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received by
Marshall Vian Summers
on 1월 31, 1997

1997년 01월 31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큰 공동체는 사회 망이 매우 방대하고 환경과 종족, 자연 등이 엄청나게 다양하므로, 영성은 더 우주적이고 더 본질적인 특성을 띠어야 한다. 만약 영성이 문화적 이미지로 뒤덮여 있거나, 특정 문화들만의 사회 역사에 얽혀 있다면, 영성의 본질적 특성은 흐려지고, 접근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영성이 큰 공동체에서 공유되려면, 문화와 역사의 기교들, 그 자체 안에서는 진짜인 이 기교들을 제쳐두고, 영성이 정말 무엇인지, 무엇을 하려고 여기 왔는지, 이런 본질적 요소들을 다루어야 한다. 다양한 나라들, 적어도 종교를 유지해온 나라들 각각이 자신들의 지역 관습과 의식을 가질 수는 있어도, 그 나라들이 다른 종족들과 이 종교를 공유하거나 이 종교에 관해 소통하려면, 영성이 무엇이고 무엇을 하려고 여기 왔는지에 대한 본질적 특성을 공유해야 한다.

여기에서 당신은 이러한 근원적 물음에 스스로 답을 알아내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영성을 말할 때, 우리는 영성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영성과 관련하여 세워진 기관이나, 영성을 이용하거나 조종하려는 기관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부족의 문화와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당신 내면에 사는 필수적인 힘, 우리가 앎이라고 부르는 힘을 말한다.

큰 공동체는 매우 광대하고 다양하므로, 오직 본질적인 것만 한 행성에서 다른 행성으로 옮겨질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옮길 수 있는 영성이라고 부른다. 지금 인간의 종교 연구와 탐구에서 초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옮길 수 있는 영성이다. 문화와 역사와 가치관에는 절대 의견이 일치할 수 없어도, 앎의 수준에서는 사람들이 함께 공명한다. 앎의 수준에서는 사람들이 통합된다. 왜냐하면 앎은 우주 전체에 걸쳐 하나이기 때문이다. 앎은 위대한 평화 중재자이며, 진정한 협력과 인지의 기반이다. 앎은 소통하고 이해하는 데 가장 훌륭한 수단이다.

그렇지만 큰 공동체와 지구에서, 앎의 체험과 표현은 드물고 귀중하다. 우리가 말했듯이 큰 공동체에서 기술이 진보한 종족들 가운데에는 영적 수행이나 공부를 하는 종교가 전혀 없는 종족이 대단히 많다. 이 종족들에게는 기술이 종교이며, 그들의 사회적 목표와 목적이 그들의 종교이다. 그들의 종교는 국가의 종교이고, 집단의 종교이며, 스스로 세운 권위의 종교이다. 하지만 큰 공동체에는 선진 종족이 몇만이나 있으며, 심지어 지구가 위치한 구역이나, 이 지역 우주에도 있다. 그래서 이곳은 엄청나게 다양하다.

하지만 모든 지적 생명체에게 무엇이 본질적인가? 본질적인 영성이란 무엇인가? 어떤 세계에서 환경과 역사, 문화, 가치관이 매우 다르고 차이가 큰 다른 세계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형태와 사회, 세계, 성향과 관계없이 모든 이에게 참인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영성의 본질이다. 이것이 옮길 수 있는 영성이다. 이것이 우리가 앎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앎의 성장은 믿음과 추측 너머에 있는, 인간의 아는 능력, 무엇이 진실인지 인지하고 그것에 적절히 응답할 수 있는 능력에 집중한다.

여기서 당신은 아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아는 것과 아는 능력을 회복하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이때 당신은 지혜를 배워야 한다. 앎을 인지하고, 앎을 당신 내면에 있는 다른 영향력과 분별하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앎을 표현해야 하는지 아는 지혜, 누가 앎을 지녔고 누가 지니지 않았는지를 알고 적절히 그들과 함께하는 법을 아는 지혜, 당신 삶에서 앎의 역할 및 앎과 당신의 본질적 관계를 아는 지혜, 앎 자체의 은총과 지혜에 따라 관용과 통찰, 분별력, 자비, 공헌을 실천하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이것은 인간 삶에서 참으로 드물지만, 큰 공동체에서도 참으로 드물다. 정말로 귀중한 것이고, 정말로 소중한 현실이다. 사실 대단히 귀중해서 이것을 아는 이들은 이것을 절실하게 구한다.

