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14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인류는 더 큰 불확실성과 격변의 시기인 어려운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이 시기는 인류가 변화의 큰 물결에 직면하고 있으며, 자원 고갈, 환경 쇠퇴, 기후 변화, 험악한 날씨, 점점 커지는 정치적·경제적 불안정, 남은 자원을 놓고 그룹들이나 국가들 사이에서 점점 더 커지는 분쟁이나 전쟁의 위험이 세상에 한꺼번에 몰려온다. 이 시기는 민족들이나 국가들 사이의 해묵은 갈등과 원한이 더욱 악화할 것이고,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이며, 불확실성이 더 커질 것이다.
인류는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선택은 정부의 지도부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의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인류가 남은 자원을 놓고 싸우고 경쟁할 것인지, 아니면 모두의 이익을 위해 더 넓게 통합하고 협력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물론 어느 쪽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선택이다.
이 시기에는 자국민뿐만 아니라 타국민들에게도 많은 절제와 많은 자비가 필요할 것이다. 마치 인류가 통합과 협력과 상호 이익으로 가는 성공의 길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분쟁과 전쟁과 쇠퇴로 가는 실패의 길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기로에 서 있는 것과 같다.
이 선택은 실제로 자기 내면의 어떤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에 대한 개인들의 선택이다. 사람들은 신이 그들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더 큰 삶으로 이끌기 위해 그들 내면에 심어 놓은 앎의 힘과 현존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보다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자기 개인 마음,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상관없이 먼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하려고 하는 자기 개인 마음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이것은 어떤 음성을 따르고, 어떤 진실을 따를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이것은 이념적 논쟁도 아니고, 이성적 문제도 아니며, 이런 것들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당신이 깊은 양심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을 따를 것인지의 문제이다. 어떻게 협동할 수 있고 어떻게 공정하게 협동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을 수 있으며, 물론 여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내면에서의 선택은 매우 본질적이다.
이것은 자신과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인류를 어떻게 보는지에 기반을 둔 선택이다. 왜냐하면 인류를 사랑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만 하면 수많은 사람이 죽더라도 개의치 않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인류는 큰 용서를 해야 하는 시대, 용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제시되고 강조되고 지지되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사람들은 종종 용서란 단지 문제를 눈감아주거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거나, 이전에 일어난 것이 모두 좋은 일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주장들은 모두 실제로 옳지도, 정직하지도 않다.
끔찍한 일들이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실망은 삶의 한 부분이다. 많은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통제권도 없고 책임도 없는 일들로 고통받는다. 당신은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서도 안 되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만약 당신이 실제로 상황에 대해 자신에게 정직하고 객관적이라면, 이 모든 것이 좋은 일이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용서는 당신이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그들에게 베푸는 관용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글쎄, 나는 여전히 당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품위 있는 사람이니 당신을 용서하겠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다. 그것은 주로 당신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자신을 입증하고 고상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용서는 상대방을 인지하고 그 사람의 인간성을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인간은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이것만으로도 인간의 행동을 너그러이 봐줄 수는 있지만, 실제로 용서는 상대방의 상태를 느끼는 것이다. 여기서 당신이 상대방이나 국민 전체의 현실과 인간성을 인지할 때 자비는 자연스럽게 생긴다. 만약 당신이 어떤 국가나 어떤 집단의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태도를 지녔다면, 당신은 그들을 찾아가서 이야기해 보고 그들의 경험을 듣고 그들의 상황과 역사를 고려하여 왜 그들에게 그런 관점이 생겼는지 이해해야 한다.
비난하는 것은 쉽지만, 이해하려면 진정한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을 도외시하거나 그들에게 낙인을 찍거나 그들을 거부하거나 그들과 의절하거나 그들이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다. 그것은 쉬운 일이며, 당신 내면에 있는 비난의 음성을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그들의 상황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당신이 부모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이것에 대한 아주 좋은 예이다. 만약 당신이 그들 삶의 환경과 성장 과정을 정말로 이해했다면, 그렇게 빨리 부모를 비난하거나 도외시하거나 그들에게 낙인을 찍거나 그들과 의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 삶의 상황과 그들이 살아온 과정을 이해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만약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아마 거의 같은 방식으로 대응할 것임을 알 것이다.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너무 게으르거나 나태해서 다른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 태도, 믿음에 안주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실패나 다른 사람들과의 문제가 자신의 태도와 믿음을 강화하기를 원하므로, 실제로 비난이 자신의 참된 본성을 부정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비난은 일종의 자기 입증이다.
