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shall Vian Summers
on 2월 5, 1997
1997년 02월 05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왜 그것을 생각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은 분명히 당신이 보는 것과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는 방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만약 당신이 특정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길들면, 당신은 그것과 관련된 것들만 볼 것이고, 여기에서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 정해질 것이다.
당신의 이전 교육은 대부분 여기에 충실했지만, 우리는 지금 새로운 교육, 기본 교육을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당신이 삶에서 두 번째 받는 큰 교육에 해당한다. 당신의 첫 번째 교육은 당신이 세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구실을 하는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첫 단계일 뿐이다. 큰 교육의 두 번째 단계는 당신 내면에 사는 큰 아는 마음인 앎을 회복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 교육 방식들은 각각 모든 것이 잘 갖추어져 있지만, 그 둘은 간접적으로만 관련되어 있다.
첫 번째 교육으로 당신이 제구실을 하는 인간이 되고, 사회적으로 융합되고, 사회적으로 결연해지고, 사회적으로 상호 작용하게 되는 것은 당신이 앎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러기보다는 당신이 생산적인 사회 구성원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당신이 인간 삶의 의미와 역사에 대해 배운 모든 것은 주로 이 결과를 낳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신이 지구에서 고립되어 살면서 받은 교육이며, 그 결과 당신 교육은 대부분 인간의 이해관계, 인간의 활동, 인간의 역사, 인간의 이상에 집중되었다.
그렇지만 당신이 삶에서 두 번째 받는 큰 교육은 앎을 회복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때 당신의 영적 출현이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과 같다. 마치 당신이 어린아이로서 삶을 시작했을 때처럼, 당신은 매우 불확실하고, 매우 불안정한 기반에서 시작하며, 새로운 영향과 고려해야 할 새로운 것들이 있는 멋진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간다. 당신은 당신 삶을 떠나지 않으며,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완전히 다른 부분을 뚫고 들어가며, 이것은 당신의 이전 교육에서 배우도록 권장하지 않은 것이다.
당신이 두 번째 단계에서 받는 큰 교육의 일부는 더 큰 분별력과 더 큰 인식을 배우는 것이다. 이러한 분별력과 인식을 기르려면, 당신은 전에 알지 못한 것들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내면과 당신의 환경에 있는 것들인, 이전에 보거나 소통하도록 권장되지 않은 것들에 응답해야 한다.
큰 교육의 첫 번째 단계가 당신이 앎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을지라도, 교육의 두 번째 단계는 당신이 사회적으로 융합하고 발전하는 것을, 그저 약간의 정도이기는 하지만, 요구하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만약 당신이 세상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없다면, 앎이 당신을 통해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람들과 잘 지내는 법을 전혀 모른다면, 앎은 당신 관계에서 자신의 유익한 현존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인간 사회에서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면, 어떻게 앎이 그 사회에서 당신을 통해 공헌할 수 있겠는가?
달리 말하면, 당신이 큰 공부를 시작하고 앎을 회복하기 시작하려면 단단한 기반이 필요하다. 당신 삶에서 영적 출현이 일어나게 하려면 당신에게 견고한 기반이 필요하다. 이것은 당신이 완전히 사회적으로 융합되거나, 사회적 통념을 모두 받아들이거나, 모든 사람과 아주 잘 지내거나, 당신 사회의 훌륭한 이상을 모두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당신이 참여할 능력이 있고, 참여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사회에서 표출되는 것처럼 당신이 내적으로는 어쩌면 사회 조직에 대단히 저항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앎에는 당신이 그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당신이 완전히 소외되고,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면, 큰 영이 당신을 통해 일할 가능성은 매우 제한될 것이다.
여기서 앎은 당신 삶을 새로운 방향에 집중시키기 위해 당신이 이전에 배운 것을 모두 사용한다. 여기서 앎은 당신이 배운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크게 이용하고 그것에 더 큰 중점을 둔다. 이것은 삶의 큰 법칙 중 하나인 ‘창조주는 파괴하는 대신 다시 쓴다.’를 보여준다.
