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received by
Marshall Vian Summers
on 1월 29, 2008

원본 음성 계시 듣기:

다운로드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클릭하여 다운로드)

2008년 01월 29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높은 진리가 있는 상위 영역이 있고, 고통과 괴로움이 있는 하위 영역이 있다는 것은 인류가 영성과 종교를 이해하는 데 공통된 주제이다. 왜냐하면 물질 현실에서 산다는 것은 이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것이고, 주변 모든 곳에서 그 징후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당신 고향에 대한 기억, 크고 더 완전한 삶의 현실은, 비록 잠깐의 순간일지라도, 떠오른다.

그래서 이런 이분법이 있다. 이 두 현실은 당신을 비롯하여 개개인의 내면에 공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고통의 증거가 있다. 분명히 분리를 중시하고, 자신의 독특함을 중시하며, 자신과 남을 구별 짓는 방식과 자신이 삶에서 고립되는 방식을 중시한다.

하지만 당신 내면과 당신 너머에 큰 삶이 있다는,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체험이나 생각, 떠오르는 기억 또한 있다. 당신 내면에 큰 삶이 있다는 사실이 단지 하나의 희망만은 아니다. 이것은 그저 꿈이나 환상이기보다는 기억에 가깝다. 이것은 물질 우주에 있는 당신 삶을 관통하여 존재하는 현실의 끈, 즉 회피하거나 잊을 수는 있지만, 없앨 수는 없는 현실의 끈이다.

큰 삶에 대한 기억은 어쩌면 큰 고통을 받거나 큰 위안을 얻는 시기, 당신이 일상의 마음 상태에서 벗어나 있는 시기에만 당신에게 스치듯이 떠오를 것이다. 당신이 목적을 위해 여기 왔다는 느낌이 들고, 이생이 당신의 궁극적인 현실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며, 당신은 지나가고 있고, 여행 중이며, 당신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해 물질 현실에서 체류한다는 느낌이 든다.

여기에서 천국과 지옥이라는 관념이 개념의 형태, 극단적인 개념의 형태로 시작된다. 천국과 지옥은 이런 깊은 자각, 즉 자신의 고통을 자각하고, 자신이 어딘가에 있는 큰 삶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이 자각을 이용하거나 조작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만들어진 천국이라는 관념은 이러한 자각의 자연스러운 산물이지만, 다소 극단적이고 매우 왜곡된 모습을 띠었다. 많은 종교 가르침에서, 천국은 삶에서 잘한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신을 믿은 것, 또 신의 명령과 종교의 명령을 따른 것에 대한 보상이다. 즉 미래에 받는 보상으로 더 나은 삶이 당신을 기다리지만, 그 삶은 특정 기대와 요건을 충족해야만 성취할 수 있다.

지옥은 벌받는 장소로 만들어졌다. 왜냐하면 이런 요구와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훨씬 더 나쁜 곳, 심지어 물질적 삶보다 더 나쁜 곳인 지옥으로 가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에서는 지옥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천국은 보상이며 지옥은 벌이다. 그런데도 신은 종종 완전히 자비롭고 온통 사랑으로 묘사된다. 신이 완전히 자비롭고 온통 사랑이라면, 어떻게 이런 지옥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신은 사람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고, 실수가 매우 만연하고 실수로 이끄는 유혹이 매우 많은 현실에 그들이 처해 있음을 이해하며, 그 유혹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들이 매우 적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왜 그들에게 화를 내겠는가?

물론 이러한 모순은 종교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고, 그 모순으로 일부 사람들은 신마저도 완전히 거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도 영적 현실, 즉 그들 문화의 산물로도, 심지어 물질적 삶의 산물로도 여겨지지 않는 어떤 것이 자기 내면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천국은 물리적 장소로 묘사되었으며, 그곳에서 당신은 항상 행복하고, 어떤 고통이나 죽음, 괴로움도 없지만, 여전히 어떤 물질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영원히 물질 형태로 있으면서, 삶에서 대비되는 것 없이, 이 상상 속의 천국에서는 당신이 여전히 몸을 지닌 채 실제로 할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생각해보면, 천국은 극도로 따분하고 지루해진다. 물론, 당신은 “영광 할렐루야”를 싫증 내지 않고 영원히 부를 수 없다.

