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received by
Marshall Vian Summers
on 5월 25, 1993

1993년 05월 25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에 대해 매우 복잡한 감정이 있다. 한편으로는 자부심이 드러나면 그 모습이 교만하고 거들먹거리므로 사람들은 그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부심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더 초라하거나 더 나약하거나 능력이 더 떨어진다고 느끼게 한다. 다른 사람이 이런 성품을 보인다면, 당신이 그 사람에게서 바로 느낄 수 있는 모욕적인 특성이 자부심에는 있다. 그렇지만 자부심은 힘과 목적과 의미를 일시적으로 느끼게 해주므로 누구나 느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부심이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매력적이지 않지만, 각자 자신에게는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하지만 자부심이란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있으며, 삶에서 더 큰 관점을 얻으려면 자부심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간단히 말해서, 자부심은 보상 심리이다. 자부심은 당신이 분리와 불확실성의 고통을 상쇄하려고 추구하는 것이며, 무능력과 역량 부족 등에서 오는 느낌에 동반되는 심각한 불편함을 상쇄하기 위한 보상 심리이다. 자부심은 약점을 상쇄하고 은폐하기 위한 것이며, 약점을 대체할 수는 없지만, 도피처는 제공한다. 자부심이 보상 심리라면, 자부심은 잃어버린 어떤 것을 보상한다.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이것은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질 때, 더 성실하고 뛰어난 능력으로 더 적절하게 일하는 경향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자질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창작물에 자신감을 느끼거나 만족하는 것은 자부심 그 자체와는 같지 않다. 당신은 오만함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거들먹거리지 않고, 불가피하게 당신에게 등을 돌릴 다른 형태의 자만심 없이, 자신의 성취에 만족할 수 있고, 당신의 일이 무엇이든 그 일의 가치와 우수성에 만족할 수 있다.

자부심은 보상 심리이다. 자부심은 잃어버린 어떤 것을 보상받기 위해 당신이 자신을 바치는 어떤 것이다. 현실적으로 자부심은 자존심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자. 자존심이란 개념은 다른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거나 표현이 극단적이지 않은 한 전적으로 정상적이고 정당해 보인다. 하지만 자존심에는 본질적인 결함, 즉 피할 수도 없고, 또 당신이 하는 모든 것과 생각하는 모든 것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결함이 있다. 왜냐하면 자존심은 잃어버린 어떤 것을 채워주는 보상 심리이기 때문이다. 자존심은 형편없는 대체물이다. 왜냐하면 자존심이 대체하는 것은 잃어버린,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부심”이라는 말을 “자존심”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실제로 두 단어는 같다. 자존심은 앎의 회복을 방해한다. 왜냐하면 일관성도 없고 삶과 양립할 수도 없는, 당신 자신에 대한 관념을 자존심은 계속 주장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은 계속해서 당신을 삶에서 분리하여 당신이 중심이 되도록 한다. 그리고 당신을 자신의 딜레마에 묶어 놓아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자존심은 당신이 자신에게만 몰두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은 삶 자체를 배제하고 개인적 마음에 집중하며, 개인적 마음은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고 불완전하므로 그 결함과 불완전함은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의 주의를 지배할 것이다. 이를 상쇄하려고 자존심은 온갖 실연과 표현을 한다. 이것은 사람들 행동의 모든 측면에서 드러나고, 그들의 개념·믿음·철학에서 드러나며, 그들 자신의 생각이나 이상에 대한 강한 집착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이 무수한 표현의 이면에는 자존심이 있다. 그리고 이 자존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나약하며 삶과 일치하지 않는다.

당신은 삶의 한 부분이고, 삶의 한 표현이다. 어느 정도 독특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독특함에 대한 생각을 지나치게 하지 말라. 당신은 삶의 중심도, 우주의 중심도 아니다. 당신에게는 자신만의 우주가 없다. 당신은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지 못한다. 당신은 단지 모든 생명체와 공유하는 우주를 해석할 뿐이다. 삶을 현명하게 해석한다면, 당신은 의미 있게 삶에 참여하고 삶과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자존심에 대한 믿음에 따라, 또 자기 뜻을 주장하고 자신의 불편함을 상쇄할 필요성에 따라 삶을 해석하면, 당신은 삶을 잘못 해석할 것이고, 삶을 이용해 자존심을 굳건히 하려고 할 것이다. 이처럼 자존심을 굳건히 하려고 하는 것은 삶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삶에 참여하는 것을 차단하고 파괴한다.