창조주가 당신의 죄에 대해 당신을 벌할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터무니없고, 현실에서 전혀 타당성이 없다. 그것은 종교 기관이 신도들의 복종과 순종을 끌어내려고 만든 것이다. 창조주는 다시 쓴다. 창조주는 파괴하지 않는다. 당신이 삶에서 무엇을 했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오류로 가득 차 있고, 당신 노력이 아무리 잘못 쓰였을지라도, 앎은 새롭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당신이 배운 것을 이용하는 방법을 당신에게 알려줄 것이다.
그러므로 앎은 분별력과 인식 면에서 당신이 배운 것을 받아들여 그 위에 쌓을 것이다. 앎은 당신이 성취한 것들을 부인하기보다는 그것들 위에 쌓을 것이다. 앎은 당신을 낙담하게 하기보다는 당신이 지금까지 성취한 것에 효용이 생기게 할 것이다. 비록 당신이 삶에서 완전히 다른 방향을 택해야 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과감하게 나아갈지라도, 당신은 지금까지 얻은 것을 사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낭비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신 삶이 더 큰 적용과 큰 의미를 찾을 때 당신 삶은 실제로 효용이 생긴다. 여기서 당신의 과거는 더 큰 균형과 더 큰 이득이 있는 미래를 만드는 데 이용될 것이다. 여기서 당신 삶에 있는 참된 것이 새로운 표현과 의미와 가치를 발견함에 따라, 당신에게 드리워진 그림자들은 없어질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기 시작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이 보는 것과 상호 작용하는 것을 더 잘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항상 본다. 다른 모든 사람은 항상 판단하는 반면, 앎을 따르는 사람은 항상 본다. 진짜 보는 것은 진짜 아는 것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보기를 원한다. 당신은 알고서 보는 것보다 보고서 아는 경우가 더 많겠지만, 이 둘은 모두 함께 간다.
당신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실제로 알려면, 당신은 체험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도록 산을 충분히 높이 올라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단지 믿음을 갖게 될 것이고, 믿음은 현실과 동떨어질 것이다. 믿음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현실을 해석하는 데 당신을 돕는 것이지만, 믿음이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결코 벗어난 적이 없다. 그들은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으로 앎을 발견한 적이 없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 너머에 삶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삶은 믿음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자신이 무엇을 믿든 자신이 믿는 것을 겪고 체험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직 인식의 수준에서만 그러하다.
실제로는 당신 믿음 너머에 현실이 있다. 당신이 반드시 찾아야 하고 함께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현실이다. 여기서 믿음은 당신이 착용한 안경과 같다. 그 안경은 당신이 보는 것을 돕거나 돕지 않으며, 당신 눈에 맞거나 맞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의 인식은 바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생각과 믿음은 유연하고 적응력이 있어야 한다. 그 생각과 믿음은 단지 당신이 보고 알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임시 방편일 뿐이다. 당신은 믿음 없이 살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생각하는 마음이 있고, 마음은 생각을 정리하고, 안정되려면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이 앎에 인도받을 때는 오로지 마음에만 인도받을 때와 매우 다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것을 매우 굳게 믿고 당신 믿음과 대단히 동일시할 수 있지만, 당신의 참 존재는 그 믿음과 아무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또 예를 들어,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 사람과 결혼하겠지만, 그들의 참 존재는 결혼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결혼식을 하고 맹세를 하며, 어떤 식으로도 그들의 참 존재는 전혀 함께하지 않는 관계에 그들 자원을 모두 쏟아붓는다.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이런 일은 항상 일어난다.
이것은 단지 앎 없이 삶을 살려고 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앎 없이 헌신하려고 하는 것이고, 앎 없이 당신이 믿는 것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반이 되는 앎과 함께하면, 믿음은 인식의 도구가 되고, 더 큰 분별력의 수단이 된다. 여기서 당신 생각은 바뀐다. 단순히 변화가 중요해서만이 아니라 당신이 볼 수 있어야 하므로 바뀐다. 당신이 더 명확하게 보고 알려면, 또 세상에서 다루게 될 것을 분별할 수 있으려면, 당신은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잘못은 분별력이 부족한 결과라고 할 수 있고, 분별력 부족은 앎과 충분히 함께하지 않은 결과이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 생각을 재정리하고 당신의 인식을 새 방향으로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했듯이, 앎은 당신이 배운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새로운 초점과 새로운 연관성을 줄 것이다.
