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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shall Vian Summers
on 11월 1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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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1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자유의 필요성은 사람들의 상황이나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자유가 필요하다. 억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필요하고, 불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필요하며, 다른 사람들의 개입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 사람들은 그저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자기 삶을 살기 위해 자유로워지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 외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개발하고, 기회를 얻고, 자신의 기량을 연마하고, 지역 사회에 봉사할 수 있고, 자기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자유가 필요하다.

이것을 이룰 수 있었거나 이런 기회를 얻은 사람들에게는 자유의 더 큰 문턱이 있다. 즉 세상에 온 자신의 진정한 목적을 찾고, 또 모든 생명의 창조주가 각자의 내면에 심어 놓은 깊은 지성, 앎이라고 하는 지성을 발견하는 자유의 더 큰 문턱이 있다.

이 깊은 지성은 당신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마음과는 다르다. 이 깊은 지성은 비교하지도, 추측하지도 않으며, 판단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이 깊은 지성은 당신 이성과는 전적으로 다르게 일한다.

하지만 앎은 확실하고, 분명하며, 두려움이 없다. 앎은 혼란과 양가성과 애착에서 자유롭다. 앎이 유일하게 진정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당신이 세상에 온 큰 목적을 찾아 성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앎을 발견하고 앎을 배우는 자유, 앎을 경험하고 나서 앎을 따르는 자유, 앎이 당신에게 행하도록 알려주는 것을 완수하는 자유, 이것이 바로 자유의 더 큰 문턱이다.

일단 세상을 살아가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과 요건이 충족되면, 당신은 이 큰 문턱을 접하게 된다. 사람들 대부분이 이 문턱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신을 위해 절대 이 문턱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당신이 매일 보고 경험하는 세상을 만들고, 사람들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정치적 자유가 있는 사회에서 살든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 살든, 모든 곳에 있는 세상 사람들의 상태를 결정한다.

일단 당신이 어떤 기본 요건을 충족했으면, 자유의 진정한 문턱이 당신을 기다린다. 당신의 이성으로는 그 문턱을 알아낼 수 없다. 당신의 개념만으로는 그 문턱을 파악할 수 없다. 당신은 그 문턱을 개념화할 수도 없고, 그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도 없다.

앎의 힘과 현실, 신의 참된 창조물의 힘과 현실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엄청난 우주론, 형이상학적 가르침, 이상적 이해에 바탕을 둔 사고체계는 앎의 현실·힘·의미를 담을 수 없다.

당신은 이상화된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앎에 다가간다. 당신은 앎이 당신에게 하라고 하는 것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따름으로써 앎의 현실을 경험한다. 이 경험에서 앎의 현실을 확인하게 되고, 앎이 당신 이성의 창조물이 아니라는 것을 더는 의심하지 않게 된다.

앎은 환영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다. 앎이 당신의 야심·욕망·선호·애착·공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앎은 당신에게 보여줄 것이다. 왜냐하면 앎은 이 모든 것과 독립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앎의 실재를 진짜로 확인하는 것은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을 아는 경험을 할 때 일어난다. 매우 어려울 수도 있고 사람들이 회피하는 이 경험은 그 자체로 진정한 검증 시험장이고 꼭 필요한 경험이다.

앎은 당신 내면에 큰 현실이 있음을 당신에게 실연한다. 앎은 지성적이고, 목적이 있으며, 이성적으로 당신을 속이는 것에 속지 않는다. 앎은 당신의 생물적 상황이나 사회적·정치적 상황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앎은 세상이나 국가를 지배하는 것이나 부족이나 가족을 지배하는 것에 지배받지 않는다. 앎에는 큰 권한이 있으며, 이 권한은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심지어 지구가 위치한 우주인 큰 공동체에 있는 어떤 것도 변질시킬 수 없다.

오직 앎만이 당신이 왜 이곳에 왔고, 무엇을 해야 하고, 누구를 만나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를 안다. 오직 앎만이 당신 내면에 있는 진실을 가리키는 진정한 지표이다.

