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shall Vian Summers
on 2월 6, 1997
1997년 02월 06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우리는 큰 공동체를 준비하는 맥락과 앎길을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맥락에서 정직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앎을 체험하는 것은 깊은 정직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모든 고려 사항보다도 진실을 알고 싶어 할 때 얻는 결과이다. 앎길을 배우는 것은 정직의 길을 배우는 것으로, 당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의 정직을 넘어 당신이 진정으로 아는 것의 정직으로 가는 길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작하려면, 당신은 자기 성향에 정직해야 한다. 당신이 더 큰 자유와 능력을 얻어 삶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적어도 안다면, 그리해야 한다. 당신은 단지 시작하기 위해 이 정직이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아직 이만큼 정직하지 않다. 당신에게 더 큰 정직이 있어야 지구에 있는 큰 공동체 세력을 볼 수 있고, 그 세력이 실제로 무엇이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전망점을 얻을 수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당신에게 모든 답을 주지도, 모든 것을 알려주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스스로 알아내야 할 어떤 것들이 있기 때문이고, 우리는 믿음이 생기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앎이 일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지구의 지배권을 두고 경쟁하는 경쟁자들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당신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이곳에서 영향력을 구축하고, 이렇게 하면서 그들 자신의 목표와 임무를 이행할 것이다. 그들은 인류의 영적 우주론의 일부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다른 세계에서 온 지각 있는 존재들일 뿐이다. 사실, 그들은 자원을 찾고 동맹을 맺기 위해 다른 세계에서 이곳에 온 지각 있는 존재들 중 몇몇 그룹을 대표한다.
더 많은 것을 알려면, 당신은 스스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문은 우리가 열지만, 통과는 당신이 해야 한다. 그들의 이름이나 어느 세계에서 그들이 왔는지는 당신이 알 필요 없다. 그것은 이 시점에서 무의미할 것이다. 이 정보는 진지한 앎의 학생을 위해 따로 보관된다.
왜 우리는 이 정보를 주지 않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의 진실함을 소중하게 여기고, 당신이 그 진실함을 기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직에 대한 당신의 잠재력을 소중히 여기며, 당신이 자신의 정직함을 기르기를 원한다. 우리는 당신의 힘과 결단력을 소중하게 여기며, 당신이 그 힘과 결단력을 키우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이 책을 읽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취해 믿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일으키거나 꾸미려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당신에게는 어떤 관점이 필요하고, 그것은 사실이다. 제대로 보려면 어떤 방향이 필요하다. 우리는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며, 당신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여행을 해야 한다. 단순히 큰 공동체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거나, 그들이 여기에 있을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이것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앎을 장려하지, 관념만을 장려하지 않지만, 관념은 당신을 앎으로 데려가고,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게 하고, 앎의 문턱으로 데려가는 데 필요하다. 그것이 관념이 당신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봉사이다. 하지만 이 문턱을 넘어서면, 관념은 더 갈 수 없다. 당신은 관념으로 견고하게 고안된 개념 없이 앎을 체험하는 순수한 영역을 향해 모험한다.
그곳에 다다르려면, 당신은 자신에게 정말 정직해져야 한다. 정직은 당신이 원하는 것과 아는 것을 분별하는 과정으로 들어가려면 필요하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아주 친숙할지 모르지만,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아는가? 당신은 당신의 존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무엇이 당신을 세상에 오게 했는지 아는가? 당신은 이곳에서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지 아는가?
당신에게 이런 것들에 대한 견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정말로 아는가? 당신은 “글쎄, 나는 평화를 가져오려고 이곳에 왔으며, 사람들을 도우려고 이곳에 왔다.”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것들은 그저 개괄적인 것에 불과하다. 당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그것보다 더 구체적이다. 당신이 이곳에 온 사명은 그것보다 더 구체적이다.
우리는 당신이 아직 이것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만약 당신이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당신은 자신이 아직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할 것이다. 그것은 좋다. 매우 정직해서 좋다. 정직하게 평가하는 것은 좋다. 당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은 좋다. 어쩌면 당신은 사소한 몇 가지만 알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은 퍼즐에서 몇 조각만, 신비에 대한 몇 가지 단서만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정도면 시작하기에 충분하다.