여기서 이것은 당신이 처음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완전 초심자처럼 느끼겠지만, 동시에 당신이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을 활용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를 것이고, 당신은 다르게 느낄 것이다. 그 체험이 다를 것이고, 보는 것이 다를 것이며, 느끼게 될 것, 알게 될 것이 다를 것이다.
당신은 큰 교육의 첫 번째 단계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찾고 무엇에 가치를 두어야 하는지를 배웠다. 하지만 큰 교육의 두 번째 단계인 앎의 회복에서는 당신이 완전히 새롭고 훨씬 더 의미 있는 것을 보는 법과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보는 법을 배웠다는 사실, 당신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당신 교육의 첫 번째 단계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 결과는 이제 더 큰 삶의 영역으로 나오며, 더 크게 쓰인다.
사람들이 거의 보지 못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조금밖에 보지 못했는지를 깨닫게 되면서 자신의 체험에서 이것을 발견할 것이다. 사람들은 정말로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큰 일들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큰 기회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믿는 것에 중요한 대안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며, 자신의 많은 관계나 만남에서 앎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것에서 발생한 모든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면 그들은 불편함의 근원으로 가기보다는, 더 많은 즐거움을 찾거나, 약을 먹거나, 아니면 기존 생각을 강화하려고 하거나, 끊임없이 외부 활동에 빠져들려고 한다.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또한 비극이기도 하다.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온갖 형태로 나타나는 인간의 고통은 대부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 결과이며, 삶에서 일어나는 것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결과이다.
물론 식량 부족이나 약품 부족, 삶의 기본 필수품 부족에서 오는 고통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넘어서면, 당신이 보는 큰 심리적 고통은 분별력이 부족한 결과이며, 이는 결국 앎이 부족한 결과이다. 앎은 이러한 사람들 내면에서 충분히 드러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삶의 변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짜로 보는 것인가? 진짜로 보는 것은 그곳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단지 당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도,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보는 것도 아니며, 단지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는 것도,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지배적인 태도와 믿음에 따라 보는 것도 아니다. 진짜로 보는 것은 마음을 뚫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은 창문이거나, 아니면 벽이다. 마음은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이거나, 아니면 정교한 망원경이 된다.
실제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당신이 보고, 직접 체험하는 것은 가능하다. 당신이 그곳에 실제로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것을 직접 체험이라고 한다. 잠시 동안 당신은 자기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직접 체험할 만큼 충분히 자기 생각이나 몰두하는 문제에서 벗어난다. 이 체험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당신은 세상과 다시 연결되고, 다른 사람들과 다시 연결된다. 그리고 당신 삶의 변하는 환경과 다시 연결되고, 당신이 보고 행동할 수 있는 다른 전망점을 얻을 기회를 얻는다.
직접 체험을 계발하고, 그 결과 새로운 관점과 더 나은 분별력을 얻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앎의 학생이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당신이 앎과 함께할 때,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 당신 내면에서 삶이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 삶에 참여하며, 당신 내면에 있는 기의 근원,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더 큰 사건들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거나 연결된 기의 근원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당신은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되고, 당신 자신과 당신의 특정한 관심사들에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자신의 정신 환경에서 받는 속박에서 벗어나고, 문화 전체의 정신 환경에서 벗어난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자신 밖으로, 당신 마음 밖으로 나와, 삶이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 그 삶으로 들어간다.
이제 삶 자체가 때때로 당신에게 찬물을 끼얹을 것이고, 당신은 자신이 응답해야 할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는 거의 언제나 복원이 있지만, 그 상황은 매우 어렵고 대가가 클 수 있다. 매일 당신에게 자각하고 깨어날 기회가 있는데, 왜 큰 역경 속에서만 자각하고 깨어나는가? 당신은 왜 문제가 매우 심각해지고 어려워져, 보통은 큰 대가를 치르며 응답해야 하는, 비상 상황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가? 처음부터 재앙을 피할 수도 있었는데, 왜 재앙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가?
