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21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당신은 큰 목적을 위해 세상에 왔으며, 이 목적은 당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 받았다. 이 큰 목적은 당신 내면에 있는 깊은 지성, 신이 당신에게 준 앎이라고 하는 그 깊은 지성 안에 신성하게 보관되어 있다.
당신이 세상에 파견되어, 먼저 배우는 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 다른 사람들과 성공적으로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 법, 분리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데 적응하는 법이다. 이 분리 상태는 어쩌면 극소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당신을 알지도 인지하지도 못하는 현실로,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분리된 현실이나 분리된 정체성이 있는 상태이다.
이 세상의 현실은 당신이 온 곳과 아주 매우 다르므로, 이곳에서 성장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심지어 기본적인 기량만을 갖추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당신의 큰 목적은 이성의 영역 너머 당신 내면에 신성하게 보관되어 있다. 당신이 삶에서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것을 느끼는 시점, 당신이 누구이고 왜 이곳에 왔고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지 절실히 알아야 하는 것들이 내면에서 드러나는 시점에 도달할 수 있을 때까지 신성하게 보관되어 있다.
이 큰 목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며, 당신의 개인적 목표나 염원을 반영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이 목적을 찾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 당신이 이 목적을 발견하여 실현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들을 찾고 있다는 사실도 진짜이고 변함이 없다.
당신은 큰 목적을 위해 이곳에 왔지만, 이 목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채 당신 내면에 비밀 화물처럼 간직되어 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신호와 단서가 있다. 당신 마음은 이 목적을 위해 독특한 방식으로 맞추어져 있고 설계되어 있으며, 당신은 삶의 다양한 시점에서 깊은 성향들을 경험했다.
당신이 훨씬 더 성숙한 상태에 이르면, 내면에서 깊이 요동치는 것을 느낄 것이다. 마치 당신이 일종의 내적 변화를 겪는 문턱에 도달한 것처럼, 당신은 자신에 대한 관점, 세상에 대한 관점, 자신의 가치관이나 관심사 등이 아주 미세하지만 심오하게 바뀌는 깊은 경험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은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나 오락처럼 보이는 것에 더는 만족하지 않고, 더 깊은 어떤 것을 찾는다. 당신은 자신의 깊은 본성을 반영하는 어떤 것, 당신을 세상에 오게 한 큰 목적을 찾는다.
이전에는 당신이 주변 세상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이나 어쩌면 자신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지만, 이제는 세상의 상태, 사람들의 상태, 자신의 상태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공헌하는 의미나 목적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기 시작한다. 이 연관성이 처음에는 매우 약하고 불완전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결국 당신은 주변에서 보는 바로 그 세상에 봉사하도록 파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봉사는 오직 세상의 독특한 측면, 특정 문제, 특별히 필요한 어떤 것에만 해당할 것이다.
당신이 다루어야 하는 세상 문제가 있으며, 세상에 필요한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당신과 깊이 공명한다. 당신에게는 이미 단서가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면에서 강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비판적인 반응일 수도 있지만, 당신을 짜증나게 하거나 신나게 할지도 모르는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더 두드러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단서이다. 아직 답은 아니지만 단서이다. 그리고 당신이 특정 방식을 지향하고, 당신에게 특정 기량이나 타고난 강점이 있다는 것, 이것들 역시 단서이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기보다는 자신의 타고난 성향을 본다. 그리고 이 목적을 발견하는 것의 일부는 다른 것들을 배제하는 과정이다. 당신이 하지 말아야 할 것, 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며, 이때 당신의 선택 폭이 좁아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마치 배제 과정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과 같다. 당신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어떤 것, 자신에게 맞지 않는 생활 방식, 자신에게 부적절한 관계들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며, 자신의 선택을 제한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당신의 큰 목적을 발견하는 것은 당신이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려고 끝없이 선택하기보다는 배제 과정의 결과이다.