자부심 밑에는 절망감, 아직 직면할 수 없는 절망감이 있다. 그래서 절망감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절망감 위에 무언가를 세우려고 하며, 황폐한 내적 현실, 본질적으로 외롭고 슬픈 내적 현실 위에 표현이 풍부한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구축하려고 한다. 자신에게 있는 자부심에 대한 욕구를 관찰하라. 당신 자신이나 성취에 큰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보라. 자부심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고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살펴보라. 자부심이 세상에 포함되는 느낌을 당신에게 주는가? 평화의 느낌을 당신에게 주는가? 더 깊은 평정심을 당신에게 주는가? 아니면 자만심의 일시적인 경험인가? 이 일시적인 경험은 다른 상황을 만나면 당신 자신을 다시 주장하려는 강렬한 욕구로 곧장 대체될 것이다. 이 자부심을 갖고자 헌신한 모든 것, 투자한 모든 것을 고려할 때, 그 보상은 얼마나 많고 얼마나 큰가?

자존심은 중대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당신 표현의 근원을 부정하고, 세상에서 당신이 갖는 의미와 목적의 근원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은 당신이 창조한 것의 근원이 당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창조한 것의 진정한 근원이 당신을 부인하거나 당신에게서 멀어지면, 당신은 정말 공허하고 정말 가난해질 것이다. 그러면 이때 무슨 자존심이 있는가?

모든 분야와 활동에서 위대한 공헌자들은 모두 어느 시점이 되면 그들이 베푸는 것이 그들 너머에서 오고, 또 그들 자신이 그들 너머에 있는 더 큰 것의 매개체이고 메신저이고 공급자라는 사실과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 창의성의 본질이며, 그들이 베풀려는 소망의 본질이다. 그들의 공헌이 무엇이든, 이것이 그들 공헌의 근원이자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이 공헌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 공헌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부심에 사로잡히면, 당연히 이 모든 것을 잃는다. 당신의 의미와 가치가 나오는 근원을 알아보지 못하며, 당신을 통해 표현될 수 있는 힘과 은총을 알아보지 못한다. 자신을 과시하는 순간들이 지나고 나면, 두려움·의심·불안·갈등의 긴 시기가 뒤따를 뿐이다.

당신은 반드시 연습하고 기량을 길러야 한다. 당신은 매우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주변에서 보는 평범함을 뛰어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직 큰 현실이 당신을 통해 표현되도록 당신이 매개체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진정한 성취가 있다. 여기에는 자부심이 없다. 왜냐하면 큰 현실과 관계를 맺으면, 당신은 자신이 단지 그 현실을 표현하는 매개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 점에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당신은 큰 현실의 힘과 지성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냥 베풀지, 영광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베풂 자체에 대한 만족 말고 베풂에 무슨 영광이 있는가? 세상이 존중하고 존경하고 심지어 찬양하기까지 하는 일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잠시 있기는 하지만, 세상이 당신에게 이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평생 하는 공헌에 대한 영광은 한 순간이다.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지만, 자신이 큰 어떤 것을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해 큰 고통을 겪는 창의적인 사람이 세상에는 많다. 그들은 자신이 근원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의 표현을 통제해야 하고, 어디에,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그 표현을 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들은 결과를 통제해야 하고, 전 과정을 통제해야 하며, 자신이 창조한 것의 원작자가 되어야 한다. 이로 인해 그들은 한도 끝도 없이 고통을 받으며, 그들의 능력과 잠재력은 자기중심 접근 방식으로 인해 크게 억눌리고 낭비된다. 이 접근 방식은 좌절과 실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주장하려 하고, 자신의 가치를 확립하려 하고, 자신의 목적을 선언하려 하고, 인정을 받으려 하고, 심지어 찬탄까지 받으려 한다.