진짜 보는 것과 진짜 아는 것은 함께 간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따를 수 있지만, 그 둘은 항상 함께 간다. 여기에서 효과적인 행동, 역동적인 행동이 나온다. 여기에서 당신 육체는 생기를 회복하고, 그 결과로 더욱 건강해진다.
앎은 보아야 할 중요한 것만 본다. 앎으로 보는 법을 배울 때, 당신은 사물의 겉모습, 밖으로 드러난 모습을 꿰뚫는 법을 배운다. 당신은 오랜 세월 당신이 공들인 주된 사고방식이나 믿음을 간파하는 법을 배우고, 분별력을 얻는다. 그리고 실제로 있는 것을 보고, 분별해야 하는 중요한 것을 분별하는 것 말고 무엇이 분별력인가?
그러므로 인식은 단순히 당신 마음속의 주된 사고방식을 투영하고 당신 주변의 삶을 이해하려고 그 사고방식을 이용하는 메커니즘이 되거나, 아니면 실제 펼쳐지는 삶과 연결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전자는 자기 집착과 자기도취를 촉진하고 심화하며, 후자는 당신을 삶으로 이끌고 역동적인 참여로 이끈다.
당신은 이미 자기 집착과 그로 인해 나약해지는 모든 영향을 겪었다. 만약 그것이 당신을 충분히 수긍시킬 수 없다면, 그저 당신 주변 삶을 보라. 매우 재능 있고, 매우 총명한 사람들이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우울한 상황에서 살고 있다.
당신은 삶을 탓할 수도 있고, 정부를 탓할 수도 있으며, 부모를 탓할 수도 있다. 당신은 무엇이든 자신이 탓하고 싶은 것을 탓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책임은 궁극적으로 당신 몫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보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는 것을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앎을 바꿀 수 없으므로, 자신이 아는 것을 바꿀 수 없지만, 앎이 당신에게 그 자신을 드러내게 할 수 있고, 정말로 효과적이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삶에 참여하는 방법을 보여주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앎으로 보면, 옳고 그른 것이 없다. 그 대신에, “예 아니면 아니요”가 있다. 앎은 끊임없이 사람과 상황을 판단하고 평가하지 않는다. 앎은 단순히 당신이 가야 할 곳으로 당신을 데려가려고 하고, 당신이 가야 할 곳으로 가기 위해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도록 당신을 도우려고 한다. 앎은 삶에 사명을 띠고 있다. 앎은 당신을 세상에 오게 한 사명으로 데려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오직 여기에서만 당신이 성취와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앎은 그저 길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으며, 삶의 구경꾼이 아니다. 앎은 적극적인 참여자이고, 변화와 복원의 촉매제이다.
많은 사람은 마치 영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어떤 것이나 되는 것처럼 매우 수동적으로 영을 본다. 영은 그저 존재하는 어떤 것, 천장에 있는 전구처럼 사방으로 빛을 발하는 어떤 것이다. 영은 개입하지 않으며, 완전히 초연하다. 일이 잘 풀리든, 잘 풀리지 않든, 영이 무슨 상관인가? 영은 구름 위에 있는 태양과 같고, 아래 상황과 관계없이 빛난다.
하지만 영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정말 맞지 않는다. 오직 당신이 삶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만 이런 인식을 키울 것이다. 하지만 앎은 당신을 삶으로 데려오려고 한다. 앎은 당신이 생각과 우선순위를 재평가할 수 있도록 당신에게 다른 전망점을 주기 위해, 삶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게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앎의 의도는 당신을 삶으로 끌어들이고, 삶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신이 온 이유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단지 구경꾼이 되고 가두 행진을 보려고, 이곳에 오기 위해 온갖 문제를 겪은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일을 해내려고 이곳에 왔다. 당신은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해서 일을 성취하려고 이곳에 왔다. 당신 선물과 공헌은 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앎은 세상을 바라볼 때, “저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니라, 앎은 “예”와 “아니요”로 말한다. “예”는 당신의 목적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뜻이며, “아니요”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앎은 비난하지 않는다. 앎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지옥으로 내몰지 않는다.
