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shall Vian Summers
on 6월 4, 1988
1988년 06월 04일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당신 체험의 매우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살면서 삶에 더욱 현존할 수 있도록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헛된 약속은 아니지만, 당신은 마음의 다른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당신은 깊이 아는 상태인 앎의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당신이 개인적 마음에서 산다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개인적 마음으로 살면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시도가 있지만, 결국 그런 시도는 거의 성공하지 못하면서 많은 에너지만 쏟아야 하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두려움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 알려면, 당신은 두려움이 무엇인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즉, 두려움이 어디서 오고 당신의 생각·행동·체험을 얼마나 많이 지배하고 결정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두려움을 정의해 놓은 것이 많지만, 그렇게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한계가 있다. 두려움은 체험을 통해 알아야 하므로 당신은 도움이 될 만한 설명을 쉽게 얻을 수 없다. 당신이 매우 속상하거나 괴롭거나 화가 나면, 잠깐 멈추어 “아, 나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라고 말하라.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알아차림이다. “나는 두려워하고 있다.” 종종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움에서 벗어나거나, 아니면 여전히 괴롭더라도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지금 나는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당신의 체험이 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자신의 두려움에서 나온 것을 표출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당신을 매우 강하게 사로잡기 때문이다.
당신은 보통 마음 상태에서 왜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는가? 두려움을 품는 그 대상이 가치 있어 보이기 때문 아닌가? 당신이 보통 마음 상태에 있을 때에는, 쉽게 잃어버리거나 없어질 일시적인 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당신은 가진 것을 지키고 싶고, 더 많은 것을 얻고 싶어 하며, 동시에 여기서 생기는 모든 불편함은 무시한다. 당신은 몸과 마음을 지키고 싶어 하고, 관념과 믿음을 지키고 싶어 하며, 소유물과 관계와 부를 지키고 싶어 한다. 당신은 이런 분야에서 더 많이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을 모두 지키고 싶어 한다. 당신은 불안감 없이 이런 것들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당신은 수도승이 아니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도원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극소수 사람만이 이럴 수 있다. 당신은 세상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우리가 다루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먼저, 두려움 자체부터 알아보자. 두려움은 매우 널리 퍼져 있으며, 당신의 생각이나 행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이 당신의 두려움이다. 오직 당신이 자신을 관찰할 때만 그 위력을 깨닫기 시작할 만큼 두려움은 세상에서 당신 체험에 바탕을 이룬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마저도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다. 새로운 것을 보면, 사람들은 먼저 두려움으로 반응한다. 내 말이 진실이면 무엇이 도전받겠는가? 당신의 반응은 두려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앎의 회복이 진정한 개인 성장 모두의 핵심이므로 당신이 앎을 회복할 때, 두려움과 관계를 새롭게 맺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당신은 세상 삶에서 두려움의 영향을 알기 시작할 것이다.
두려움은 정의나 설명만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은 매우 광범위하게 배어 있다. 그래서 당신의 생각 대부분은 물론 심지어 더 나은 세상을 염원하거나 평화를 염원하는 것마저도 그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인류의 상황이나 환경을 개선하려는 당신의 노력도 대부분 두려움에 지배받는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갈망하거나 죽음에 대해 걱정하는 것도 모두 두려움이다. 그래서 당신이 이 모든 것들과 실제로 맞닥뜨리기 시작할 때, 두려움은 불길한 것이 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하며 준비하기 시작할 때,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에 객관적이 되는 법을 배우고, 그 결과 그것들을 훨씬 더 철두철미하게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참 본성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객관적이 된다. 참된 종교는 모두 이것을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감정이나 관념과 완전히 동일시하는 사람은 큰 기량이나 능력을 가질 수 없고 큰 지성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많은 두려움을 체험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자신을 관찰해왔다면, 얼마나 많은 두려움이 당신을 해치고 옭아매는지 알 것이다. 이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하며, “아, 나는 그 일을 할 수 있는데, 너무 두렵구나.”라고 말하며 자신을 다시 보게 된다. 