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4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지구는 항상 큰 공동체 안에 존재했으며, 이제 인류는 그 큰 공동체 삶의 영성을 배울 때이다. 이제는 부족에 초점을 맞추거나 정체성을 두기보다는 새로운 인식 체계를 배워야 할 때이고, 종교 이해의 진화가 가장 잘 표현되고 가장 크게 이루어진 우주에서 그 진화를 깨달아야 할 때이다.
인류의 통합과 이해를 확고히 하고,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을 마주하여 직시하고, 세상에 있는 큰 어둠을 알아차려 상쇄하려면, 인류는 이제 훨씬 더 큰 관점을 취해야 한다.
당신은 기존 이해로 새로운 현실을 접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신이 인류의 보호와 진보를 위한 새 메시지를 세상에 보냈다.
첫 번째 질문은 “창조물이란 무엇인가?”이다. 창조물이란 시간 속에, 또 시간을 초월하여 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말한다. 당신은 시간 속에 살고 있으니, 움직이고 유동적이고 불안정하고 진화하고 팽창하는 창조물의 부분에서 살고 있다. 창조물의 이 부분은 분리된 이들에게 살 집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분리를 체험할 수 있고, 변치 않고 완전하고 영원한 창조물의 부분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선택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당신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창조물은 이 일시적 창조물이다. 시공이 있는 곳인 물질 현실, 끊임없이 변하고 진화 체계가 있는 현실, 비교와 갈등이 있는 현실, 생사가 있는 현실인 일시적 창조물이다.
분리가 이 현실을 창조했다. 왜냐하면 신은 분리된 이들에게 살아갈 기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물질우주가 시작되었다. 당신은 그 물질우주를 이제 겨우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물질우주의 매혹에 흥미를 잃고 물질우주에서 벌어지는 비극들을 용서하려면, 알아차리고 봉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현실 너머에 있는 창조물은 비록 당신이 실제로 그 안에 살고 있지만, 지금 당신의 의식 밖에 있다. 왜냐하면 일시적 창조물은 다른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미 불변의 창조물에 둘러싸여 있지만, 당신 눈으로는 볼 수 없으며, 당신 귀로도 들을 수 없고, 당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의 감각은 오직 물질적인 것들, 움직이는 것이나 물체, 변하는 소리만을 감지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큰 현실 속에 살고 있으며, 이 큰 현실은 당신을 둘러싸고 있다. 당신은 그 현실을 결코 떠나 본 적이 없지만, 당신이 감각에 의존한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어떤 특정 준비를 하지 않고서는 그 현실을 직접 체험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전적으로 당혹스러운 것이며, 지적 생명체로 이루어진 큰 공동체의 무수히 많은 종족들이 이해하기에도 전적으로 당혹스러운 것이다. 그들은 모두 분리 속에서 살고 있으며, 모두 진화를 체험하고 있다. 그들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준에서 의식의 진화, 기술의 진화, 사회체제의 진화를 나타낸다.
이것은 모두 불변의 창조물 자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분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리고 이 분리된 상태, 즉 모든 것이 독특하고 뚜렷이 구별되며, 변하고 움직이며, 태어나고 죽는 상태에서 당신이 살고 있지만, 당신은 불변의 창조물을 결코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변의 창조물은 여전히 여기에 있다.
분리는 근본적으로 지각과 소통과 인식의 문제이다. 당신의 고향인 불변의 현실과 물리적이고 일시적이고 변하는 현실 사이를 분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막을 뚫고 나아갈 수 있었던 사람은 인류 역사에서 거의 없었다. 이 고향은 신을 알고 자신을 아는 곳, 갈등이 없으므로 의문이 없는 곳, 변화가 필요 없으니 변화가 없는 곳이다.
현재 상태에서 당신에게 이 고향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며, 당신의 우선순위와 목표를 고려하면, 당신에게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리는 실제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신과의 단절은 실제로 달성되지 못했음을 당신이 아는 것은 중요하다. 당신이 현재 체험하는 현실, 즉 당신이 사는 이 부분의 창조물에서 분리는 실제이다. 하지만 이 현실은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이 현실은 변하며, 진화한다.