당신은 자기 생각이 진실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고, 자기 입장이나 믿음이 진실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오직 앎만이 실제로 무엇이 진실인지 안다. 당신은 자신이 믿는 것이 자신이 아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앎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믿음이나 가정일 뿐이고, 주장이나 요구, 기대나 선호일 뿐이다.

여기에는 자유가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당신은 자신의 문화에 지배받고, 자신의 조건화에 지배받으며, 자신의 두려움·욕망·중독·선호에 지배받기 때문이다. 당신은 다른 힘들의 노예이다. 심지어 당신 마음속에 있는 생각도 거의 독창적이지 않다. 당신은 그 생각을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얻으며, 당신이 태어난 이래로 형성된 사회적 조건화에서 얻는다.

이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면, 당신은 앎 없이는 자유가 없다는 것을 알기 시작할 것이다. 일종의 노예 상태에 있을 뿐이다. 어쩌면 거기에는 즐거움이나 끌리는 것이 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노예 상태이다.

당신이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거나 다른 사람들이 거는 기대의 노예가 된다면, 비록 호화롭게 살더라도, 당신은 일종의 노예이며, 하인이다. 당신은 세상의 하인이다. 당신은 세상에 봉사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의 하인이다. 물론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당신은 자신의 생각·감정·동기가 진정으로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것들에 대한 통제권이 있는가? 당신은 그것들 앞에서 정말로 선택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순히 그것들이 당신을 지배하고, 당신은 자신의 조건, 환경, 상황, 마음 상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가?

노예들은 묵종하고, 적응하며, 자신의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노예이다.

세상에는 여전히 물리적 속박이 있다. 세계 여러 지역에는 여전히 물리적 속박인 노예 제도가 있다. 사람들은 제자리에 갇혀 있다. 심지어 외적 상황에서도 제자리에 갇혀 있다. 이동할 자유가 없고, 자신의 상황을 바꿀 수 없으며, 다른 방향을 선택할 수가 없다. 그들은 다른 일, 다른 환경을 선택할 수가 없다.

그리고 당신이 보기에 그들은 그들 상황에 매여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교육의 부족, 기회의 부족, 정치적 자유의 부족 등이 그 이유이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에게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 자유는 단지 전체 상황의 일부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자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하고 싶은 것을 훨씬 더 많이 선택할 수는 있어도, 그들 역시 속박을 받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유는 단지 가능성일 뿐이다. 그들이 이 자유를 헛되이 쓰고 있다는 사실, 즉 실제로 자신의 내적 방향을 요청할 수도 없고, 신이 그들 내면에 있는 앎 안에 심어 놓은 안내를 경험할 수도 없다는 사실은 그들의 상황을 더욱더 비극적으로 만든다.

여기에서 그들에게는 선택할 기회가 있다. 그들에게는 자기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극히 드문 기회, 인류 역사를 통틀어 거의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극히 드문 기회가 있다. 지금 현대에 들어서서 그들에게 그런 기회가 있으나, 그들은 그 기회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중을 따르고, 즐거움·부·편안함의 약속에 굴복한다. 역사를 통틀어 성취하고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던 자유, 역사 과정에서 매우 드문 자유를 누리는 그들은 단순한 즐거움을 위해 그 자유를 흘려보낸다. 즉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성적으로 매력적이 되고, 재정적으로 풍요로워 보이고, 사회에서 자부심을 느끼고, 자신을 과시하고, 자신이나 남들에게 멋지게 보이고, 미래 이점을 위해 몸치장하려고 그 자유를 흘려보낸다.

