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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깨달음"
work: "The New Message from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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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ume: 0
volume_title: "기타 가르침"
book: "기타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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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_by: "Marshall Vian Summers"
received: "2008-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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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ge: "Read and quote freely. Name the source and link to the canonical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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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

> From *기타 가르침*, Volume 0 of **The New Message from God**.
> As received by Marshall Vian Summers on September 19, 2008 in Boulder, Colorado.
> Source: https://newmessage.org/ko/the-message/volume-0/book-0/enlightenment/
> Read and quote freely. Name the source and link to the canonical URL.

사람들이 자신의 깊은 본성을 발견하고, 세상에 온 큰 목적을 발견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실제로 모든 사람은 큰 목적이 있어 이곳에 파견되었지만,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극소수이며, 심지어 이것이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현실임을 이해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일단 당신이 세상에서 자리를 잡았고, 의식주와 물과 안전 등 필수적인 것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나면, 더 깊은 차원의 욕구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개인적 자유와 자기표현의 욕구, 기회를 얻고자 하는 욕구, 자신의 기량과 능력을 개발하고 기르려는 욕구,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기회를 얻으려는 욕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욕구들을 채울 수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 개인의 내면에는 더 크고 더 근본적인 욕구가 있다. 오늘날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심지어 음식과 주거지와 안전에 대한 첫 번째 욕구조차 채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깊은 욕구는 그들 내면에도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이 바로 빈곤이 가진 비극 중 하나이다. 인류의 상당수가 바로 이 빈곤 때문에 세상에 공헌할 가능성을 잃는다. 빈곤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문화와 사회, 인류의 안녕과 발전에 크게 공헌했을 수많은 사람이 자기 삶의 이런 큰 표현을 실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환경에 압도되어 환경의 포로가 된다.

더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과 집착의 포로가 된다. 그들은 자신의 야심이나 개인적 관심사, 로맨스나 중독의 포로가 된다. 이 모든 경우에 사람들은 자신의 깊은 본성, 즉 삶의 깊은 흐름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그들을 세상에 오게 한 큰 목적을 경험하고 표현할 가능성마저 잃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깨달음이 궁극적 목표로 여겨진다. 즉, 집착에서 벗어나고, 세상의 제약에서 벗어나고, 더 큰 의식, 모든 생명의 의식에 몰입하거나, 어쩌면 신의 의식에 몰입할 수도 있고, 내적으로 아무런 걸림이 없는 상태가 되며, 분노와 원망과 낮은 자존감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은 목표로 여겨진다.

그 결과 어떤 사람들에게는 깨달음이 새로운 집착이 된다. 그들은 그것이 바로 자신이 이곳 세상에 온 이유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세상을 벗어나기 위해서이며, 존재의 끝없는 윤회와 그에 수반되는 온갖 고통과 투쟁과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만약 당신의 목적이 당신 내면에 신이 심어놓은 깊은 앎을 발견하고, 그 앎을 따르며, 세상에서 앎의 표현을 위한 매개체가 되는 것이라면, 즉 그렇게 하는 것이 깨달음에 대한 당신의 정의라면, 깨달음은 전적으로 적절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깨달음은 매우 다른 것이다. 깨달음은 일종의 개인적 고양이고, 삶에서 도피하는 것이며,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깨달음은 큰 야심이다.