지구에서나 당신의 삶에서 창조주가 배후에서 일하는 것처럼, 큰 공동체에서도 창조주는 배후에서 일한다. 여기에는 불가시 세력들이 있으며, 이 세력들은 지적 생명체가 있는 모든 곳에서 앎을 기르는 것을 촉진하고 자극하며,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 이용할 모든 기회를 활용한다. 그렇지만 큰 공동체의 매우 많은 곳에서, 수많은 문명과 문화에서는 그 기회가 거의 없다.

큰 공동체 준비, 즉 당신이 큰 공동체에 대비하는 그 기반에는 이 본질적 영성의 성장에 초점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신의 가장 큰 능력과 기량일 뿐만 아니라, 자유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큰 공동체에서 자유로워지는 당신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구에서 당신이 인간으로서 누리는 자유는 큰 공동체에서 대부분의 개인이 누리는 자유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당신이 여기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비록 당신이 자유를 잘 활용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자유는 귀중하다. 비록 이 놀라운 기회들이 무시되더라도 자유는 놀라운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큰 공동체 삶이 개인의 자유를 위해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이 당연하리라고 결코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큰 공동체의 학습 환경 안에서는 창조주와 창조주를 대변하는 불가시 세력들이 배후에서 일하면서, 가능성이 있는 개인들을 자극해야 하고, 앎의 집단이나 공동체를 발전시켜야 한다.

어떤 곳에서는 앎의 집단이나 공동체의 능력이 매우 높은 수준까지 성취되었다. 큰 공동체에는 이해와 능력을 매우 높은 수준까지 성취한 소규모 앎 공동체와 앎을 지닌 개인들이 있지만, 우리가 말했듯이, 그들은 무역과 상업에 관여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그들은 큰 공동체 삶의 어려움에 자신을 노출하지 않는다. 그러기보다는 비밀리에 숨어 지내며, 아주 멀리 떨어져, 각자의 세계에서 억압과 방해 없이 일할 수 있도록 숨어 지낸다.

물론, 많은 세계에 고도로 조직화되고 규제된 국가 종교들이 있지만, 이 종교들은 앎 공동체를 대변하지 않는다. 큰 공동체 전역에 걸쳐, 앎을 지닌 개인과 공동체는 자신들의 실체와 역량을 극비리에 유지해야 한다. 그리하여 국가 권력이나 다른 집단 의지에 조종당하는 것을 피해야 하고, 통제당하는 것을 피해야 하며, 그들의 큰 재능이 이용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여기서 당신은 영성과 종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종교 또한 필요하다. 왜냐하면 전통이 있어야 하고, 방법과 수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것들을 통해 영성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이용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종교를 비방할 것이 아니라, 이해하라. 종교가 대중화되고 잘 알려지면, 종교가 어느 곳에서 표출되든, 그 종교는 그저 국가 권력이나 사회 권력에 장악되어 이용되고, 조종될 뿐이다.

큰 공동체에서 진정한 달인들과 진정한 앎 공동체는 거의 모든 경우에 숨어 지낸다. 눈에 띄지 않는 곳, 상업과 무역이 미치지 않는 곳, 오늘날 큰 공동체에서 매우 활발한 큰 조종 세력이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지낸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 지구에 앎 공동체가 있다 하더라도, 지구 종교에서 이러한 공동체를 찾을 것으로 기대하지 말라. 당신은 이러한 공동체를 공공 예배 장소에서 찾을 수 없을 것이고, 공공기관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쉽게 눈에 띄고 크게 영향받을 수 있는 외부로 드러난 삶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찾으려면, 엄청난 분별력과 신중함을 개발해야 하고, 효과적이고 성공적으로 삶을 사는 법을 배우는 기본 기량을 개발해야 한다. 여기서 지구의 예로 큰 공동체를 보라. 왜냐하면 인류는 이러한 문제들의 현실을 단지 어느 정도만 표출했지만, 큰 공동체에서는 이 문제들을 철저히 겪었기 때문이다.

