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 20일
튀르키예 안타키아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이 시점에 여기에서, 종교의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종교는 인간 체험의 일부분이며, 종교를 근절하거나 최소화하기 위해 행해진 어떠한 시도도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인간 정신의 현실은 부정할 수 없으며, 사람들 내면에 표현되어야 하는 더 큰 영적 욕구가 있다는 근본적인 현실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것은 왜곡되거나, 어그러지고 오용될 수 있으며, 다른 목적들과 결속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자연스러운 충동이 정부나 사회의 강력한 세력들과 연결될 때, 더욱더 그러하다.
단순하게 말하면, 종교의 목적은 자신의 삶에서 신의 현존을 경험하고자 하는 소망과 체험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다. 모든 가르침과 종교의식은, 큰 단체 안에서든, 자기 집 안에서든, 이러한 목적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신의 현존을 경험하고자 하는 소망과 체험할 수 있는 역량은 모든 생명의 창조주가 인간 개개인의 가슴 안에 심어 놓은 앎의 힘으로 그들을 데려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당신 나라든, 다른 나라든,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의 삶이 이 앎의 현존과 힘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가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실망과 불만족의 모습, 노인들의 회한, 젊은이들의 낙담과 절망감은 이 힘과 현존이 경험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종교는 이제 사람들에게 속박과 족쇄가 되었으며, 그들에게 정해진 특정 사고방식에 맞추어 믿고, 정해진 특정 행동 양식에 맞추어 행동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진정한 목적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유인책이나 위협을 통해, 사람들이 특정 신앙 체계를 고수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종교의 본질과 목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세상에서 그리하는 것이 대단히 분명하다.
종교는 또 다른 형태의 정부가 되었다. 권력과 지배를 추구하는 정부의 한 형태, 경쟁자를 누르고 다른 종교와 맞서는 문제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정부의 한 형태가 되었다. 그래서 경쟁이 있으며, 이 신앙 체계의 가장 급진적인 요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전쟁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진짜 종교가 아니다.
모든 생명의 창조주는 세계 모든 종교를 창시했지만, 그 종교들은 모두 사람과 정부, 문화와 전통에 의해, 또 세상의 권력 경쟁으로 인해 바뀌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에는 진정한 영적 욕구와 갈망이 있지만, 현재 종교의 모습을 보고 대단히 멀리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어디에서 자신의 내적 삶을 함양할 수 있는가? 개개인의 내면에 있는 앎의 힘과 현존을 인식하고, 따르고, 포용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곳은 어디인가? 모든 종교의 가르침과 관습이 허용되지 않는 신비인 신의 현존의 신비를 경험하고자 하는 개개인의 소망과 체험할 수 있는 개개인의 역량을 개발하고 장려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곳은 어디인가?
그런 것들이 개개인을 위해 장려되는 곳은 어디인가? 당신이 교회나 절이나 모스크를 방문하면, 그곳에서 종교 이념, 종교 관례, 종교의 요구를 옹호하는 것 말고 무엇을 보여주는가? 이런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은 종교의 본질적 목적과 맞지 않으며, 관련이 없다.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앎길을 가르치는 것이며, 개개인을 이성 너머에 있는 깊은 마음인 앎을 직접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 깊은 마음은 신이 사람들 개개인을 안내하고, 보호하고, 세상에서 더 큰 삶과 표현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들에게 제공한 마음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 주안점을 듣지 못한다. 그 대신, 현대 생활의 맥락에서 볼 때, 종교의 처방들이 아무리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일지라도, 그 처방을 믿고, 고수하고, 따르라는 장려가 있다. 그리고 이것을 “하느님 말씀”이라고 하며, 인류를 위한 신의 뜻이라고 한다.
물론, 인류를 위한 신의 뜻과 처방에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를 놓고 경쟁하는 권력들 사이에 큰 경쟁이 있다. 마치 종교와 관계없는 이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종교 사업을 탈취한 것과 같다. 그 본질적인 목적과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그들은 종교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종교는 정당 같은 것이며, 당연히 정치적 목적도 있다.