그렇지만 만약 깨달음의 방향으로 이끄는 영적 연습이 그들을 자신의 깊은 본성인 깊은 앎과 함께하게 할 수 있다면, 그들은 봉사하기 위해 세상에 돌아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자신의 깊은 본성을 발견하고, 또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깊은 마음을 경험한다면, 당신에게 세상에서의 운명이 있고, 이곳에서 수행해야 할 봉사, 즉 특정인들이 합류하는 매우 구체적인 봉사가 있음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당신이 지복과 만족을 추구했을지라도, 실제로는 당신이 세상에서 해야 할 큰 봉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며, 온갖 어려움과 비극과 유혹이 있는 세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세상에 온 이유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세상을 회피하려고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당신은 개인적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려고 세상에 온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당신을 단순히 소비만 하는 사람으로 만들 뿐이며, 모든 정신 질환의 근원인 자기 집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의 깨달음 추구가 당신을 앎과 함께하게 한다면, 당신은 세상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며, 당신의 봉사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행해질 수도 있다. 당신은 이 봉사를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당신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깨달음이 앎과 무관하다. 깨달음은 개인적 목표이며, 행복과 만족에 대한 궁극적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들 삶의 목표이다. 즉 행복하고 만족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모든 자원과 모든 의지를 쏟아부어, 자신을 작게 만들고 세상에 묶어두는 자기 내면의 모든 성향을 근절하거나 극복하거나 무시하려고 평생을 바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앎의 힘과 현존을 간과할 것이고, 앎이 그들을 불러 하라고 하는 것도 간과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죄책감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깊은 본성과 혼에 절실히 필요한 것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죄책감도 그들이 단순히 극복해야 할 한계의 일부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서 당신 삶의 목표와 목적에 대한 혼란과 오해가 있고, 잘못된 인식이 있다. 평화와 만족이 분명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것들은 세상에서 더 깊고 의미 있게 참여한 결과의 산물이어야 한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세상을 피하는 것은 재산을 모으거나 높은 사회적 지위를 통해 부유해지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여전히 자아 성취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자아를 성취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당신은 소비만 하는 사람이 되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며,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계발이나 자기만족을 위해, 혹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용하려고 온 것도 아니다.

이 점을 명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약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깨달음을 어떤 고귀한 길, 궁극적인 추구, 가장 큰 모험, 삶에서 가장 크고 의미 있는 도전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당신을 세상에 오게 한 큰 목적에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놓칠 위험이 있다.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놓은 이 깊은 앎과 내적으로 연결하고, 더 깊고 심오한 차원에서 자기 삶을 경험하고, 삶의 진정한 방향 감각을 얻으려면, 세상에서 은둔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고, 심지어 오랫동안 그럴 수도 있지만, 사람들 대부분에게 이처럼 세상에서 은둔하는 것은 일시적이어야 한다.

수도자가 될 운명을 지닌 사람은 드문 존재이며, 그들이 수도승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 무능력하거나 세상에서의 역할을 회피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거짓 동기이며, 가슴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기 전에는 자신을 완전히 정화할 수는 없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봉사 자체가 정화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내적 삶을 구축하고 자기 내면에 있는 앎의 기반을 쌓지 않은 채 단순히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는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당신이 자기 내면에 있는 일종의 완벽함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고군분투하면서, 봉사를 끝없이 미룰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영적 연습의 목표는 그 형태가 어떠하든, 그 연습이 어떤 종교에 속하든, 세상 마음인 표면 마음을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놓은 앎의 마음과 연결하는 것이고, 그 앎을 따르는 것이다. 그 앎은 당신을 경험으로 이끌고, 그런 다음 이 세상에 온 큰 목적, 삶에 특정 형태로 봉사하는 큰 목적을 표현하도록 이끌 것이다.

비록 당신의 영적 연습이 정신 환경에 유익한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당신의 영적 연습만으로 세상을 치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에게는 이행해야 할 큰 봉사가 있다. 심지어 수도원에 사는 이들도 서로에게 봉사해야 하며, 겸손하고 존중하는 자세로 봉사해야 한다.

지각 있는 존재에게는 삶이란 봉사이다. 당신은 그저 생존하고 번식해야 하는 식물이나 동물이 아니다. 당신은 큰 목적이 있어 이곳에 왔다. 당신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세상의 메뚜기가 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당신은 큰 목적이 있어 이곳에 왔다.

바로 이 큰 목적이 당신 혼의 성취이자 당신 운명의 성취이다. 이 목적을 적절히 수행하고 나면, 당신은 이 차원의 삶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이렇게 했을 때 당신 내면에서 분리가 종식될 것이고,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놓은 것과는 물론 신과도 충분히 강하게 연결될 것이며, 당신이 다시 물질계 삶에 들어올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신의 봉사는 또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더 큰 봉사가 될 것이며, 더 큰 책임이 될 것이다.