그래서 비록 천국이 현재 당신 삶의 어려움에서 큰 위안으로 보일지라도, 지속적으로는 진정한 위안이 되지 않아 보인다. 당신의 현재 의식 상태를 볼 때, 또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고, 몸과 관련하여 필요한 것들과 원하는 것들에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당신을 볼 때, 당신이 여전히 물질 상태로 있다면, 천국은 정말로 어떤 모습이겠는가?

모든 사람은 신을 찬양하는 데 싫증이 날 것이고, 어차피 신은 찬양받을 필요가 없으므로, 시간이 지나면 개념 전체가 다소 우스꽝스러워진다. 만약 당신이 천국에 있는데도 여전히 몸을 가지고 있다면, 몸은 여전히 문제이다. 먹을 것과 거처가 필요하고, 편안하게 유지해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변화의 필요성과 물건들에 대한 욕구도 있다. 천국은 당연히 흥청망청 쇼핑하는 곳일 리가 없다. 그리고 심지어 이곳 지구에서도 감각적인 쾌락을 맛보면 사람들에게 내적 갈등이나 의심이 일어나는데, 그런 갈등과 의심을 야기하는 일 없이, 끊임없이 감각적인 쾌락을 즐기는 곳일 리가 없다.

그래서 고통 없는 물질적 삶이 있는 물리적 장소인 천국에 대한 이런 모든 개념이 있고, 다음으로 당연히 일종의 벌인 지옥이 있으며, 이곳은 당신이 요구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거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거나, 신이 판단하기에 착한 사람이 아니면, 가는 곳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종교를 완전히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큰 삶에 어떤 연결이 있다는 개념, 혹은 세상에서 그저 심리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필요한 일만 하는 것이 아닌 영적 현실이 있다는 어떤 개념을 계속 가지고 있다.

이때 신은 당신이 기쁘게 해주어야 하는 어떤 존재가 되며, 그리고 당신이 다른 이를 기쁘게 해주어야 할 때, 분노와 저항이 생긴다. 이때 잘못된 생각과 개인적 도락에, 심지어 파괴적인 도락에까지 끌리게 된다. 이 끌림은 항상 당신을 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일종의 악마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세상의 많은 종교에 널리 퍼져 있다. 즉, 선한 영과 악한 영이 있으며, 천국의 끌어당김과 지옥의 끌림, 이 둘 사이에 계속되는 줄다리기가 있다. 이것은 한 개인의 내면에서도 일종의 줄다리기가 있으므로, 개인의 체험 안에서 분명하게 증명된다.

만약 누군가 해결책을 찾는다면, 세상에 전해진 신의 새 메시지가 이 부분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왜냐하면 천국을 투영하고 지옥을 투영하는 것은 모두 당신의 현재 삶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일 법한 현실이나 천국의 현실은 확실히 당신의 현재 삶 너머에 있다. 그런데 현재 당신의 위치에서 이런 것들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한 당신의 관념을 어떻게 투영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단지 상상일 뿐이다.

당신은 현재 당신에게 필요한 것과 당신의 기대를 충족하려고 천국을 상상한다. 그리고 지옥을 두려워하며, 은총에서 더 멀어지는 것과 같은 더 나쁜 상황으로 지옥을 상상한다. 물론, 기관들과 종교들은 이러한 상상 속의 천국과 지옥을 이용해서, 선한 행동을 하도록 사람들을 몰아가려 하고, 심지어 선한 일이나 선한 시민 의식을 고취하려 하거나, 종교적 원칙이나 종교 단체 자체를 신봉하도록 고취하려고 한다.

분명히 진짜 천국은 있지만, 그 진짜 천국은 당신 견해 너머에 있다. 그리고 확실히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 너머에 있으며, 완전히 다른 상태이다. 그리고 당신의 현재 상태보다 더 나쁜 지옥이 있다면, 그 지옥 역시 확실히 당신 견해 너머에 있을 것이다. 당신이 얼마나 많이 지옥에 자신의 두려움을 투사하고 천국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든, 이 두 현실은 당신의 현재 삶 너머에 있고, 당신은 이 둘을 상상할 수 없다. 종교 기관들 또한 이 두 현실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정확히 묘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기관들 역시 천국도 지옥도 아닌 당신의 현재 현실에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의 새 메시지는 명확성을 가져오지만, 그 명확성은 다른 수준에서 사는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산 아래에 있다면, 매우 높은 고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는 한, 정상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실제로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산의 높은 곳에서만 살았다면, 해안가 근처나 저지대 부근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새 메시지는 당신이 어려움에 처한 세상에 봉사하도록 세상에 파견되었다고 밝힌다. 그리고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당신이 완전히 연결되어 있으며, 의문은 거의 없고 답은 항상 존재하는 완전히 다른 현실에서, 의문은 끝이 없고 답은 거의 없으며, 당신은 혼자이고 다른 사람들도 당신을 모르고 심지어 당신도 자신을 모르는 현실로 들어왔다고 밝힌다.