심판하고 최후의 심판일에 당신을 연옥에 보낸다는, 신에 대한 이런 모든 개념은 완전히 마음이 꾸며낸 것이다. 이 말이 유일하게 현실과 연결된 것은, 만약 당신이 앎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매일 연옥에서 사는 것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당신은 확신 없이 살고, 큰 양심 없이 살며, 방향 없이 살고, 지혜 없이 살 것이다. 당신은 마치 브레이크 없이, 통제 불능 상태로 산비탈 아래로 질주하는 자동차와 같다. 이 정도면 지옥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신은 다시 쓸 것이고, 큰 목적을 강조할 것이며, 앎을 통해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이것이 신과 당신의 연결이다. 신은 당신의 침대 발치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영화에서만 일어난다. 신은 앎을 통해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에게 당신이 이곳에 목적이 있어서 왔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여기서 어떤 것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며, 당신의 참 본성과 사명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줄 것이다.
신은 당신을 세상 밖으로 데려가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삶을 위해 어떤 것을 할 수 있도록 세상 속으로 데려가려고 할 것이다. 삶을 위해 어떤 것을 하는 것이 당신을 복원하는 것이고, 당신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 과거를 고통스러운 기록, 실패, 분리에서 삶과 정말 의미 있는 관계로 바꾸는 것이며, 세상에서 만들어진 모든 것을 좋고 유익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큰 부분은 인식의 변화이다.
그래서 앎으로 보면, 당신은 겉모습 너머를 볼 수 있고, 심지어 자신의 관념 너머도 볼 수 있으며, 자신의 이전 믿음이 가로막아 보지 못한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대안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전에는 전혀 교감할 수 없던 정신 환경과 물질 환경에 있는 요소들을 볼 수 있다.
앎은 당신에게 보는 법, 보아야 할 것 및 생산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과 관계 맺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집착과 믿음, 사고방식, 강박 충동과는 근본적으로 매우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더 높은 전망점에서 보게 될 것이고, 이런 식으로 보는 법을 배움으로써, 새로운 눈과 새로운 의식을 발달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지구가 큰 공동체에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당신 믿음과 매우 다를 수 있지만, 앎은 당신 믿음에 영향받지 않는다. 앎은 자신이 아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것이 앎이다. 앎은 흔들릴 수 없고, 오염될 수 없으며, 앎 자체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앎이 당신 내면에 있는 힘과 온전함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앎에 가까워질 때, 또 당신 삶의 일상적인 활동은 물론 당신이 하는 것이나 가고 있는 곳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서 점점 더 앎의 영향을 느끼기 시작할 때, 당신은 앎의 특성을 공유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너질 수 없는 당신의 안전감은 커질 것이고, 그럼으로써 세상에 대한 당신의 분별력 역시 향상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온갖 의미 없는 것들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당신의 마음이 조용해지고 고요해질 것이며, 통찰력이 예리해질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물음에 답하기보다는, 삶에서 답을 찾을 것이다. 앎이 진정한 방식으로 당신을 세상에 데려오려고 하지만, 앎은 당신이 자기 내면에서 모든 답을 찾도록 장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 답은 대부분 세상에서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답이 당신 내면에 이미 있다 하더라도, 그 답은 표현되고 연관될 수 있는 실제 일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당신을 세상으로 되돌아오게 한다. 이것이 모든 정신병의 근원인 자기 집착에서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
큰 공동체 앎길을 배우는 공부 방법인 앎으로 가는 계단을 공부하면서, 당신은 마음을 고요히 하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기본 기량이고, 많은 세계 종교에서 가르친 기량이다. 고요는 분별력을 얻기 위해 필요하다. 만약 당신 마음이 정신없이 돌아가거나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당신이 어떻게 무언가를 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바라보지만, 보지 못한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들은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현존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마치 그들 마음 안에 텔레비전이 항상 켜져 있는 것과 같으며, 그리고 그들은 그 텔레비전에서 벗어날 수 없어 보인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무언가를 볼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세상과 단절되고, 그 결과로 쉽게 조종당할 수 있다.