실망한 경험이나 때로는 충격적인 환멸의 경험을 통해 삶은 이 점에서 당신을 도울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이 되고 싶다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다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끌리는 상황이나 관계라고 해서 모두 적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당신은 이 선택들 대부분이 자신에게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안다. 이것은 자기 인식에서나 세상의 지혜를 쌓는 데에서 중요한 단계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전 생애를 자신이 결코 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려고 하고, 자신에 대한 환상 속에서 살고, 정말 자신의 운명이 아닌 역할을 하면서 보낸다. 사람들은 자신의 혼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 아닌 일련의 목적을 끝없이 끈질기게 추구할 수 있다.
이때 당신이 더 단호할수록 결국에는 어떤 미래도 어떤 성취도 없는 길로 훨씬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의 진정한 방향을 잘못 이해한 것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기량과 재능을 오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깊은 전환점이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길을 잃고 낙담하고 환멸을 느끼며 공허하고 우울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 내면에 있는 이 전환점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의 야심에 지쳤고, 실망과 낙담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깊은 어떤 것이 자기 내면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이 전환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라. 이것은 매우 어려운 상태이며, 장기화하면 비극적인 상태가 될 수 있다. 모두가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생존을 위한 이런 고군분투를 넘어서면, 자기 삶에 대한 진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다. 이 투쟁은 사람들을 많은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고, 아주 많은 사람을 엉뚱한 길로 이끌 수 있으며, 일종의 영적 빈곤으로 이끌 수 있다.
설사 물질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하고, 당신 문화에서 성공으로 여기는 것을 달성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진정한 목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당신 혼에 필요한 것은 충족되지 않는다. 그리고 공허한 느낌, 충족되지 않는 느낌은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더 많은 목표를 달성하거나, 더 많은 것을 구입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정복하는 것은 이 혼에 절실히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물질적인 성공 지점에 도달할 때, 끝이 없어 보이는 심한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 깊은 수준에서 삶의 공허함을 느끼는 텅 빈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여기서는 유일하게 봉사를 통해, 일종의 이타적인 봉사를 통해서만 탈출할 수 있다. 그들은 필요한 것을 인지하고, 자신의 자산이나 개인적 힘을 이용하여 그 필요한 것을 지원하며, 이것이 그들에게 복원의 길이 된다. 여기서 모든 부자는 단지 자기 재산의 일부를 기부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정말 필요한 것에 기여하는 데 자기 재산을 쓰기도 하는 후원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질문이 생긴다. “신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당신이 종교 성향이 없거나 종교적인 가정이나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당신은 이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은 다양한 방식으로 할 수 있다. “나는 정말로 무엇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는가?” “삶에서 무엇이 내 참된 길인가? “신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이것은 모두 같은 질문이다.
종교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이 질문을 좀 더 직접적으로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자신의 종교적 믿음이나 수행, 자기 종교의 성향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답을 해석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답은 이보다 훨씬 더 심오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더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큰 목적을 위해 세상에 파견되었다면, 신은 당신이 이 목적을 찾아 경험하고 받아들이고 성취하기를 바란다. 신을 기쁘게 하려면, 찬양하고 경배하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야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어쩌면 겸손의 표현으로써 이러한 예배 형식은 자기 뜻을 큰 뜻에 내주는 표시로 적절할 수도 있다. 이러한 예배 형식은 상당히 유익할 수 있지만, 신을 기쁘게 하지는 못한다.
신은 숭배나 찬양을 받을 필요가 없다. 분리된 상태, 불안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흔히들 그러는 것처럼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같은 것에 신은 이끌리지 않는다. 신은 불안하지 않으므로 검증받을 필요가 없다. 신은 낮은 자존감 같은 것으로 고통받지 않으므로 숭배를 받을 필요가 없다. 신은 찬양을 받을 필요가 없다. 신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이 이곳에 와서 하려고 하는 것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이다.
설사 당신이 종교적이지도 않고, 종교도 없고 종교 수행도 하지 않더라도, 만약 당신이 봉사하는 위치에서 봉사하려는 태도로 이곳에 와서 하려고 하는 것을 할 수 있다면, 이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완수할 것이다. 당신은 분리의 벽을 뚫을 것이다. 당신은 신이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고,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당신에게 준 깊은 앎을 따를 것이다.