바로 이런 것들을 사람들은 선택하겠지만, 그것은 단순히 또 다른 형태의 노예 상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들판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성안에서 노예처럼 산다. 상황이 바뀌었고 어쩌면 어느 정도 개선되었을지 모르지만, 정신 상태는 여전히 똑같다. 그리고 이것이 낳는 분노와 좌절은 해결책이 전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경질적이 되고, 갈등을 겪게 된다. 그들의 행동은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 된다. 그들은 자신을 해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자신이 이룬 것들을 파괴하며, 어떤 것에 중독된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상황이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중독이 있다. 어떤 중독들은 다른 중독들보다 더 나아 보인다. 어떤 중독들은 곧바로 해를 끼치고, 어떤 중독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해를 끼친다. 하지만 그 중독들은 모두 당신이 자기 삶에서 더 깊이 연결하는 것을 막고, 신이 당신에게 준 진짜 안내를 찾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당신의 상황을 이 안내가 명확히 알려주지 못하게 하고, 피해를 주거나 방해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집착·중독·불안에서 마음이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삶의 다른 길,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을 나서지 못하게 한다. 다른 모든 사람은 함께 목적 없이 헤매지만, 당신은 혼자서, 혹은 그저 한두 사람과 함께 어딘가로 간다.

여기서 자유는 정말 외로워 보일 수 있다. 당신은 모든 사람이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을 믿지 않는다. 당신은 모든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의 가치관과 믿음과 초점이 바뀌고, 당신 삶의 깊은 흐름, 깊은 안내와 서서히 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바다 표면을 이리저리 떠다니거나 세상의 광풍에 휩쓸리기보다는, 당신은 실제로 자신을 어딘가로 데려갈 깊은 흐름을 발견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당신은 다른 많은 사람, 즉 오랜 친구, 형제자매, 당신이 이전에 존경한 사람들이 함께 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그곳에 가지 않는다. 매우 고립되고 외로운 느낌이 들 수 있으며, 이 시점에서 당신은 “음, 여기는 나에게 큰 즐거움을 주지도 않고, 삶에 깊이 포함된 느낌도 주지 않아. 나는 더 외롭다. 내 말은 내가 다른 어딘가로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거야. 나는 다른 어딘가로 가고, 다른 모든 사람도 그들이 가는 곳으로 가는데, 내가 그곳으로 가지 않는다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큰 삶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면,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이 가는 곳으로 가지 않아야 한다. 당신 삶은 대다수의 의견에 기반을 두어서는 안 된다. 당신의 가치관은 방종하고 타락한 문화에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 당신이 따르도록 신이 당신에게 부여한 것을 따르려면,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를 따르지 않아야 한다.

당신이 반드시 져야 할 어떤 책임이 있다. 당신이 완수해야 할 어떤 의무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길로 가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다른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여기에는 당신이 이 깊은 음성, 이 내면의 음성인, 앎의 음성을 따르지 못하도록 설득하는 온갖 음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신은 당신을 구원하고자 하지만, 먼저 당신의 주의를 끌어야 한다. 신에 대한 당신의 충성심이 커져야 하며, 신에 대한 당신의 신뢰가 커져야 한다. 신은 당신 삶을 세세하게 관리하지 않는다. 신은 절망적이고 무의미한 상황에서 당신을 불러내어 당신이 세상에 온 목적을 경험하고 회복하는 방법을 찾게 한다. 그 목적은 잊혀졌고 당신 내면에 깊숙이 묻혀 있으며,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이 당신을 위해 보존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먼저 정치적 자유가 있어야 해. 더 큰 영적 자유를 얻기 전에 경제적 자유가 있어야 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 이것은 단지 뒤로 미루는 것뿐이다.

앎이 당신에게 말하는 데는 당신이 재정적으로 안정되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거나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필요하지 않다. 당신은 신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먼저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것에 응답할 용기와 진실성을 지니려면, 당신은 세상의 기대 대부분을 저버려야 할 것이다.

앎은 당신을 구원하려고 이곳에 왔지만, 먼저 당신은 구원받기를 원해야 한다. 당신은 자신의 상황에 희망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깨달아야 하는 것은 당신 삶에 진정한 생동감이 없고, 틀에 박힌 삶을 살고, 소유물을 획득하고, 남의 기대를 맞추어 주지만, 실제로 당신 삶은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당신 혼이 당신을 부르며, 당신 혼이 불안하다는 것이다.