완벽함을 추구하지 말라. 당신은 개인적 마음을 완벽하게 할 수도 없고, 몸을 완벽하게 할 수도 없다. 또 세상과 단절하고, 자기 내면에 있는 앎과 단절하지 않고서는 완벽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살 수도 없다. 당신이 아무리 오랜 시간을 들여 영적 연습을 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결국 세상에 돌아와 봉사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봉사하기 위해 세상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봉사하려면 준비가 필요하며, 올바른 태도와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자신이 진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나, 자기 삶에 대해 정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진실하고 적절하게 관계를 맺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로서 봉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그들은 여기에서 생기는 죄책감과 부족함을 상쇄하려고 다양한 형태의 봉사에 참여한다. 하지만 그들의 봉사는 일종의 자기 보상이며, 그들이 타협하며 사는 삶에 묶여 있고, 삶에 접근하는 그들의 방식에 묶여 있다.

그러므로 그 봉사는 온전하지 않고, 진실하지 않다. 그 안에는 영의 힘이 담겨 있지 않다. 이것은 오히려 일종의 도피이고 회피이며, 자신이 가치 있고 쓸모 있음을 자신에게 증명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진정한 봉사가 아니다. 그래서 당신은 자기 삶을 봉사에 바치기 전에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아야 하고 앎과의 연결을 구축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당신은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봉사의 형태를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도해 볼 수는 있다. 다양한 것을 시도해 볼 수도 있고, 다양한 일에 자신을 바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익할 수도 있으나, 정작 당신을 어떤 곳으로도 이끌지 못할 수 있다.

당신은 큰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 당신이 베풀기로 되어 있는 봉사의 형태는 당신 내면에 살고 있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 안에 신성하고 안전하게 간직되어 있다. 당신의 이성으로는 이 목적을 알아낼 수 없다. 이 목적은 당신의 개인적 목표나 야심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당신은 자기 내면에 있는 앎에 순응해야 하며, 이 큰 목적을 찾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당신 마음에 있는 온갖 다른 강박 충동 및 기대와 이 큰 목적을 구별해야 하며, 이 방향으로 자신을 내어줄 힘과 내적 자유를 얻어야 한다. 그리하여 당신은 다른 야심들을 극복하게 되며, 자기 삶을 조화롭게 하고 삶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는 상황, 자멸적인 추구를 청산하고 타협하며 살아가는 관계에서 벗어나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관계로는 실제로 갈 곳이 없으며, 세상에 가치 있는 어떤 것도 내놓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에서 비롯된 자기 정화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관념이나 이상, 혹은 다른 사람의 이상이나 심지어 종교나 종교적 가르침의 이상에 따라 완벽해지려고 애쓰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개인적 고양을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내면에 있는 진실로 내려가는 것이다. 이것은 화해이다. 이것은 삶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며, 삶과 다시 함께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 삶의 깊은 흐름, 즉 당신 삶에 항상 존재한 진실의 끈과 다시 함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당신이 이 깊은 진실의 끈과 무관한 삶을 구축했을지도 모르지만, 이 끈은 여전히 존재하며, 신에게 연결된 당신의 생명줄이다. 그리고 당신의 진정한 삶의 핵심이자 중심이다. 비록 당신이 다른 의무와 헌신과 애착으로 가득 찬 삶을 창조했더라도, 당신이 다시 연결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깊은 삶의 끈이다.

당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오직 앎만이 안다. 그러므로 당신이 자아를 실현하려고 하거나 심지어 세상에 봉사하려고 하면서, 수많은 다른 일을 시도할 수는 있겠으나, 오직 당신 내면에 있는 앎만이 당신이 어디로 가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앎은 당신이 자신을 준비시키고, 온전함과 명료한 마음을 되찾아 이 큰 봉사를 인지하고 표현하기 위해 따라야 할 길을 안다.

여기서 개인적 야심과 자기 회피는 앎과 다시 연결하는 데 큰 장애물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는 일과 개인적 관계를 맺는 데 막대한 투자를 했으며, 자신의 투자가 현명하고 효과적이었음을 계속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 투자가 잘 돌아가게 하려고 계속 노력한다. 그들은 자신의 관계가 잘 돌아가고 삶에서 하는 일이 성공적이 되도록 계속 노력한다. 계속해서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또 노력하지만, 그저 자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 또 자신과 자원을 끊임없이 투자하는 것이 단지 자신의 딜레마만을 더 키우고 깊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날을 늦출 뿐이다.