이것과 관련된 성공과 실패는 분명하고 심각했다. 신중하지 못하고 분별력의 결여로 세계 전체가 속박당했다. 매우 유망한 종교 전체가 신중함과 분별력의 결여로 자국 정부나 타국 정부의 통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훌륭하고 전도유망한 많은 이가 자신과 다른 이들 사이의 문제에서 신중함과 분별력의 결여로 자신의 가능성을 잃었고, 재능을 잃었으며, 자기 목숨을 잃었다.

이런 사례들은 지구에도 흔하게 있는 일이지만, 큰 공동체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하며, 여기서 우리가 당신의 주의를 집중시켜야 할 만큼 실제로 일어나는 사례들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지금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 사이에는 큰 희망이 있다. 그들이 품은 희망으로는, 큰 공동체에서 진보한 이들, 지구에 온 이들은 영적 마스터의 경지에 있으며, 영적 마스터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와서 인류를 깨닫게 해줄 것이고, 인류의 오래된 문제에서 인류를 구해줄 것이며, 더 큰 영적 형제애 안에서 인류에게 새 삶을 줄 것이다.

이것에 대한 많은 팡파르와 환상이 있고, 많은 희망과 기대가 있다. 그런데 진실 그 자체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면서, 동시에 해방감을 준다. 왜냐하면 희망과 환상 속에서 사는 것은 그저 당신 눈을 멀게 할 수밖에 없고, 당신 내면에 있는 큰 영적 현실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으며, 표현되어야 하는 이 현실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환상에 빠져 있을 때는 활력을 얻을 수 없다. 진실하고 명료한 상태에서만 활력을 얻을 수 있다. 활력은 이곳 지구에서나 큰 공동체 전역에서, 건강의 본질이며, 영적 출현을 위한 진정한 맥락이다.

창조주는 큰 공동체에서 매우 근본적인 방식으로 일한다. 이것은 창조주가 지구에서 일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이다. 당신이 본질적인 영성을 다루고, 사람들이 영감받은 상태로 있게 만들려고 하는 온갖 낭만과 영광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 또 본질적인 영성과 옮길 수 있는 영성에 집중할 때, 신의 일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때 신의 일은 희망에 찬 기대가 아니라 현실에서 확립된다.

큰 공동체 전역에서는 앎을 기르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우리가 앎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관념이나 정보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심오한 능력을 말한다. 이 체험이 바로 당신의 영적 현실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당신이] 오직 알 수만 있고, 당신이 세상에 온 큰 목적은 오직 알 수만 있으며, 지구의 큰 공동체 출현은 오직 알 수만 있고, 당신의 참된 선물과 그것들의 의미 있는 표현에 대한 깨달음은 오직 알 수만 있기 때문이다.

희망, 두려움, 믿음, 추측은 앎 자체의 현실을 대체할 수 없다. 이것은 종교 기관과 순수한 영성 체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우리가 앎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큰 공동체에 있는 영성을 이야기하며,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지각 있는 존재들과 공유하는 영성인 우주적 영성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것은 지구에 있는 당신 삶의 모든 면에서 사실이다. 왜냐하면 큰 공동체는 단지 지구에 있는 당신 삶의 큰 그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큰 공동체는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다양하지만, 영적 현실의 본질적 원리들은 지구에서 진실인 것처럼 그곳에서도 진실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큰 공동체에서, 영성은 개개인의 내면에 있는 앎의 성장과 앎 공동체의 성장을 통해 발전한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당신이 큰 운명을 공유하는 다른 이들과 당신을 의미 있는 관계로 항상 결합하려고 할 것이다. 이것은 큰 공동체 모든 곳에 있는 이들에게 진실이다.