그래서 용서는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인지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고, 사람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심지어 사악하거나 비극적인 일일지라도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내면에도 동일한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알면, 당신은 더 신중하게 되고, 비난을 자제할 수 있다. 실제로 잔인하고 억압적이며 비난받기 쉬운 통치자와 독재자가 있으며, 당신은 그들을 이해하더라도 결국 그들을 혹평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들 국민의 안녕을 위해 그들과 전쟁을 벌이는 데는 대단히 머뭇거릴 것이다.
미래에 변화의 큰 물결에 직면하여 어떤 지도자들은 관심을 돌리기 위해 국가를 전쟁으로 이끌려고 할 것이다. 국민들의 불만과 분노와 좌절감을 돌리기 위해, 어떤 지도자들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끌려고 할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적을 만들고 그 적이 위험하다고 강조할 것이다. 그들은 국민들을 겁주려고 할 것이고, 이 적이 정말로 국민들을 파괴하려고 한다고 하면서 국민들에게 적과 싸워야 하고, 싸우려면 단결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거의 예외 없이 이것은 술책이고, 속임수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도자들은 자신에게 오는 사회의 불만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리고 싶어 하며, 국민의 안녕을 염두에 두는 강력한 지도자처럼 보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국민들이 비난하고 원망하고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는 것을 이용할 것이다. 그들은 국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은 불용서를 악용할 것이다.
매우 많은 전쟁이 이런 식으로 조장된다. 종종 전쟁이 조장되는 것은 국가의 지도자들이 지도자로서 자신의 첫째 책무이자 막중한 책무인, 자국민에게 필요한 것들을 뒷바라지하는 것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이런 식으로 조장하는 시도를 볼 것이다. 이런 시도를 하려는 유혹은 매우 클 것이다. 만약 국가 지도자가 선거로 선출되었다면, 그 지도자는 자신의 선거 공약을 이행할 수 없거나 이행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국민들의 좌절감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려고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독재 정부는 항상 적이 필요하다. 이것이 자기 잇속만 차리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는 방식이다. 실제의 적이든 상상의 적이든 적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그리한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사람들을 이해한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봉사하고 싶어 하고, 그들을 돕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들과 공명하고, 그들에게 자비심을 느낀다. 설령 잔인하고 억압적인 정부가 그들을 이끌더라도, 당신은 그들의 상황에 공감한다. 당신은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과 자비심이 더 많을수록 평화와 협력을 향해 나아갈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 왜냐하면 항상 전쟁의 위협이 있는 것은 경쟁이 자연의 일부이고,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인간들 사이의 경쟁은 쉽게 충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서의 첫 단계는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인지하고, 그들이 왜 그렇게 느끼는지 아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에게 그들의 개인적 삶을 알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도움이 된다. 심지어 그 국민 전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알게 되면 당신은 잠시 멈추게 되고 그들을 더 깊이 존중하게 된다.
만약 다른 나라 사람들이 당신 나라의 정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그러는지 알아보라. 비판적이거나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그들에게 어쩌면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진정한 용기와 겸손이 필요하다. 당신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실패나 반대를 이용함으로써 그들의 편견을 강화하고자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상대방을 인지하지 못하면, 당신은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있고, 당연히 그 사람과의 유대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인간 가족과 당신의 타고난 연결이 끊어질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자신이 속한 종교 단체나 민족 단체나 경제 단체 등 자신의 단체만을 지지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인류에 대한 자연스러운 동질감은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지금 변화의 큰 물결에 직면한 인류에게 큰 위험이다. 왜냐하면 변화의 큰 물결은 인류의 통합된 대응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류의 해묵은 문제인 부족의 정체성이나 타인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기도 하기 때문이다.