그러나 당신과 당신의 목표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을 모두 두려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사람들은 두려움만 없다면 자신이 엄청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종종 생각한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 개인 성장을 가르치는 많은 가르침에 이런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두려움이라는 마귀만 없다면, 혹은 어릴 적 기억이 없거나 사회에 길들여지지만 않았다면, 당신은 정말로 엄청난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어떤 것이든 할 수도 있고 가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널리 퍼져 있는 관념이지만,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이 관념은 지혜가 아니라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위대한 전사처럼 자신 앞에 놓인 장애물을 공격하려 하고, 다리 위에서 길을 가로막는 용을 죽이려 한다. 물론 그들은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이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두려움은 당신 개인적 측면에 타고난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을 없애려는 것은 아픔도 고통도 상처도 없는 몸을 가지려는 것과 같다. 당신에게 자비심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당신이 스승이 되고자 한다면,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 측면을 개선하는 일에 매우 가혹해질 수 있으나, 이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당신은 앎을 기르고 있으니,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앎 속에서는 두려움이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앎이 당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때 당신은 세상이나 자신과 싸우지 않는다. 당신은 훨씬 더 큰 것을 기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몸과 마음은 집과 같고, 앎은 텃밭과 같다. 그래서 당신은 텃밭에 나가 작물을 재배하여 집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당신은 집에 앉아서, “먹을 것이 어디 있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먹을 것이 제 발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당신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나서, “그럼, 집을 바꿔보자.”라고 결정해도, 텃밭은 밖에 있으며, 당신은 밖에 나가 먹을 것을 가져와야 한다.
세상에 봉사하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세상이 현재 이 모양인 것에 분개한다. 하지만 어떻게 세상이 다른 모습으로 있을 수 있겠는가? 세상은 사람들이 삶에서 만들어 낸 산물이므로 정확히 지금과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당신이 만약 “세상은 지금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어야 해.”라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세상에 전쟁을 선포하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조만간 세상에 적이 될 것이고, 앎이 아닌 두려움에 지배받아 난폭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곧 변하지 않는다면, 큰 일 나고 말거야.” 만약 당신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세상에 봉사하려 한다면, 평화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당신의 동기가 극심한 불안에서 나온 것이라면, 평화나 화해를 가져오는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만약 당신이 “나는 이 아이를 범죄자가 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라고 생각하면서 아이를 키운다면, 그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겠는가? 이런 관점으로 세상을 돌보면서, 세상에 참된 혜택을 줄 수는 없다. 게다가 세상은 변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며, 사람들은 단단히 벽을 쌓아놓고 자신을 지키려 한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으며, 그것은 앎을 기르는 것이다. 앎을 기를 때, 당신은 자신에게 전쟁을 선포하지 않으며, 자신을 칼로 해부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개인적 측면에 잔혹해지지 않으며, 자신의 감정이나 사소한 생각들을 매몰차게 대하지 않는다. 당신은 약한 것에 자비심을 갖고, 강한 것에 존경심을 가진다.
지금 우리는 복잡한 상황을 다루며, 우리가 여기에 단순한 방향을 제시한다. 하지만 앎을 기르려면, 당신은 많은 두려움을 거칠 것이며, 그런 과정 중에 두려움이 점점 사라질 것이다. 두려움은 세상 마음의 주인이다. 나는 두려움을 하나의 실체가 있는 것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면 두려움에 없는 중요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려움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만들어내는 힘이다. 물론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사랑도 이와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랑의 원천은 당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당신이 그 원천이다. 모든 사람이 사랑하기를 멈춘다 하더라도 사랑은 여전히 세상에 스며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을 세상에서 없애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을 없애는 처방전으로 “나는 두려움을 몰아내겠다. 그러면 남는 것은 모두 사랑과 행복 그리고 마음의 평화다.”라고 쉽게 말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는가? 두려움은 매우 강하다. 