설사 당신이 신을 믿지도 종교적이지도 않다고 주장하더라도, 만약 봉사 정신으로 이것을 할 수 있다면, 즉 내면에 있는 앎을 따르고 개인적인 자기 집착과 중독에서 벗어나 용기·자비·결단력을 가지고 이런 방식으로 봉사하면서 이것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완수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찾을 수 없는 깊은 수준의 성취,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 등 어떤 만족을 찾을 것이다.
신은 대규모 신자 집단이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모두 보조를 맞추어 걷고, 모두 같거나 비슷한 헌신을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신은 당신이 앎을 발견하여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앎은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것이며, 그리하여 당신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세상에서 큰 삶으로 인도하고 당신이 이 목적을 찾아서 성취할 수 있는 큰 관계로 인도한다.
여기서 당신은 단지 신을 믿는 것만으로는 복원되지 않는다. 믿음은 단지 마음의 상태일 뿐이다. 믿음은 당신이 이곳에 파견되어 성취하고 확립하려는 것을 실제로 성취하고 완수할 만큼 아주 깊지는 않다.
게다가 당신이 모든 사람을 똑같은 것을 믿게 할 수 없으며, 만약 그렇게 하려고 하면, 결국 사람들을 억압하고 처벌하여 일종의 독선적인 잔인함을 초래할 뿐이라는 것을 신은 안다. 이런 일은 신의 이름으로 자행될 것이다. 사람들은 신의 이름으로 처벌받고 처형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일은 혐오스러운 일이며, 대단히 큰 왜곡이다.
신은 누구도 처벌하거나 죽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신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복원되기를 바라며, 분리된 이들이 앎과 봉사를 통해 회복된다는 것을 안다.
당신은 필요한 것이 엄청나게 많은 시기에 세상에 왔으며, 인류에게 필요한 것들은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에 직면하여 더욱더 많아질 것이다. 자원 고갈, 환경 쇠퇴와 악화, 기후 변화와 기상이변, 정치적·경제적 불안정의 증가, 남은 자원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국가들이나 집단들 사이의 전쟁 위험 등이 세상에 다가오고 있다. 이로 인해 인류는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태에 더 크고 깊이 빠질 것이며, 많은 위험한 지도자가 권력을 잡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 처한 세상에 봉사하도록 파견되었다. 이것을 받아들이라. 세상을 사랑하려면 당신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모든 것을 묵인하거나 이곳에서 일어나는 큰 비행과 오류를 정당화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단순히 세상을 비난하는 사람, 비판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어떻게 봉사할 수 있는지 보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주 많은 경우에, 또 아주 많은 종교에서 사람들이 신에 관해 믿는 것은 전혀 맞지 않다. 그들은 훌륭한 신자가 되는 것으로 자신의 큰 목적을 이루려고 하지만, 믿음은 당신이 이곳에서 자신의 큰 봉사를 찾아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올바르게 봉사할 것을 보장할 만큼 아주 강하지도, 일관되지도 않고, 조작과 오류에서 벗어날 만큼 아주 자유롭지도 않다.
많은 폭군은 자신이 자국민들에게 큰 봉사를 하고 있다고 여긴다. 많은 잔인한 압제자는 자신이 사회에 질서와 이익을 가져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믿음만으로는 당신의 안내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신은 인간의 믿음에 영향을 받거나, 유혹받거나, 지배받지 않는 깊은 지성을 주었다.
믿음의 힘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현존을 존중하고 신뢰하는 데 적절하다. 이 앎의 현존은 특히 처음에는 당신이 아주 드물게 경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여전히 삶의 방향을 바꾸고 삶을 참된 방향으로 가도록 정하기에 충분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으로 신의 뜻과 본성과 목적을 이해하려고 하고, 믿음과 순종과 기이한 행동을 통해 신이 자신에게 하기를 바란다고 여겨지는 것을 이해하고 따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특사에게서 온 큰 가르침이 이러한 질문에 완전한 답을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신을 이곳에 오게 한 진정한 목적은 어떤 종교나 단순한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다.