큰 갈림길이 있다. 모든 사람이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 선택은 단지 정부와 정책에만 있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이다. 당신은 자신을 전쟁으로 이끌 후보를 뽑을 것인지, 아니면 다른 국가들과 더 큰 협력을 추구할 후보를 뽑을 것인지 선택한다. 이것은 당신이 국가의 지도자를 선출할 때 고려해야 할 기준의 일부이다.
용서는 또한 당신이 자기 내면에서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당신이 단지 자신의 생각·믿음·편견하고만 동일시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반대자와 적을 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로 인해 당신의 입장이 더 이치에 맞고, 더 현실적이고, 더 정의로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과 동일시할 때, 다른 생각, 다른 태도, 다른 입장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대립하게 된다.
그렇지만 만약 본연의 당신이 당신 마음보다 더 크고, 당신의 문화·가족·종교가 당신에게 주입하려고 했던 것을 넘어서서 깊은 양심이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당신은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종교, 다른 인종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특성과 현실을 더 깊이 인지하는 데 마음을 열 것이다. 당신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공명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의 믿음 체계와 어떻게 부합하는지에 따라 그들을 분류하지 않는다. 그렇게 분류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감옥이다.
그러기보다는 당신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사람을 사람으로 이해한다. 당신은 사람들 대부분이 실제로 옳은 일을 하려고 하고 진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안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상황으로 방해받고, 어쩌면 정부의 방해를 받고, 종교적·문화적 조건화로 방해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최선의 일을 하려고 한다. 따라서 당신은 사람들을 곧장 노골적으로 비난하기보다는 일단 선의로 해석한다.
이것은 당신이 자신 안에서 동일시하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을 자기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자기 생각이 매우 중요하며, 그 생각이 당신 자신이고 당신이라는 것을 규정한다고 여길 것이다. 그런 다음 자신의 고정관념에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지 그 여부에 따라 그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서로에게 아주 무자비해질 수 있다. 여기에서 잔인함이 드러날 수 있으며, 특히 어려운 상황에서 더욱 드러날 수 있다. 그리고 한 그룹이 다른 그룹을 나쁘다고 여기거나, 자기 그룹의 삶에 위협이 된다고 확신하며 다른 그룹을 파괴하고자 한다. 설사 어쩔 수 없이 다른 그룹의 사람들과 싸워야 할 상황이라 하더라도, 당신은 그들의 인간성을 부정하지 않고도 싸울 수 있다. 이것이 무력 충돌과 노골적인 대량 학살의 차이이다.
그다음으로 사람들의 상황도 있다. 만약 사람들이 식량을 재배할 땅이 충분하지 않고, 먹을 것도 충분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다면, 그들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을 맹렬히 비난할 것이다. 그들은 광기에 사로잡히고, 박탈감에 빠진다. 그들이 처한 환경으로 인해 그런 상황에 내몰린다면, 당신은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만약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을 수도 없고, 기회도 없다면, 당신은 그들이 그들 문화에서 안전 보장과 가치를 얻기 위해 더 극단적인 것에 의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현자는 다른 사람들의 곤경과 상황을 볼 때, 이들 환경의 곤경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들 내적 삶이 결코 길러질 수 없었다는 사실도 본다. 이들은 끊임없는 압박, 끊임없는 이념적 조건화,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 끊임없는 고난에 내몰린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사람들이 더 미묘하고 깊은 본성을 지니거나 그들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그 사람은 위대한 과학자나 의사나 훌륭한 교육자가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생계를 꾸려 나가느라 절박함에 내몰리고 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평정심을 기대할 수는 없다. 만일 당신이 위안을 얻을 기회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당신 자신도 극도로 화가 나고, 극단적인 견해를 가지도록 내몰리며,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깊은 본성이 마음 너머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당신은 자신의 생각·믿음·편견과 동일시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비난하거나 도외시하는 데 훨씬 더 신중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자기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깊은 본성을 인지하지 못하면, 그들의 사고는 비정상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소유물을 자신과 동일시하므로, 타인을 인지하고 자비를 경험하는 그들의 능력은 제한되거나 완전히 파괴된다.