그래서 당신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삶 속으로 명해를 가져올 것이고, 큰 힘과 확신을 되찾을 것이며, 미래도 없고 단지 당신 삶을 낭비할 뿐인 다른 의무나 헌신에서 벗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지금 당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다고 결코 생각하지 말라. 사실 당신은 산을 오르려고 하고 있다. 당신은 계곡과 나무들 너머까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보고 알려고 하고 있으며, 자기 삶의 변수들과 떠나야 할 큰 여정을 명확히 이해하려고 하고 있다.

여기서 많은 것, 심지어 깨달음까지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개인적 목표나 야심, 궁극적 성취 등 이 모든 것은 개인적 불안과 자기 의심에서 비롯된다.

앎이 당신 마음을 인도하지 않으면, 마음은 방황하는 아이와 같다. 마음은 마치 세상의 고아처럼 끊임없이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늘 부족함을 느끼고, 큰 현실과 다시 결합하거나 다시 연결되기를 갈망한다. 마음은 당신을 몰아붙인다. 끊임없이 몰아붙여 사람, 장소, 사물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며, 심지어 깨달음에서도 자신을 찾으려고 한다.

겉으로 내세우는 목표가 무엇이든, 그 기저에 깔린 동기는 같다. 이것은 분리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당신이 앎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개인적 마음이 제멋대로 날뛰면서 성취를 추구하려 하고, 안전을 추구하려 하고, 행복을 추구하려 하고, 궁극적인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불안과 깊은 개인적 실패감에 의해 움직인다.

당신이 이 가운데 어떤 것을 추구하든, 계속해서 이것들을 추구하는 데 자신을 바칠수록, 개인적 실패감과 불안감은 오직 커질 뿐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혼에 절실히 필요한 것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당신이 자신의 목표와 야심을 이루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음에도, 정작 그것들은 계속해서 당신의 시간을 빼앗고, 당신이 앎에 다가갈 기회, 또 당신 자신이나 마음이나 의식을 세상에 당신을 오게 한 큰 목적과 다시 연결할 기회를 점점 줄어들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진정한 큰 목적 같은 것은 없다. 나는 그저 깨달음을 얻어 세상과 그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이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그 사람에게 큰 목적이 없다는, 분리의 궁극적인 표현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을 위해 궁극적 현실을 창조하려고 하거나, 자신이 상상하는 궁극적 현실로 도약하려고 이곳에 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는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점이고, 자기 삶과 본성에 대한 깊은 결핍감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답을 만들어 내어 성취하려고 하지만, 그 답은 이미 모두에게 제공되었다.

그 답은 분리가 시작된 태초에 제공되었다. 신은 즉시 지각 있는 모든 존재 안에 앎을 창조했다. 앎은 깊은 양심이자, 깊은 연결감과 책임감이며, 성취감과 관계에 대한 깊은 경험이다.

만약 깨달음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앎을 향한다면, 이것은 적절하다. 그러나 당신의 이해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당신은 명확성과 확실성과 힘을 추구하는 것이 세상에서 행하는 더 큰 봉사로 이어질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목표는 지복이나 만족이나 평화가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참여이다.

만약 깨달음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삶에서 벗어나는 일종의 도피라면, 당신은 자신의 목표를 재고해야 한다. 그리고 신이 당신 내면에 이미 답을 심어놓은 현실, 영적 연습만으로는 당신 혼자서 이 답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답은 어떤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답은 단 한 번의 깨달음이 아니다. 단 한 순간에 당신 눈이 번쩍 뜨이고 당신 마음이 완전히 맑아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신은 영적 연습의 결과로 그런 명료한 순간을 경험할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삶의 큰 움직임, 세상에서의 방향과 목적이 있는 움직임, 당신을 세상으로 이끌어 특정인들과 함께 더 크고 더 구체적인 목적에 참여하게 하는 움직임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곳에 왔다.