큰 공동체 영성은 다른 수준의 삶에 관한 것이 아니며, 다른 차원을 들락날락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우주 영성의 진보에서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상상력에 해당한다. 큰 공동체 영성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하고, 훨씬 더 본질적이다.

큰 공동체에서 창조주가 중점을 두는 것은 앎을 기르고, 표현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앎이 출현할 수 있는 곳은 어디든, 공헌이 있으며, 지성이 커진다. 그리고 협력이 확대되며, 평화와 조화가 구축된다.

앎이 없거나 방해받는 곳은 어디든, 분열이 지배하고, 힘은 의지와 야망에 기반을 두며, 예속과 노예화가 관계의 본질이 된다.

앎과 함께하면, 모든 참된 것이 가능하다. 앎이 없으면,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은 참으로 기본적이면서도 여전히 정말 신비롭다.

우리가 전에 말했듯이, 기술 진보는 영적 진보와는 완전히 다르다. 고대에 기술이 거의 없었는데도 고대 부족 종교들조차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듯이, 당신은 이것을 자신의 시대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꼭 필요한 지혜를 찾으려면, 당신은 나아가야 하며,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 삶은 앞으로 가지, 뒤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미래로 향하고 있으며, 바로 이 미래에 모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과거를 다시 살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그러면 당신은 현재를 부정할 것이고, 미래를 준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큰 공동체는 당신의 미래이다. 비록 당신이 아직 큰 공동체를 설명할 수 없더라도, 큰 공동체는 현재 당신 경험의 일부이다. 큰 공동체에 있는 영성은 기본적이고 현실적이다. 만약 당신이 삶에서 참 본성과 참 목적을 찾으려 한다면, 큰 공동체는 당신 자신의 경험에서 기본적이고 현실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큰 공동체 영성의 핵심은 지혜를 기르고, 앎을 회복하며, 큰 공동체의 관점과 이해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큰 공동체 전역에 있는 신흥 행성은 모두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문화와 역사에 중점을 둔 부족 종교에서 벗어나, 본질적이고 옮길 수 있는 영성을 찾아야 하고, 그 영성에 따라 살며 그 영성의 큰 권한을 받아들이기 시작해야 한다.

지금 인류가 직면하는 것은 큰 공동체에 출현해야 한 모든 행성이 직면하였다. 이것은 모든 종족이 직면하는 진화의 일부이며, 관련된 사회의 선호나 신념에 상관없이 머지않아 일어날 것이다. 모든 아이가 자라야 하는 것처럼, 고립된 모든 행성은 큰 공동체에 어느 정도 노출되어야 한다.

큰 공동체에서 물러나 있기로 한 현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큰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배웠고, 큰 공동체에 대응하는 법과 큰 공동체를 분별하는 법, 큰 공동체의 메커니즘과 관계를 이해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당신이 세상을 떠나 숨어서는 어른이 될 수 없듯이, 당신은 세상에 들어가 세상을 배우고 난 다음, 그 안에서 은둔해야 한다. 그러나 은둔은 당신이 세상에서 참여하지 않는다거나, 진실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세상에 공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큰 공동체 전역에 있는 앎 공동체는 모두 주로 공헌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공헌에 대한 그들의 초점은 자신들의 행성만이 아니라, 큰 공동체의 삶 자체에 있다. 왜냐하면 깨닫게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큰 공동체에서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영성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큰 공동체 현실 그 자체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지금 지구에 있는 많은 사람이 그들 자신의 개인적 깨달음에 몰두하고 있지만, 큰 공동체 영성에서는 이것이 결코 주안점이 아니다. 주안점은 항상 앎을 기르고, 운명의 관계들을 맺는 것이다.

깨달은 이가 다른 이들과 결합하지 못하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깨달은 이가 자신의 깨달음을 자신의 관계들과 구현할 수 없다면, 만약 공동체에 들어가서 앎 자체에 봉사하는 집단심을 구축할 수 없다면, 그 깨달음은 환상이다.