당신은 형태를 갖추어야 했고, 이제 필요한 것이 엄청나게 많은 몸을 돌보아야 한다. 몸은 많은 것에 해를 입거나 손상되거나 파괴될 수 있는 매우 연약한 도구이다. 몸은 먹을 것을 주고, 입혀주고, 보호해주어야 한다. 몸은 질병에 걸리기 쉽고, 쇠약해지기 쉬우며, 지금 엄청난 보살핌과 관심이 필요한 어떤 것이다. 그리고 몸은 세상에서 당신에게 독특한 정체성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제 당신의 정체성은 당신의 신체적 특징, 피부색으로 설명되고, 이외에도 개인 성격의 특이한 점들로 설명되며, 가족과 문화와 종교로 인해 크게 조건화된, 당신이 개발한 의식으로 설명된다.

여기서 당신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 된다. 당신은 이제 자신의 몸, 자신의 생각, 문화의 사고방식, 문화의 관습과 동일시되는 한 개인이 된다. 그리고 당신의 문화는 당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당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알려주고, 또 생존하기 위해 몸에 필요한 것을 충족하고, 편안하고,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하려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물론, 당신이 적응해야 하는 매우 독특하고 각기 다른 정치 상황들과 사회 관습들이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당신 삶은 완전히 소모적이 된다. 당신은 온종일 적응하거나, 자원을 구하는 데 몰두하거나, 아니면 자신들만의 동기에 좌우되는 사람들,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 당신 또한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몰두한다. 그리고 이런 위치에서 당신은 천국을 상상하려고 하지만, 그 천국은 당신이 지금 체험하고 있는 것의 더 나은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신은 당신 내면에 깊은 마음인 앎을 심어 놓았다. 이 깊은 마음은 의문을 품고, 추측하고, 대조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아니라, 확실한 마음, 아는 마음, 당신이 왜 세상에 왔는지 아는 마음, 물질적 삶의 모든 두려움과 유혹에 속지 않는 마음, 당신의 조종에서 벗어난 마음, 당신이 세상에서 항해하려는 배의 가장 밑바닥에서 중심을 유지해주는 감추어진 보물이자 마치 비밀 화물처럼 당신 내면에 지닌 마음이다.

그리고 겉보기에는 당신 고향에 대한 기억이 당신의 현재 체험으로 완전히 지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억은 그곳에 있다. 이 기억은 구름 너머에 있는 태양처럼 빛난다. 비록 당신이 이 태양이 거의 비추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매우 흐린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억은 그곳에 있다.

당신은 어떤 종류의 단체나 정치 운동, 종교 단체와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자신을 특징짓는 데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다. 당신은 자신의 생각, 감정, 성향, 열정, 몰두하는 것,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등, 당신이 고통받는 것이자 당신이 바라는 것인, 당신을 독특하게 보이게 하는 모든 것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 내면에는 잃어버릴 수 없는 이 진실의 끈이 있다. 이것을 부정하고, 잊을 수는 있지만, 이것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고향과 연결된 생명줄이 있다. 이것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 덕분에 살아 유지된다. 당신은 종교를 부정할 수 있고, 신을 부정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단지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고, 이런 것들과 관련해서 매우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앎은 여전히 당신 내면에 있다.

당신은 앎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생리작용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것이 모두 자신의 죽을 운명과 자신의 괴로움을 아는 고통받는 동물의 희망과 꿈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은 원하는 어떤 논쟁도 할 수 있고, 같은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 큰 인정을 받을 수도 있지만, 앎을 파괴할 수는 없다.

앎은 당신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또 당신이 육신보다 더 크고, 자신의 심리 상태보다 더 크며, 이 순간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 현재 생각의 흐름이 무엇이든, 그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하는 어떤 체험을 할 때까지는, 그저 당신 내면에서 침묵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천국에 대한 개념이 없더라도, 당신은 물질 영역 너머, 가시 범위 너머에 있는 더 큰 어떤 것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당신의 현재 인식과 삶을 지배하는 모든 것 너머에는 더 큰 어떤 것이 있다.