이것은 앎길이 아니다. 이것은 행복의 길도 아니며, 세상에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다. 당신은 자신이 베푸는 것의 가치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은 오직 당신이 더 큰 어떤 것의 매개체, 즉 세상을 사랑하지만, 규정할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심지어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의 매개체라는 것을 알 때만 인지할 수 있다. 당신은 큰 현실을 이해하지 않아도, 큰 현실을 느낄 수 있고, 큰 현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큰 현실의 일부가 될 수 있고, 당신의 것인 태곳적 헤리티지를 되찾을 수 있으며, 앎을 통해 당신에게 제공된 힘을 되찾을 수 있다. 삶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들이 큰 현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도록 놓아두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관념이 겉보기에 아무리 이성적으로 뛰어나고 완벽하게 질서정연해 보이더라도, 그들 자신이 큰 현실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앎의 학생이 되는 것을 숙고하는 당신, 또 우리가 제공한 준비에 맞춰 앎을 깊이 회복하기 시작한 당신에게는 자존심이 약점이자 방해물임을 깨달아야 한다. 문제는 단순히 자존심과 관련된 행동만이 아니며, 이 행동이 표현하는 기반이 없다는 점이다.

앎의 학생이 될 때, 당신은 삶의 진정한 기반을 천천히 의미 있게 회복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답이나 설명도 아니고, 당신이 혼자 속으로 말하는 어떤 것도 아니다. 이것은 삶의 어려움에서 당신을 벗어나게 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당신을 돋보이게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존심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확실성을 위한 기반을 구축한다. 당신 내면에 있는 확실성, 삶과 당신의 관계에 있는 확실성을 구축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확실성은 당신의 모든 생각과 활동에 스며들기 시작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더 강해지고 더 완벽해진다. 그러니 이 기반이 확립되었을 때, 자신을 주장하고 입증해야 할 어떤 필요성이 있는가? 실제로 자존심을 추구하면, 당신은 자신의 기반에서 멀어지고, 자신이 삶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지 못하며, 지혜와 창의성의 근원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외견상 적대적으로 보이는 우주에서, 즉 세상의 인정과 보상을 얻으려고 당신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주장을 하고 당신 앞에 나서려고 하는 다른 모든 사람과 경쟁하는 우주에서 혼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자존심을 버리라. 당신의 개인적 마음은 우주에서 결코 대단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 마음을 높이려 하지 말라. 개인적 마음은 당신이나 삶에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다. 당신의 개인적 마음은 그저 일시적인 현실에서 큰 현실을 표현하는 수단의 일환, 즉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유일한 기회를 통해 우주의 앎을 표현하는 수단의 일환일 뿐이다.

당신이 삶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앎이 있고, 자존심이 있다. 앎이 없으면 사람들이 자신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고, 어디에도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관념과 자신을 결부하고, 자신의 관념을 뒷받침하려고 관계를 구축하며, 돈과 권력, 영향력과 인정을 갈망하는 것으로 상실에서 자신을 지킨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획득하든, 일시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든,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는 엄청난 공허감과 상실감이 있다. 그들은 앎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 물론 여기저기서 직관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앎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당신보다 더 강하고, 더 위엄 있고, 더 중요하고, 더 영향력 있고, 더 아름답고, 더 잘생긴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 무엇이 보이는지 숙고해 보라. 앎이 없다면, 삶에는 다른 이점이 없다. 앎이 없다면, 당신에게는 기반이 없을 것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당신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 기반이 없다면, 당신은 오리무중에 빠져 있고, 당신 삶은 모래 위에 세워진다. 당신이 쌓는 모든 것은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당신은 세상과 세상 세력들의 희생양이다. 당신은 모든 사람, 모든 것과 경쟁한다. 당신은 자신과도 경쟁한다. 당신 마음은 끊임없이 갈등에 휩싸인다. 당신의 관심사는 성공과 실패에만 있으며, 공헌은 아니다.

겉보기에 절망적으로 보이는 이 상황에 앎이라는 선물과 큰 공동체 앎길이 온다. 당신 주변 사람들은 자존심을 더 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자존심에 더 투자하지만, 당신에게는 더 큰 가능성이 있다.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추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자유라는 선물이 당신에게는 있다. 당신은 결코 충분히 자신을 높일 수 없다. 당신은 결코 내면의 기반이 결여된 것을 상쇄할 만큼 충분히 부유할 수도, 유명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없다. 명확하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큰 힘과의 관계도 없고, 삶에서 베푸는 위치에도 있지 않다면, 당신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잘생겼든 못생겼든, 위대하든 소박하든, 대단히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삶에서 당신의 지위가 어떻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든, 앎이 없다면 당신은 나약하고 취약하다.

