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received by
Marshall Vian Summers
on 1월 31, 1997

1997년 01월 31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인류에게 큰 변화가 닥쳐오고 있음을 느끼는 사람이 지금 지구 전역에 걸쳐 대단히 많다. 그들이 이렇게 느끼는 데는 그들 사회나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실질적 변화에서뿐만 아니라, 그들 내면의 깊은 느낌에도 기인한다. 그들 중 일부는 희망에 차 있고, 대부분은 두려워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큰 보상과 성공이 인류를 기다릴 뿐이라고 추측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큰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고 예측한다.

현재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매우 걱정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큰 변화의 시기인 과도기에 사는 결과이다. 역사를 통틀어 이런 과도기에는 대단한 영적 선언들이 많이 나온다. 어떤 것은 황금시대를 예견하고, 어떤 것은 인간의 몰락과 종말을 예견한다. 이런 종류의 예언이나 사람들의 타당한 걱정은 모두 큰 전환점에서 사는 것의 일부이다.

이것에 대한 반응으로, 많은 사람이 인간 삶의 황금기나 순수시대라고 자신이 믿는 것을 재현하여 다시 체험해보고자 하면서, 고대 종교들 안으로 도피하고자 한다. 어떤 사람은 환상에 빠져 자신의 내적 체험이나 주변 변화에 대한 실질적 체험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가는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과거를 뛰어넘고, 과거가 나타내는 모든 것을 뛰어넘어 나아가고자, 용감하게 전진하려 한다.

이 세 가지 반응은 인류가 큰 전환점에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것에 대한 증거는 보려고만 하면, 도처에 있다. 그런데 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사람들이 주변에서 경험하는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들은 왜 침착하지 못하고 확신이 없는가? 무엇이 이런 불안과 걱정과 흥분을 자아내는가?

이 의문들에 답을 찾으려면, 당신은 인간가족의 희망과 두려움 너머를 보아야 한다. 끝없는 성공 방안이나 많은 사람에 의해 예견된 완전한 몰락 너머를 보아야 한다. 이 두 극단의 인식 사이에 있는 모든 다른 예측에서, 당신은 먼저 자신을 넘어 큰 공동체를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큰 공동체에 있는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제법 분명하다. 왜냐하면 현재 세상에 널리 유포된 미래에 대한 예측에는 큰 공동체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무 언급이 없는 것은 인류가 그저 계속 고립상태로 살 것으로 사람들이 믿으면서,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하고, 자신의 강점을 이용하려고 하고, 눈앞에 있는 어려운 변화나 다가오는 어려운 변화에 적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밝고 어두운 모든 전망에서, 당신은 큰 공동체를 언급한 것이나, 인류의 오래된 고립이 끝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사람들은 여전히 고립상태에서 생각하고 있으며, 고립상태 안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 열망을 투사하고 있다.

지금 세상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인류의 고립이 끝났으며 큰 공동체 세력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중요한 어떤 것, 인간이 만들거나 실수한 것의 산물이 아닌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 주목할 만한 어떤 것이 변하고 있다는 증거가 나날이 늘어난다. 인간가족이 만들 수 없는 어떤 것이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나날이 그 증거가 늘어나며, 나날이 더 많은 사람이 알아차리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참으로 많이들 모르고 부정하고 있으며, 여전히 이 증거가 엄청나게 조작되고 있다. 사람들이 신뢰할 만한 어떤 정보를 얻기가 지금 대단히 어렵다.

지구 정부들은 그들이 아는 것을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지구 종교단체들은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사람들은 미신으로 가득 차 있고, 희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터무니없는 기대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누가 명료하게 볼 수 있겠는가? 누구의 생각이 명료하며,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사고방식이나 믿음에 영향을 받지 않겠는가?