당신은 이런 체험을 하기 위해 신앙을 가질 필요는 없다. 심지어 종교를 가질 필요도 없다. 당신은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앎은, 발견되기를 기다리면서 여전히 그곳에 있다. 앎의 현존은 당신이 완전히 떨쳐 내거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앎의 현존은 당신 삶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끈과 같다.

당신은 자신을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며, 이리 가기도 하고, 저리 가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도 하고, 끊기도 하며, 자신의 상황을 바꾸기도 하고, 철학을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당신 내면에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 이것은 그곳에 있다. 마치 당신 심장이 계속 뛰는 것과 같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무엇을 생각하고 있든, 무엇을 믿든, 당신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다. 생명이 끝나도 멈추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앎은 심장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지옥에 관해 말하자면, 당신은 분리의 지옥이라는 일종의 지옥에서 살고 있다. 당신은 일종의 벌로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세상은 유배지가 아니며, 천국에서 잘못한 이들에게 “음, 당신은 천국에서 잘못했으니, 이제 지구로 가든지, 아니면 큰 공동체에 있는 다른 행성으로 가야 한다.”라고 해서 오는 곳이 아니다. 당신은 이 현실에 들어오기로 선택했다. 왜냐하면 창조물의 일부가 물질 현실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당신은 여기 와서 공헌하기를 소망하고, 당신의 본성에 낯설고 이질적이며 파괴적인, 당신이 생각하고 행동한 그 모든 것에서 자신을 복원하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여기에 오는 데 필요한 완벽한 앎이 있고, 신이 당신을 도우려고 구성한 학습 단체,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학습 단체인 당신의 영적 가족이 있다. 당신은 세상으로 들어간다. 기억상실 상태를 거쳐, 감각이 열리고, 쉽게 외부의 영향을 받는 상태로 세상에 왔으며, 가족과 문화, 환경으로 각인되기를 기다린다.

당신은 이런 기억상실 상태에 있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고향을 기억한다면, 정말로 여기 있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뒤돌아 곧장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당신이 세상의 밝은 빛과 냉기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저 뒤돌아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여기 있을 수 있게 하고, 당신에게 여기 있을 동기를 주고, 여기 있을 기회를 주려면, 기억상실이 필요하다. 기억을 상실하지 않으면, 당신은 완전히 안전이 보장되고 완전한 관계를 맺은 곳에서 완전히 불안정하고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운 곳으로 가는 것이 된다. 당신은 육신이 없는 곳, 적어도 지금 당신이 체험하는 것과 같이 딱딱한 형태의 육신이 없는 곳에서, 온갖 필요한 것들과 문제들이 있는 이 육신이라는 매개체를 돌봐야 하는 곳으로 온다.

그래서 당신은 기억상실 상태를 거쳐, 세상에 들어오며, 지금 여기 있다. 그리고 당신의 정체성은 첫날부터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름이 지어지며, 당신의 몸은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이 가거나 가지 않는 어떤 특징들을 가지는 것으로 식별된다. 당신은 가족 내에서 어떤 역할과 직분을 맡으며,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다. 만약 당신 문화가 종교를 중시하면, 당신은 종교의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당신이 젊은이가 되면, 당신은 문화가 당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기대에 부응하도록 완전히 조건화된다.

하지만 물론 사람들은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며, 그들의 진짜 본성에 고삐를 채울 수 없다. 진짜 본성은 전적으로 개조될 수 없다. 이처럼 당신에게는 자연 그대로의 부분이 있다. 가족과 문화와 종교가 명령할 수 없는 부분,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종종 파괴적인 방식으로 심취하려는 부분이 있다. 그 까닭은 당신의 참된 본성은 현재의 요건과 기대를 완전히 충족하도록 맞춰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앎이 당신 내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의 참된 본성이고, 신이 창조했고, 신의 일부이며, 신과 연결되어 있고, 신에게 응답하는 본성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세상에서 신앙을 갖든지, 아니면 영적인 것을 지향하든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당신 내면에 있는 참된 본성을 선택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본성을 경험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의 존재 여부는 선택할 수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점이 당신에게는 정말 행운이다. 만약 당신이 실제로 신에게서 자신을 분리할 수 있다면, 지옥과 비극은 영원히 실재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당신이 신에게서 자신을 분리할 수 없다. 그래서 지옥은 틀림없이 일시적이다. 물질 영역 안팎에서 지옥이 어떻게 표현되든, 그것은 일시적이다.