문제는 사람들이 정말로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할 때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생각과 그들 내면에서 정말로 아는 것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각하는 마음과 아는 마음을 구별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음, 나는 매우 직관적이야.”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아는 마음이 아니다. 직관적인 것은 그저 좀 더 민감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당신이 내면에 있는 앎의 현실을 찾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앎이 무엇이고, 앎이 당신 삶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당신이 앎에 충분히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당신은 앎과 본연의 당신이 동일하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충분히 가까이 오지 않았다.
이 깨달음들은 모두 앎길에서 엄청나게 높은 문턱들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문턱에 접근할 것이며, 그 문턱들은 한 개 이상이다. 각각의 문턱에는 큰 정직과 명확한 자기 평가가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상당한 혼란이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자기 내면에 있는 진짜인 어떤 것을 알고, 삶에서 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미신을 믿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져서도 안 되고, 그저 이기적으로만 접근해서도 안 되며, 두려움이나 야망에 지배를 받아서도 안 된다.
그래서 당신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고, 그것이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모르며, 그것에 무엇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당신에게는 정직이 있다. 당신은 다음 계단을 밟는 것으로 자신에게 응답한다. 즉, 앎에 책임(response-ability: 응답 능력)을 진다. 앎은 단지 당신에게 다음 계단을 밟는 것만 요청한다. 앎은 당신이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깨닫도록 하거나, 아직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성취하도록 하거나, 아직 될 수 없는 것이 되도록 요청하지 않는다. 앎은 단지 다음 계단을 밟는 것만 요청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단순히 다음 계단만 밟는 것에 자신이 없다. 그들은 전체 그림을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앎이 그들에게 전체 그림을 모두 드러내지 않을 것이므로, 그 그림을 스스로 지어내 그리거나, 다른 사람들이 지어낸 것에서 그 그림을 얻는다. 그들에게 완벽한 설명이 있을 때까지 그들은 자기 생각과 믿음으로 모든 공간을 채운다.
어쩌면 당신도 어느 정도 이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모든 답을 아는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와 이야기한 것을 확실히 기억할 수 있는데, 그들이 정말로 알았을까?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신념에 매우 확고했을지도 모르고, 그들이 보고 느끼는 것에 대해 매우 강하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알았을까? 그들은 자신이 믿은 것과 아는 것 사이의 차이를 알 만큼 충분히 자신에게 정직했는가?
당신은 심지어, “나는 이것이 진실임을 안다! 이것은 진실이다. 나는 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신은 그들이 그것을 실제로 모르지만, 심지어 목숨을 걸고 자신의 관념을 옹호한다는 것을 알 수도 있다. 당신은 사람들이 자신의 관념을 위해 삶을 내놓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관념을 위해 삶을 희생하다니, 말이 되는가?
물론 극단적인 상황에서 참되고 진짜이며 영원한 것을 위해 당신 삶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가치가 있을 수도 있지만, 관념을 위해 당신 삶을 내놓는다면 가치가 있겠는가? 그 관념에 앎이 스며 있지 않는 한, 그 관념에는 실체가 없다. 비록 모두가 그 관념을 믿고 의지하더라도, 앎이 없으면, 실체가 없다.
내가 말하는 이것들은 깨달음을 나타낸다. 각각의 깨달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턱이지만, 삶의 과정에서 당신이 누구이고 왜 이곳에 왔는지를 온전히 깨달으려면, 당신이 넘어야 할 큰 문턱들이 있다.
이러한 큰 문턱에는 엄청난 자기 평가와 재평가가 필요하다. 자기 평가와 재평가에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정직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생각하거나, 느끼거나, 믿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큰 정직은 당신이 아는 것을 느끼는 것이고, 당신이 아는 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당신이 아는 것과 하나가 되려면, 아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아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당신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다른 생각이나 마음속의 다른 힘과 당신이 아는 것을 분별해야 하며, 지금까지 당신을 형성한 온갖 설득과 조건화와 당신이 아는 것을 분별해야 한다.