용서의 셋째 측면은 당신이 큰 목적을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며, 신이 당신 내면에 깊은 앎을 심어 놓아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며, 당신이 이 목적을 경험할 수 있고 세상과 인류에게 봉사하는 데 이 목적을 표현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극소수에게만 이 앎을 깊이 있게 키울 기회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환경이 허락되어야 자신의 큰 본성을 받아들이고 그 본성에 집중할 기회와 자유를 얻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들이 즐거움, 환상, 자기 집착, 중독을 추구하며 이 근본적인 기회를 낭비하고 잃는 것은 매우 비극이다.
높은 목적의 관점에서 보면, 당신은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앎의 가치를 가르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는 모두 당신 내면에 있는 이 깊은 앎을 충실히 따르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을 따르지 않는 결과를 알려주는데, 왜 그들을 비난하는가? 사람들이 온갖 잘못을 저지르고 이 잘못한 결과를 경험하면서,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힘, 현존, 안내를 부정하려는 유혹의 결과를 당신에게 보여주는데, 왜 그들을 비난하는가?
당신은 자신이 하고 있지 않는 일들을 이미 알고 있다. 당신은 자신에게 “오, 나는 이것을 포기해야 해. 이것을 바꿔야 해.” 또는 “이 음식을 그만 먹어야 해.” 또는 “이곳에 그만 와야 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당신은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이렇게 바꾸지 않으려 했을 때의 결과를 당신에게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당신은 자신의 실패에 대해 그들을 비난하기보다는, 그들이 당신에게 신호를 보낸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당신에게 어떤 것을 가르치고 있다. 어쩌면 이 결과로 그들의 상황이 비극적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실제로 당신에게 어떤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앎 없이 사는 삶, 신이 당신에게 준 더 큰 안내 없이 사는 삶, 그들 내면에 있는 깊은 양심에 안내받지 못한 삶의 결과를 당신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면 당신은 비난을 누그러뜨릴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기를 잠시 멈출 것이다. 당신은 이 전망점에서, 삶이 이런 식으로 당신에게 봉사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자신이 해야 한다고 아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생각할 수 있는 온갖 변명을 할 때,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보며 그 결정을 따르는 결과를 알 수 있다.
당신은 즐거움을 추구하고 행복을 추구하고 개인적 책임을 부정하는 일에 몰두한 결과를 볼 수 있다. 당신은 이것을 다른 사람들의 결정, 그들의 행동, 그들의 삶의 결과에서 볼 수 있다. 어쨌든 그들은 어떤 이점을 요구하고 자신의 생각·믿음·욕망을 실현하려고 하면서 자신의 깊은 본성과 깊은 목적을 배반했다.
이것은 충격적이며, 이것을 통해 당신은 잠시 멈추어 자기 삶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왜냐하면 바로 다른 사람들의 실패가 결국 당신이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망점과 더 높은 관점에서 볼 때, 세상 전체가 사람들 내면에 있는 앎을 따르는 것에 대한 성공과 실패를 실연하는 것이고, 이 둘의 매우 다른 접근 방식이 가져오는 엄청난 차이의 삶의 결과를 실연하는 것임이 보인다.
만약 당신이 자기 내면에 있는 앎을 부정하고 자기 생각이나 믿음, 다른 사람들의 설득에 따라 살려고 하면, 당신은 이러한 영향력의 노예가 될 것이다. 당신 삶은 노예 상태가 될 것이고, 당신 마음도 노예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노예 상태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몹시 싫어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보면 당신은 자신의 품위가 떨어진 상태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당신은 영리하고 조종을 잘하는 지도자들에게 쉽게 이끌려 그들이 당신에게 믿기를 원하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믿고, 그들이 당신에게 전쟁에 나가기를 원하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전쟁에 나가고, 그들이 당신에게 구매하기를 원하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구매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면에 있는 나침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당신의 깊은 분별력이 이제 너무 흐려져서, 사실 그 분별력이 당신 내면에 있는 가장 근본적인 현실인데도 신비처럼 보인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실연을 통해서 봉사하고, 또 당신 자신에게 진실하고 정직하고 삶에 객관적이 되는 것의 중요성을 당신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으로 봉사한다는 것을 알 때, 어떻게 그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들의 행동에 화가 날 수도 있고, 그들의 비극에 마음이 움직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으므로 당신이 그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거나 그들 주변을 경계해야 하겠지만, 실제로 그들도 당신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준다. 당신 주변 사람들 모두 온갖 실수를 저지르며 당신이 느끼는 유혹의 결과를 보여주는데, 어떻게 그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물론 그들은 무심코 우연히 당신의 삶을 실제로 구하려고 한다. 만약 당신이 그들의 삶을 보고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어. 나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돼. 그런 압력이나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당신을 강하게 하고 있다. 그들에게 감사하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라. 앎이 없으면, 사람들은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의 깊은 본성이나 진정한 의도가 반영되지 않는 삶을 살 것이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타협의 삶, 자신을 억압하거나 타인에게 억압받는 삶을 살 것이며, 자신의 문화적 가치관이나 지도자의 주장에 이끌릴 것이다. 그들은 쉽게 현혹되고, 쉽게 배반을 경험할 것이다.