왜냐하면 큰 공동체에는 강력한 개인이 없으며, 오직 강력한 관계만 있고, 강력한 공동체만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구에서 개인에게 부여하는 주도권을 감안할 때, 이것은 당신이 이해하기 매우 어려울 수 있지만, 개인의 힘은 관계의 힘이나 공동체의 힘에 비하면 무력하다.

우주 전역에 걸쳐 앎길에서 성장한 모든 개인은 앎의 큰 공동체에 들어갔다. 이것은 앎이 항상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관계로 개인을 데려가기 때문이다.

개인적 깨달음에 대한 집착은 진정한 영적 진보와는 상반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깨닫게 하려는 사람은 당신 길을 가로막고 있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사람을 깨닫게 하려고 하지만, 그 사람은 결코 깨달을 수 없다. 앎은 이미 깨달았다. 깨달음은 앎과 결합하는 것이고, 앎의 관계들 안에서 결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이란 당신을 삶 밖으로 데려가는 것도, 들어올리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이란 당신을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끌어, 당신이 여기 있는 동안 발현된 삶의 현실에 공헌하게 하는 것이다.

당신이 세상에 온 유일한 목적은 공헌이다. 당신은 오래된 실수를 바로잡으려고 이곳에 온 것도 아니고, 오래된 빚을 갚으려고 이곳에 온 것도 아니며, 이전 삶을 다시 살려고 이곳에 온 것도 아니다. 당신이 이곳에 온 것은 앎을 찾아 앎이 당신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큰 공동체에서 영성의 본질이고, 세상에서 영성의 본질이다.

영성의 본질은 참으로 단순하고, 참으로 강력하지만,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당신은 결코 그 본질의 신비나 현실을 철저히 다룰 수 없다. 당신은 결코 철저히 다룰 수 없으니, 그 단순함에 당황하지 말라.

큰 공동체에서 성자나 마스터의 경지와 같은 것은 없다. 성자의 경지는 다른 이들이 당신을 인정해주는 한 방식이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성취를 이룬 것에 대한 인정의 표시일 수는 있지만, 진정한 마스터의 경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지구에서는 개인에게 중점을 두고, 참된 앎 공동체가 없으므로, 마스터의 경지가 개인의 성취처럼 여겨진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이것을 마스터의 경지라고 부르고, 어떤 문화권에서는 성자의 경지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화신으로 불리고, 마스터로 불리며, 성자로 불린다. 하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큰 공동체에서는, 적어도 앎 공동체에서는 그러한 인정이 없다. 그런데 모든 국교는, 그것이 어디에 있든, 그 종교에 성자들이 있고, 영적 권위자나 종교 권위자가 있다. 왜냐하면 국교가 정부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앎 공동체에서는 마스터의 경지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앎이 마스터이고, 앎은 항상 앎의 매개체인 사람이나 개인보다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앎이 마스터인데 어떻게 당신이 마스터가 될 수 있겠는가? 당신이 세상 사람으로 있는 한, 완전히 앎과 통합되지는 않는다. 당신의 일부는 여전히 세상 사람으로 있다. 마스터가 당신 내면에 살면서 당신을 통해 일하는데, 어떻게 세상에 있는 사람이 마스터가 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혼동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많은 심각하고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지만, 그런데도 지금 세상에는 여전히 마스터와 성자의 경지에 중점을 두는 것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큰 공동체 영성에서는 오로지 공헌과 성취만 있으므로, 그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이 고향으로 돌아가면, 당신은 진짜 본연의 자신이 될 수 있고, 그곳에서 인정받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앎의 일을 해야 한다. 당신은 여기에 와서 하기로 한 일을 완수해야 한다. 그것이 의미와 가치의 본질이며, 본인을 위한 성취의 본질이다.