신이 당신에게 화가 났으므로, 당신이 지옥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신은 당신이 실수를 저지를 줄 알고 있는데, 왜 당신에게 화를 내겠는가? 타협하며 살아가야 하는 그런 상황으로 신이 당신을 보냈다면, 다른 사람들이 기대할 수도 다가갈 수도 없을 만큼 진정으로 순수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당신은 심각한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신은 은총을 통해 신이 선택한 자들의 모든 잘못을 없앨 수 있다고 당신은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여행을 해야 하며, 여기서 당신의 운명을 완수해야 한다.

당신은 천국에 머물면서, “글쎄, 나는 물질 현실에 들어가지 않을 거야. 물질 현실은 너무 어려워. 갔다 온 이들에게 그 현실에 관해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이곳에 와서 당신의 참된 본성을 확장해야 한다는 것을 가슴으로 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신은 당신을 베푸는 자로 만들었다. 만약 당신이 베풀지 않는다면, 또 확장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고, 연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비참하다. 그리고 물론, 여기에서 먼저 분리를 낳고, 그다음 지옥을 낳고, 온갖 지옥의 형태와 상상 속의 지옥의 형태를 낳는다.

물론, 사람들은 신을 자신들을 투사한 존재로 상상하려고 한다. 단지 더 낫고 더 강력할 뿐, 여전히 분노와 원망과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고, 여전히 그들처럼 나약하고, 옹졸하고, 이기적이다. 그들은 이런 것들이 없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상 속의 신이 그들 스스로 맞설 수 없는 이들을 벌하고, 자신들이 보기에 세상에서 자신들에게 부당하게 대우하거나 보복하는 이들을 벌하기를 원한다. “글쎄, 신이 그들을 처리할 거야. 그들을 지옥으로 보낼 거야.” 그들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지 않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 지옥에 있으면서 다른 이들을 더 깊은 지옥에 보내고 싶어 하는 자는 바로 그들 자신임을 알기가 어렵다.

벌을 받는 장소인 지옥에 대한 개념이 없다면, 오늘날 세상에 있는 종교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무엇이 사람들에게 선한 행동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것인가? 무엇이 사회 질서를 만들 것인가? 만약 벌을 내리는 방식이 아니라면, 무엇이 더 높은 윤리를 확립할 것이며, 이 벌의 원천은 어떤 신에게서 나와야 하는가?

사람들은 올바르게 행동하려면, 그들 머리에 칼을 겨누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이 건설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그들을 자연스럽게 안내할 앎에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앎이 없다면, 그들에게는 착한 행동을 하도록 위협하고 강요할 일종의 지배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착한 행동의 대가로 이승과 저승에서 보상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당신의 현재 삶 너머에 있는 지옥은 매우 잔인한 것, 즉 불 구덩이와 악마, 고문과 고통 등 이런 온갖 종류의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분명히 당신이 현재 경험하는 것보다 더 좋지 않고 더 편협한 형태의 분리도 있다. 그리고 사실 당신 주변에 당신보다 더 깊은 상태의 지옥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심지어 저승에도, 더 깊은 상태의 지옥들이 있다. 그러한 상태는 누군가가 자신의 매개체인 육체를 떠났지만, 영적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할 때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 수치스럽고, 적대감이 너무 가득하며, 갈등이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육체가 없는 일부 이런 존재들은 여전히 물질 현실과 연결되어, 특정 장소에 출몰하면서, 갇혀 있고, 들러붙어 있다. 비록 그들이 자신의 매개체인 육체를 상실했더라도, 불만과 수치심과 애착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 없어 보인다. 그들은 일종의 림보에 갇힌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일시적이다. 왜냐하면 결국 그들 내면에 있는 앎이 그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고, 그들은 곤경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더 깊은 어떤 현실에 갇혀 있는 지옥들이 있다. 그러나 이 현실마저도 일시적이다. 왜냐하면 결국은 모든 사람이 신에게 복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비극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비극이기 때문이다. 지속되는 고통은 정말 비극이다. 하지만 이것도 일시적이다. 결국 분리는 멈출 것이고, 앎은 드러날 것이며, 각 개인은 신이 제공하는 안내와 도움을 받으며 앎의 인도 아래 회복의 길을 걷기 시작할 것이다.