우리가 여기서 당신에게 제공하는 개념조차도 더 깊은 이해와 인지가 필요하며, 당신 내면의 신비한 힘을 고수하려는 헌신이 필요하다. 이 신비한 힘은 당신이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구체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 어떤 것을 규정하는 것은 그것에 형태와 한계를 부여하는 것이지만,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형태가 없고 한계를 뛰어넘는다.
인류의 큰 종교들은 일반적 의미에서 중요하고 필요한 관점과 안내를 제공했다. 계명은 일반적 의미에서 인간의 행동을 인도하도록 제공되었다. 그래서 인류 문명이 자멸하는 일 없이 발전하고 성장하고 확장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넘어서면 계시는 당신 내면에서 일어나야 한다. 당신에게는 자신의 계시가 있어야 하며, 당신은 겸손한 자세로 계시에 다가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당신은 진실에 다가가고 자신을 내맡기지만, 이것은 단순히 당신이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행동이나, 사회 과정이 아니며, 의례적으로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당신 내면에서 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당신은 멀리 있는 신에게 인도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이 드러나기를 요청한다. 신은 당신에게 이미 완벽하게 인도하는 지성을 주었다. 이제 당신은 자신의 경험에서 앎을 분별해야 한다.
당신은 자신의 충동이나 욕망이나 다른 욕구를 앎과 구별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나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앎의 증표를 찾아야 하며, 세상과 인류를 비난하는 것을 멈추고 앎의 신호를 찾고 듣기 시작해야 한다.
당신 마음은 정의를 내리고 싶어 할 것이다. 마음은 매우 불안정하므로, 믿음·확신·이론·법에 의존하고 싶어 할 것이며, 이런 것들을 일종의 의지처로 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앎은 이성 너머에 있다. 왜냐하면 당신의 진정한 정체성은 이성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오기 전 당신이었고 이 세상을 떠난 후 당신이 되는 존재는 이성의 범위와 영역 너머에 있다. 당신의 이성은 이 세상의 삶이라고 하는 제한된 이 현실에서 소통하고 기능하도록 창조되었지만, 당신 삶의 큰 현실과 창조물의 큰 현실을 아우를 수는 없다. 심지어 온갖 차원과 확장이 있는 물질 우주조차 창조물의 일부일 뿐이다.
당신의 이성은 소통하고 평가하는 데 엄청나게 중요한 도구이다. 이 세상에서, 즉 상황이 변하고, 사람들이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고, 당신이 생존하고 적응하고 혁신해야 하는 세상에서, 이성은 훌륭한 도구이다.
그러나 이성이 삶의 의미, 세상에 온 당신의 큰 목적, 당신을 이곳에 파견한 이들의 본성과 현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당신에게 계시되어야 한다.
경험을 당신의 관념에 맞추려고 하지 말라. 경험을 존중하고 그 경험이 당신의 관념을 형성하게 하라. 심오한 경험을 자신의 믿음 체계에 끼워 맞추려고 하지 말라. 심오한 경험이 당신의 믿음 체계 밖에 존재하게 하라. 그래서 이 경험을 통해 당신의 믿음 체계에서 얻을 수 없는 지혜를 얻으라.
이것이 겸손이다. 자신의 관념이 옳고 자신의 믿음이 확인되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오만이다. 그것은 삶과 신이 당신의 관념을 따르거나 당신의 문화적·종교적 관념을 따라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오만하고 무지하며, 겸손이나 열린 마음에서 나온 태도가 아니다.