큰 공동체 영성에는 창조 이야기가 없다.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도 없다. 단지 공헌을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앎을 발견하느냐 발견하지 못하느냐, 앎의 관계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 하는 일만 있다. 앎을 발견하지 못하고, 앎의 관계를 맺지 못하고, 공헌을 하지 않는 한, 존재는 발현된 현실에서 계속 살아갈 것이고,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어려움과 참상 및 여기에 내재한 온갖 문제들을 체험할 것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오직 일어나고 있는 일만 있을 뿐이다. 만약 당신이 시작과 끝이 필요하다면, 당신은 그것들을 혼자서 상상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상상한 것을 믿을 수 있다.

실제로는 시작이 있었고 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작은 매우 오래전이었고 끝은 아주 먼 미래에 있어서 그것은 지금 당신이 있는 곳과는 무관하다. 일이 끝나면, 그것이 끝이 되겠지만,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래서 큰 공동체 영성에는 인류 종교에 지배적인 많은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큰 공동체 전역에 걸쳐 존재한다. 권위자와 정부가 종교를 이용하여, 충성과 복종과 협동을 조장하는 곳에, 또 개인의 의지와 지성에 초점을 맞추는 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큰 공동체 전역에 걸쳐 숨어 지내는 진짜 앎 공동체에서는, 이것은 주안점이 아니다. 이들은 진정한 큰 공동체 영성을 실천하고 베푸는 공동체이다.

큰 공동체 영성에는 모두가 지지해야 하는 위대한 영웅인 개인은 없다. 마스터도 없고, 발현한 삶에서 완벽하게 진보한 개인도 없으므로, 영웅 숭배와 마스터의 경지와 같은 모든 문제를 다행히 피할 수 있다.

당신을 구원할 유일한 것은 앎이다. 그래서 당신은 헌신해야 하며, 앎이 당신 삶에서 드러나도록, 또 당신을 세상에 오게 한 큰 목적에 따라 앎이 자신을 표현하도록 기반을 닦아야 한다.

훌륭한 교사들이 있고, 훌륭한 실연들이 있으며, 큰 희생들이 있다. 하지만 어떤 이도 다른 모든 사람의 신이 되지는 못한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진실하고 적절하다.

영웅 숭배는 다른 모든 이의 내면에 있는 앎의 현실을 부정하며, 사실 매우 고상한 이에 대한 잔인한 인정 방식이다. 그들은 증오와 비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경험될 수 없으므로, 십자가형을 당할 수밖에 없다. 만약 당신이 그들과 함께할 수 없다면, 그들과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에게도 그들에게도 잔인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큰 공동체에서 앎 공동체는 영적 초점을 순수하고 건전하게 유지하기를 원한다. 앎 공동체는 세계 정부들이나 국가 사회들의 조종과 책략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영적 초점이 유지되기를 원한다.

앎 공동체는 종교의 한계를 이해하지만, 앎의 불이 계속 살아서 밝게 타오르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앎의 불은 정화의 불이고, 복원의 불이며, 자율권의 큰 불이기 때문이다. 이 자율권을 통해, 당신은 힘과 에너지, 헌신과 결단력을 지닐 수 있고, 당신에게 운명 지어진 큰 활동들을 수행할 수 있다.

큰 공동체 영성에서 앎은 자유의 기반이다. 왜냐하면 앎은 정신 환경에서 영향받거나 지배받을 수 없는 당신의 유일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것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인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만약 당신이 큰 공동체 교육을 통해 성장하고, 영적 현실과 이해를 통해 성장하려고 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은 이것이 얼마나 기본적이고, 얼마나 핵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앎이 큰 공동체를 준비하는 데 가장 핵심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당신 이성을 준비시킬 수도 있고, 당신 관념을 발전시킬 수도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심지어 더 큰 제도를 정착시킬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은 더 강력한 세력의 지배와 통치 아래 놓일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이 큰 공동체에서 아무리 강하더라도, 당신보다 더 강한 다른 집단이나 국가는 항상 존재한다. 권력 추구에는 끝이 없다.

큰 공동체 영성에는 천국과 지옥이 없다. 착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나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것은 부족 신화이다.