물론, 이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옥이 있어야 하고, 벌이 있어야 하며, 정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엇이 정의인지 안다고 생각하며, 정의를 결정하는 자가 된다. 신이 따라야 한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바로 정의에 대한 그들의 개념이다. 그들은, “사악한 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 옳지 않은 자는 천국에서 거부당해야 한다. 끔찍한 행동을 하거나 끔찍한 일을 옳다고 생각하는 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신이 이들에게 벌을 주기를 원한다.

이것은 단지 그들의 갈등상태를 나타낼 뿐이며, 그들 자신의 분리 상태를 나타낸다. 그들은 지금 물질 현실에서 길을 잃은 채, 신이 무엇이고, 무엇을 할 것이며, 사악한 자들과 불신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상상한다. 그래서 그들 자신이 문제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신은 그들 내면에도 앎을 심어 놓았으며, 앎은 이런 믿음과 이런 기대, 이런 요구와 이런 주장에 속지 않는다.

당신이 신에게 복귀하는 것은 인간의 이해 너머에 있을지 모르지만, 신의 계획에서 복귀는 반드시 일어난다. 신은 당신과 다른 모든 이의 내면에 앎을 심어 놓아, 복귀가 반드시 일어나도록 했다. 그래서 당신이 지금 삶에서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을 계속 강화하는 것이 아니며, 위대한 처벌자의 역할, 누구는 감옥에 보내고 누구는 무죄로 용서하는 판관의 역할을 신에게 투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판관 노릇은 당신이 하는 것이지, 신이 하는 것이 아니다.

신은 당신을 어려운 상황에 파견하였으며, 당신 내면에 앎을 심어 놓아 당신이 그 상황에 봉사할 수 있게 하였고, 당신에게 되돌아갈 길을 제공했다. 그것은 마치 빛을 완전히 뒤로한 채 깊은 동굴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당신은 이 미로의 어딘가에 있으며,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이들을 도우려고 아래로 파견된다. 신이 당신에게 작은 줄을 매어 놓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당신 자신도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일종의 끝없는 줄로, 당신이 모퉁이를 얼마나 많이 돌든, 그 미로로 얼마나 깊이 들어가든, 빛을 얼마나 완전히 잊든 관계없이, 당신에게는 여전히 생명줄이 있다. 당신은 길을 잃을지 모르지만, 신은 당신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주안점은 앎과 당신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며, 불멸의 영적 본성인 앎과 연결을 확립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잘못된 일을 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본성을 거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고, 그래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본성을 더 많이 거스를수록, 그 본성은 당신 내면에서 더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고, 당신은 그 본성과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된다.

다른 사람과 당신의 관계에서도 그러하듯, 당신이 만약 매우 오랫동안 관계를 맺지 않으면, 다가가기를 피하고 싶어 한다. 지금 당신은 다시 연결하는 것이 두렵고, 어려우며, 난처하다. 당신은 관계에 저항하게 되며, 이것은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온갖 관념으로 강화된다. 하지만 그런 저항은 분리에서 생긴다.

심지어 이것은 당신의 참된 본성에서도 일어난다. 당신은 본성을 경험하는 것에 저항하게 된다. 몇 분만 눈을 감고 있으면, 당신은 그 저항을 느낀다. 당신은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하며, 내면에 있는 것을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모두 지옥 같고 끔찍하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요동치는 당신 표면 마음 아래에 사는 당신의 참된 본성이다. 이제 여기에 저항이 있고, 회피가 있다. 당신이 사는 지옥에는 여전히 끌림이 있으며, 당신은 그 지옥에 동화한다. 그래서 지옥에 등을 돌리는 것은 끌리는 것에 등을 돌리고, 동화한 것에서 등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저항과 불안과 불편함이 있다.

당신은 앎과 다시 연결해야 한다. 당신의 계획과 목표가 당신에게 일시적으로 즐거움이나 부나 성취감을 주든 안 주든, 그것들은 당신 영혼에 절실히 필요한 것을 충족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큰 목적을 말하지 않으며, 당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에 대한 당신의 근본적인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다.

세계 모든 종교를 통해, 신은 앎에 복귀하는 길을 구축했지만, 종교가 지금 모습이 되고 이용되면서 이러한 길들이 알아보기 어려워졌다. 오로지 새 메시지에서만, 그 길이 역사의 영향을 받거나, 문화의 영향을 받는 일 없이, 또 인간의 심리 속에 들어가 이용되는 일 없이, 복구된다. 그 길은 명확하다. 미로 밖으로 빠져나오는 길이 있다.