이에 대한 답은 당신 외부와 내부 양쪽에 있으며, 단순히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다. 당신은 세상의 큰 움직임에서 세상 안을 들여다보아야 하며, 사람들이 품고 있는 온갖 희망·믿음·두려움·열망 너머를 보아야 한다. 당신은 인간가족 너머를 보아야, 인류가 더 이상 홀로 있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지구 안에서조차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큰 공동체 세력이 이곳에 있고, 인류의 고립이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인류가 사는 이 지구가 큰 전환점, 즉 인류의 운명과 그 노력의 결과를 영원히 바꿀 전환점에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 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희망과 동경의 눈, 두려움과 공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것을 보아야 한다.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실제로 있는 것을 보기 위해 들여다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시간을 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을 너무 두려워한다. 또한, 삶의 신비를 뚫고 나아가려고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체험할 법한 혼란을 체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마음에 드는 입장을 취하여, 깊이 생각하거나 고려해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그 입장을 유지할 것이다.

세상 안을 들여다보라.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느껴보라. “지구에 우리만 있는가? 지구에 인류만 있는가? 인류는 지금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책임지고 있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리고 당신 내면을 들여다보라. 당신이 생각하거나 믿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마음, 당신 내면에 있는 진실로 아는 마음 안을 들여다보라. 이때 당신은 구체적 증거 또한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 내면에서 거짓된 것이 당신 외부의 거짓된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당신 내면에서 가장 참된 것은 당신 외부의 가장 참된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보려면, 당신은 보아야 하고, 인내해야 한다. 당신은 곧장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뚫고 들어가야 하고, 더 깊이 들어가야 하며, 이해해야 하고, 시간을 들여야 한다. 심지어 이것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 체험하기 시작하는 데도 필요하고, 과거와는 대단히 다른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하는 데도 필요하다. 누가 여기에 시간을 들여, 자기 삶의 의미와 운명은 물론 인류 전체의 현실과 운명을 숙고해볼 것인가?

이런 식으로 보려면, 당신은 젊은 눈을 가져야 한다. 만약 당신이 배움과 관념으로 가득 찬 삶을 입증하려고 하면, 당신은 주로 자신이 이미 믿는 것이나 이미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입증하고자 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세상을 들여다보지만, 이런 현실과 인류의 운명에 만족하고, 인간의 변화와 진화에 대한 근거에 만족하면, 당신은 증거가 사방에 널려 있어도, 그 증거를 보지 못할 것이다.

진실로 보려면, 당신은 열린 눈, 젊은 눈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당신이 젊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당신이 이전에 보지 못한 어떤 것이 기꺼이 드러나도록 해야 하며, 당신이 이전에 보지 못한 어떤 것을 기꺼이 보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당신이 이전에 보거나 체험하지 못한 어떤 것을 기꺼이 느껴보고 체험해보려고 해야 하며, 당신이 자신의 견해에 얼마나 많이 투자했든 상관없이 그 견해에 기꺼이 이의를 제기해보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볼 수 없으면, 당신은 알 수 없다. 당신이 알 수 없으면, 그때는 올바르고 적절하게 대응하는 법을 알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대응하는 법을 알지 못하면, 그때는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이 대응할 것이다. 당신이 길들여진 것이나 당신이 받은 영향,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받고 있는 영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방식대로 대응할 것이다.

사람들이 자유롭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다. 단순히 당신이 감옥에 있지 않거나, 누군가가 당신 문 앞에 보초를 서지 않는다고 해서, 또 당신이 사회에서 어떤 권리를 누린다고 해서, 이것이 실제로 당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만약 당신이 볼 수 없고, 알 수 없다면, 또 자신이 가장 깊이 체험한 것을 체험할 수 없고, 자신의 작은 개인적 영역 너머에 있는 큰 그림에서, 당신 주변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없다면, 만약 당신이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다면, 당신은 아직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자유가 당신을 부르고 있다.

당신에게 도전은 보고 알고 행동하는 것이며, 당신 삶 안에 새로운 기반인 앎의 기반, 영적 현실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다. 이때 당신은 자신이 이미 아는 것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며, 새로운 기반을 다진다. 당신은 새로 시작한다.

도움이 되어 당신이 미래로 가져갈 수 있는 것만 당신 미래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단계적으로 조금씩 뒤에 남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당신의 도전이다. 당신은 이것을 단지 자신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도 한다. 자신만을 위한다면, 당신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헌신하지 않을 것이며, 어려움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를 위하면, 큰 부름과 큰 책임이 있다.