당신의 지옥은 앎 없이 사는 것이며, 당신은 매일 지옥에서 산다. 그것이 지옥이다. 더 깊은 지옥은 더 많이 앎 없이 사는 것이다. 지옥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지만,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결국 당신은 앎을 발견할 것이고, 발현된 삶에 있는 동안 앎을 표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중간에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 고향에 있는 영적 가족에게 돌아가면, “음, 이거야! 그런데 내가 잊었어. 나는 되돌아가야 해!”라고 말하며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

역사와 문화의 영향력이 없다면, 당신은 영성이 매우 단순하고 단도직입적이라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신비로우며, 가늠할 수 없다. 당신은 영성을 이해할 수 없다. 오직 체험하고 표현할 수만 있으며, 체험하고 표현한 것을 이해하는 법을 배울 수만 있다. 하지만 당신의 이성은 앎이 무엇인지, 큰 공동체 영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완전한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인류가 큰 공동체 영성을 배우는 것이 지금 지구에 필요하다. 이것은 세계 종교를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들에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가능성을 주고, 큰 공동체 맥락 안에서 생존하는 능력을 주려는 것이다.

당신이 큰 공동체에 대비하려면, 또 인류가 지구에서 앎을 계속 살아 있게 하고, 인류의 자연 유산인 인류의 능력과 힘을 얻을 수 있으려면, 큰 공동체 영성을 배워야 한다. 지구에 기반을 둔 종교를 이해하는 것으로는 이러한 것들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구에 기반을 두었고, 인류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문화와 역사의 영향력 아래 묻혀 있기 때문이다.

큰 공동체 영성을 지금 지구에서 배우는 것은 필수이다. 비록 모든 사람이 이것을 배울 수는 없겠지만, 상당한 수의 사람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을 배우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하며, 그들 삶의 모든 측면에서 그들에게 줄 큰 보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단순함과 이 힘, 이 명확함으로, 당신을 괴롭히는 집착과 문제들이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고, 큰 힘과 능력이 당신 내면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웅 숭배도 없고, 천국이나 지옥도 없다면, 또 지구에 기반을 둔 모든 종교의 매우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온갖 이러한 부수적인 믿음이 없다면, 당신은 당신의 길과 목적을 찾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삶에서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출현을 지지하는 힘들과 그 출현을 반대하거나 조종하려는 힘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인류가 지구에서 앎을 유지하고 미래에 앎을 회복할 어떤 가능성이라도 지닐 수 있으려면, 큰 공동체 영성을 실제 있는 그대로 배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인류는 또 다른 기술 사회, 정신적으로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사회가 될 것이고, 이들의 삶은 획일화되어 정해진 기준에 완전히 순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회는 인류를 단지 훌륭한 노동력이나 의존국으로 이용할 뿐인 다른 종족들에게 지배받게 될 것이다.

이미 지금 지구에서, 기술은 젊은 세대들에게 신이나 구원의 은총, 진정한 영감으로 보인다. 당신이 기술을 숭배하는 것은 당신에게는 기술이 기적적인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술은 당신을 속박에 빠뜨리고, 결과적으로 당신은 내적 권한을 잃는다.

사람들은 “나는 이 가전제품 없이는 못 살아!” 또는 “나는 이 기계 없이는 못 살아” 그리고 “어떻게 내가 이것 없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타고난 재능을 잃고, 세상과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잃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통찰과 앎을 깊이 체험하는 능력을 잃기 시작한다. 이 능력은 개인 내면에 있는 앎의 출현을 예고해준다.

지금은 큰 공동체 영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울 때이다. 이 책은 입문서로서 역할을 하며, 이 입문서는 큰 공동체를 준비하는 데 절실히 필요한 것이고, 큰 공동체의 영성을 배우는 데 필요한 것이다.

큰 공동체 영성에 대한 큰 가르침은 우리의 책 가운데 큰 공동체 영성이라는 제목의 또 다른 책에 제시되어 있다. 그 책을 공부할 것을 권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그 책이 당신 내면에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든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준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 책에 낯설고 생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 책은 당신에게 이미 있는 앎이라는 큰 하사품을 부르고, 삶에서 더 높은 전망점에 도달하는 법을 당신에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 전망점에서 당신은 세상의 움직임, 여기 있는 큰 공동체 세력 및 여기에 수반하는 모든 것을 점차 분별할 수 있다.