오직 목적을 성취하고 앎을 따르는 것만이 당신 혼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들을 충족할 수 있고, 그래서 당신 혼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들이 성취될 수 있다. 당신 혼은 즐거움, 획득, 사회에서 좋아 보이는 것, 인정받는 것 등에는 관심이 없다. 이것들은 두렵고 외로운 마음, 개인적인 나약한 마음에는 필요한 것들일지 모르지만, 혼에 필요한 것들은 아니다. 혼에 필요한 것들은 매우 다르고, 매우 근본적이며, 변하지 않는다. 당신이 열 살이든 아흔 살이든 혼에 필요한 것들은 동일하다.

당신의 종잡을 수 없는 욕망, 오늘은 기분 좋다가 내일은 우울한 변덕스러운 감정은 이 주에는 이것을 원하고, 다음 주에는 저것을 원한다. 이것들은 혼에 필요한 것들이 아니다.

당신 혼은 당신을 부른다. 당신 혼은 당신의 완전한 참여가 필요하고, 당신의 주의가 필요하다. 신은 당신을 구원하려고 하지만, 당신은 먼저 신이 제공해야 하는 것이 당신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신은 당신의 주의를 끌어야 한다. 당신의 주의는 항상 온갖 곳에 꽂혀 있다.

만약 당신 마음이 자극에 끊임없이 사로잡히고, 분주함, 활동, 텔레비전, 언론, 신문, 책 등 당신을 지속적으로 점령하는 모든 것에 당신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사로잡힌다면,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노예인지 알 것이다.

당신은 5분도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없다. 당신 마음은 결코 고요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하다. 그리고 찾아다니고, 회피하고,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놓고 애태우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비난과 비판을 투사하고, 괴로워하고, 지쳐 있다. 잠이 오지 않아! 밥맛이 없어! 생각할 수가 없어! 당신 몸은 당신 마음 상태를 반영한다. 당신 몸은 스트레스를 받고, 건강하지 못하고, 균형이 깨져 있다.

진정으로 진보할 수 있기까지는 자유를 위한 기반을 쌓아야 한다. 당신은 자유로운 것과 자유롭지 않은 것, 진짜 자유인 것과 그저 자유인 척만 하는 것을 차츰 알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책임도 없고, 의무도 없고, 책무도 없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노예에게는 자신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그들이 온갖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기 마음, 즉 세상에 조건화된 마음, 두려워하고 집착하는 마음, 갈등·불안·욕망으로 가득 찬 마음이 지시하는 것을 위해 일한다.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이 자유롭지 않고, 좋다고 생각한 것이 실제로 그다지 좋지 않고, 더 나은 삶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제로는 별로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어렵게 배워야 하기보다는 근원으로 가는 것이 더 낫다. 당신은 이것을 알 수 있었고 당신 내면에서는 이미 아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알아내려고 평생을 보낸다.

이제 세상에 대해 말해 보겠다. 왜냐하면 수평선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이 인간의 자유, 즉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사회적 자유를 제한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쇠퇴하는 세상, 줄어드는 자원 창고에서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자원을 꺼내 쓰는 세상에 직면할 것이다.

