한다. 세상을 떠나면서 “아, 나는 이 사람들 말고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나는 벅찬 가슴을 안고 빈손으로 돌아왔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큰 축복이다.
이때 당신 고향은 그곳뿐만 아니라 이곳에도 자리잡는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가? 당신과 함께 일하는 당신의 작은 단체에 있는 모든 이가 이 세상에서 일을 마치면, 당신들은 모두 고향이 거부된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그곳에 고향을 다시 세운다. 그런 다음 당신들은 그 세계를 구한다. 일시적으로 고향을 잃은 곳 말고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모든 곳이 회복되면, 일은 끝나고 즐거움이 시작된다. 당신이 고향에 있을 때, 신의 현존을 경험하는 것은 장엄하지만, 그곳에서도 당신의 경험은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험 또한 진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경험이 당신 능력만큼 위대하고, 시간이 흘러 당신 능력이 커짐에 따라, 현존을 경험하는 것도 더 커지고 더 포괄적이게 될 것이다. 당신이 어디를 가든 이것을 공헌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베푼 이들에게 감사하자. 왜냐하면 그들의 베풂이 이곳에서의 우리의 목적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의 공헌자가 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고 우리의 가슴이 충만하도록 삶이 우리에게 공헌자를 보내준다는 것을 우리는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