하지만 용기를 내라. 앎은 당신을 떠나지 않았다. 앎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신은 앎을 제거할 수 없으며, 앎은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앎은 이 시기에 세상에 온 당신의 의미와 목적을 확인해 주는 현실, 당신 내면에 살아 있는 현실로 당신 내면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앎은 저승에 있는 영적 가족과 당신의 관계를 확인해 주고, 세상과 당신의 관계를 확인해 준다. 왜냐하면 당신은 베풀기 위해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삶에서 당신 사명을 더 진척하고 다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 높든 낮든 무슨 차이가 있는가? 당신이 이승을 떠나 영적 가족에게 돌아갈 때, 당신은 세상에서 무엇이 되었는지, 사람들이 그곳에서 당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다. 당신의 유일한 관심사는 당신이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느냐 하지 못했느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당신의 임무는 항상 관계 회복과 앎의 표현을 포함할 것이며, 그 표현은 어떤 형식을 취하든, 당신이 어떤 삶의 분야에 참여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자존심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으라. 절망적인 이 자존심에 빠져 있는 것에서 벗어나 열린 문을 찾는 소수 중 한 사람이 되라. 세상에서의 당신 삶이 일시적이라는 것은 축복이다. 세상에서의 당신 삶이 일시적인 이유는 당신이 어떤 것을 베풀려고 이곳에 왔으며 너무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삶을 사는 것은 매우 번거롭고 매우 복잡하므로 당신 삶이 일시적인 것은 좋다. 물질적인 삶은 힘들다. 몸을 돌보고, 당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돌보고, 당신의 관계를 돌보는 등, 이 모든 것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당신은 영적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이곳의 당신 근무 기간은 제한되어 있지만, 당신에게 이 세상 너머의 더 큰 현실, 즉 지금 이곳에 당신이 있는 것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현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경험하게 될 때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신은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생각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 삶의 근본적인 진실이다.

세상은 당신에게 의미를 줄 수 없고, 목적도 줄 수 없다. 세상이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가져온 목적, 이미 당신 내면에 있는 목적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세상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성을 제공한다. 당신에게는 답이 있다. 세상에는 절실히 필요한 것이 있으므로 세상은 당신에게서 답을 끌어낸다. 그래서 일이 아닌 다른 것을 하기 위해 세상에 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이 달리 당신에게 무엇을 제공할 수 있겠는가? 물론 세상에는 아름다운 곳들이 있고, 멋진 순간적인 즐거움도 있지만, 당신이 무언가를 해낼 수 없다면 이곳은 여행할 가치가 없다. 당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돌아갈 것인지를 생각하면, 이것은 확실히 그렇다.

당신이 삶의 큰 목적을 찾는 것에 관해 묻거나, 관계를 맺을지 말지,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등을 묻는 이런 물음은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 있으므로, 이때 왜 이렇게 묻는지 숙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당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매우 근본적이고 중요한 물음인 이런 물음 뒤에 있는 동기는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 당신의 동기는 무엇인가?

앎은 당신 삶을 변혁할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이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당신의 현재 위치를 강화하고, 당신의 강점 목록에 추가하고 싶은가? 당신은 더 안전하고, 더 부유해지고, 놀라운 능력을 더 갖추고, 더 인정받고 더 가치 있게 되기를 원하는가? 당신의 동기는 무엇인가?

당신이 앎에게 어떤 것을 해달라고 요청할 때, 앎은 당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앎에 필요한 것을 당신에게 제공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당신은 특정한 것을 원하겠지만, 앎이 당신을 변혁할 것임을 이해하라. 이 변혁은 당신이 원하는 특정한 어떤 것을 얻으리라는 것을 보장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당신은 삶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정신력을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획득에 전념할 수도 있다. 획득하는 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아이디어든, 진실이든, 이것은 모두 획득이다. 진실을 획득하는 것은 돈을 획득하는 것만큼이나 이기적이고 방종이 될 수 있다. 진실의 획득이 자부심과 자존심을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동일한 결과, 동일한 부적격 국면을 낳는다. 그리하여 당신은 삶에 접근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만족이 있는,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에도 다가가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소유하는 모든 것, 관계 맺는 모든 사람, 행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세상에 베풀기 위해 당신에게 이 큰 이해와 이 큰 헌신을 가져다주는 목적에만 기여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세상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보다 실망하게 하는 것으로 당신에게 더 봉사한다. 세상은 당신이 자존심을 원하는지, 아니면 앎의 삶을 살고 싶은지 알아볼 또 다른 기회를 당신에게 제공한다.