당신들 중 일부가 누렸을 법한 자유와 이점들이 미래에는 없을지도 모른다. 삶은 더 힘들어지고, 더 어려워질 것이다. 기회는 줄어들 것이다. 어리석게 행동하거나 무질서하게 제멋대로 행동하는 자유는 줄어들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큰 손실과 침해로 볼 수도 있고, 혹은 당신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인, 신이 당신에게 준 것으로 마침내 돌아서는 좋은 기회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신이 당신에게 준 것은 신앙이 아니며, 종교적 믿음 체계도, 이념도,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도, 형이상학적 이해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에게 중요할 수도 있고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신이 당신에게 준 근본적인 것은 앎이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종교적 이념을 믿고, 종교적 가르침을 고수하고, 자신의 믿음이나 가정에는 완강하지만 앎과는 단절되어 있다면, 당신은 단순히 다른 것들의 노예일 뿐이며, 여전히 노예 상태에 있다. 이제는 생각의 노예가 된다. 그 생각은 대체로 당신의 것이 아니고, 당신에게 지시된 것이며, 당신이 믿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이것들을 이용하여 자기 삶에 안정과 확실성과 확신과 목적의식과 방향감을 주려고 한다.

당신의 상황은 변했지만, 당신의 조건, 당신의 진짜 조건은 변하지 않았다. 오직 앎만이 당신을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오직 앎만이 당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

앎은 정식 종교 안에서도 일할 수 있고, 밖에서도 일할 수 있다. 앎은 종교에 구속받지 않는다.

앞으로 마주할 세상은 당신의 개인적 자유를 빼앗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더 어려워질 것이고, 더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지는 더 적어지겠지만, 더 근본적이고 중요할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 앞에서 빈둥거려서는 안 된다.

그러니 이것은 당신이 자기 삶에 진지해지고, 자신이 하는 것, 생각하는 것, 믿는 것을 재평가할 기회, 내면에서 진정으로 정산할 기회이다.

당신은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것을 실제로 하는가? 정말 본연의 당신으로 있는가, 아니면 단순히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 노릇을 하는가? 당신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해야 할 것을 찾도록 실제로 도와주고, 본연의 당신을 정말로 확장하고 인정해 주는가? 혹은 단지 편의나 이익이나 기회를 위해 당신 삶을 메꾸는 사람들인가? 당신은 판단이나 비난 없이 고요히 앉아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가? 혹은 마치 누군가가 매 순간 당신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고, 내몰리고, 강박적이고, 괴로운가?

자유를 찾기 시작하려면 당신은 자유를 원해야 한다. 당신이 앎을 경험하기 시작하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려면, 신이 당신에게 준 깊은 지성을 원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이성이 더 큰 것들을 이해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음을 깨달아야 한다. 큰 것을 이해하는 것은 더 깊은 인식, 내면의 진정한 공명에서 나와야 하고, 어쩌면 당신이 순간적으로 겪었을 수도 있고 지금 더 자주 겪을 필요가 있는 경험에서 나와야 한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삶이라는 강은 다리 밑을 지나간다. 이 세상에서의 기회를 당연하게 여기고 미래의 다른 어떤 시점으로 미뤄서는 안 된다. “언젠가 나는 이 문제를 다룰 거야. 언젠가 나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거야. 언젠가 나는 더 깊은 질문을 할 거야. 언젠가 나는 앎에 관심을 가질 거야.”

그것이 바로 노예가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것이 바로 어떤 사람이 자기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을 직시하기를 두려워할 때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조건화, 심리적 조건화에 의문을 품는 것을 두려워할 때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훨씬 더 근본적인 더 심오한 질문에 관심을 두기 위해 자신의 작은 즐거움과 이점들을 포기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자신이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 다른 사람들, 그 상대가 부모든 남편이든 아내든 자식이든, 이들을 실망시키는 것을 두려워한다.