이것이 당신의 도전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당신의 내적 현실은 당신의 외적 현실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므로, 당신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아야 하고, 어떻게 준비하는지 배워야 한다. 당신은 큰 공동체에 관해 배워야 하고, 큰 공동체 앎과 지혜가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워야 한다. 당신은 인류의 영성을 발견하고, 당신의 종교·전통과 일상 삶의 체험에 큰 공동체 영성을 가져가기 위해, 큰 공동체 영성을 체험해야 한다. 또한, 큰 공동체에 관해 배워야 하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아야 한다. 이것이 자신의 큰 도전에 응할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이하는 큰 도전이다.

사람들은 보통 결과를 원한다. “나는 내 목적이 무엇인지만 알고 싶을 뿐이며, 그것을 할 것이고, 어쩌면 해낼지도 모른다.” 알아가는 과정은 대단히 중요한데, 그들은 이 과정을 거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답을 알고자 하고, 결과를 알고자 한다. 그래서 스스로 답을 내리고, 스스로 결과를 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희망·두려움·욕망·관심사 등 동요하는 감정에 기반을 둔다.

그들은 어떤 것에도 헌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헌신할 만한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이것을 원하지만, 다음 주는 다른 것으로 바뀐다. 그리고 한 달 뒤에는 또 다른 것이 된다. 그들은 집중할 수 없고, 방향을 정할 수 없다. 그래서 지혜와 분별력으로 명확하게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인류에게 닥친 큰 도전은 큰 공동체 출현에 대비하여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인류의 고립이 끝났다는 현실을 다루기 위해, 또 인류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 관심이 있고, 지구 자원과 지구 안에서의 기회에 관심이 있는 다른 종족들과 이제 인류가 싸워야 하는 현실을 다루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도전에 직면하려면, 이 책을 읽거나 응답하고 있는,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이 도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때 당신은 지도자를 추종하지 않는다. 이때 당신은 교사를 우상화하지 않는다. 이때 당신은 엄격한 형태의 신앙이나 계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하기보다는, 당신은 앎을 향한, 신비롭고 근본적인 여행을 시작한다. 당신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고, 앎길을 배우며, 앎의 학생이 된다. 또한, 당신 자신을 위해 스스로 내놓을 수 없는 준비를 찾는다. 당신은 자신의 성장에 책임을 지며, 내면의 부름에 응답한다. 그리고 당신 주변 모든 사람이 현재 하고 있고 또 미래에 할, 수동적이고 근거 없는 가정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항상 적은 비율의 인구가 단호하게 노력함으로써 발전하였다. 인류를 발전시키는 것은 선한 의지와 진정한 영감을 가진 사람들이며, 그들이 지금 있는 문제들에 대처하고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문제들을 준비하려고 중요한 일들을 수행하기 위해 힘을 합친 결과이다.

인류는 그냥 준비하지 않으며, 준비하는 개개인이 있다. 정부를 기대하지 말라. 종교기관을 기대하지 말라. 사회봉사단체를 기대하지 말라. “이 일은 누군가가 해야 하는데!”라고 말하지 말라. 바로 당신이다. 부름은 당신에게 왔다. 부름은 응답할 수 있는 사람, 준비할 수 있는 사람, 도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온다.

물론 그들은 위대하다. 하지만 이것이 당신 내면에 있는 위대함을 찾는 방식이다. 작은 것들에 매여 작은 삶을 살면, 위대함을 결코 발견하지 못한다. 큰 도전과 책임을 받아들이고, 당신 내면의 큰 힘과 에너지를 요청함으로써, 또 당신의 기량과 의식을 개발하면서, 그 큰 힘과 함께 있고, 배움의 문턱들을 넘어섬으로써, 당신은 큰 삶을 발견한다.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인류는 큰 공동체에 준비되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준비되지 않았고, 심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도 준비되지 않았으며, 영적으로도 준비되지 않았다. 이 준비를 마련하기 위해 인간 단체들이나 인간 종교들을 찾아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새로운 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진정한 준비는 이들이 지금까지 이룬 것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위대한 교사들이 몇천 년 전에 제공한 것은 새로운 환경에 대처하기에 결코 충분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종교 진화는 새 계시의 물결이 계속 밀려오면서 이루어진다. 새 계시는 날마다 혹은 해마다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백 년 아니면 천 년에 한 번씩 전해진다. 그리고 새 계시는 변하는 삶의 환경에 대처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전해진다.