분리된 이들은 앎을 통해 우주 곳곳에서 회복된다. 당신의 이해나 성향이 어떠하든, 영적 연습의 특성이 어떠하든, 당신이 앎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앎은 멀리 떨어진 어떤 해안이 아니며, 외딴 장소도 아니다. 길고 고된 여정의 결실도 아니다. 앎은 지금 당신 내면에 있으며, 매일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있지만, 당신은 그 말을 들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 마음은 너무 소음으로 가득 차 있고, 자기 일에 너무 몰두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추구하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깊이 함께하는 것이며, 신과의 이 깊은 관계이다. 이것이 당신을 세상으로 다시 데려와 어떤 것을 이곳 삶의 흐름과 진화에 공헌하게 하고, 인류의 안녕 및 세상에 공헌하게 한다. 이 궁극적 역할을 당신 스스로 규정하려고 하지 말라. 그렇게 하는 것은 오직 당신의 진보를 방해할 뿐이다.

여기서 당신 마음은 답에 의존하는 대신, 질문과 함께 살아야 한다. 당신은 자신이 올바른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안전감과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즉, 큰 산을 오르고 있고, 단번에 정상으로 도약할 수는 없으며, 정상이 무엇인지, 어떤 모습일지,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안전감과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이 산을 더 높이 오를수록 무엇을 보게 될지 당신은 모른다. 그래서 당신은 일종의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지만, 이것은 수동적인 믿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준비에 온전히 전념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번개가 내리치듯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당신은 어떤 마법 같은 사건이나 어떤 기적이 일어나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당신은 여행을 할 것이며,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오를 것이다. 당신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법을 배워 자기 삶의 깊은 흐름에 대해 점점 더 깊이 느끼고 경험할 것이다. 이것은 어떤 것을 취하기보다는 놓아버리는 과정에 가깝고, 더 많은 생각, 더 많은 활동, 더 많은 책무, 더 많은 관계를 받아들이는 대신, 실제로 삶에서 본질적이고 실제적인 것들로 단순화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마치 비워내는 것과 같지만,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과정에서 무엇에 가치를 두고 무엇에 가치를 두지 않을 것인지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좋은 것과 그저 좋아 보이기만 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분별력과 결단을 통해, 또 어떤 책임은 지고 다른 책임은 내려놓는 과정을 통해, 이 지혜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 찰나의 깨달음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단지 순간일 뿐이다. 당신은 여전히 여행해야 한다. 당신을 이 산 위로 데려다줄 비밀의 마법 양탄자는 없다. 위대한 교사 곁에 있든, 심지어 천사의 현존과 접촉하더라도 당신을 이 산 위로 옮겨다 주지는 못할 것이다. 당신이 여행해야 한다.

바로 이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당신은 강해지고, 지혜를 얻으며, 한 인간으로서 성숙해진다. 또한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법을 배우고, 수많은 것에 존재하는 진실과 거짓을 점점 더 명확하게 분별하고 분리하는 법을 배우며, 점점 더 많은 상황에서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는 법을 배운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비난 없이, 자신을 미워하거나 남들을 미워하는 마음 없이 행하는 법을 배운다. 당신은 삶에 대해 더 냉철해지고, 더 명확해지지만, 삶이 주는 가능성과는 늘 연결되어 있다.

깨달음, 해탈, 완전한 자유, 완전한 만족, 어려움 없는 삶, 갈등 없는 삶을 약속하는 영적 교사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영적 교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삶에서 도피하는 것이고, 회피하는 것이다. 마치 누군가에게 마약을 주어 그들이 중독되게 하여 더는 자신이나 자신의 상태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이런 것에 끌리는 사람들은 모든 제약과 절제가 동반되는 진정한 수도승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을 갖고 싶어 하지만, 자신만의 방식대로 갖고 싶어 한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원하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하고 싶어 하지만, 자신이나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사랑은 여전히 그들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느끼고 싶어 하지만, 자기 내면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삶에서 어떤 근본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연결을 놓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열심히 노력한다. 그들은 영적 연습에 더 집착하게 되며, 자신의 마음 상태에 더욱 비판적이 된다.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함이나 해방을 얻으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더 비판적이 된다.

