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shall Vian Summers
on 5월 25, 1993
1993년 05월 25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앎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실제로 앎길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앞에 놓인 길이 어떤 모습인지, 시작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에 대한 더 큰 개념을 당신에게 제공하기 위해 앎길을 걷기에 대해 말할 것이다.
모든 사람의 길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여기에 너무 큰 차이를 두지 않도록 주의하라. 당신이 지구에 살고 당신에게 보이는 지적 생명체가 인간뿐일 때―물론 지구에는 다른 지적 생명체도 있으므로 이것이 완전히 정확한 말은 아니지만—당신은 인간들 사이의 차이가 꽤 크다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이렇게 제한된 맥락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대단히 커 보인다. 사람들은 서로 뚜렷이 구별되어 보인다. 그들의 본성, 기질, 환경, 문화 등에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큰 공동체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실제로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인간들 사이의 차이는 실제로 아주 작다. 이처럼 인식하려면 인간의 맥락을 벗어나 큰 공동체 삶의 맥락에서 훨씬 더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심지어 큰 공동체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과 인간 사이의 차이는 사람들 개개인 간의 차이를 아주 작고 미미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시간을 두고 당신이 길러야 하는 큰 공동체 관점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개인의 준비가 다소 독특해 보일 수 있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은 어떤 기본적인 것들을 배워야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본성, 기질, 환경, 문화, 나이, 세대와 관계없이 어떤 기본적인 기량을 길러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다시 사람들 간의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큰 공동체 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처음에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해야 하는 것에 약간의 차이가 있고, 자신의 배움과 준비에서 역점을 두어야 하는 것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은 어떤 기본적인 문턱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당신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앎이 무엇이고 자기 자신을 통해 앎이 어떻게 말하는지 알아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큰 일이고, 많은 성장 단계가 있는 일이다. 이것은 이 큰 여행을 시작하는 모든 사람이 해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앎을 다르게 경험할 것이다. 그 까닭은 그들 내면에 있는 앎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해석 능력과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같은 나무를 바라보지만, 다른 경험을 한다. 그것은 나무가 한 그루 이상 있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사건을 바라보고 상당히 다른 결론에 이르지만, 그래도 사건은 하나뿐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대단히 다양한 반응을 보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다양한 활동을 함께하는 모두 같은 사람들일 뿐이다.
세상에서 인간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에는 크게 구별을 짓고, 큰 의미가 있는 것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사람들의 버릇, 행동, 특이한 성격, 갈등에서 보이는 차이는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앎의 현존과 출현인, 각 개인 안에 있는 더 큰 가능성은 간과되며, 단지 사람들에게 있는 특이성에 불과한 것들이 그들을 완전히 규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수준까지 격상된다. 예를 들어 당신은 사람들의 행동이나 버릇, 심지어 그들의 말투와 같은 주된 특징의 관점에서 그들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정말 사람들의 중요한 부분인가? 아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왜냐하면 앎길에서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개체성을 강조하고 입증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더 독특하고, 더 중요하고, 더 특별하고 싶어 한다. 물론 여기에 큰 투자가 있기는 하지만, 결합, 협력, 공동체, 동질감, 공통의 목적, 함께하는 성취에 대한 더 깊은 열망도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이 두 가지 목적은 서로 상반되며, 이것이 각 개인 내면에 존재하는 갈등이다.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고, 화해를 원한다. 하지만 다른 것들도 원한다. 이것이 평화와 화해를 불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는 근본적 갈등이며, 사실은 모든 형태의 지적 생명체에게 있는 근본적 갈등이다. 그래서 지성의 출현과 더불어 더 큰 영적 이해의 출현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지성을 통해 단지 자신의 고통과 불화와 취약성과 죽을 운명만 더 잘 인식하게 된다. 큰 영적 인식이 지성과 함께 일어나지 않는 한, 지성 그 자체는 개인에게 막중하고 억압적인 부담을 준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더 원하면서 앎길의 첫째 문에 도달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은 더 깊이 배어 있는 어떤 것, 어쩌면 규정하기 더 어려운 어떤 것,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더 깊이 갈망하는 어떤 것, 소망하는 것보다 더 많이 필요한 어떤 것을 찾아야 한다고 강하게 느끼고 그에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첫째 문에서는 당신이 가르침을 접하고, 그 가르침에서 어떤 것을 얻어 내려고 마음먹는다. 당신은 그 가르침에서 이득을 얻고 싶어 하고, 그 가르침이 자신을 위해 어떤 것을 해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 가르침이 이 두 가지 다른 목적을 충족시켜 주기를 원한다.
본질적으로 이 두 목적의 차이점은 하나는 큰 분리를 바라는 소망이고, 다른 하나는 결합을 바라는 소망이라는 점이다. 이 모든 것을 구분하여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지지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앎길에서 하는 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처음에는 사람들 대부분이 큰 공동체 앎길이 그들을 더 부유하게 하지도, 그들의 삶을 사랑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우지도, 세상의 영향에서 그들을 안전하게 해주지도, 그들을 더 독특하고 인상적으로 만들지도 않을 것임을 알고 나면, 매우 실망한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알게 되면 떨어져 나간다. 그들은 이러한 보상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것들을 찾으려고 돌아선다. 이런 것들은 진짜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이런 약속을 하지 않는다. 당신의 더 깊은 부분은 베풀 곳을 찾으며, 세상 모든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을 더 많이 획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큰 공동체 앎길을 제시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사랑도 돈도 약속하지 않는다. 명성도 약속하지 않으며, 세상의 영향에서 안전하게 해준다고도 약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지속적이고, 더 완전하고, 더 진실하고, 더 현실적인 어떤 것을 제공한다. 그리고 지혜, 앎, 관계, 공동체, 목적, 성취를 제공한다. 또한 이것들에 상응하여 용기, 일관성, 자기 신뢰, 내적 확신을 제공하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포함을 제공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내가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이 좋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연히 만연해 보이는 다른 욕망들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큰 공동체 앎길이 당신의 자존심을 키워주지 않을 것을 말하여 처음부터 당신이 혼란을 겪지 않게 하겠다. 이 앎길은 자기 의심이나 자기혐오를 극복할 수단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 앎길은 부적절하거나 불완전한 삶을 대신하는 대체물이 아니며, 당신의 내적 갈등으로 생긴 상처에 붙이는 반창고가 아니다.