계시의 새 물결이 없다면, 고대의 2000년 전 기독교, 2500년 전 불교, 1500년 전 이슬람은 현재의 도전에 응할 수 없다. 그 새 계시가 세상에 있다. 이 계시는 큰 공동체에 관한 가르침이다. 또한, 큰 공동체 영성을 배우는 수단이며, 큰 공동체 앎길이다.

이곳 고대 종교들에 새 삶을 불어넣어줄 것이 바로 이 계시이며, 인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주는 것도 이 계시이다. 하지만 진짜 책임은 여전히 개개인에게 있다.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앎은 당신이 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당신은 앎이 아는 것을 아직 모른다. 그것이 당신의 기회이다. 앎에는 힘이 있으며, 당신을 성취로 안내할 지혜가 있지만, 그런 여행을 하려면, 당신은 용기를 내야 한다.

인류는 더 큰 지적 삶의 무대에 출현하고 있다. 그 결과, 누구나 다소 더 주눅 드는 느낌이 들 것이다. 이것은 더 큰 맥락으로 옮겨갈 때, 항상 치루는 대가이다. 당신은 작은 마을에서 중요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이제는 더 큰 공동체 안에서 작은 사람이다.

인류의 고립이 끝났고, 큰 공동체 세력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누구나 매우 주눅 들고 취약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고, 자신의 무력함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자신이 일어나는 일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고, 자신의 대응마저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세상에 현실 부정이 대단히 많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극적으로 변하였는데도, 자신이 통제한다는 느낌과 자신의 권위 의식을 계속 갖고 싶어 한다.

누가 이것을 직시할 수 있는가? 이것이 구원의 은총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 누가 이것을 직시할 수 있는가? 두려움을 갖기가 쉬우며, 용기를 가지고 맞서기는 훨씬 더 어렵다.

인류는 큰 공동체를 대비하는 준비에 예정보다 한참 뒤처져 있다. 인류의 안녕을 감독하는 큰 영적 세력들은 더 많은 진전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인류는 뒤처져 가고 있다. 인류는 자기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너무 자기 집착이 강하다.

예를 들면, 회복되어야 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환경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에 인류가 드디어 어떤 책임감을 느끼게 된 것은 겨우 최근 일이었다. 이것을 수백 년 전부터 안 사람들이 있었다. 농사일에 해박한 사람은 누구나 이것을 안다. 나무에 해박한 사람은 누구나 이것을 안다. 그런데 마침내 집단으로 책임 의식이 생겼다. 이런 의식을 갖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는가? 또 얼마나 뒤늦게 생겼는가?

만약 당신이 불안을 느낀다면, 만약 당신이 내면에서 어떤 것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는데,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없으며,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나 흥밋거리를 찾아 즐겨보아도,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다면, 당신은 어떤 것을 알고 있으며, 어떤 것에 응답하고 있다. 어쩌면 내면에 어떤 알 수 없는 긴박감이 있을지도 모르며, 당신이 대부분의 영역에서 상대적으로 만족하는 사람일 만큼 충분히 누리고 있어 보이므로, 이 긴박함을 개인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 불안을 느끼는가? 왜 긴박감을 느끼는가? 왜 주의하고 조심하는가? 왜 심란한 느낌이 들고, 그런 기분에 휩싸이는가? 기본적으로 당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가? 아니면, 불우한 어린 시절 때문인가? 당신 삶이 완전하지 않아서인가?