당신은 이 미로를 사랑하는 동시에 싫어한다. 이 미로는 당신에게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만,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고 가둔다. 하지만 당신은 그 미로에서 곧바로 빠져나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은 오직 앎만이 아는 특정 목적을 위해 특정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세상에 어떤 것을 제공하려고 여기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신의 운명을 완수하려면, 최선을 다해 이 선물들을 전해야 한다. 그 선물들이 어떻게, 언제, 어디에 전해질 수 있는지는 상황에 맞게 조정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해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자신의 선물을 열어보지도 않고, 공헌도 못 한 채, 영적 가족에게 되돌아갈 것이고, 그런 다음 그저 돌아오기만 바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신의 소망이고 당신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되돌아오고 싶어 하며, “좋아. 이번에는 잊지 않을 거야. 나는 앎을 잊지 않을 것이고, 세상에 나를 파견한 이들 모두를 잊지 않을 것이며, 신을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또 세상에 들어와서 잊는다.

그래서 문제는 당신이 기억할 것이냐이다. 그리고 당신이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생각하는 마음과 당신 내면에 있는 깊은 마음을 다시 연결하는 것이다. 성자와 화신을 믿고, 구세주를 믿으며, 인류 종교가 확립한 것을 믿는 것만으로는 다시 연결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유익할 수 있지만, 당신이 앎에 연결될 때만 그러하다.

그래서 여기에 큰 명확성이 있다. 주안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길은 여전히 신비롭다. 왜냐하면 당신은 앎이 무엇인지, 앎이 당신에게 무엇을 하도록 안내할지, 앎이 자신을 어떻게 표현할지, 앎이 당신을 문화와 종교의 현재 범위 너머로 데려갈지 아닌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앎을 통제할 수도, 이용할 수도 없으며, 조종할 수도 없다. 당신은 오로지 앎과 다시 연결할 수만 있고, 앎을 따를 수만 있다.

물론, 사람들이 그들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의 안내를 받는다면,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자기 내면에 있는 앎과 연결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내적 안내가 불가능하거나 미친 짓으로 보인다. 그들은 앎을 두려워할 것이고, 앎이 혼란으로 이끌 것으로 생각할 것이며, 앎이 인간의 탐닉과 인간의 실수, 인간의 어리석음, 인간의 파괴와 같은 최악의 형태로 이끌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앎을 잊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앎이 자기 내면에 있다는 것을 모르며, 그들이 자신을 위해 세운 계획보다 더 큰 계획이 신에게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여기에 신뢰가 필요하다. 특히 처음에, 그리고 자신을 강하게 의심하는 시기, 자신이 창안하지 않은 길을 선택해야 하는 중요한 결정의 시기에, 큰 신뢰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당신이 앎을 향해 한 계단씩 나아갈 때마다, 그 신뢰는 당신의 경험에서 더 강해진다. 당신의 양심이 더 강해지며, 무엇이 정말 옳은지에 대한 당신의 감각이 더 좋아진다.

이 양심은 종교나 문화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신이 세운다. 당신이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면, 무언가 잘못했다고 느끼고, 이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이 자신의 참된 본성을 확인하는 것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영감을 느낀다. 그것은 당신에게 소생하는 느낌을 주며, 마치 전율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어떤 것을 잘못하면, 차가움을 느끼고, 어떤 것을 잘하면, 따뜻함을 느낀다. 당신이 따뜻함을 향해 가고 싶다면, 비록 따뜻함을 주는 것들이 아주 작고 보잘것없더라도, 그런 일들을 계속한다. 당신이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는 어떤 것을 하면, 자기 자신과 더욱더 멀어지게 된다.

이처럼 당신이 기쁘게 해주려는 것은 신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의 실제 본성에 진실해지고, 당신 자신에게 진실해지며, 훨씬 더 깊은 수준에서 정직해지는 것에 가깝다. 단순히 당신이 느끼는 것을 말할 때만 정직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진정으로 아는 것을 느끼고, 그것이 세상에서 당신의 소통과 의사결정과 정체성의 기반이 되게 하는 수준에서 정직해지는 것이다. 당신이 처한 상황에서는 불가능하고 이해할 수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신에게는 당신을 이 미로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 당신 자신만의 분리된 개인적 체험을 하는 이 지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이 있다.