여기에는 엄청난 선별 과정이 있다. 이것은 마치 집에 있는 벽장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고, 정말로 유용하고, 정말로 가치가 있는 것만 간직하겠다는 마음 자세로 벽장을 뒤지는 것과 같다. 그 외의 것은 다 처분한다. 그러면 당신은 결국 꽤 빈 벽장을 갖게 되겠지만, 그것으로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오직 단계적으로만 할 수 있는 마음 정리법을 당신이 배우면, 당신 마음속에 많은 공간이 생긴다. 당신 마음은 더 이상 생각과 믿음과 기억으로 가득 차 있지 않다. 당신은 정리해야 할 것들을 정리했다. 왜냐하면 문턱마다 더욱더 그것들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앎길을 실천할 때, 당신은 고요히 있는 법을 배우며, 그러는 동안 현실적이지 않거나 당신에게 의미 없는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냥 서서히 사라진다. 그러면 마음속에 앎이 채워질 수 있는 많은 공간이 생긴다.
앎을 준비하기 시작한 사람은 누구나 앎의 초보 학생인데, 이 초보 학생에게 자신이 믿는 것이나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것, 또 에너지를 쏟는 것이 대부분 실제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정신이 번쩍 드는 깨달음이다.
이것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실감은 당신이 정말 중요한 것을 접할 수 있고, 정말 의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정말 가치 있는 것을 확인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로 즉시 상쇄될 수 있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마침내 자신을 의미 있는 존재로 체험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체험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체험하는 것은 당신이 동일시하고 헌신하는 것에서 오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작은 것에 헌신하면, 작게 느껴질 것이고, 당신이 큰 것에 헌신하면, 크게 느껴질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길이 없다. 만약 당신이 무능하다고 느끼고, 당신 삶이 무력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이 자기 내면에 있는 큰 것과 동일시할 필요가 있고, 삶에서 자신을 큰 것에 내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처방이지만, 해내기가 쉽지 않다. 왜 해내기가 쉽지 않은가? 바로 이 정직의 문제 때문이다.
여기서 당신 내면에는 두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각하는 마음이 있고, 아는 마음이 있다.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생각하는 마음을 아는 마음과 함께하도록 데려가 아는 마음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앎과 생각하는 마음의 참된 관계이고, 생각하는 마음에 진정한 효능과 가치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앎이 발견될 때까지는 생각하는 마음이 유일한 마음인 것처럼 보이며, 이 마음은 파괴와 불확실성과 절망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또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모든 방어 기제를 구축한다. 생각하는 마음은 취약하고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삶에 대항하여 큰 방어책을 세우려고 한다. 하지만 이 마음은 진짜 당신이 아니다.
물질세계를 헤쳐 나가고, 정신 환경에서 일하려면, 당신은 생각하는 마음이 필요하지만, 생각하는 마음은 당신 내면에 있는 큰 마음과 큰 현실을 섬기기 위한 메커니즘이다. 당신이 큰 현실과 동일시하는 법을 배울 때, 당신은 이 마음이 매개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은 이 마음이 일시적인 것이고, 영원하지 않으며, 단지 지금 이곳 이 세상에 있는 당신 삶에만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 영적 가족에게 돌아갈 때는 이 생각하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지금 당장은 생각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중요한 물음은, “이 생각하는 마음이 무엇을 섬기는가?”이다. 생각하는 마음은 마음 자신을 섬기거나, 다른 누군가를 섬기거나, 아니면 앎의 큰 힘을 섬긴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마음은 오직 섬기기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앎길에서 큰 진실이고, 그것도 자유롭게 해주는 진실이다. 왜냐하면 이를 이해한다면, 당신은 마음이 충성하는 것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충성하는 것을 바꿈으로써, 당신은 당신이 마음이 아니라는 것과 당신이 마음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음이 당신 전부라면 어떻게 마음이 바뀔 수 있겠는가?
당신이 앎길을 배우면, 당신 마음은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당신 마음은 부인되거나, 단절되거나, 파괴되지 않을 것이며, 비난이나 비방을 받지 않을 것이다. 마음은 다시 쓰일 것이고, 탈바꿈하게 될 것이며, 훌륭한 소통의 도구가 될 것이다. 그것이 마음의 궁극적인 목적이고 가치이다.
마음이 영을 섬기면, 몸은 영을 섬길 수 있고, 모든 것이 영을 섬긴다. 이것은 당신 체험의 완전한 탈바꿈이다.