물질계의 삶이 변하지 않고 진화하지 않는다면, 그 삶은 당신에게 지옥일 것이다. 당신이 좋아하지 않은 현실, 결코 변하지 않은 현실에 있다고 상상해보라. 당신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을 것이고, 아무런 진보가 없을 것이다. 설혹 변하지 않는 물질 현실이 당신에게 인지된 필요성을 충족하게 해주는 데 완벽하다 할지라도,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몸속에 사는 것이 본질적으로 불편하고 문제투성이고 어렵다는 것을 알고서, 당신은 자유롭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당신이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상상의 물질 현실에서 일종의 영생을 누리도록 해놓았을 것이고, 거기에 갇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은 당신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곳이다. 바로 그곳이 지옥이다. 만약 당신이 정말 고통받는 곳에 있다면, 당장 신이 머문 고향으로 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지옥에서는 당신이 양가적이 되고, 애착을 가지게 된다. 이 지옥은 당신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당신을 유혹하고 매혹되게 한다. 그래서 비록 당신이 이 물질 현실에서 아름다운 지옥의 위험과 공포와 예측 불가능성을 두려워할지라도, 여전히 여기에 집착한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창조물이 물질우주이다. 물질우주는 영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시적이다. 물질우주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다. 팽창하는 이 우주는 아직 중간 지점에도 도달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당신이 이해하기에 당혹스러운 어떤 것이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물질계에서 영생을 누리면 좋을 것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면, 그런 상태는 지옥 자체가 될 것임을 당신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곳에 있는 것은 지극히 지옥 같을 것이며, 당신은 오랫동안 그곳에 붙들려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계속해서 그곳에 있기를 원하고, 그곳이 좋다고 믿고, 그곳에 대해 희망을 품고, 그곳이 더 잘 돌아가도록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는 물질계가 끊임없이 변하고 팽창하고 진화하며, 성장과 퇴락을 통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당신의 큰 목적과 혼에 필요한 것이 이곳에서 성취될 수 있다는 희망을 당신에게 준다.
여기에는 완전히 다른 신학과 철학의 기반이 필요하다. 만약 자신이 죄를 지었거나 벌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에 왔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자신의 현실 속에 복원을 위해 존재하는 큰 기회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현재 세상 종교들 대다수의 철학적 기반을 고려해보면, 이 그림은 믿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고 불분명하며,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신은 당신 내면에 깊은 마음, 깊은 이해인 앎을 심어 놓았다. 그리고 이 앎은 당신의 목적과 방향을 지니고 있고, 세상에서 당신이 큰 성취를 이룰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당신은 분리 속으로 들어왔으니, 이제 분리에 봉사해야 한다. 당신은 이 분리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삶에 봉사해야 한다. 당신이 고향의 불변성을 다시 발견하고 체험하는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복원은 단순히 신을 기쁘게 하면 천국에 가고, 신을 기쁘게 하지 못하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이다. 이것은 순전히 분리된 인간의 마음 상태와 인식에서 나온 말이다. 당신은 착한 사람은 보상받아야 하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며, 신이 보상을 주고 벌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당신은 신이 당신과 같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즉, 당신의 기질과 가치관을 가졌고, 당신의 정의감을 지지하며, 당신의 기준과 기대치에 부응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당연히 이것은 어리석고 오만하지만, 많은 사람이 취하는 태도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물질우주에서 온갖 진화 단계에 있는 무수히 많은 종족의 모든 이들이 비슷한 가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상된 것이다. 신은 이것에 속지 않으며, 이런 일로 속상해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분리된 상태에서 사는 결과이다.
종교나 영성에 대한 당신의 관념마저도 이 분리된 상태에서 생겨난다. 사람들은 천국을 자신이 사는 물질 현실의 완벽 판으로 상상한다. 만약 그런 현실이 창조된다면, 바로 그것이 지옥임을 깨닫지 못한다.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아름다운 곳에 사는 것은 계속되는 지옥과 같을 것이다.
신은 마술 지팡이로 툭 치거나 어떤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당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갈등을 겪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당신을 창조한 대로 당신은 자신의 영원한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 당신은 갈등을 겪는 불행한 사람으로는 자신의 불변의 현실을 체험하는 것마저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마음이 투사하는 것들을 볼 것이고, 갈등을 겪는 자신의 상태를 나타내는 환경 속에 있고 싶어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당신을 이곳에 계속 있게 한다.