이것은 종교에 대한 신의 원시 충동이나 의도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신의 원시 충동과 의도는 앎을 세상에 계속 유지하고, 앎길을 가르치고, 인간의 책임과 윤리적 행동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지, 단순히 규범이 아니며, 천국에 가는 요건이나 다른 고양된 미래의 어떤 상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자연스러운 성실과 윤리를 실제로 부정하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성실과 윤리는 앎의 힘과 현존을 경험하고 그 지혜와 은총에 안내받는 사람에게 일어날 것이다. 이런 이들은, 그들이 세계 어느 지역에 거주하든, 어떤 부족이나 집단, 문화에서 왔든 간에, 모두 같은 가치관을 지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가치관은 모두 앎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대단히 종교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종교의 진정한 목적을 실천하거나 강조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류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고 억압한 것을 보면, 어떤 성스러운 의도가 유지되었든 간에 오로지 엘리트, 수도승, 숙련자들을 위해서만 유지되었다.
그 결과, 신의 진정한 메신저들은 관습의 사슬을 끊어야 했고, 지배적인 종교적 믿음과 사고방식 앞에서 반대로 가르쳐야만 했다. 또한, 신성한 것을 불경스러운 것으로 바꾸려는 인류의 경향에 대항하여 반역자나 개혁자가 되어야 했다.
참된 메신저의 의도는 무엇인가? 개개인의 영의 불을 불러일으키어 그들 내면에 있는 더 깊은 양심, 즉 사회적 순응이나 사회적 기대의 산물이 아닌, 인간 삶에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더 깊은 양심과 접촉하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종교적이지만 종교에 관해 모르는 세상이 생겼으며, 종교기관과 그 지지자들이 그들 신앙의 근원이 같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서로 충돌하고 경쟁하는 세상이 생겼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사상과 신앙과 계율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지만, 그들 자신은 현존의 신비와 힘으로 들어가는 진정한 입문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했다.
종교는 딱딱하게 굳어졌고, 정치적이 되었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위와 힘을 지키려는 경제적·사회적 권력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 종교의 참된 목적에 진정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떠도는 처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종교 교단이나 기관에서 아주 많은 사람에게 잊혀진 신비를 따르는 이단자나 선지자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종교가 진정한 자기 목적의 적이 된 것과 같다. 종교는 이제 국가의 종교, 전통의 종교, 역사의 종교, 고정 관념과 고착된 신앙의 종교, 권위의 독점적 권리를 주장하는 종교가 되었다. 이것은 앎을 세상에 계속 살아 있게 하려는 창조주의 소망과 의도와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종교가 앎의 적이 되었다. 종교는 오직 신만이 앎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은 어리석어 동물처럼 우리 안에서 살아야 하며, 믿도록 프로그램되고 조건화되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믿을 수 없고 불가능한 것들을 믿고, 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깊은 경험에 어긋나는 것들, 진정한 종교의 본질인 진짜 신비와 심오한 경험과는 거리가 먼 것들을 믿게 한다.
깊은 경험을 가진 이들 가운데 신비주의자와 현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 힘과 현존이 계속 살아있도록 해왔지만, 그들은 종교기관의 가장자리에서 따돌림받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반항자나 개혁가들로, 비록 그들 기관 상층부에서 못마땅해하거나 불신하였지만, 실제로 인간 사회에 만연한 의미 없는 종교적 관행에 생명과 본질과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이것이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당신 삶에 더 큰 힘, 더 큰 신비가 있으며, 신과 당신의 연결은 앎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앎은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깊은 지성이며, 이성의 영역 너머에 있는 지성이다. 이 힘이 당신을 부르고 있으며, 이 힘에 당신의 응답은 당신 혼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 즉 생존과 만족, 교육과 기회, 우정과 동반자 관계에서 필요한 것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이 필요한 것을 찾으려면, 당신은 세상에서 제공하는 것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은 사회적·심리적으로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고,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지만, 혼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충족시키지 못한다. 여기에는 특별한 종류의 결합이 필요하다.