두려움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면, 두려움을 별것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큰 현실세계에서는 두려움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신의 현실에서는 두려움이 세상을 지배한다. 그래서 당신이 직면해야 하는 강한 힘에 합당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현명하다. ‘앎에 이르려면 당신은 어떤 두려움을 거쳐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은 진실이지만, 이런 과정에서 당신은 두려움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아낼 것이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을 신에게로 곧장 데려가기 때문이다. 이때 당신은 사람들이 자신의 두려움을 고통스러운데도 붙잡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이 개인적으로 혼자서 찾아내야 하는 신비다. 두려움에 관한 정의나 설명으로는 이것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앎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당신은 자신의 두려움을 끊임없이 극복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이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는 두렵든 두렵지 않든 이 길을 선택한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상황에서 앎을 따르겠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당신은 마치 거대한 먹구름을 통과하듯 두려움을 통과한다. 이렇게 하려면, 당신은 두려움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아야 한다. 이때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이 두려움은 사악한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만, ‘나’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에 주의를 기울이겠다. 하지만 두려움은 내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사람이 잊고 있는 매우 중요한 차이를 하나 알려주고자 한다. 조심은 두려움과 다르다. 조심은 앎에서 나올 수 있다. 조심은 당신이 매우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잘못될 수도 있고, 또 잘못된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도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암벽이나 험한 산을 등반하는 산악인처럼 매우 주의를 기울인다. 산악인은 자신의 손과 발을 어디에 놓을 것인지 매우 주의를 기울인다. 당신은 이것을 두려움이라고 말하겠는가? 산악인은 발을 잘못 디뎌 떨어질 것을 생각하면, 매우 두려울 것이다. 그들은 겁에 질릴 것이고, 잘못된 결정을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험한 산을 오르고 싶어 하는 이유이다. 그들은 매우 대담해지며, 순간적으로 앎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은 조심과 두려움의 차이를 배워야 한다. 이 둘은 매우 다르지만, 당신은 체험해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조심을 체험하려면, 당신은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에서 자신을 떼어놓아야 한다. 당신은 두려움을 점점 더 제대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제대로 알아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당신의 지각 작용을 지배한다. 그러나 현실은 당신의 지각에 바탕을 두지 않음을 당신은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당신은 두려움을 제대로 알아보려고 스스로 치유상담사가 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신의 시선을 앎의 장애물이 아닌 앎에 고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점을 알려주고자 한다. 만약 당신이 두려움이나 두려움 때문에 생긴 어떤 것과 관련되어 있다면, 두려움이 당신을 지배할 것이다. 당신이 만약 악을 연구한다면, 악이 당신의 주인 노릇을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앎이 없다면 악은 당신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앎에 역점을 두어야 하고, 이는 당신 삶에 관해서나 혹은 내려야 할 결정에 관해서 당신이 진정으로 아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려면 연습을 통해 내적으로 고요히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요히 있는 능력 개발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 고요한 상태에 있어야 당신은 주의 깊게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일 저 일,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당신 마음이 항상 정신없이 바쁘다면, 당신은 주의 깊게 지켜볼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주의를 기울일 수 있고, 무엇을 볼 수 있겠는가? 앎을 회복하려면, 마음의 고요가 필요하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이 필요하며, 참된 분별력의 개발이 필요하다. 이것들은 모두 지극히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며, 당신이 삶에서 행하는 모든 것들과 직접 연관이 있을 것이다. 삶에서 앎을 실제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지극히 드물므로 당신이 조금이라도 그런 능력을 지녔다면, 당신은 엄청난 자산이다.
당신에게는 정말 당신 것으로 느껴지지만, 잃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당신이 사회적·물리적으로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이 매우 많다. 내가 여기서, “음, 모든 것을 포기하라. 결국 어떤 것도 가치가 없다. 몇 년 있으면 당신은 이 세상을 떠날 것이고, 그러면 그때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세상에 있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세상에 있는 데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당신의 개인적 마음이나 두려움에서는 찾을 수 없다.