당신은 더 고약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당신은 더 철저하게 지옥을 체험할 수도 있고, 정말로 더 비참해질 수도 있다. 사람들이 기꺼이 순응하고 적응하려는 비참함의 정도는 끝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창조물은 완벽하며, 물질우주라 불리는 일시적인 이 현실에서 당신의 일시적 체험은 단지 신의 불변의 창조물에서 나온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이 불변의 창조물은 비록 당신이 간간이 잠깐씩 일별할지라도 아직은 혼자서 분명하게 체험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가진 믿음이나 가정, 성찰, 형이상학적 개념이나 종교적 가치관은 모두 일종의 수준을 혼동하는 문제를 겪는다. 사람들은 천국이라 불리는 영원히 축복받는 상태를 그려보려고 하지만, 천국을 실제 모습 그대로 볼 수 없다. 그들은 천국에 준비되지 않았으므로 실제 모습 그대로의 천국과 공명할 수 없다. 그들은 천국으로 돌아갈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 물질 현실에서 해야 하는 봉사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에서의 사명을 마치지 않았다.
당신이 아는 시간이나 역사가 있기 전, 분리가 시작되었을 때, 그 해결책은 동시에 창조되었다. 왜냐하면 분리가 당신을 기만하고,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당신의 넋을 빼앗고, 당신을 비롯하여 이 시기에 물질 현실에 있는 다른 모든 존재들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지만, 신을 기만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분리는 바보에게 통할 수는 있어도, 신에게 통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 해결책은 그 즉시 창조되었다. 하지만 그 해결책을 받아들여 체험하고 표현하는 데는 결국 대단히 많은 체험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신은 시간 속에 머물러 있다. 시간은 당신이 불변의 창조물을 떠난 시점에서 최종적으로 완전히 되돌아가는 시점까지의 간격이다. 그 간격을 시간이라 부른다. 시간은 변화와 관련된 것이므로, 불변의 현실에서는 시간이 불필요하며, 상상할 수도 없다. 시간은 변하는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사건들의 진행을 표시하는 어떤 것이다.
모든 시간 개념은 물질 현실 안의 삶에 적응하는 것을 다룬다. 시간 개념은 필요에 의해 마련된 측량 방식이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체계화할 수 있고, 변하는 물질 현실과 소통할 수 있으며, 자신의 진행과 성취를 표시할 수 있고, 자신의 역사나 과거뿐만 아니라 이곳에 살았던 다른 사람들의 역사나 과거를 이해할 수 있다. 불변의 현실에서는 시간이 필요 없으며,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우리가 여기서 하는 말을 들음으로써, 당신은 자신이 이것을 체험하거나 이것과 공명하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아니면 태곳적 기억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이 갈망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불변의 현실에서 사는 것이 지루해 보이거나 재미없고 따분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당신은 변화에 대단히 중독되어 있다. 당신은 변화를 사랑하면서 싫어한다. 당신은 물질적 삶을 사랑하면서 싫어한다. 물질적 삶은 당신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당신을 자극하지만, 동시에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두려움을 주며 실망을 준다.
신의 응답이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이 바로 이처럼 모순되어 보이는 문제와 혼란과 이분법이다. 왜냐하면 신은 당신 내면에 깊은 지성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 깊은 지성인 앎은 세상 마음인 당신 생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에 혼란되지 않는다. 또한 세상에 혼란스러워하지 않으며, 외관에 속지 않는다. 앎은 당신을 유혹하고 설득하고 유인하는 모든 것들에 끌리지 않으며, 당신을 두렵게 하는 것에 겁먹지 않는다. 앎은 변화와 상실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앎은 불변하는 당신의 부분이며, 신에게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당신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앎이 지금 당신 내면에 있다. 앎은 특정 환경에서 특정 사람들과 공헌하여 특정 일들을 달성하는 사명을 띠고 이곳에 있다. 앎의 궁극적인 목적은 당신이 이해할 수 없지만, 만약 당신이 기꺼이 마음을 열고 또 수용할 수 있다면, 당신에게 앎이 제공하는 단계들을 바로 접할 수 있고, 분별해낼 수 있다. 앎은 딜레마를 해결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일시적인 물질 현실인 이곳에 있는 동안, 당신을 통해 고향의 현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앎은 큰 힘, 큰 공명, 큰 관계를 표현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이곳 세상에서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봉사를 한다. 사람들은 시간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으며, 절망하고 있고 자포자기하고 있다. 그리고 세상은 가까운 미래에 있을 큰 고통에 직면하고 있다.
신은 이런 일에 무관심하지 않다. 신은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필요한 것을 세상에 보낸다. 이 현실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을 더욱더 고향의 반영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더욱더 지옥 같은 곳으로 할 것인지 결정할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