혼에 필요한 것은 점점 커지고 있다. 방치되고, 인정받지 못하고, 도움을 받지 못한 순간에도, 더욱 강해진다. 그래서 즐거움과 방종의 삶을 살고 나면 당신은 대단히 공허하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의 근원인 절실히 필요한 것이 전혀 인지되지도 않았고 실제로 충족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원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가진다면, 당신 삶은 더 편안할지 모르지만, 혼에 필요한 것은 더 절실할 것이다. 시간은 흘러갈 것이다. 당신은 이제 점점 늙어가며, 바꿀 능력이 더 떨어질 것이다. 삶의 방향을 바꿀 능력, 해가 갈수록 증가하는 사회적 조건화에 의문을 제기할 능력이 더 떨어질 것이고, 가치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것들에 자신의 삶을 매우 많이 낭비했다는 사실을 기꺼이 직시할 의지가 더 약해질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오직 하나뿐이며, 그것은 당신의 목적을 찾아 성취하는 것이며, 그것이 당신 혼에 필요한 것을 충족한다. 그것이 바로 당신 내면에 있는 진정한 온전함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며, 당신 삶에 만족과 방향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자신과 실제로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고, 올바른 관계를 맺은 결과로, 누구와 함께 있어야 하고 어떻게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하며, 상대방의 외모와 상관없이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사람과 방해만 할 수 있는 사람을 인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당신의 큰 자유는 단순히 관계를 맺거나 더 나은 직업을 얻거나 수입을 늘리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자기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이 모든 것은 단지 당신 어깨에 더 많은 짐을 지울 뿐이다. 그러고 나면 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언덕을 오르면서 더 많이 일할 것이다.

이제 당신에게는 획득한 것들이 있다. 당신은 그것들을 보살펴야 하고, 돌보아야 하며,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만약 내면에서 앎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도 없고, 자신의 불안·초조·조바심·좌절을 이해할 수도 없다면, 또 이 모든 것이 당신 내면의 혼에 필요한 것에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없다면, 당신의 업적·부·성취는 단지 부담과 곤경을 키울 뿐이다. 그리고 당신은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심지어 자유라는 것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무책임한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걱정 없이 지내는 것도 아니며, 놀이터에서 어린아이처럼 노는 것도 아니다. 자유는 당신 삶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고, 당신이 이곳에 와서 해야 하는 일과 연결되는 것이다. 자유는 산을 오르는 그 여행을 하는 것이다. 자유는 맞는 목적을 위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고, 맞는 목적을 위해 맞는 장소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 대부분은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있지도, 맞는 장소에 있지도 않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과 동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삶에서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어디에 있는지가 이 깊은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앎은 당신을 위해 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 모든 것이 엄청나게 혼란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앎은 이 길 전체를 안다. 앎은 참된 방향으로 당신을 데려가고, 당신의 참된 목적에 당신을 참여시킴으로써,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왜냐하면 앎은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앎은 이미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이미 세상에 방해받지 않는다.

당신이 앎을 따르면, 당신은 더 자유로워지며, 더 방해받지 않는다. 그래서 당신이 책임을 지고, 헌신하고, 의무를 다할 때, 당신은 이 무게를 감당할 수 있으며, 이 무게는 당신의 진정한 본성이나 목적을 배반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당신은 일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지금까지 일하던 것보다 더 열심히 일하겠지만, 그 일을 해야 한다는 느낌이 있을 것이다. 그 일은 여전히 매우 어렵고 도전적일 수도 있지만, 이전에는 가져보지 못한, 해야 한다는 느낌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관계나 직업을 찾지도, 사회적 지위를 찾지도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당신은 앎을 찾아야 하며,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다. 당신은 단순히 앎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하면 당신은 마음이 집착하는 것들을 채워주기 위해 앎을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때는 당신이 정말로 따르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통제하려고 하며, 지시하려고 한다. 앎의 모든 초보 학생은 어느 정도 이렇게 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앎을 이용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앎에는 신이 제공한 방향인, 자기만의 방향이 있다. 이것이 당신 삶에 대한 신의 응답이다.

당신은 삶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자신을 어떻게 분명히 할 것인가? 당신의 진짜 방향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당신 삶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다줄 사람들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당신이 살아야 하는 맞는 장소, 해야 하는 맞는 일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이것이 그 모든 질문에 대한 신의 응답이다. 하지만 이 응답을 받으려면, 당신은 그 응답에 자신을 내주어야 한다. 당신은 단계적으로 그 응답을 따라야 한다.