당신이 보기 시작하면, 큰 공동체에서 영성이 의미하는 것은 지구에 있는 영성과는 매우 다르지만, 보편적인 그 기본 요소들은 여전히 여기에서도 진실이다.

지구에 있는 위대한 영적 대변인들, 위대한 교사들 역시 신성한 본성과 목적의 본질적 체험과 의미로 인류를 다시 데려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교사들이 세상에 알려질수록, 그 가르침은 비난받고 변질하였으며, 국가의 도구가 되었다. 자연스러운 전달 과정이 좌절되고 방해받았다.

그렇지만 당신도 큰 차이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천국은 어찌되었든 보장되어 있으므로, 천국이라는 마지막 보상이 없는 영성과 같은 것에서 알 수 있다. 당신에게는 이제 지옥이 필요 없다. 지옥이 필요한 것은 책임지도록 당신에게 동기부여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지옥이 만들어졌다. 즉, 사람들에게 동기부여 하고, 일하게 하고, 복종하게 하고, 그들에게 의도한 것, 그들이 성취하기를 국가가 원한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하려고 만들어졌다.

이때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동기가 완전히 부정된다. 앎 없이 사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것이고, 앎 없이 맺는 관계는 어떤 성공이나 만족감도 가질 수 없으며, 당신의 참된 본성을 체험하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인류가 지금 고통받고 있는 온갖 장애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것을 마침내 깨닫는 것보다 더 동기부여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마침내 자신의 삶에 있는 진짜 성향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이러한 것은 충분한 동기부여가 아닌가?

당신에게는 이제 지옥이 필요 없다. 당신은 이미 지옥에 살고 있으니, 지옥 밖으로 나가는 길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아주 충분한 동기이다.

이 관점으로 큰 공동체를 보면, 당신은 신의 일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신은 영향을 주지, 개입하지는 않는다. 신은 가시 영역과 불가시 영역 모두에서 개인들을 통해 일한다. 왜냐하면 신은 한 개인으로 있기에는 그 자체로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현된 삶 전역에 걸쳐 일하는 불가시 세력들이 있으며, 이들은 모든 곳에 있는 개인들이 앎의 필요성을 깨닫도록 이끌고, 그들이 앎을 발견하여 표현하고, 성취하도록 돕는다.

이것이 우주 전역에 걸쳐 창조주가 하는 일의 핵심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당신은 지금 지구에서 창조주가 어떻게 일하는지 알 수 있는 관점을 얻기 시작할 것이다. 신은 앎을 통해 분리된 이들을 회복하고, 앎의 관계들을 맺으며, 앎 공동체를 구축하고, 이 큰 회복에 참여한 이들이 모두 삶의 모든 분야에서 자신의 독특한 선물과 공헌을 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은 큰 영적 일이다. 이것은 발현된 삶이 시작된 이래로 큰 공동체에서 계속되어 왔으며, 발현된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작과 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작은 어제가 아니었고, 끝도 내일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당신의 일은 공헌하는 것이고,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신 내면에 있는 당신 공헌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큰 공동체를 배움으로써 공헌의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증거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큰 공동체 앎길의 학생이 됨으로써 앎을 회복하는 법을 알 것이고, 큰 공동체에 대비하고 큰 공동체 영성의 의미와 본질을 배우는 법을 알 것이다.

이때 당신의 인간성은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활기를 되찾고 다시 활성화된다. 왜냐하면 한 인간으로서, 당신은 이 시기에 세상에 제대로 참여하고 공헌하는 데 필요한 것을 받았기 때문이다. 창조주의 일은 당신을 이 공헌으로 데려가고, 당신을 준비시키고, 당신이 해낼 수 있게 하고, 세상에 이 공헌을 하도록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여기서 당신의 성취를 찾을 수 있게 한다. 세상에 있으면서 다른 성취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