어떤 것에 사로잡힌 사람을 조종하는 것은 쉽다. 현존하는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어렵다. 자기 생각에 지배받는 사람을 조종하는 것은 쉽다. 자기 자신 너머를 보는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인간사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큰 공동체에서 온 방문자들은 앎의 회복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이 강해지고 관찰력이 깊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인류를 이용할 수 없고, 인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인류는 훨씬 더 큰 적수가 된다.
여기서 당신은 지구 방문자보다 더 큰 부름을 받을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앎을 회복하고, 앎으로 분별력과 인식을 회복할 수 있다면, 당신은 방문자들이 배울 수만 있다면 그들을 가르칠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훌륭한 기술과 심지어 정신 환경에 영향을 주는 그들의 모든 능력조차,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앎을 기르는 것에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 삶에서 진짜 실질적인 지배력을 얻는 것은 물론, 큰 공동체 자체에 대비하는 것에서, 앎을 기르는 것은 인류의 유일한 방어 수단이고,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방문자들을 보고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들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그들의 정신 환경을 지배하는 요소들을 알고, 그들에게 자유가 없음을 알고, 그들의 기술을 이해하며, 그저 모든 것을 그대로, 객관적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혹시 이것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오, 그들은 천사야! 그들은 영적으로 깨달음을 얻어, 우리를 구원하러 올 것이며, 깨달음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러 올 것이다. 이것으로 전쟁과 분쟁은 영원히 끝날 거야.” 아니면, “오, 그들은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여기 올 거야! 우리를 말살하려고 할 것이고, 저녁 식사로 해치울 것이며, 우리를 압도할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명확하게 분별할 수 없는 상황에 단지 자신의 믿음과 사고방식을 투영하는 것일 뿐이다.
믿는 이의 마음에서는 큰 공동체에서 온 방문자들이 천사이거나 악마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오는 세력은 누구든 천사이거나 악마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문자들을 천사나 악마의 모습으로 개념화한다. 하지만 이것은 보는 것이 아니며, 분별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지배적인 생각과 믿음을 투영하는 것이지, 실제로 있는 것을 보려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체험에 대하여 자신에게 안정감과 안전감을 주려고 자신이 믿는 것을 투영하는 것일 뿐이다. 앎은 그곳에 있는 것을 보고, 믿음은 그 믿음 자체만을 본다.
당신이 삶에서 앎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 즉 확실성이 필요하고, 명확성이 필요하며, 삶의 참된 목적의식과 사명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 당신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얼마나 더 명확히 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에 얼마나 더 현존할 수 있어야 하는지를 또한 인지하게 된다.
삶에서 당신이 저지른 실수는 대부분 현존하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한 결과였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당신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당신은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은 나중에 “오, 삶은 나에게 너무 가혹해! 오늘 나는 정말 운이 나빴다.”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당신은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저 우연히 그들이 지금 있는 곳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곳에 도달한 것은 의식적으로 그곳에 있으려고 의도했거나, 아니면 다른 것들이 그들의 진로를 정하는 동안, 그들이 현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삶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가? 당신이 자기 생각에 빠져 있지 않다면, 또 당신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참여한다면, 자신이 하는 것을 어떻게 알지 못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와 결혼하는지, 어떤 상황으로 들어가는지, 자신의 책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매일 결혼한다.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많은 것을 희생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자, 당신은 삶에서 기회를 잡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당신이 더 현명해질수록, 다시 말해 당신이 앎에 더 가까워지고 당신의 분별력이 더 좋아질수록, 당신에게 기회가 더 적다는 것을 당신은 깨닫지만, 동시에 그 기회가 더 중요하다는 것도 깨닫는다.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것, 특히 전에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당신은 그런 중대한 결과를 낳는 일에 그렇게 조심성 없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분별력과 명료한 인식을 기르는 것은 고요히 있는 것에서 시작된다. 고요히 있으려면 당신은 현존해야 하고, 자기 마음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연습이다. 이것은 쉽지 않지만, 여기서 당신이 내딛는 작은 계단은 하나하나 당신에게 아주 많은 것을 내준다.