이것의 근본적인 현실은 정직이다. 당신은 자신의 마음에 정직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과 그들의 마음에 정직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앎에 정직할 수 있는가? 앎에 정직하다는 것은 당신이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이 앎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이 체험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따르는 것이고, 앎을 받아들이고 체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며, 앎이 실제로 무엇인지 그리고 앎이 왜 여기에 있는지를 인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근본적으로 모든 종교 수행, 모든 영적 초점은 앎의 회복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앎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여 당신이 앎을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앎이 세상에 알려질 때 종교의 온갖 조건과 선입견 없이 앎을 볼 수 있게 한다.
원초적 영성은 앎이다. 영적 삶의 본질은 앎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때 당신이 믿는 것, 생각하는 것, 평가하는 방식, 인식하는 것, 선택하는 것이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훌륭한 도구가 된다. 이때 당신의 참 자아가 드러나, 당신 마음이라는 매개체와 몸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하여 세상에 큰 것들을 전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이 일을 끝마치면, 당신은 영적 가족에게 돌아가고, 그러면 당신 일은 끝난다.
영적 깨달음에 대한 세상의 가르침은 오류로 가득하다. 삶에 큰 돌파구가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고, 이것이 깨닫는 체험에 해당할 수도 있지만, 참된 깨달음의 상태는 저승에 있다.
당신은 이곳에 공헌하려고 왔지, 자신을 위한 큰 보상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공헌의 본질을 알고, 삶에서 지혜를 가지고 그 본질을 체험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울 때 당신은 큰 보상을 받을 것이다.
세상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비록 당신이 인간 체험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성장할 수 있다고 해도, 당신은 여전히 큰 공동체에서 초보자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는 것과 같다. 물론, 당신은 졸업했지만, 이제 새로운 반에서는 초보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큰 공동체 앎길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당신은 세상 영성과 큰 공동체 영성 둘 다 교육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큰 공동체에 대비해 당신을 준비시킬 수 있고, 동시에 이 교육을 당신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르침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준비와 교육이 동시에 전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구가 큰 공동체에 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사에서 현명하게 역할을 다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매우 가치 있고, 좀처럼 성취하기 어렵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인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류에게 큰 문제이고, 큰 기회이다. 그리고 인류에게 중요한 요건이고,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으니, 이 책은 당신에게 정직을 연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정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밝혀보겠다. 진정한 정직은 앎에 책임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앎은 세상에 대단히 미지의 것이므로, 이것은 사용하기 매우 어려운 정의이다. 당신은 이 책을 읽고, “나는 이 책에 대해 공감할 수 없어. 나는 이 개념들에 공감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들은,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도 공감하지도 않아.”라고 말하겠지만, 그들이 실제로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실제로 말하는 것은 그들의 기존 관념을 이 새로운 정보와 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새로운 정보는 현재 내 생각이나 체험에 부합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이것은 발견하려는 동기가 되어야 하며,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려는 동기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보통 일어나는 일은 사람들이 이것을 핑계 삼아 새로운 정보를 일축하고, 스스로 새로운 체험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배울 필요가 있어. 나는 아직 이것을 배우지 않았으니, 배울 필요가 있어.”라고 말하는 대신, “음, 나는 이것과 관련이 없어.”라고 말하고, 이것을 지나친다.
당신의 관념에 책임지는 것은 정직이 아니라, 기만이다. 당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큰 것에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이 큰 것은 당신의 관념을 넘어서고, 필요하다면 관념에서 벗어나도록 당신에게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새 계시, 즉 새로운 영성, 세상에 살아 있는 새로운 체험, 확실성과 힘과 지혜를 체험하는 새로운 기반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미 배운 것을 미화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며, 세상에서 믿고 있는 것을 모두 입증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새 계시와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제공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이것은 희망과 두려움이 아닌, 현실에 기반을 둔 계시이다. 이것은 인간의 이상이나 인간의 근심이 아니라,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기반을 둔 계시이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글쎄, 나는 이 글에 공감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아.”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괜찮으니, 다음 단계를 밟으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가 말하는 것을 모두 믿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우리가 말하는 것을 체험할 기회를 그들에게 주고 싶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체험이다. 만약 사람들이 우리가 말하는 것을 믿지만, 알지 못하면,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어떤 가치도 없고, 아무 쓸모도 없다. 물론, 그것은 그들을 큰 깨달음으로 데려갈 수 있지만, 이 깨달음으로 들어가려면 자신의 관념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지금 정직을 말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정직을 생각할 때 보통 떠올리는 것보다 더 큰 정직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정직을 생각할 때,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드러내거나, 자신이 행한 것을 드러내는 것을 떠올린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정직에서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만약 삶에서 새로운 것을 만나면, 당신은 내면 깊숙이 들어가, “이것은 내가 배워야 할 만큼 중요한가?”라고 자문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 마음에 귀 기울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 마음은 단지 기존 생각을 다시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더 깊이 귀 기울여야 하며, 당신의 존재인 당신 가슴의 수준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정직이다.