처음에는 응답에 대한 당신의 믿음이 매우 부분적일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커질 것이다. 당신은 이제 새 주인을 섬기는 법을 배울 것이다. 이 주인은 세상도 아니고, 세상의 가치관도 아니며, 세상이 당신에게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진짜 주인을 섬긴다. 당신은 종교 수행이나 종교 조직의 일원으로 이 주인을 섬길 수 있고, 종교 밖에서도 이 주인을 섬길 수 있다. 이 주인을 섬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영적이다.

먼저 당신은 짐을 벗어야 한다.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우는 첫째 단계는 짐을 벗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모든 소유물을 버리고 수도사가 되라는 것도, 어딘가로 달아나 고립되어 살라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고, 어느 정도 물질적 짐이나 상황적 짐도 벗어버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앎이 없으면, 사람들은 완전히 짓눌릴 때까지 자기 삶을 물건과 의무와 사람들과 책임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이것들 중 일부를 내려놓아야 당신은 실제로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숙고하는 데 충분한 자유와 시간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신의 첫째 목적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짐을 벗기는 것이다. 당신은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세상이 당신에게 당신이 원한다고 말한 것이다. 안전하고,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전부인가?

당신은 관계를 원한다. 당신은 관계로 무엇을 할 것인가? 당신은 심지어 자기 삶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누구와 함께 있어야 하는지 어떻게 알 것인가? 당신은 당신 삶이 가기로 되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실제로 함께 가기로 된 맞는 사람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그러기보다는 당신은 미모, 매력적인 성격, 경제적 이점들을 선택할 것이다. 당신의 짐은 그저 늘어나기만 할 것이고, 앎에 대한 두려움도 커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당신은 자신이 헌신하던 것들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며, 그 헌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두렵고, 자신의 노예 상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두렵고, 자신이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하는지 다시 생각하는 것도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자신이 하는 일을 실제로 다시 숙고해 보는 것은 오직 사람들이 자신의 집착에서 충분히 실제로 벗어나게 하는 큰 실망이나 개인적 상실을 겪을 때뿐이다. 이것은 좋은 기회이다. 모든 사람은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우리가 말했듯이,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다른 어떤 것에도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앎은 자유롭다. 앎은 다른 어떤 것이 되려고 하는 일 없이, 실제로 앎 그 자체가 되는 것에 자유롭다.

세상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견줄 수 없는 이 자유를 얻으려면, 당신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아야 한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을 그곳으로 데려가는 신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앎을 속일 수 없다. 앎은 기만이 없으며, 그 자체 안에서 갈등이 없다. 그러므로 앎은 기만당할 수 없으며,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앎은 세상에서 길을 잃은 나머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단지 기다릴 뿐이다.

궁극적으로 당신의 자유는 사실 어떤 것에서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라, 어떤 것을 향하는 자유이다. 처음에는 자유가 짐을 벗는 것에 관한 것이다. 자유는 어떤 것에서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것이고, 상황·감정·중독 등 당신 삶을 가두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유는 어떤 것을 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어떤 것을 위해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향하는 자유를 찾으려면 당신은 어떤 것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당신은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벗어나는 것 대부분은 내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저 자신의 상황을 바꾸더라도 같은 관념, 같은 강박 충동에 사로잡힌다면, 당신은 그저 다른 곳에서 자신의 상황을 재현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일련의 다른 상황에서 똑같이 불행하고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당신의 곤경은 실제로 변하지 않았다.

당신은 세상에 필요한 어떤 공헌을 수행하기 위해 특정인들과 관계를 맺도록 세상에 파견되었다. 이 공헌은 거창하지 않다. 당신은 지구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높이 평가받고 인정받는 유명인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의 봉사는 아마도 매우 평범한 상황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인정을 거의 받지 못하거나 전혀 받지 못할 수도 있지만, 앎에게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으며, 당신 혼에게도 중요하지 않다. 앎에게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으며, 당신 혼에게도 중요하지 않다.