물론 모든 생명의 창조주는 종교가 답이 아니라 문제가 된, 이 곤경을 이해한다. 종교는 길이 아니라 걸림돌이 되었으며, 종교의 진정한 목적과 주안점은 대단히 많은 면에서 상실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종교 안에서 매우 현명하고 예외적인 교사들만이 이 신비와 이 힘을 말할 수 있고, 개개인 안에 있는 깊은 양심을 언급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교사들은 드물다. 그들은 교회 힘과 권위를 지닌 사람 중 소수에 해당한다. 만약 당신의 가장 큰 충성이 앎에 있다면, 다시 말해 신에 있다면, 어떻게 교회나 모스크나 절에 충성할 수 있는가? 만약 신이 인간의 사상, 인간의 철학, 인간의 신학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앎을 따르는 이로서 당신도 이러한 것들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당신을 자유롭게 하고 통제할 수 없게 만들며, 통찰력 있게 하고 더 청렴하게 한다. 또한, 당신에게 종교 권위의 가치에 의문을 품게 하고, 종교 기관의 윤리와 행위, 즉 종교 기관이 걸핏하면 반대하고 억누르는 모든 것에 의문을 품게 한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것으로, 종교의 원시 충동과 힘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필요하다. 즉, 국가의 종교나 종교 기관들만의 종교가 아니라, 그것들 내부나 그 너머에 존재할 수 있는 훨씬 더 순수한 어떤 것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필요하다.
고정불변으로 보이는 신앙에 주의하라. 종교 지도자들이 배타적 특권이나 권위를 가진 것으로 선언하는 것에 주의하라. 자유 지향적인 사람들도 있고 통제 지향적인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라. 통제 지향적인 사람들은 자유를 두려워하고, 신비를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 정신의 본질적인 선함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잃었으며, 모든 신뢰를 그들 이념에 두었고, 그들이 신에게서 왔다고 믿는 처방에 두었다.
그러나 신은 위대한 교사들을 통해서, 규범이 아닌, 오직 권고만 하였다. 살아가는 것에 대한 권고, 즉 사람들이 올바르고 생산적이고 유익하게 삶의 방향을 정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생활지침만 주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연결을 찾으려면, 당신은 앎길을 배워야 한다. 모든 종교의 중심에는 앎길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은 신앙의 길이 아니며, 순종의 길이 아니다. 또한, 종교 지도자나 기관의 처방과 계율과 규범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길이 아니다. 이 길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힘과 현존을 찾아, 개개인 내면에 있는 다른 충동들과 강박관념들로부터 이 힘과 현존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가르침을 통해 세월이 흐르면서, 배우는 것이다.
세상에서 신의 목적은 앎이 살아 있게 하여, 인간의 자유와 인간의 정의, 인간의 자비심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신의 목적은 종교 지도자나 기관을 찬양하거나,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위에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창조물이지 신의 창조물이 아니며, 그래서 잘못되기 쉽고 변질하기 쉽다.
신은 이 그림을 명확히 하고, 실질적인 체험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길을 제시하기 위해, 세상에 새 메시지를 제공하였다. 그들은 그들 종교 안에서든, 그들 종교 밖에서든, 이 체험을 할 수 있다.
신의 새 계시는 정치적 이념이나 오랜 믿음과 상충될 수 있지만, 그것은 변형되고 적응된 것이 순수한 것과 대조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신은 인간의 창조물이나 인간의 믿음, 규범에 구속받지 않는다. 신은 사람들 가슴에 불을 붙이고, 개개인에게 외부 지향적이 되기보다는 내부 지향적이 되는 기반을 주기 위해, 실질적이고 필수적인 것만을 제공한다.
여기에서 당신의 이맘이나 랍비나 신부가 앎의 안내를 받는다면 당신을 도울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당신을 방해할 것이다. 당신은 그 차이를 아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종교들은 유지되고 보호되어야 하는 기관들이다. 그들은 서로 경쟁하고 있으므로,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교도 인간의 평화와 단결을 진정으로 함양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종교들은 모두 특권을 주장하며, 그 종교들 안에 위대한 세계 종교 운동을 지지하고 세계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는 소수 사람만이 본질적으로 분열을 초래하고 파괴적인 이 경쟁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말로, 우리는 이성이 아닌, 인간의 가슴에 말한다. 이성은 모든 것을 알기를 바라고, 그 개념과 믿음과 전통을 고수하고 싶어 한다.