우리는 당신이 숙고해 볼 수 있도록 큰 공동체에서 온 매우 훌륭한 개념을 하나 알려주겠다. 이 개념은 큰 공동체의 선진 종족들이 삶의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진실이다. 이것은 우주적 진실이므로, 어디서나 적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종족·문화·기질·자연을 초월하는 진실이다. 그리고 당신이 인간이든, 혹은 다른 종이든, 모든 곳에 적용되는 진실이다. 진실은 다음과 같다. 현자는 계속 현명한 채로 있으려면 숨어 지내야 한다. 우리는 당신이 이 개념을 숙고하되, 처음 내린 결론에 만족하지 않기를 권한다. 이 개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려면, 당신은 처음 내린 결론을 훨씬 뛰어넘어야 한다. 당신이 이 개념을 숙고할 수 있고 이 개념과 함께 충분히 오랫동안 머물 수 있다면, 이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개념을 통해 당신은 자신에 대해 배우고, 진정한 당신 능력의 본질, 앎의 역할, 세상의 현실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 개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이런 훌륭한 결과를 얻을 것이다.

자기주장을 하려고 하고, 또 자신을 드러내 내세우려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면, 앎에 접근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당신은 바로 알 수 있다. 앎과 함께하면, 당신은 자신이 더 강할수록, 자신의 힘을 더 숨긴다. 앎과 함께하면, 당신은 영향력이 더 클수록, 이 영향력을 표현하는 데 더 신중하게 된다. 앎과 함께하면, 당신은 특정 목적을 위해 특정 사람들에게만 전한다. 앎과 함께하면, 당신은 세상에서 숨어 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직 앎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앎으로 강한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선물을 지킬 것이고, 그 선물을 어디에 전할 수 있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등 매우 분별력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혜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일을 해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세상에서 일을 해내는 것이 바로 지혜의 본질이다. 세상에 있는 것과 일을 해내는 것이 같으므로 지혜는 또한 세상에 있는 법에 관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앎을 따르는 사람이더라도 이 지혜를 쓰지 않는다면, 세상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당신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저것을 위해 당신을 이용할 것이다. 당신에게 있는 것을 취하려고 당신과 관계를 맺을 것이며, 그들의 목적을 위해 당신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과 에너지를 고갈시킬 것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의존하고, 당신을 이용하려고 하고 조종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에게서 더는 얻어낼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당신을 버리거나 아니면 당신을 파괴하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들에게는 아직 앎을 직접 받아들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떤 것을 직접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것은 간접적으로 전해져야 한다. 당신 자신은 아직 앎을 직접 받아들일 수 없다. 당신은 앎을 점진적으로, 아주 천천히 받아들여야 한다. 앎은 당신에게 적용되고 실연되어야 한다.

우주의 큰 힘은 현명하다. 그 힘은 사람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들을 주지 않으므로, 그 힘의 초점은 사람들의 능력·소망·이해를 키우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앎으로 가는 계단의 목적이며, 내가 하는 말의 목적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이나 내가 하는 말은 당신이 옳다고 주장하도록 부채질하지 않으며, 삶에서 당신을 더 부유하게 하거나, 더 위엄 있게 하거나, 더 아름답게 하거나, 더 우아하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을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당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당신이 세상의 광기에 희생자가 되게 할 뿐이다.

현자는 계속 현명한 채로 있으려면 숨어 지내야 한다. 여기에 자존심이 들어설 자리가 어디 있는가? 당신은 더 강해질수록 강함을 더 숨겨야 하며, 더 완전해질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력을 미치므로 더 신중해야 한다.