앎은 씨앗처럼 당신 안에 심어져 있다. 당신이 앎을 기르기 시작하면, 앎은 자라서 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할 것이다. 앎은 땅속에 있는 씨앗처럼 그 자체의 삶이 있다. 당신이 앎에게 어떻게 자라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필요한 환경·영양분·조건만을 제공하라. 그러면 앎이 자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당신은 여전히 물리적·정신적·사회적 생존을 염려해야 하는 세상 사람이다. 그러나 이제 당신 삶에는 또 다른 것이 있으며, 당신은 거기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서 살아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하니, 세상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앎의 학생이 되기 위해서도 세상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온종일 연습하고 훌륭한 체험을 하는 것뿐이다.”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렇게 하면 더 많은 고통을 낳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세상 사람으로서 책임을 져야 하고, 동시에 앎을 받아들이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 앎은 매우 천천히 성장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앎을 매우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고통에서 구해 줄 한 가지 확실한 것을 두려워한다.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 다 좋은데, 그럼 세상이 이렇게 어려울 때, 세상을 어떻게 돕는다는 것인가? 뭔가를 해야 할 것처럼 보이는데.” 세상을 어떻게 도와야겠는가? 세상에 봉사하는 데는 그 동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앎에 끌려 봉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에 끌려 봉사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앎의 학생들 대다수는 정치적·사회적 참여에서 일시적으로 빠져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여전히 그들 자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영원히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을 관찰하고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우 근본적이고 유용한 어떤 능력을 길러야 한다.
내 대답이 합리적으로 여겨질 때는 사람들이 “오, 이것 아주 좋은데.”라고 말하며, 합리적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는 “이 말은 이해할 수 없는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답은 임시방편이다. 모두가 앎을 따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극소수만 앎을 따르고자 한다. 그런데 당신 삶에 유익한 도움을 줄 사람은 앎을 따르는 사람이며, 당신은 이런 사람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할 수 있다.
세상이 온갖 어려움 속에 있는데도 어떻게 계속 유지되고 있을까? 이십 년 전 사람들은 “이런 세상에, 조금만 있으면 우리는 완전히 망하겠구나.”라고 말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런 세상에, 조금만 있으면 우리는 완전히 망하겠구나.”라고 말하고 있다. 앞으로 이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이런 세상에, 조금만 있으면 정말 우리는 완전히 망하겠구나. 빨리 뭔가를 해야 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누가 우리 모두를 지탱하게 해줄까? 인간에게 있는 동물적 속성은 종족을 충분히 파멸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은 누구나 살인자나 범죄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인류를 지탱하게 해줄까? 어떻게 해서 인류가 존속해 왔을까? 어떤 힘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떤 것이 이 일을 하고 있다.
이곳 삶을 보전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사람만이 앎과 함께하고 있으면 된다. 모든 사람이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샘물을 마시지만, 그 물이 어디서 흘러나오고 누가 길러왔는지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현자가 드러내지 않는 이유다. 만약에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이 자신을 알린다면, 많은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진보하는 앎의 학생들은 모든 야망을 포기해야 한다. 심지어 세상을 구하겠다거나 고통 받는 세상에 이로움을 주기 위해 새로 발견한 기술을 사용하겠다는 생각조차 포기해야 한다. 몇 사람은 종교나 역사의 흐름을 바꾸거나 인간의 생각에 변화를 주기 위해 세상에 나가 가르쳐야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세상의 진정한 대가들은 숨어 지낸다. 이렇게 할 때, 그들의 일이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지금 하는 것은 수천 년 동안이나 행해졌으며,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수천 년 동안 지극히 비밀리에 행해졌다. 이제 당신에게 그런 자유가 왔다. 물론 이 시대에 불리한 점은 사람들이 성심성의를 다해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이런 종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면 목숨을 걸었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단순한 호기심으로 접할 수 없었으며,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지금 지구에서는 참으로 대단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우리 은하에서 지구가 위치한 이 지역 선진국들 사이에는 이런 자유를 누리는 국가가 거의 없다. 사람들은 이런 자유를 누리지만, 동시에 매우 빈약한 동기 때문에 고통받는다. 사람들은 가야 할 방향을 잃었다.
물론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되도록 어려움이나 갈등이 없기를 바란다. “나는 문제가 없었으면 해. 나는 돈이 떨어지거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아.” 당신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가능한 한 많이 즐길 수 있도록 편안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들에게서 앎이 번뜩이는 것은 보통, 보기 드문 상황이나 심지어는 극단적인 상황이다. 앎이 번뜩이는 데 꼭 고통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정말 다른 상황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새로운 체험을 한다.