그것은 마치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사람과 같으며, 그들은 이를 위해 무슨 일이든 다할 것이다. 그들은 관계를 희생할 것이고, 건강도 희생할 것이며,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삶에 참여하는 것도 희생할 것이다. 그들은 단호하고 집착에 사로잡혀 있다.

신은 이미 당신 내면에 답을 심어놓았지만, 이 답은 오직 당신이 준비되고, 그 답에 대한 당신의 열망이 순수하고 분명해질 때만 드러날 것이다. 답은 당신 삶이 더 큰 질서와 조화를 이룰 때, 또 당신의 활동이 조화를 이루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에 정직해졌을 때,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자체가 이 앎을 당신에게서 불러낼 것이다. 당신 스스로는 앎을 불러낼 수 없다. 세상이 당신의 큰 목적을 활성화할 것이다. 세상이 당신에게 어디에서 봉사해야 하는지, 당신의 봉사가 어디에서 가장 유익할 수 있는지,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깨달음에 관한 자신의 관념을 충족시키려 하거나, 모든 것에서 에고를 벗어나려 하는 것과는 정말 다르다. 여기에서 에고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은 에고이다. 에고는 여기에 편승하여 힘을 얻는다. 심지어 당신이 에고의 한계를 벗어나려 애쓰는 동안에도, 에고는 당신과 계속 함께 간다.

이것은 마치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만약 당신이 감정적·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한다면, 삶에서 물러날 것이다. 삶은 불편하고, 도전적이다. 삶은 문제와 곤경을 안겨주며, 그중 어떤 것은 이해하거나 해결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당신이 해결할 수 없다. 만약 이런 것들을 느끼고 싶지 않다면, 당신은 자신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 세상에서 멀어질 것이며, 이곳에 온 큰 목적을 완수할 가능성에서도 멀어질 것이다.

당신의 첫 번째 책임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이다. 두 번째 책임은 당신 삶에 질서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진실하다는 뜻이며, 자기 내면에 있는 이 근본적 진실을 나타내지 않는 의무·헌신·행동·애착을 내려놓을 힘을 길렀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에게 이 과정은 수년이 걸리지만,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비난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당신은 귀 기울이고, 세상에 앎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며,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이 당신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알기 위해 바라본다.

여기서 당신은 기존 삶에서 더 큰 삶으로 나아가겠지만, 기존 삶 위에 큰 삶을 얹을 수는 없다. 당신은 한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나아가는 여행을 하겠지만, 이 여행을 하는 중에도 세상에 있다. 그리고 이 여행을 하는 중에도 앎길에서 영적 연습을 계속할 것이다.

당신이 매우 구체적 요건이 따르는 아주 독특한 역할을 맡은 수도사가 될 운명이 아니라면, 세상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마치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의 상태이다. 물론 그들은 그 자리에 있지만, 온전히 있지는 않다.

당신은 세상에 온전히 속해 있어야 한다. 여기에 양가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어떤 고통도 없이 오직 세상의 쾌락만을 원하게 되는데, 이것은 정직하지 않으며, 현실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마치 물에 젖지 않고 바다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데 따른 어려움을 겪지 않은 채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저녁 식사로 디저트만 먹고 실제로 당신에게 자양분을 주는 것을 놓치는 것과 같다.