앎과 지혜가 있으면, 당신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 자존심을 세우고자 하는 것에 편승하는 것을 삼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도 삼가게 된다. 왜냐하면 자존심은 당신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의 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존심을 거부하지 않는다. 자존심은 도덕적으로 부당하지 않다. 그보다는 당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며, 당신은 자신의 내면에서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더불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이용해 그들 자존심을 키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자존심은 종종 사람들이 개인적 관계를 맺는 동기가 된다.

현자들이 또 숨어 지내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그들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보호 장치이다. 만약 당신이 더 장엄하고, 더 강력하고, 더 인정받고,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앎을 따르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앎을 따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면, 당신의 학습 과정은 실망과 환멸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잘못된 생각과 부적절한 동기에서 벗어나야 하고 분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진실하지 않으면 앎은 당신과 함께 머물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앎은 단순히 활용하고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앎은 지성이다. 당신은 마치 앎이 퍼내 쓸 수 있는 자원인 것처럼, 앎에 접근해서 사용할 수 없다. 앎은 슬기롭다. 앎은 똑똑하고, 현명하며, 자비롭다. 앎은 당신에게 가는 길을 안다. 앎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라. 앎이 당신 내면에서 드러나게 하라.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라. 그 계단들을 바꾸지 말라. 자신만의 길을 만들려고 하지 말라. 당신은 앎에 도달하는 방법을 모르지만, 앎은 당신을 앎 자신에게 데려갈 수 있으며, 그것이 길이다. 자기주장을 하고 자신을 내세우는 지속적인 부담에서 벗어나라. 바로 그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어쩌면 내가 말하는 것에 대한 더 명확한 개념을 당신에게 알려줄지도 모르는 다른 어떤 것을 말해 보겠다. 나는 사람들이 자기주장을 하고,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을 더 높게 여기려고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면에 결핍이나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분명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부족함이나 결핍을 보상하려고 할 때, 이것들이 더 강해진다는 점이다. 당신이 자신의 약점을 보상하려고 할 때, 자신의 약점이 견고해진다. 집요할수록, 당신은 자신과 더욱더 분리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정말 높다고 믿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되려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이라고 믿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밑에는 당신이 약하고, 부족하고, 외롭다고 느끼는 현실이 있다. 오류는 수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신 삶의 거대한 왜곡으로 덧씌워졌다. 이제 당신은 두 배로 자신에게서 멀어진다. 이제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을 회복하는 수단을 찾고 받아들이기가 훨씬 더 어려워진다.

공허함을 보상하기보다는 직시하라. 자신이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끊임없이 입증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나약함을 직시하라. 고립감이나 외로움이 없다고 자신을 설득하기보다는 그 고립감과 외로움을 직시하라. 당신은 앎길에서 이것들을 직시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것들을 통과해서 그 너머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당신을 가로막고 있다. 이것들을 직시해야 한다. 당신은 자신에게 “글쎄, 나는 정말 멋진 사람이야.”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내면에서는 이렇게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당신은 자신이 멋진 사람임을 입증하기 위해 앎길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당신은 심지어 앎이 그것을 입증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오류가 있으며, 당신은 오류를 범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신은 자신이 있고 싶은 곳이 아니라, 현재 있는 곳에서 시작한다.

정직해진다는 것은 당신이 지금 있는 그대로 상황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당신은 현재 상황이 궁극적으로 진실이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출발점이므로 그 상황을 받아들인다. 당신은 여행을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시작할 수 없다. 당신이 여행의 시작점에 있는 한, 여행의 끝 지점에 있을 수 없다. 실제로 당신이 산 아래에 있다면, 산 정상에 있을 수 없다. 당신이 산 아래에 있다면, 산 아래에 있으라! 상황을 왜곡하지 말라. 산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산을 오르는 데 문제가 없다거나,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으므로 다른 날에 산을 오를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상황을 왜곡하지 말라. 사람들은 필요한 것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므로 삶에서 진정으로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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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길은 필요한 것을 채워준다. 삶의 목적·의미·방향을 찾기 위해 내적으로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세상에는 당신 공헌이 필요하므로 당신이 공헌할 수 있도록 외적으로 필요한 것을 채워준다. 세상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당신의 공헌이 필요하다. 세상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당신의 공헌이 필요하다.