때때로 나는 ‘불난 집’을 소재로 이야기한다. 만약 당신이 사는 집에 불이 났다면, 모든 사람이 개인적으로 그곳에 있는 이유를 잊고서 불을 끄거나 필요한 일을 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당신 마음이 다른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알다시피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종종 두려움 없이 반응한다. 그러나 상황이 끝나고 나면, 그때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런, 세상에!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했잖아. 정말 겨우 피했어.” 그러나 불을 끄는 순간에는 그들에게 두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상황을 매우 흡족하도록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앎을 경험할 기회를 주어 자신을 일깨우려고 상황을 아주 심각하게 만들려고도 한다. 흥미롭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사람들은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가? 자신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만약 모든 것이 경이롭고 지금 당장 지구에서 천국을 누린다면, 얼마나 굉장한 일이겠는가? 모든 사람이 다정하고, 일하고 싶지 않다면 아무도 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그러나 천국의 기쁨이 얼마나 오래가겠는가? 당신이 앎에 되돌아가지 않았다면, 그 기쁨은 순간일 뿐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내면에서 고요할 수 없다면, 당신 환경에서도 고요히 있을 수 없다. 당신은 고요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움직이지 않고 여덟 시간 동안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움직이지 않고 이십 분 동안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당신들 중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모든 사람이 고요한 상태를 원하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원하지만, 누가 그런 세상을 견디겠는가? 그런 세상이야말로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울 것이다. 그래서 천국을 원하지 않는다. 누가 천국을 원하겠는가? 사람들은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혹시라도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지, 누가 지금 당장 천국을 원하겠는가?
나는 지금 당신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세상에 자비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려는 것이다. 인류가 부족민에서 벗어난 것이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았고 또 새로 발견된 기술이나 능력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구는 꽤 잘하고 있는 편이다. 현재 성장 단계에서 사회가 계속 나아간다면, 인류는 꽤 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앎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자. 그들은 앎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앎이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할 것인지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삶에서 당신의 부름은 앎이 당신에게 할 일을 알려주는 데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물론 사람들은 그들의 부름을 앎과 상관없이 찾기를 바란다. 즉, 그들은 단지 자신이 누구인지 새롭게 정의하고 싶을 뿐이다. 삶에서 당신의 부름은 당신의 앎에서 드러난다. 부름을 받으면, 당신은 어떤 것을 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 일은 개인적 선호와는 상관없으며, 심지어 두려움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어쨌든 이 일을 해야만 해.”라고 느끼면서, 당신은 이런 확신과 힘으로 한마음이 되어 이 일들을 할 수 있다. 당신은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지는 않겠지만, 이것만은 해야 한다. 그때 당신은 세상에서 일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두려움 없이 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의 개인적인 측면에 속한 것은 여전히 평상시 하던 걱정을 하겠지만, 당신 삶에는 이제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훨씬 더 중요한 어떤 것이 있으니, 당신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집에 불이 났다면, 누가 우두커니 앉아 언제나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날까 걱정하고 있겠는가? 지금은 다른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지금은 잠시 위험한 상황에서 삶을 보존해야 할 목적이 있다. 당신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지혜의 원천이 함께하고 있다면, 당신에게 극단적인 상황은 없어도 된다. 지혜는 서서히 자랄 것이며, 당신 삶을 점진적으로 변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다수 사람들에게 변화는 천천히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매우 빨리 가기를 원하여 극단적으로 어려운 영적 수행, 자신이 찾을 수 있는 가장 혹독한 수행을 한다. 그러나 체계적인 길을 따라 천천히 가는 사람이 더 빨리 간다.
가장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가 고요다. 고요가 깊어지면, 자신에 관한 것들이 보이고 그다음 점점 세상에 관한 것들이 보일 것이다. 이런 것들은 고요 속이 아니라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점점 상황이나 사람들, 심지어 사물들까지 볼 수 있을 것이며, 당신이 해석한 대로가 아니라 실제 그곳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앎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상황을 점점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어느 정도 고요가 깊어져야 한다. 이때 평화에 대한 열망도 커진다. 왜냐하면 평화는 매우 고요하기 때문이다. 평화는 단순히 세상에 싸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평화는 고요다. 고요를 몹시 두려워한다면, 전쟁은 있기 마련이다. 자극을 받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싸움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앎을 기를 때, 당신은 항상 두려움에 직면할 것이고, 이때 앎과 함께 갈 것이냐 말 것이냐를 선택할 것이다. 당신이 앎과 함께 갈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앎과 함께 가지 않을 때는 그저 앎과 함께 가는 것이 더 나았다는 것만 발견하게 된다.