당신은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의 현재 생각이나 믿음에 반하거나 상충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은 지금까지 결코 체험한 적이 없는 것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접할 때, “아, 나는 이것과 관련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새로운 것에 대한 문을 닫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더 깊은 질문을 하지 않으며, 실제로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그 순간에 자신의 생각하는 마음이 지시한 것을 따를 뿐이다.
그들의 생각하는 마음은 큰 교육에 관심이 없다. 생각하는 마음은 주로 자신의 생존에 관심이 있다. 왜냐하면 앎이 없으면, 생각하는 마음은 두려워하고 세상에서 취약하기 때문이다. 앎은 생각하는 마음의 실제 기반이므로, 생각하는 마음에 정말 필요한 것은 앎이다. 마음이 봉사하기로 되어 있는 것은 앎이다. 하지만 앎이 없다면, 생각하는 마음은 자신을 보호하는 것과 주로 관련된 자신의 이익에만 봉사할 수 있다.
그래서 앎 없이 생각하는 마음은 주로 두려움에 지배를 받는다. 생각하는 마음은 자기 관념의 힘에서, 또 그 관념과 관련된 확신에서 안정을 얻는다. 비록 이것으로 생각하는 마음은 자신의 불안에서 일시적으로 편안해지지만, 자신을 해방하는 길을 열지는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글쎄, 나는 여기서 말하는 것에 공감은 하지만, 이해는 못하겠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은 괜찮다.”라고 말한다. 참된 이해는 진정한 준비와 참여의 결과이다. 큰 물음에 진정한 답은 일련의 말이나 견해가 아니라, 알아내기 위한 수단이다.
당신은 큰 공동체가 무엇인지 알아내야 할 것이며, 앎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앎길을 따르는 것, 앎길을 배우는 것,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당신은 이러한 것들을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당신은 여행을 해야 하며,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여행이다.
사람들은 답을 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게으르기 때문이고, 여행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자기 생각을 강화하고 싶어 한다. 그들의 마음은 감옥과 같고, 그들은 감옥에 더 많은 벽돌을 쌓고 회반죽을 바르고 싶어 한다. 그들은 벽을 더 두껍고 더 튼튼하게 만들어 세상과 단절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신을 가두는 것으로 그 대가를 치른다. 그들의 생각은 큰 차단막과 같다.
이것은 마음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지성을 활용하는 것도 아니며, 지적인 것도 아니다. 지성은 기꺼이 하는 마음이고, 소망이며, 적응하고 창조하는 능력임을 잊지 말라. 창조하려면, 적응해야 한다. 이 말은 당신이 변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뜻이며, 당신 생각이 바뀔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당신 생각이 이 순간 아무리 유용해 보여도, 바뀔 수 있어야 하며, 당신은 생각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생각이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으면, 생각은 당신을 구속할 것이고, 당신을 감금할 것이며, 당신이 진정으로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게 막을 것이다.
마음은 콘크리트와 같으므로 끊임없이 저어주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콘크리트를 젓는 것과 물을 추가하는 것을 멈추면, 마음은 굳어져서 당신은 마음과 함께 일할 수 없다. 사람들의 마음은 굳은 콘크리트처럼 된다. 당신은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없다. 그들은 사고방식이 완전히 고정된다.