종교의 기본 목적을 충족시킨다면, 전통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종교의 기본 목적은 신의 현존을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소망과 체험할 수 있는 그들의 역량을 고무하고 확장하는 것이며, 신이 그들 내면에 심어 놓은 깊은 지성, 세상에서 그들의 성공과 복지에 필수적인 이 깊은 지성과 그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 창시자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것은 종교가 공식적으로 선언한 믿음이나 교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사람들은 위대한 교사들의 삶을 끝없이 찬양하고 숭배하며 반복하지만, 이 교사들이 장려한 삶을 실제로 살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인간의 행동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모든 잘못된 이유로 잘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회적 이익, 경제적 이익, 사회적 지위와 수용을 얻기 위해 서로를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더 큰 목적과 삶의 더 큰 의미를 알고자 하는 사람, 종교적인 사람은 이런 사람을 의미한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든, 이슬람교도든, 유대교도든, 다른 종교 단체에 속해 있든, 그것은 부차적이다.
세상에 있는 종교 이념을 장려하는 것이 이곳에서 신의 뜻과 목적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이념과 신앙 체계가 종교의 기본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만 그것들이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가치를 지니고,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종교 가르침도 전쟁을 조장하거나, 다른 그룹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는 것은 그룹들 사이 권력 경쟁이기는 하나, 종교는 아니다.
종교는 당신을 신에게 데려가는 것이며,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고 삶에서 큰 성취로 이끌기 위해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것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이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인간이 지어내고 각색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법의 적용과 사회 운영 측면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내야 할 것이다. 신은 사회를 운영하거나 복잡한 법학이나 법의 관리를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은 당신에게 발현된 세상이 아니라 신비를 향해 가리키고 있다. 신은 발현된 세상일을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신비로 불러들이고 있다. 세상에 더 많은 성인이 있기를 원하고, 진정으로 영감을 주는 개개인들이 있기를 원한다면, 또 인류에게 억압적인 정권에서 나온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이해에서 나온 더 높은 기준이 있기를 원한다면, 사람들을 신비의 힘으로 안내해야 한다.
종교는 모든 사회적·정치적 문제에 해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있어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더 깊은 지성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종교는 국가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정치는 신성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처형을 요구할 만큼, 종교를 더럽히고 타락시킬 뿐이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에 자리잡은 왜곡과 탈선의 정도이며, 이 때문에 신의 새 메시지가 종교의 명확성과 목적, 영적 연습의 의미를 회복하고, 각자의 내면에서 일어나야 하는 신의 계시의 본질을 회복하려고 세상에 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에 접근할 수 없다면, 위대한 교사의 계시를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훨씬 더 평범하고 단순한 일상 환경에서 적용될 이 힘과 이 현존을 당신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없다면, 위대한 교사나 해방자를 숭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기서 그 대비는 중요하며 이해해야 한다. 종교가 어떤 것이 되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그 본질과 의미를 잃을 것이고, 결코 의도하지 않은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종교를 이상이나 믿음, 또는 복잡한 신학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당신은 종교의 진정한 본질과 목적을 잃을 것이다.
예수나 무함마드가 가장 위대한 교사인지, 또는 인류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전했는지 논쟁하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고, 신이 의도한 종교의 본질과 의도와는 거리가 멀며, 종교의 본질을 형편없이 깎아내리고 왜곡한 것이다.
무함마드가 마지막으로 계시를 내놓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의 목적과 현존을 오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세상에 말할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특히 인류가 쇠퇴하는 세상, 자원이 감소하는 세상에 직면하고, 우주 지적 생명체와 접촉의 현실에 직면하고 있는, 이 대전환점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이전에 전해진 어떤 신의 계시도 이 큰 두 사건을 다루기로 되어 있지 않거나, 충분히 합리적으로 다룰 수 없다.
종교는 사상과 신앙, 제도와 법, 필요한 것들로 겹쳐져 있으며, 이것들은 사람들에게 억압적이 되었거나,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었다. 이것들은 혼에 절실히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당신이 본질적인 것, 실질적인 것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절이나 모스크, 교회, 또 부족의 예배당은 신비를 기리고 현존과 힘을 일깨우는 곳이다.
세계 모든 종교의 핵심에 있는 앎길은 성직자나 수도승, 특출난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종교의 필수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당신 앞에 놓인 도전이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인류에게 문제의 일부가 될 것이며, 화해와 영감과 높은 윤리 의식의 필수적인 수단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당신의 이해로 삼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