그렇지 않다. 더 멀리 보고, 더 깊이 보라. 당신은 어떤 것에 응답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이 책임진다(responsible: to be able to respond = 응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 내면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어떤 것, 당신 개인적 삶의 범주를 한참 벗어난 어떤 것에 응답하고 있다.

폭풍우가 몰려오기 전, 숲속의 동물들은 조용해지며, 피난처를 찾는다. 이때 동물들은 행동을 바꾸며, 폭풍우가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반응한다. 당신 또한 반응하지만, 당신의 반응은 보통 주의를 끌지 못하고, 감지되지 않는다. 이 반응은 당신을 주위 환경과 계속 연결되도록 하는 당신의 타고난 자동 유도 장치이지만, 특히 현대인들은 이 타고난 본능, 이 타고난 능력이 많이 퇴화되고 손상되어, 이 반응을 의식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들 삶의 환경 전체가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자신의 일상생활을 해나갈 것이다. 사람들은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며, 노후를 대비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삶에 꼭 필요한 것들에조차 대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응답해야 하는 신호에 응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큰 공동체 세력들이 지금 지구에 있다. 그들은 숨어 있지만, 사방에 그들의 흔적을 남긴다. 당신이 발견할 수 있도록 그 흔적이 사방에 있지만, 당신이 보아야 한다. 신문에서는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문에는 대체로 그런 것들이 보도되도록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 전반에 걸쳐 기억 상실증이 널리 퍼져 있다. 특히 자신이 고등교육을 받았고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선진국 사람일수록 더 심하다.

인류를 기다리는 큰 도전은 큰 공동체 세력들이 세상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인류가 변하는 상황을 책임지기 시작해야 하고, 그런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환경과 상황의 기본요소를 알아차리기 시작해야 하는 요건도 있다. 이 요건이 당신을 바르게 큰 공동체로 이끈다.

이 요건은 곳곳에 있는 사람들이 전에는 고려해볼 필요가 없는 어떤 것을 고려해보도록 이끈다. 당신의 부모 세대는 이것을 고려해볼 필요가 없었다. 당신의 조상들은 이것을 고려해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다른 문제들을 안고 있었으며, 그 문제들 중 일부는 당신이 더 이상 경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이 전혀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들을 안고 있다.

내적으로 응답할 수 있으려면, 당신은 자신이 지금까지 교육이나 세상 삶을 통해 받은 모든 조건화를 넘어서야 한다. 당신 내면에 있는 그 책임감(responsibility: ability to respond, 응답하는 능력)을 찾아내려면, 당신은 대단히 견고한 이 조건화의 영향을 극복해야 하고, 이 조건화 아래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큰 공동체는 인류에게 큰 위험을 가져오지만, 동시에 큰 교육과 큰 영적 조화와 큰 능력이 필요한 구원의 은총 또한 가져온다. 큰 공동체는 세상 모든 사람을 똑같은 운명에 놓이게 한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어느 나라 국민이든, 당신은 같은 문제에 봉착한다. 이것이 현재 있는 불공평을 평등하게 하며, 과거에는 실질적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협동의 기반을 제공한다.

큰 공동체의 현실, 큰 공동체 이해와 관점을 만들어 낼 필요성, 큰 공동체 영성을 배울 필요성, 바로 이것들이 인류에게 협동의 기반을 제공할 것이다. 전 세계 인류는 단순히 심각한 위협에만 직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지금 기반을 다질 기회를 얻는다. 그리하여 이 기반을 통해, 현재 지구 문제들의 대부분을 해결할 것이고, 큰 공동체 삶에 출현할 때 인류를 기다리는 더 큰 문제들을 다룰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다.

만약 단순히 두려움과 걱정으로만 큰 공동체에 대응한다면, 당신은 아는 위치에 서지 못할 것이다. 또 만약에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이것은 과정일 뿐, 신이 모든 책임을 맡고 있으니, 나는 내가 맡은 역할만 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끝없는 낙관론으로 큰 공동체에 대응한다면, 당신은 알 수 없을 것이고, 준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보다는 당신은 중도를 취해야 한다. 두려움과 희망은 각기 나름대로 매력이 있지만, 둘 다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그 어느 쪽에도 빠지지 않으며, 명확히 볼 수 있도록 중도를 지킨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균형점을 찾는다. 그들은 균형의 중심점 위에 서서, 바라보고, 분별한다.