그들의 존재는 그들 자신이 만든 것 안에 갇힌 죄수이다. 그들은 자신 주위로 담을 쳤다. 그들은 창조주가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고, 오직 자기 생각만 들을 수 있으며, 다른 이들의 깊은 마음이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들을 수 없고, 오직 자기 생각만 들을 수 있다. 그들은 삶을 실제 모습 그대로 마주할 수 없으며, 오직 그들 마음이 그들에게 드러내는 것대로만 삶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을 섬겨야 하는 것의 노예이다. 왜냐하면 마음의 참된 목적과 기능은 존재를 섬기는 것이고, 앎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정직이 단순히 자신의 관념에 순종하는 것이고, 자기 생각을 일관성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당신에게 말하는 것을 가슴에 새기라. 무엇이 중요한지 자신에게 깊이 물어보되, 즉각적인 답에 만족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은 더 깊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표면 마음에서 사는 것을 멈추고, 표면 마음 깊은 곳인 그 핵심까지 뚫고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표면 마음에 있는 것은 장벽, 장애물, 보호막, 흉터 조직과 같이 겹겹이 조건화된 것들이다. 마음은 앎이 자유롭게 할 때까지는 마음의 표면에 있는 기계와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반응한다. 그들은 자신이 인지하지도 못하는 힘에 지배받는다. 그들은 결코 자기 생각에 의문을 제기할 생각을 하지 않으며, 결코 자신의 가치관에 실제로 의문을 제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생기는 불확실성을 다루고 싶어 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은 하찮은 것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가진 것을 위태롭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당신이 자신에게 정직하다는 것은 앎에 정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앎이 무엇인지 모르면, 당신은 앎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앎으로 가는 길은 당신이 앎을 요청함으로써, 또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넘어섬으로써 찾으며,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나 믿는 것, 지금까지 경험한 것을 넘어섬으로써 찾는다.
앎으로 가는 계단으로 준비하면, 당신은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앎으로 가는 계단은 당신 믿음에 호소하여 확실성과 힘과 지혜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앎에 호소하는 법을 당신에게 가르친다. 이것은 당신 외부에 있는 어떤 초자연적 힘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며, 정신 환경에서 당신 마음을 지배하고자 하는 이가 누구든 그들에게 당신 마음을 여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에게 진실하다는 것은 앎에 진실하다는 뜻으로, 깊이 아는 것, 당신 삶의 진정한 의미와 흐름인 것에 진실하다는 뜻이다. 이 능력은 오로지 당신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으로, 또 앎이 드러날 수 있도록 당신 마음을 여는 것으로, 당신이 마음의 메커니즘을 꿰뚫어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마음을 고요히 하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마음을 인도하고 마음의 큰 역량을 기르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만 기를 수 있다.
여기서 마음은 섬기는 법을 배운다. 여기서 마음은 마스터인 체하는 것을 포기한다. 여기서 마스터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 완전히 바뀐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마스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큰 공동체에는 마스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앎이 마스터이기 때문이다. 앎이 당신 안에 있는 마스터이다. 앎은 마스터인 창조주가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마스터이다. 앎은 당신을 신과 연결하고, 신성과 연결하며, 진리와 연결하고, 목적과 연결하며, 삶에서 의미 있는 모든 것과 연결한다.
앎이 마스터인데 어떻게 당신이 마스터가 될 수 있겠는가? 당신은 단지 마스터를 표현할 수만 있으며, 단지 받아들일 수만 있다. 당신은 단지 마스터가 당신을 탈바꿈하고, 당신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당신 삶을 전환하게 할 수만 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마스터의 경지이지만, 매우 겸손한 방식의 마스터 경지이다.
이것이 정직한 것이다. 이것이 큰 것과 작은 것을 아는 것이다. 당신의 몸과 마음은 작고, 당신의 존재는 크다. 우리는 작은 것이 참된 표현을 할 수 있도록 당신을 큰 것으로 데려간다. 그러면 몸도 더 커지고, 마음도 더 커진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이 더 큰 어떤 것을 표현하고, 더 큰 어떤 것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은 더 큰 어떤 것의 매개체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고, 이것이 바로 큰 공동체에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인류에게 큰 공동체에서 힘을 주고, 우위를 차지하게 할 것이다. 우위를 차지하게 하는 것은 인류의 기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기술은 아직 매우 원시적인 발전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우위를 차지하게 하는 것은 더 크고 더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큰 공동체에서 기술은 무엇인가? 결국 당신이 기술적으로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그것은 한계에 다다른다. 이때 당신은 매우 큰 환경인 정신 환경에서 힘을 기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앎이 없다면, 당신에게는 여전히 큰 기반이 없다. 당신은 여전히 진실을 분별할 수 없으며,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상황의 의미도 제대로 알 수 없다. 우리는 당신에게 이 큰 공동체 관점을 제공하여, 당신이 자기 내면에 있는 큰 정직을 회복할 수 있게 하고, 당신이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에 무엇이 필요한지, 그것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게 한다.