앎이 이곳에서 하려는 것은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목적을 당신의 의식과 삶 속에서 되찾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이다. 그것은 본연의 당신이 되는 자유이고, 당신이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것을 하는 자유이며, 당신이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것을 찾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다른 사람들을 찾는 자유이다.

당신을 세상에 파견한 이들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자유, 결국 정말로 중요한 자유이다. 이것은 정치적 자유, 사회적 자유, 경제적 자유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사람들의 안녕에 공헌하고 있고, 공헌할 수 있으며, 아주 많은 곳에서 매우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큰 자유를 말하며, 이 자유를 통해 당신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나 세상에 있는 다른 형태의 생명체를 위해 기회와 안녕을 구축하고, 세상을 회복하는 데 돕고, 세상의 상태를 안정시키고, 파괴를 종식하고, 전쟁을 끝내고, 분쟁을 종식하고, 자원을 더 공평하고 더 지속 가능하게 사용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등 세상에 이처럼 절실히 필요한 것들을 함으로써 도울 수 있다.

앎은 구체적으로 이렇게 필요한 것 한두 가지를 충족하도록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혼자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먼저 큰 전환을 해야 한다.

새 삶을 구축하려면, 당신은 기존 삶을 떠나야 한다. 더 큰 의식을 가지려면, 기존 의식을 버려야 한다. 당신은 기존 삶 위에 새 삶을 올려놓아서는 안 되며, 기존의 이해와 경험에 기반을 두고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나 경험을 쌓아서는 안 된다.

당신은 다른 것을 찾으려면 한쪽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벗어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이것이 바로 당신 혼이 갈망하는 것이다. 당신 마음은 믿고 싶어 하고, 그 믿음에 자신을 잡아매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 혼은 도망치고 싶어 한다. 당신 혼은 포로이다.

삶에서 진정한 행복, 진정한 성취, 진정한 관계, 진정한 업적, 진정한 만족, 이 모든 것은 당신이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것을 하고 이곳에 파견되어 되기로 한 것이 되는 것에서 나온다. 그리고 오직 당신 내면에 있는 앎만이 이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당신 삶의 변하는 상황에서 이것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지 안다.

이미 당신은 자신이 뒤에 남겨두거나 옆으로 제쳐놓아야 할 것들을 알며, 자신에게 본질적이나 자신에게 없는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혼에 필요한 것은 이미 당신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이미 당신은 사람들의 추구가 얼마나 얄팍하고,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허약하고, 그들의 성취가 얼마나 공허한지 알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앎이 이미 당신의 경험을 통해 당신에게 이것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더 큰 자유가 당신을 기다린다는 신호가 되게 하고, 당신 삶에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이 있다는 신호,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상이 단순히 재앙이 아니라 기회라는 신호가 되게 하라. 이것은 당신이 앎을 찾아 따르도록 하는 기회이자 유인책이다.

세상의 어려운 시기와 점점 커지는 폭풍우가 당신에게 이것을 알려주게 하라. 인류의 보호와 발전을 위해 세상에 전해진 신의 새 메시지를 받아들이라. 신의 새 메시지가 당신에게 앎으로 가는 계단을 가르치는 것으로 당신을 돕게 하라. 앎으로 가는 계단은 분명하고 깨끗하다. 그리고 역사와 문화, 정치와 정부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았으며, 이기적이고 야심 찬 개인들에게 지배받지 않았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순수한 길이다.

이 시기에 당신이 왜 세상에 왔는지,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 세상이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를 신의 새 메시지가 당신에게 드러내도록 허용하라. 인류 앞에 놓인 큰 문턱이 당신에게 드러나도록 허용하고, 근본적으로 앎의 부름에 응답하라.

오직 앎만이 안다. 마음은 생각하고 앎은 안다. 앎은 당신의 선물이다. 앎은 받아야 하는 선물이자 주어야 하는 선물이다. 이제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하는 당신에게 앎은 신의 큰 하사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