모든 작은 성취는 사실 당신에게 전에 없던 감각, 즉 분별하고 인식하고 처리하는 감각을 준다. 물론 당신 마음은 계속해서 판단하고 평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 마음은 기계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당신 내면에 있는 큰 힘에 봉사할 수 있을 때까지는 폭주하는 기차처럼 보인다.
하지만 점점 더, 당신은 마음 옆으로 비켜설 수 있다. 점점 더, 당신은 마음이 표현하는 것 너머를 볼 수 있다. 점점 더, 당신은 다시 보고, 다시 숙고할 수 있다. 당신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바라본다. 당신은 자신의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당신은 바라보고, 기다리며, 고요히 있는다.
동물들은 매일 이렇게 한다. 동물들은 지켜보며, 고요히 있는다. 지켜보며, 자기가 보는 것에 의식을 완전히 내준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것이 매우 어렵다. 인간의 마음은 지나치게 활동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상상에는 맥락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시나리오를 만들어내어 결국 현실 세계가 아닌 상상의 세계에 살게 된다. 그들은 실제로 일어나는 것과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구별할 수 없다.
이것은 중대한 장애이며, 특히 지구에 큰 공동체 세력이 있고 인류가 지적 생명체로 이루어진 큰 공동체에 출현한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장애이다. 하지만 당신은 매일 이 장애를 겪는다.
우리가 말했듯이, 당신은 처음에 주로 자신을 위해 앎을 회복하고 진정한 분별력을 기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다음,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은 이것을 정말로 자신을 위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자신을 위해서 이것을 한다면, 당신은 필요한 에너지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위해서 하기보다는 세상을 위해서, 더 큰 것을 위해서 이것을 한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진실에 더 굳건히 헌신하고, 진실을 분별하는 데 더 큰 기량을 발휘한다.
당신이 의식적으로 세상에서 어떤 것을 바라볼 때,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무엇을 보는가? 이것이 유익한가? 내가 이 일에 참여해야 하는가?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이것이 중요한가?”
이제 당신은 이 모든 질문들을 ‘예 아니면 아니요’로 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이것은 매우 좋은 질문 방법이다. 왜냐하면 이 방법은 이런 질문을 다루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 마음을 우회하려는 경향이 있어, 그냥 아는 앎으로 바로 가기 때문이다.
마음은 기본적인 질문을 받으면, 그것을 당신이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과 거의 관련이 없을지도 모르는 것들을 복잡하게 숙고해야 하는 문제들로 바꾼다. 그래서 마음은 온갖 판단 기준을 이용하여 계속해서 파고들지만, 앎은 안다.
때로는 마음의 기준이 중요하지만, 보통은 아니다. 하지만 새롭게 보기를 어느 정도 개발하려면, 당신은 적어도 잠시나마 마음을 넘어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앞으로는 당신이 마음을 이용해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마음을 이용할 힘이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마음이 당신을 이용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한과 능력에 대한 큰 감각을 얻으려면, 당신은 생각하는 마음을 우회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단지 훈련의 일부일 뿐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아는 것을 찾는 데는 많은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마음을 우회하여 아는 것을 발견하며, 때로는 마음을 통해서, 당신이 아는 정신 과정을 거쳐서 아는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 답은 항상 마음 너머에 있다.
당신이 고요해지는 법을 배우면, 당신 마음은 조용해지고, 당신은 마음 너머를 보는 법과 마음을 통해서 보는 법을 배울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을 배움으로써, 당신은 볼 수 있게 되어,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에 더 명확하고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당신의 믿음은 부차적이다. 당신은 거기에 있는 것을 보려고 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인내심을 갖고, 또 자신의 질문에 답하려고 하지 않으면, 당신은 자신의 인식에서 진정으로 큰 약진을 할 것이다. 이것은 당신 삶의 모든 측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큰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당신을 준비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앎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상황의 겉모습에 속지 않을 것이며, 당신 선호에 지배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정신 환경에서 힘과 확신을 얻는다. 왜냐하면 앎은 물질 환경에서와 마찬가지로, 상황의 겉모습에 속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앎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당신은 앎으로 더 강해지고, 앎이 당신을 더 많이 인도하며, 당신에게 이 큰 명료함과 큰 인식이 더 많이 생기고, 분별력이 더 많이 생기게 될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단히 이로움을 주는 이가 될 것이다. 당신은 그들에게 보는 법, 아는 법, 고요해지는 법, 분별하는 법을 가르칠 것이다. 당신은 실연을 통해 이것을 가르칠 것이고, 당신이 삶에서 옹호하고, 지지하는 모든 것을 통해 이것을 가르칠 것이다.