당신이 인간의 모든 생각에 마음을 열거나 인간의 모든 믿음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지만, 당신 삶에 있는 앎의 힘과 현존에는 마음을 열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신은 당신을 안내하고 당신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한 것이 되고, 당신이 실제로 이것을 경험하려면, 당신은 앎과 당신의 믿음 사이의 차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기량이 있어야 하고 성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마다 신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마다 신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이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내린 판단마다 신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것은 매우 분명히 부정확하고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정말 높은 수준의 자기 정직이 필요하다. 그래서 앎이 출현하는 큰 전환점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인생의 후반부에 온다. 만약 여기서 당신이 기만적이면, 자신을 속이고, 찾았다고 생각하는 진실은 실제로 자기기만의 산물일 것이다. 당신은 어떤 관념이나 믿음에 매달릴 것이고, 그로 인해 길이 막히고 눈이 멀 것이다. 심지어 빛조차도 당신을 눈멀게 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큰 빛, 큰 계시를 찾았다고 느낄 것이다. 그 큰 빛과 큰 계시는 당신을 눈멀게 할 것이고, 실제로는 큰 빛과 큰 계시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앎의 학생은 천천히 신중하게 나아가야 한다. 도중에 많은 오류와 함정이 있으며, 많은 사람이 이 오류와 함정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조급하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하고, 자신의 생각과 믿음 심지어 자신의 존재까지 확인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 조급하고 너무 강박적이어서 자기 삶의 현실이 천천히 드러나 자신에게 보여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을 여행이라고 한다. 이것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섬광 속에서 당신 삶의 현실을 볼 수 있다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이것을 해석하고 일상생활에 적용하여 모든 관계의 맥락으로 가져와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긴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계시가 자신에게 갑자기 드러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당신은 긴 여행을 통해 지혜와 분별력을 기르고, 환상과 현실을 식별하고, 관념과 진실을 식별하는 지혜와 분별력을 기른다.
사람들이 조급한 것은 대단히 불안정한 이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이성은 자신이 앎이라고 하는 영에게 진실로 봉사하는 것, 또 신에게 진실로 봉사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이성은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한다. 이성은 놀라운 소통의 도구이지만, 매우 형편없는 신을 만든다. 나약하고, 오류에 빠지기 쉽고, 비판적이고, 오만하고, 자만하고, 잔인한 매우 형편없는 신을 만든다.
사람들은 신이 이성과 같으며, 단지 규모만 더 클 뿐, 이성의 모든 약점과 위험한 성향 등, 이 모든 것이 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복수하는 신, 심판하는 신, 처벌하는 신, 사람들을 영원한 천벌, 영원한 고통으로 보내는 신 등, 일종의 거대한 자아가 생겨났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신이 다정하고 완전히 자비롭다고 주장하므로 당신은 모순을 볼 수 있다. 이 모순은 종교를 완전히 외면하는 많은 사람에게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개념이 거짓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신에게 주는 이 가르침은 세상을 위한 신의 새 메시지의 일부이다. 새 메시지가 지닌 목적의 일부는 석명을 가져오는 것이고, 앎의 수준에서 영성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며, 세상에서 진정으로 복원하고 성취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당신에게 밝히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과거의 모든 큰 종교의 일부였지만, 길을 잃고 모호해졌다. 왜냐하면 그 종교들이 정치 세력과 야심가들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종교들의 진정한 메시지와 진정한 힘은 많은 점에서 모호해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 종교들을 통해 큰 진실과 복원을 찾을 수 있지만, 매우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문화가 믿는 것, 전통에서 받는 중압감, 그들의 국가와 문화에서 종교를 어떻게 가르쳤고 강조했는지 등을 고려할 때, 여기서 진실을 찾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신의 새 메시지는 신의 의도를 순수한 형태로 전한다. 국가 권력이 섞이지 않고, 정부에 점유되지 않고, 인간에 의해 조작되거나 지배당하는 일 없이 전한다.
이것이 바로 순수한 형태로 온 신의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는 모든 큰 종교의 순수함과 공명하기로 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이 창시하였고, 인간이 변질시켰다. 진실은 모든 종교에서 찾을 수 있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노력, 엄청난 정신적 자유, 엄청난 인내가 필요하다.
모든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계시를 받는 것이 당신 삶의 핵심에서 일어날 때 계시를 받아들여 따르는 것이 된다. 계시는 단순한 개념도 강렬한 경험도 아니다. 계시는 해야 할 여행이고, 따라야 할 길이며, 완전히 새로운 삶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당신은 학생이자 추종자, 거의 가정하지 않는 학생,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배우는 데 마음을 여는 학생이다.
여기서 당신은 하나의 믿음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다. 당신은 하나의 가르침을 암송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신비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시대의 신비주의자들이 따르던 것이다.