우리는 당신이 볼 수 있는 다른 전망점을 당신에게 제공한다. 이 전망점에서 당신은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을 볼 수 있고, 거기에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당신의 두려움과 욕구와 선호 너머를 볼 수 있고, 지금까지 당신을 형성한 온갖 사회적 조건화 너머를 볼 수 있고, 당신 시대의 일반적인 태도와 신화 너머를 볼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닌 당신의 맑은 눈으로 볼 수 있고, 당신 내면에 있는 앎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글쎄, 나는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더 많은 것을 제공하기 위해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보를 찾고 있으며, 사실과 수치, 날짜와 장소를 원한다. 그리고 큰 공동체에 얼마나 많은 거주 행성이 있는지 알고 싶어 하고, 얼마나 많은 종족이 지구를 방문했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그 종족들의 추진 체계를 알고 싶어 하고, 그 종족들의 이름과 언어를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정보를 원한다.
만약 이 정보를 인지하고, 이 정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는 앎이 당신에게 없다면, 이 정보는 쓸모가 없을 것이다. 도서관에 가면, 당신이 소화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가 있다. 정보가 너무 많아서 사람들은 그 정보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큰 공동체 세력들이 있는 것에 대한 정보가 매우 많다. 매우 많은 목격 사례와 매우 많은 증거가 있다. 만약 당신이 그 증거를 찾는다면, 또 그 증거를 찾는 데 마음을 연다면, 증거는 거기에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증거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그들은 그 증거를 이해할 수 없으며, 그 증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별하는 법을 모른다. 당신은 하늘에서 큰 공동체 우주선을 수백만 번 목격할 수 있지만, 앎이 없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정보를 구하지 말라.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당신이 깨닫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이 그 정보를 보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당신은 겉모습 너머를 볼 수 있고, 설득 너머를 볼 수 있으며, 조종 너머를 볼 수 있다. 당신 정부들의 조종, 종교 기관들의 조종, 심지어 이 순간 인류와 교류하고 있는 큰 공동체 세력들의 조종 너머를 볼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정보를 원한다면, 당신은 아직 자신에게 정직하지 않다. 정보는 당신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는 자신이 보는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어떤 발자취를 따라가야 하는지, 어떤 단서가 중요하고, 그 단서들을 어떻게 꿰맞추어야 하는지 알려면, 당신에게는 내면에 있는 큰 지성이 있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방문자들의 이름을 알며,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안다. 이것은 당신에게 전혀 의미가 없을 것이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로 가득하다. 가치 있는 것은 그들의 이름과 온 곳 사이의 관계이다. 그 관계는 중요하다. 그 관계가 언젠가 필요하게 되면, 그 이름은 나중에 채울 수 있다.
당신은 사람들의 이름을 안다. 당신은 그들 중 일부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도 알지만, 그들이 진짜 누구인지 아는가? 당신은 그들의 삶이 진짜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아는가? 그들이 무엇을 하기로 되어 있는지 아는가? 그들의 깊은 성향을 아는가? 그들이 왜 여기 왔는지 아는가?
그러므로 큰 공동체를 숙고하고, 똑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라. 당신은 자신의 마음으로 답을 채우고, 다른 누군가의 생각에 기반을 두고, 다른 곳에서 답을 얻거나, 아니면 자신이 알 수 있는 곳인 앎으로 가는 길을 찾을 것이다.
앎길은 정직의 길이며, 관계의 길이다. 그리고 더 크게 참여하는 길이고, 삶에 대한 큰 인식과 이해를 얻는 길이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앎길은 세상에서 당신 마음과 당신 존재를 완전히 탈바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현재 필요한 것이 있는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왔고, 미래를 위해 세상에 필요한 것에 봉사하기 위해 왔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여기에 있고, 동시에 세상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