인류는 지적 생명체로 이루어진 큰 공동체에 출현하고 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별력과 명확한 인식이 더 절실히 필요하다. 당신 내면에 있는 이러한 본질적인 자질을 개발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당신 개인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 더 큰 비극을 초래할 것이다.
당신이 앎으로 바라볼 때, 당신은 두려움 없이 바라보고 선호 없이 바라본다. 결과적으로, 당신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과 선호를 부추기지 않는다. 이것은 참된 객관성이 시작되는 것으로, 삶에서 성취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큰 공동체 앎길이 있으므로 이제 이것을 성취할 가능성은 훨씬 더 커졌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볼 수 있고 알 수 있게 하는 가르침이 있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이 이 가르침의 기반이다. 이 가르침은 고요히 지켜보는 법을 당신에게 가르치고, 자신의 생각과 믿음에 휩쓸리지 않고 외부에 있는 것과 연결하는 법을 당신에게 가르친다. 게다가 심지어 이것 말고도 훨씬 더 큰 비전으로 보는 법, 지적 생명체로 이루어진 큰 공동체에서 사는 결과로 얻게 되는 큰 비전으로 보는 법을 당신에게 가르치고, 지구에 사는 인류로서 고립된 상태 너머를 보는 법을 당신에게 가르치며, 큰 공동체의 인식과 의식, 이해를 당신에게 가르친다.
큰 공동체에 참여하려면 당신에게는 뛰어난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당신은 정신 환경에서 어떤 기량을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삶에서 긍정적인 세력이 되려면, 앎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금 세상에 있는 단 하나의 준비만이 당신이 이런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큰 공동체 앎길이라고 한다. 이 준비는 앎으로 가는 계단, 큰 공동체 지혜, [그 밖의 새 메시지 다른 책들] 등, 이런 경전을 통해 전해진다.
이 준비가 여기에 있으며, 그 필요성이 절실하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엄청나다. 당신은 삶에서 당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단절된 채, 당신의 미래와 경험과 운명을 결정할 큰 사건들을 알지 못하면서, 보지 않고 앞을 향해 계속 비틀거리며 걸어가서는 안 된다. 비전을 얻고, 통찰력을 얻고, 분별력을 기를 수단이 지금 당신에게 있는데,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 준비에는 많은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당신은 수십 년의 습관과 다년간의 사회적 조건화를 하루나 일주일, 한 달 만에 되돌릴 수 없다. 당신의 비전과 인식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그렇지만 부름은 바로 이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세상에 있다.
지금은 양가성을 품을 시간이 없다. 지금은 자기 집착에 빠질 시간이 없다. 지금은 당신의 작은 쾌락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다. 지금은 당신의 가장 큰 능력을 개발하고, 진짜 당신이 되는 시간만 있으며, 앎의 보상과 앎의 기량을 얻고, 인류가 자신의 상황과 영향력과 운명을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도울 시간만 있을 뿐이다.
앎은 당신에게 이 통찰을 줄 것이다. 앎은 당신 눈이 될 것이다. 앎은 당신에게 고요하고, 꿰뚫어 보고, 마음을 열고, 자비로워지는 법을 가르칠 것이다. 앎은 당신 마음 안에서, 또 당신 삶의 영역 안에서 자신만의 정신 환경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면 당신 삶은 공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앎이 당신에게서 발산되고, 당신 주변으로 발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당신의 현존과 함께 있음으로써, 보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고, 앎길에서 준비할 때, 그리고 당신이 통찰력을 되찾고 인식을 개선하고 분별력을 기르는데 필요한 모든 계단을 밟을 때뿐이다. 이것이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고, 우리가 제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