믿음과 교리는 이 여행을 할 만큼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 자신의 문화나 경제적 지위에 묶여 있는 사람들, 자신의 국가와 지도자들에게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 내면에서 앎이 흔드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너무 얽매여 있고, 자신의 상황에 너무 갇혀 있다. 이것이 지금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의 상태이다.
인류의 미래에 위대한 지도자, 과학자, 의사, 발명가가 될 사람의 상당수가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고 있거나, 억압적인 정권에서 탄압받고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그들의 큰 재능은 발견되지도, 발현되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빈곤과 억압이 모든 종족의 발목을 잡고, 인간 가족의 가능성을 떨어뜨릴 것이다. 그래서 여성들이 지도자의 자리, 권력의 자리, 혁신의 자리를 자유롭게 맡을 수 있어야 한다. 인류의 절반을 억압하는 것은 인류가 창출하고 생산할 수 있는 전적으로 유익한 모든 것의 절반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앎을 발견하기 쉽게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에 압박을 받거나, 가족을 부양하려는 생존의 문제에 내몰리거나, 정부나 종교의 엄격한 제약과 억압 속에서 살고 있다면, 앎이 출현하기에는 환경이 매우 열악하므로 앎이 출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정치적 자유가 중요하다. 그래서 어떤 종교들이 열려 있어야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그들의 선물이 발견되고 표현될 수 있다. 그래서 빈곤은 전 인류를 병들게 한다.
훌륭한 종교적·정치적 지도자들은 종종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나온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소수의 사람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하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당신이 자신에게 ‘신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혹은 ‘나는 정말로 무엇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는가?’ ‘나는 정말로 살기로 한 삶을 살고 있는가?’라고 자문한다면, 모든 경우에, 당신은 자기 내면에 있는 앎의 힘과 현존에 다가간다.
신은 당신의 일상사를 관리하지 않는다. 우주의 창조주이자 우주 너머에 있는 창조물의 창조주는 당신의 일상생활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신은 당신 내면에서 싹이 트고 자랄 수 있는 씨앗을 당신 내면에 심어 놓았다. 이것이 바로 신의 지혜이다.
그러므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신이 일어나도록 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하거나, 신이 당신의 이익이나 교화를 위해 일어나는 모든 사소한 일을 관리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말라. 신이 삶의 모든 일상사를 관리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신은 자연과 진화를 창조했고, 자연계의 메커니즘을 창조했다. 당신은 이 큰 변화와 불확실성의 무대로 들어섰다. 신은 당신에게 앎을 주었다. 핵심은 바로 이 앎이다. 앎의 현실을 분별하고, 앎의 현존을 느끼고, 앎이 당신의 생각과 감정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하는 것은 실제로 복원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때조차 당신은 “신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여행을 하고 있고, 여행은 발견의 과정, 당신 삶의 가장 근본적인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점차 이 여행에서 센세이션·욕망·환상·착각보다는 영원하고 실재하는 것에 가치를 두고, 좋아 보이기만 하는 것과 좋은 것을 분별하기 시작한다. 이 분별력과 지혜와 능력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 당신이 큰 목적을 수행하고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완전히 복원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봉사를 하려면, 바로 이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답은 그냥 답이 아니다. 그 답은 당신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열린 문이고,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 여행이다. 당신은 여전히 자신을 강하게 의심하고 큰 불확실성을 가지고 답이 없는 의문을 품은 채로 이 여행을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신비 속에 살고 있고, 신비가 이성을 당혹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이때 당신 이성의 밑바닥에 잠재하는 큰 불확실성은 당신 내면에서 의지할 수 있는 큰 힘과 큰 능력을 찾는다. 본질적으로 당신 몸은 당신 마음을 섬기고, 당신 마음은 앎이라고 하는 영을 섬긴다. 그것이 당신 존재의 진정한 위계질서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여행을 이 위계질서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사람들 대부분은 마음이 몸을 섬기고 영이 마음을 섬긴다고 생각하면서 여행을 시작한다. 사람들은 영을 일종의 자원으로 이용하고 싶어 하고, 앎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자원으로 이용하고 싶어 한다.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 내면에서 존재의 자연스러운 질서가 완전히 뒤바뀐 이 깊은 혼란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분리 상태에서 살면 거의 모든 것이 잘못 해석되고, 큰 혼란을 겪는다.