고요가 깊어지면, 당신은 인내심도 커진다. 앎은 요청만 하면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느끼는데 앎이 조용하다면, 어쩌면 그때는 당신이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결정을 내릴 수 없을 수도 있으며, 어쩌면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다지 효과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연히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인내심이 있으면, 포용력·신뢰·믿음과 같은 매우 기본적인 것들이 모두 뒤따른다. 당신이 고요하면, 현존이 당신과 함께하고, 스승들이 당신과 함께하며, 영적 가족의 힘이 당신을 통해 발산되기 시작한다. 당신이 고요하면, 당신은 꽉 막힌 벽이 아니라 거울이나 창문과 같은 것이 된다.
이쯤 해서 당신이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당신에 관한 것이지, 당신 남편이나 아내, 친구, 고객 등에 관한 것이 아니다. 주체는 바로 당신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저 사람에게 이런 자질을 갖도록 할 수 있을까?”라든가, “저 사람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지 말라.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데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은 이제 저승의 삶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내 삶의 기반은 이승이 아니므로 나는 두려움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내 역할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이승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다. 나는 세상에서 일해야 하며, 다만 훨씬 나은 곳에서 일할 뿐이다. 나는 저승의 삶에서 양분을 공급받는다. 그래서 나는 부자이고, 나에게는 관계가 있으며, 세상은 나를 해칠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저승에 기반을 가져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 종교에서 교육받은 것 때문에 신이라는 용어를 쓰지 못한다. 당신이 여기에 해당된다면 어떤 용어든 괜찮으니, 당신이 저승의 삶을 생각해보는 데 쓸 수 있는 말을 사용하라.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당신의 역할은 당신이 온 곳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보고, “내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 의미와 방향을 알려 달라. 나는 삶의 진리를 찾기 위해 왔다.”라고 말하지만, 세상은 말해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의사가 환자 방에 들어가서, “내가 누구지? 내가 누구인지 좀 알려 달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세상은 당신 내면에 있는 진리가 필요하다. 세상은 당신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한 번이라도 세상에 진리를 주고 나면, 앎은 모든 곳에 두루 있으니 세상은 앎의 증인이 될 것이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이것을 볼 수 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해석 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보거나 아는 데 자유롭지 못하며, 삶과 멀어져 있다. 당신이 이것을 체험하려면 당신 삶이 저승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곳에 잠시만 머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승의 삶을 생각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삶을 앎에 헌신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앎은 선하다. 당신은 앎을 찾아내어 잘못된 곳에 쓸 수 없다. 자기 개인을 위해 앎을 이용하려 한다면, 당신은 곧장 앎을 잃는다. 앎은 당신 개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통해서 일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여 열어놓게 되면, 당신은 등대처럼 빛을 비추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그들과 어떤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당신 삶은 매우 단순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에게 고요히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고요하지 않으면, 당신은 세상처럼 정신없이 나대며 불행할 것이다. 그러나 고요하면, 당신의 행복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점차 앎에서 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여전히 당신에게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은 당신의 길을 가로막고, “이곳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라고 말할 것이다. 두려움은 깊이가 없으니, 당신은 두려움을 알아차릴 수 있다. 비록 두려움이 당신을 매우 강하게 끌어당길 수는 있지만, 그래도 두려움은 매우 피상적이고 실체가 없다. 이 점에서 두려움은 앎과 매우 다르다. 앎은 조용하지만, 엄청난 현존이 있다. 앎은 대단히 지성적이지만, 항상 생각하지는 않는다. 앎은 마음의 다른 상태다. 세상은 지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앎을 따르는 사람들이 충분히 있고, 앎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앎이 움직이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