주위를 둘러보라. 당신은 사람들이 끝없는 열정과 더할 나위 없는 불안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들은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가며, 어떻게 중도를 찾는지 알지 못한다.

두려움의 위치에서 보면, 낙관론은 놀랄 만큼 자유로워 보일 것이므로, 당신은 낙관론을 취한다. “모든 것이 괜찮을 거야.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우리는 이것을 처리할 수 있어. 신이 책임을 맡고 있으니, 나는 안심할 수 있어. 이것은 내가 생각한 것만큼 나쁘지 않아. 사실 이것은 모두 아주 좋은 거야.” 그러고 나서 한동안 그렇게 살다가, 다시 알게 된다. “아니야. 이것은 내가 경험한 현실과 전혀 맞지 않아.” 그리하여 당신은 다시 걱정과 불안 속으로 빠져든다.

당신은 중도를 찾아야 한다. 여기가 명확성을 얻는 곳이며, 균형이 있는 곳이다. 이것은 한쪽의 감정이나 기대에서 다른 쪽의 감정이나 기대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며, 중도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앎길을 따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앎은 희망·번영·행복의 약속에 매혹되지 않으며, 두려움이나 불안의 끌림에 사로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쉽다. 두려움을 체험하는 데는 노력이 거의 들지 않는다. 낙관론은 약간 어렵지만, 이 또한 쉽다. 왜냐하면 당신은 마음속을 멋진 기대로 채워 당신 주변이나 내면의 현실에 대한 온갖 것을 자신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앎은 더 어렵다. 균형점을 찾는 것은 결단과 노력과 준비가 필요하므로 더 어렵다.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당신에게 더 큰 그림을 잘 볼 수 있게 해주며,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잘 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당신을 압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깊은 응답, 당신 내면에서 더 깊이 아는 것, 당신에게 이미 아는 것을 자극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에게 새로 믿어야 하는 어떤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아는 것을 부르고 있다. 이것이 인류를 기다리는 큰 도전의 일부이다.

인간 사회에나 큰 공동체에 있는 다른 많은 사회에, 모든 이들이 기대하거나 선호하는 것을 훨씬 넘어 해결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점까지, 모든 것이 나빠지도록 놓아두는 경향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은 상황이 악화되도록 놓아두고 나서, 어쩔 수 없이 어떤 것을 하게 되지만, 그때가 되면 그들의 행동은 절박해지고, 대단히 비용이 많이 들며, 보통은 그다지 효과가 없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일단 문제를 처음 인지하게 되면, 그 문제를 제거하려고 애쓰지만, 이런 큰 기반이 없는 사람은 문제가 악화되도록 놓아두고 나서, 나중에 그 문제를 처리하려고 극단적인 노력을 기울이며, 대체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

이런 성향은 책임감이 부족하고, 내적 자각이 부족함을 보여준다. 또한, 인간 사회에 사회적 결속력이 부족하고, 정신 환경이나 물질 환경 등 환경의 큰 영향에 대한 존중이 부족함을 보여준다.

큰 공동체가 도래함으로써 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며, 또 바뀌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단순히 원하기만 하면, 그것은 충분하지 않으며, 어떤 것이 행해져야 할 때는 행해져야 한다. 이것이 일을 촉진하는 자극제를 낳는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거나 선호하는 것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에 지배받는다. 소망은 나약하며, 자주 바뀐다. 선호는 개인적 바람에 바탕을 두지, 삶의 현실이나 내면에 있는 앎의 움직임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인류는 큰 공동체에서 살아남아 자결권을 유지하려면, 큰 공동체에 대비하여 준비해야 하고, 더 위대하고 더 순수한 영적 기반을 얻어야 하며, 인간가족 사이에 협동과 단결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 이것이 큰 도전이다.