이때 사람들이 고수하고 내세우는 가장 단호한 믿음의 기저에는 혼란과 오해가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혼란과 오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단적인 견해를 고수하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을 해결하지 않고 덮어두기만 할 뿐이다.
당신의 근본적인 혼란과 오해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출현이다. 그리고 여기서 당신은 학생처럼 따라야 하며,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당신은 신비한 힘에 당신의 이성을 내주어야 한다. 이 신비한 힘은 당신이 아마 주기적으로만 경험하겠지만, 당신을 앞으로 이끌기에 충분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의 믿음과 생각에 의존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 신비한 힘에 더 큰 확신을 둔다. 이 힘은 매우 일관되고 세상의 조종에서 자유롭다. 이 힘은 당신 내면에 있는 깊은 양심으로, 여기에서는 옳고 그름이 명백하다.
이런 식으로 신은 당신을 딜레마에서 벗어나게 하고, 당신 삶의 엄청난 혼란과 불확실성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런 식으로 신은 오류와 오용으로 가득 찬 과거에서 당신을 벗어나게 하고, 이런 식으로 당신을 구원한다.
당신이 종교의 옹호자나 참여자이든 아니든, 신은 이런 식으로 당신을 구원한다. 만약 당신이 종교를 굳게 믿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앎이 출현하여 당신 종교의 진정한 본질과 진정한 핵심을 당신에게 계시할 것이다.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당신 마음을 데려가 앎을 섬기도록 설계되었다.
여기에서 복원이 일어나고, 여기에서 삶이 새로워진다. 여기에서 힘이 발견되고, 여기에서 목적과 헌신이 가장 유익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신은 당신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신이 바라는 것은 당신이 앎에 응답하는 것이고, 앎이 당신 삶의 방향을 바꾸어 당신 상황에 명료함을 가져오도록 당신이 허용하는 것이고, 당신이 가정하거나 요구하는 일 없이 학생처럼 따르는 것이고, 당신이 앎길을 따르는 것이고, 신비를 규정하려 하고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는 것으로 모독하는 일 없이 신비를 배우는 것이고, 당신 자신과 자신의 의도에 진정으로 정직해지는 것이고, 당신이 내린 모든 결정을 당신 내면에 있는 깊은 양심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이 깊은 양심에서 당신은 비현실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고, 자신에게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분별할 수 있다.
여기서 이것은 앎으로 가는 많은 계단을 밟는 여행이다. 모든 계단은 중요하고, 모든 계단은 주의와 분별력이 필요하며, 모든 계단은 당신의 힘과 내적 확신을 키우고, 앎에 연결을 구축한다. 모든 계단은 당신 생각을 명확하게 하고, 당신 믿음을 완화하고 조정하며, 당신의 극단적인 생각을 누그러뜨리고, 당신을 강박 충동과 중독에서 벗어나게 한다.
신은 당신이 앎을 따르고 발견하기를 바라며, 자신과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앎을 존중하기를 바란다. 신은 인류가 큰 통합과 협력을 이루어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을 직시하고, 지적 생명체로 이루어진 우주 큰 공동체로 출현하는 현실을 직시하며, 나약하고 분열된 인류를 이용하려고 이곳에 온 다른 종족의 개입에서 이 지구를 보호하기를 바란다.
신이 바라는 것은 당신을 이곳에 오게 한 목적을 당신이 경험하고 따르고 알아가는 것이고, 그 목적이 단계적으로 당신에게 드러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며, 성실하고 겸손하지만 헌신과 결단력 있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고, 인도하는 이 빛에 충실하고 당신 내면에서 방향을 정하는 나침반을 따르는 것이다.
이 목적을 따르고 존중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이 목적을 격려하라. 그러면 당신 삶은 저승의 큰 삶을 반영할 것이며, 신에게서 분리된 느낌과 고향에서 분리된 느낌이 점차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