자신에게 삶의 큰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관점인 더 높은 전망점에서, 당신은 이러한 것들을 볼 것이다. 어쩌면 이전에는 이것들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오직 앎이 있거나 앎의 대체물만 있다는 것을 삶이 당신에게 가르치고 있음을 당신은 알 것이다. 오직 당신의 깊은 본성에 진실한 것이 있거나 아니면 다양한 방식으로 배반만 있다.
사람들은 행복 추구하려고 행복을 위해 자신을 배반하고, 자신에게 해로운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을 배반하며, 매력과 유혹에 넘어가 자신을 배반한다. 그리고 자신의 문화나 국가나 종교가 말하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따를 때 자신을 배반하며, 다른 사람들과 다른 민족을 비난할 때나 자신이 속한 그룹이나 문화의 편견을 받아들여 채택하고 강조할 때 자신을 배반한다. 자신을 배반하는 정도는 그저 엄청나고 놀랍다. 어떤 배반은 사람들이 인지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그저 삶 그 자체, 즉 정상적인 삶이고 정상적인 마음 상태이고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자신을 배반하는 고약스럽고 심각한 상태이다.
여기서 앎의 학생은 되돌아가야 하며,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인,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을 되돌려야 한다. 이것은 자신을 위한 복원의 일부이다. 그들은 매듭을 풀어야 하며, 자신을 붙들어 맨 사슬을 풀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헌신과 결단력으로 이 일을 한다.
따라서 용서를 단순히 바람이나 희망이나 어떤 자기 계발 활동이 아니라, 현실로 만드는 세 가지 측면이 여기 있다. 당신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만이며, 비난의 근본적 오류를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인지하며, 그들 삶의 상황과 조건, 그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인지한다. 그리고 그들의 인간성을 결코 잊지 않는다. 심각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반대해야 하더라도, 당신은 그들의 인간성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의 접근 방식에는 잔인함이 없을 것이다.
둘째는, 다시 말하지만, 당신이 상대방 삶의 상황과 조건을 이해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들을 비난하거나 도외시하기 전에 그들 삶의 상황과 조건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함으로써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에게 더 공정하고 효과적으로 반응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협력을 구축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과 협력을 구축할 수 없는 곳도 있지만, 협력을 구축하는 것이 당신의 주안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변화의 큰 물결에 직면하여 인류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높은 전망점은 당신이 큰 목적을 위해 태어났음을 인지하는 것이고, 당신 내면에는 깊은 앎, 이 목적을 담고 있는 당신 삶의 더 깊은 흐름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며, 당신의 이 깊은 부분은 현명하고 자비롭지만 강하고 결단력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 이 앎에 충실하거나 충실하지 않은 본보기로 바라보아야 함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은 자신에게 진실하고 정직해지는 데 더욱 전념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 내면에 있는 앎을 부정하는 것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극적으로 당신에게 보여줌으로써 삶이 당신에게 선물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한 당신의 관점을 바꾸지만, 매우 현실적이다. 이것은 당신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거나,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며, 모든 것이 훌륭하다는 뜻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훌륭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잘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인지는 현실에 기반을 둔다. 물질 현실뿐만 아니라 당신 내면의 더 깊은 현실에도 기반을 둔다.