이것은 꼭 해야 하는 필수 상황이다. “음, 이것은 문제이긴 하지만, 우리는 나중에 이 문제를 다룰 것이다.”라고 말해도 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사람들이 깨어날 때쯤에는 너무 늦을 것이며, 이미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인간 삶의 다른 많은 영역, 즉, 자연환경의 악화, 빈곤과 사회불안의 정도, 불공평한 자원 분배 등에서도, 이것은 같은 도전이다. 이것들은 모두 나날이 규모가 커지고 있는 문제들인데, 이 문제들을 온전히 직시하고 해결할 만큼 인간가족 안에 책임감이 없다. 진실의 횃불은 진실에 불이 붙은 개인들이 나르지만, 그 수는 비록 많아지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아직 그다지 많지 않다.

인류를 기다리는 큰 도전은 단순히 어떤 것을 알게 되는 도전, 큰 공동체를 알게 되는 도전만이 아니며, 준비하는 도전, 행동하는 도전이기도 하다. 준비와 행동은 임박한 상황을 명백하게 이해하는 데서 나와야 하며, 정말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도록, 그 힘이 앎에서 나와야 한다.

인류 앞에 있는 큰 도전은 당신 앞에 있는 큰 도전과 같다. 즉,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러 이곳에 왔는지를 찾아내는 도전, 당신 내면에 있는 진실의 기반을 찾아 그 기반 위에 살기 시작하는 도전과 같다.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앎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제는 그 앎을 발견하여 그 앎을 따라 살아가기 시작할 때이다. 그것이 당신 앞에 있는 큰 도전이며, 인류 앞에 있는 큰 도전과 같은 것이다.

당신이 당신 삶에서 해야 하는 더 큰 일이 있으며, 인류가 해야 하는 더 큰 일이 있다. 당신이 알아야 하는 더 큰 일이 있으며, 인류가 알아야 하는 더 큰 일이 있다. 당신이 알고 깨달아야 하는 중요한 일들이 있고, 인류가 알고 깨달아야 하는 중요한 일들이 있다.

이 모든 것은 개인에서 시작한다. 정부나 기관을 쳐다보지 말라. 그들은 과거에 묶여 있다. 그들은 과거의 신념에 묶여 있으며, 대체로 미래에 대응하는 데 자유롭지 않다. 왜냐하면 정부나 기관은 그 자체가 영향을 받고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개인에게서 나온다. 혁신이 일어나는 곳은 바로 개인이다. 당신이 누구이든, 어디에서 일하든, 삶에서 당신 상황이 어떠하든, 이것은 당신의 큰 도전이다.

큰 공동체 세력들이 지금 세상에 있다. 그들은 이곳에 자리 잡으려고 지배력을 얻고자 한다. 그들은 정신 환경에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유전자적으로 인류와 결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 지배력을 얻고, 큰 힘이나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을 회유하고, 인간의 개입 없이 이곳에서 계속 주둔할 수 있도록 인류의 현재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 정부들의 갈등과 인간 종교들의 모순을 이용할 것이다.

하지만 인류에게는 큰 공동체에 동행자들이 있으며, 우리는 이 책 뒷부분에서 그들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며, 한 개인으로서 당신이나 전체로서 인류에게 그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그들의 도움이 없다면, 큰 공동체에 출현할 수 없을 것이며, 새 삶이 가능하도록 해줄 준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더 큰 지적 삶의 무대에서 새 삶을 준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준비 자체에 초점을 맞추자. 준비에 포함된 것과 필요한 것, 준비가 제공하는 큰 보상들에 초점을 맞추자. 어떤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아는 것에서 오는 도전에 대처하고, 기회를 잡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때 당신은 큰 공동체를 상대할 수 있고, 큰 공동체 세력들이 있는 것에서 득을 볼 수 있으며, 힘과 온전함을 얻기 위해 큰 공동체를 이용할 수 있고, 인간가족의 통합과 협동을 위한 기반으로 큰 공동체를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강하고 목적의식이 있는 관계, 개인적 소망이나 두려움에 지배받지 않은 관계를 구축하는 데, 큰 공동체를 이용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준비의 결과이며, 이것이 이제 우리가 다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