앎을 따르기 위해, 당신이 반드시 종교에 속할 필요는 없다. 앎을 따르는 데는 당신이 사는 곳, 사는 나라, 당신의 외모가 중요하지 않으며, 당신의 사회적 지위나 정치적 상황도 중요하지 않다. 그 길은 같다. 비록 당신이 당신에게 고유한 길, 당신에게 필요한 것들과 당신의 큰 목적에 고유한 길을 따르긴 하겠지만, 그 길은 같다.

믿음도 다르고, 해석도 다르고, 설명도 다르고, 신학적 이해도 다르지만, 그 길은 같다. 예수가 당신의 안내자라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앎을 통한 길이다. 무함마드가 당신의 안내자라고 해도, 그 길은 여전히 앎을 통한다. 붓다가 당신의 안내자라고 해도, 그 길은 여전히 앎을 통한다. 안내자에 따라 당신이 따라야 하는 길이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은 의견을 달리하고, 논쟁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비난하고, 속상해하고, 분노하고, 화를 내겠지만, 이것은 그들의 상태를 나타낸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 상태와 인식을 보여준다. 앎은 당신 내면에 있다. 당신이 앎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당신의 상황과 마음 상태와 인식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당신은 앎을 바꿀 수는 없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구원을 나타낸다.

당신이 앎과 분리된 정도에 따라, 당신은 그 정도의 지옥에서 살고 있다. 당신은 더 분리되어 더 깊은 지옥에서 살 수도 있다. 당신의 고통은 심해질 수 있고, 당신의 고립은 더 깊어질 수 있다. 당신의 수치심과 죄책감은 더 커질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같은 문제이다. 당신은 미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가서 자신을 위한 구원의 모든 가능성을 부인할 수 있지만, 앎은 여전히 당신 내면에 있다. 비록 앎의 불이 그저 미미한 빛이라 하더라도, 앎의 불은 여전히 당신 내면에서 꺼지지 않는 불씨이다.

시간이 지나면, 숨는 것이나 자신을 벌하는 것에 끌리지 않게 되고, 앎은 당신을 당신 자신, 참자아에게 돌아오도록, 그리고 당신을 세상에 파견한 현실로 돌아오도록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비록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앎은 당신 내면에 있다. 앎은 당신에게 보상하게 할 것이고, 훌륭한 일을 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자신의 복원을 체험할 수 있도록 당신에게 큰 임무를 부여하겠지만, 여전히 당신 내면에 있으면서, 당신 삶에서 신의 현존과 신의 힘을 끌어당기고 있다.

당신이 정말 신을 기쁘게 하고 싶다면, 찬양과 숭배만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신이 당신을 이곳에 파견하여 하도록 한 것을 실제로 해야 하고, 당신이 존중하도록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것을 정말 존중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 내면에 있는 이것 또한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이것을 따라야 하고, 변하는 상황, 어려운 상황에 놓인 세상에서 이것이 자신을 표현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당신과 신의 관계가 존중받고,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것과 당신이 공명한다.

신에게는 찬양은 필요 없지만, 일이 실행되고, 선물이 전해지고, 당신이 복원을 체험하는 것은 필요하다. 신에게는 당신이 공포와 즐거움이 있는 세상, 방향을 상실한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새 메시지에서는, 이것이 정말 명확하다. 하지만 당신이 방어 자세를 풀어야, 이것을 체험할 수 있고,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으며, 이것이 세계 모든 종교의 정수임을 알 수 있다. 이 종교들은 인류가 자신이 타협한 상태에 맞게 개조했지만, 여전히 순수한 형태로 존재한다.

천국을 당신이 온 곳으로 생각하고, 지옥을 당신이 봉사하도록 파견된 곳으로 생각하라. 즉, 분리된 이들의 회복을 돕고, 그들 내면에 있는 앎과 재결합하는 것을 돕도록 파견된 곳, 지금보다 앎이 더 분명하고, 영감이 더 분명하고, 조화와 협동이 더 분명한 세상을 만들도록 당신이 파견된 곳으로 생각하라. 당신은 마치 천국에서 벽돌 하나를 지니고 온 것과 같으며, 그 벽돌은 여기에서 더 크고, 더 완전하고, 더 진실한 현실을 이루는 데 기반이 되는 한 부분이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자신의 운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곳에 온다.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체험할수록, 세상은 덜 두렵고, 덜 갈등하고, 덜 분열되고, 여기에 사는 모든 사람의 진정한 본성에 더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