깨달음은 그것이 당신을 어디로 안내하는지, 무엇을 강조하는지에 따라 참이 되거나 거짓이 된다. 만약 깨달음이 앎으로 가는 길이고, 삶의 큰 관계를 위한 준비라면, 그 깨달음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방향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깨달음은 당신을 엉뚱한 곳으로 이끌며, 당신의 자기 집착을 깊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세상에서 멀어지게 하고, 진정한 관계에서 멀어지게 하며, 실상에서는 아무런 실체도 없는 당신 자신 속으로 더 멀리 데려갈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당신은 목적이 있어 이 세상에 파견되었으므로, 스스로 목적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신이 당신을 복원하기 위해 당신에게 앎을 주었으므로, 당신이 자신을 복원할 필요가 없다. 신이 당신에게 삶의 큰 방향을 주었으므로, 당신이 이 방향을 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당신은 적극적으로 준비하여 앎을 발견하고, 당신 삶에 질서를 가져오며, 삶의 큰 목적을 경험하고 표현하는 방향으로 단계들을 밟아야 한다. 그 무엇보다도 세상이 당신에게 삶의 큰 목적을 드러낼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세상과 더 큰 관계를 맺고, 자신과 더 큰 관계를 맺으며, 다른 사람들과 더 큰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바로 이 더 큰 관계들이 당신 내면의 분리를 끝내며, 당신이 실제로 삶과 연결되어 있고 이 세상 너머의 큰 삶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모든 방향에서 분리를 끝낸다. 이것은 당신 위와 아래, 그리고 주변의 모든 곳에서 동시에 관계를 확립한다.

신의 계획은 이렇게 작동한다. 신의 계획은 이성을 정화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에고를 벗어 던지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에고에 주의를 더 많이 기울일수록, 에고는 더 강해진다. 에고는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고, 관심과 투자를 먹고 산다. 여기서 당신은 참된 길에서 벗어나, 자신이 성취할 수 없는 목표를 추구하려 하면서 자기 삶을 허비할 수 있다.

여기에는 더 큰 내맡김이 필요하다. 멀리 있는 신이나 어떤 세력, 혹은 영적 교사나 어떤 관념이나 믿음 체계가 아니라, 삶의 깊은 흐름에 내맡기는 것이 필요하다. 삶의 깊은 흐름은 당신을 어딘가로 이끌어 세상에서 아주 다른 방식으로 살도록 당신을 준비시키기 위해 이곳에 있다.

신은 이러한 것들을 명확히 하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제공하기 위해 세상에 새 메시지를 보냈다. 세상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정립된 앎으로 가는 다른 길들이 있으며, 그중 다수는 매우 강력하고, 진짜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찾기가 매우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르치는 이들은 공개 석상에 나타나지 않으며, 찾기가 매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신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세상에 보냈으며, 그리하여 다른 어떤 길도 찾을 수 없는 이들, 오늘날 삶에서 앎의 축복과 힘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길이 되게 하였다.

신의 새 메시지는 또한 지적 생명체로 이루어진 우주 큰 공동체 안에서 인류의 운명을 계시하며, 지구의 환경이 변하고 있으므로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을 인류가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를 계시한다.

당신의 목적을 이해하려면, 당신은 그것이 표현될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영구히 은둔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당신은 인류가 생명체로 이루어진 큰 공동체에 출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나약하고 분열된 인류를 이용하려고 이곳에 온 우주 세력들에 의해 오늘날 세상에서 인간의 자유가 크게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지구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 즉 환경 훼손, 자원 고갈, 험악한 날씨, 기후 변화, 점점 커지는 경제적·정치적 불안정, 전쟁과 충돌의 위협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당신은 이 모든 과정의 일부가 되려고 이곳에 왔다. 그러므로 당신은 세상의 상태와 수평선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오직 신의 계시만이 제공할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이고 왜 이곳에 왔는지 알려면, 당신은 세상이 현재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삶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올바르고 현명하게 알려면, 당신은 자신의 환경을 이해해야 한다. 당신은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러므로 더 큰 객관성과 더 큰 용기를 가지고 더 명료하게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 당신은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앎은 당신을 삶 및 세상과의 더 깊은 연결로 이끌고, 당신 자신과의 더 깊은 연결로 이끌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아야 하고, 당신 삶에 질서를 가져와야 하며, 세상에 더 깊이 참여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당신이 세상에 온 이유이고, 이 세상을 떠나면 되돌아보게 될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앎의 힘과 현존은 당신과 함께 있으며, 늘 당신과 함께 있었다. 이제 당신은 차츰 그 깊은 흐름을 느끼고, 그 신호를 알아보아야 하며, 그 격려와 억제에 응답하고, 큰 힘에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관념과 신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 큰 힘은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내면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 다가올 크고 불확실한 시기로 당신을 이끌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