세상과 의미 있게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자신을 입증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할 뿐이다. 그들은 정직할 수 있고,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긴장을 풀 수 있고, 삶을 즐길 수 있다. 그들은 헌신할 수 있다. 그들에게 헌신은 손실이 아니다. 헌신은 현실의 시작이다. 그들에게 헌신은 포기가 아니다. 헌신은 그들 자신이 정한 조건이 아니라 그들 내면에 있는 앎에 따라 마침내 삶에 참여할 기회이다. 앎과 함께하면, 그들은 자기 안에서나 세상에서 확고한 기반을 갖는다. 확고한 기반이 있으면, 계속 자신을 입증해야 하거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아도 된다.

자존심에서 벗어나는 것은 비할 데 없는 가치를 지닌 자유이다. 당신이 앎길에서 이 자유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는 것은 앎길이 당신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앎길은 삶에 관한 것이고, 삶에서의 당신 위치와 삶에 공헌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당신의 현실은 저승에 확립되므로, 당신은 여기서 현실을 확립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으며, 단지 자신을 해석할 뿐이다. 하지만 큰 힘은 당신을 통해 창조할 수 있으며, 만약 당신이 길을 잃지 않고 자존심을 지킬 필요성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큰 힘을 이용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이 큰 힘은 지금 세상에서 당신의 진정한 정체성과 진정한 의미를 확인해 줄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들은 소박하며, 당신은 필요한 것들 때문에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넘어서면, 당신은 성취와 공헌을 위해 일하며, 여기에 당신의 모든 에너지가 쓰인다. 당신은 자신 때문에 고통받을 시간이 없으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걱정할 시간이 없다. 왜냐하면 이 상황에서는 당신이 적절하게 자신을 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충분히 큰 도전이다.

큰 현실에 마음을 열라. 심지어 가장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큰 현실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되라.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라. 당신은 꼭 인정받을 필요는 없으며, 삶에서 소수 사람에게만 인정받으면 된다. 소수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필요하다. 그것을 넘어서면, 알려지지 않고 신비로운 채로 있는 것이 더 낫다. 생색내지 말라! 당신이 생색을 내면, 당신 삶이 무의미하고, 또 자신에게 본질적인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강화한다. 귀 기울이고 관찰하는 법을 배우라. 고요히 있으면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당신이 멈추고 바라보면 매우 분명하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판단도 비난도 하지 않으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은 사람들이 그들 내면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을 알 것이고, 절망적인 동기, 보상 심리의 동기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상황이므로 이것 때문에 절대로 누군가를 비난하지 말라. 하지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당신에게 제공되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당신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이것을 공유할 기회가 있고 이것의 큰 결과와 보상을 공유할 기회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

큰 공동체 앎길이 당신에게 전해졌으므로 당신의 기도는 응답받았다. 이것이 진짜 응답이다. 진정한 응답은 세상 안팎 모두에서 진정한 도움이자 준비 수단이다. 당신은 이제 자기도취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가는 길을 제공받았으므로 자신이 이곳에 와서 성취하기로 한 것을 압박감이나 오해가 가장 적은 상태에서 성취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신이 삶에서 진정한 활동에 참여하고, 진심으로 그 활동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해지면, 당신은 영적 가족이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인도하는, 앎의 영속하는 현존을 느낄 것이다. 당신은 자신에게 운명이 있고 그 운명이 보장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자존심이 필요 없을 것이다. 당신은 나약하거나 취약하거나 가치 없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앎을 회복해야 하는 일이 있고, 자기 삶의 불균형과 거짓을 바로잡아야 하는 일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일이 있다. 하지만 당신은 이 일에 자신을 바칠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을 미워하면서 앎길을 걸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 위대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신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부심을 소중히 여기지 말라. 자부심을 들추어내라. 실망은 물론 불명예까지도 삶에서 당신의 진정한 본성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 우상을 갖지 말라. 심지어 앎을 따르는 사람들도 우상이 아니다. 그들은 종종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용기 있고 중요한 결정을 내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사례를 소중히 하고, 그들의 보상이 당신에게 삶의 큰 목적, 이곳에 온 큰 의미, 베풀어야 할 것을 베푸는 큰 기회가 있다는 격려가 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