여기서 당신은 본연의 당신이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이나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다. 이것들은 모두 당신의 조건화의 일부이고 어쩌면 독특하고 중요한 존재가 되려는 개인적 마음의 활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깊은 본성도 있고, 당신은 이 본성의 현존을 느끼며, 이 본성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항상 인지한다.
여기서 당신은 현실은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며 사람들에게는 내면에 깊은 본성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본성이 부정되면, 사람들은 잘 처신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잘 살지 못할 것이고, 건강하지 못할 것이며,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할 것이다. 그 자연스러운 조화는 부정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실제로 용서는 당신의 노력이 필요하고 당신 내면의 진정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깊은 인지 없이 다른 사람들을 단순히 너그러이 봐주기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과 변화가 없었다면, 용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당신은 해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위해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일어나는 모든 일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하며, 당신은 이것이 사실임을 안다. 하지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일어난 일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큰 목적을 위해 이용될 수 있다. 여기서 당신은 해로운 어떤 것을 선이라고 부르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당신 삶에 더 큰 정직과 자비를 가져가려는 당신의 결심을 굳건히 할 수 있도록 당신에게 주는 신호의 혜택을 찾으려고 한다.
만약 모든 것을 훌륭하고 유익하게 만들려고 하면, 당신은 부정직해질 것이고, 부정직은 큰 잘못과 큰 어려움으로 이끈다. 따라서 당신의 평가는 그 특성이 꼭 이념적이지는 않은, 당신 내면의 더 깊은 인식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그 인식은 자연스러운 공명에 더 가깝고, 이성의 영역 너머에 있으며, 더 깊은 수준에서 사람들과 함께 느끼는 공감이다. 당신은 누군가를 만나서 관계를 맺고 그들의 상황을 인지할 수 있다면, 단순히 멀리서 그들을 판단하기보다는 더 많이 존중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변화의 큰 물결에 직면할 것이다. 변화의 큰 물결은 큰 고난을 가져올 것이다. 변화의 큰 물결은 주로 인류가 지구를 오용하고 남용한 결과이다. 이제 그 모든 것의 결과가 다양한 방식으로 한꺼번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인류가 지구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인류는 경제 체제, 생활 방식, 세상과의 상호 작용, 자원 이용 등 모든 것을 바꿔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들은 사람들에게 매우 어렵다. 아무리 변화가 필요할지라도, 사람들에게는 큰 스트레스와 심지어 박탈감을 야기할 것이다.
당신은 변화를 원할 수도 있지만, 변화는 매우 어렵고, 많은 사람이 아주 우아하게나 아주 기꺼이 겪는 것이 아니므로 갈등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당신은 깨달아야 한다. 변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종종 변화의 비용, 변화의 대가, 변화의 영향을 간과한다. 그들은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원하지만, 세상이 현재 상태에서 더 나은 상태가 되려면 그 과정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당신은 자신의 삶에서조차 아주 우아하게 혹은 아주 기꺼이 변화를 겪지 않는다. 필요한 진짜 변화는 매우 도전적이다. 당신은 그 변화에 저항하고, 그 변화와 싸우며, 심지어 그 변화가 당신에게 꼭 필요하더라도 변화를 불평한다. 변화에는 노력과 결단과 자신감이 필요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필요하며, 안전 보장을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누구도 아주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인간성을 절대 잊지 말라. 당신 마음 너머에 있는 깊은 본성의 현실을 찾으라. 당신의 믿음이나 생각, 문화의 조건화에 너무 좌우되지 말라. 당신이 큰 목적을 위해 세상에 왔다는 것을 인지하라. 당신이 이 목적을 찾고, 분별하고, 경험하고, 변하는 삶의 환경에서 표현할 수 있도록, 신이 당신에게 앎을 주었다는 것을 인지하라.
그러면 용서는 인위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이다. 이때 당신은 기만과 혼란을 꿰뚫어 볼 수 있고, 사람들의 깊은 본성을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변화의 큰 물결에서 진보하고 살아남으려면, 이 깊은 정직과 인식이 더 많은 사람 사이에서 길러져야 한다. 그리고 당신이 이렇게 할 수 있고 그 중요성을 안다면, 당신은 이것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세상에서 긍정적인 변화의 주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