심지어 앎길을 시작하기 위해서도 순수한 동기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다른 동기가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동기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당신을 이곳으로 부르는 매우 진실한 어떤 것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큰 사교 행사나 축제처럼 모두에게 무언가를 제공하는 대중 운동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우리는 당신이 겪는 온갖 사소한 아픔과 고통을 해결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당신이 앎길을 따르면 당연히 일어나는 것만 약속한다. 그것은 당신이 새롭게 가치를 두는 것 때문에 당연히 일어나며, 삶의 진정한 동기가 더 강해질 것이고 다른 모든 동기나 유인들, 즉 당신이 직접 창안했거나 일반 사회에서 동화되었을 수도 있는 것들을 결국 극복할 것이므로 당연히 일어난다. 이 보상을 당연히 받게 되는 것은 당신이 이 보상을 원하고 선택할 것이며, 이 보상보다 못하거나 진정으로 이 보상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앎길은 배우는 곳이고 베푸는 곳이다. 그리고 만약 배우고 베푸는 과정에서 도중에 어떤 것을 상실하거나 포기한다면, 그저 그것들을 과도한 짐으로 여기라. 왜냐하면 당신은 삶의 짐이 가벼워지기를 원할 것이고, 삶의 짐이 가벼워져야 더 큰 것을 배울 정신적⋅육체적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 앎길은 소유물을 경멸하지 않고, 금욕주의자가 되도록 당신을 격려하지도 않으며, 금욕을 가르치지도 않는다. 앎길이 강조하는 것은 정직이고 삶에서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현실적 접근이다. 이것들을 존중하고 받아들이고 따르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해지고 더 증폭될 것이며, 당신에게 부담만 주는 것은 도중에 버려질 것이다. 무의미한 것을 원하고 의미 있는 것을 회피하는 것보다 무엇이 더 큰 갈등을 일으키겠는가? 이것이 모든 혼란의 근원이다. 앎의 위대함이 당신 내면에 있고, 당신을 부르는데, 왜 당신은 삶의 하찮은 장식물들을 원하는가? 물론 당신은 앎의 위대함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 당신이 어떻게 제대로 경험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당신은 앎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곳에 도달했다.
큰 공동체 앎길을 배우는 것은 당신이 일하는 법, 집중하는 법을 배우며,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고요히 있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다. 이것은 당신을 괴롭히거나 낙담하게 하는 온갖 세속 활동을 제쳐둔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 마음이 더 깊이 현존하면서 세속 활동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당신의 삶은 똑같아 보인다. 많은 의식이나 성대한 축하가 없다. 당신의 행동이 반드시 바뀌는 것도 아니다. 바뀌는 것은 더 근본적이고 스며드는 어떤 것이다. 이것은 마치 훌륭한 정원을 가꾸는 것과 같다. 정원을 가꾸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당신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정원은 성장한다. 이것은 앎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앎을 위한 당신 내면의 공간을 가꾸고 지지하며, 그 공간에 자양분을 공급하면, 앎은 저절로 성장한다.
중요한 변화는 점진적이다. 이것은 당신 내면에서 그 변화를 통합해 나가면서 하는 변화이다. 지혜도 통합도 없는 변화는 자기 삶에서 분리하는 힘일 뿐이다. 이것은 진보도 성장도 발전도 약속하지 않는다. 실제로 당신은 주변에서 온통 사람들이 엄청난 변화를 겪으면서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변화는 큰 목적을 동반할 때, 또 지혜를 얻을 가능성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동반할 때 삶에 생기를 주고 삶을 새롭게 한다. 이때 변화가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 이때 변화를 통해 새로운 문이 열리고 당신은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앎길을 따라 살고 또 따른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당신에게는 여전히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을 것이며, 여전히 자신이 하는 것을 확신하는 날도 있고 확신하지 못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울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할 것이며, 여전히 어리석은 일도 하고 여전히 실수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당신 내면에서는 다른 어떤 것이 성장하고 더 강력해지며, 더 현실이 되고 더 분명해진다. 점점 더 자라는 큰 정원, 앎의 정원이 있다. 당신 내면에는 타오르는 불, 앎의 불이 있으며, 이 앎의 불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당신이 경험할 큰 변화는 사람들이 보통 자기 변혁이라고 부르는 큰 느낌과는 다를 것이다. 진정한 변화는 당신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난다. 당신은 보통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보지 못하지만, 결과는 알아차릴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것들을 다르게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그렇게 느끼라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며, 단지 당신이 느끼는 어떤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당신의 가치관이 변한다. 당신은 진실에서 벗어나려고 하기보다는 진실에서 위안을 찾기 시작한다. 거친 자극이 상당히 짜증나는 것이 되면서, 당신은 더욱더 조용함을 추구하게 된다. 당신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다른 것들을 찾으며, 사람들 사이의 미묘한 상호 작용을 더 잘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정신 환경에 더 영향을 받고 더 민감하며, 소유물과 즐거운 감각보다는 진실과 이해를 더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이것은 모두 자연스럽다. 여기서 아무것도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저 절실히 필요한 것 및 삶과의 깊은 동질감을 받아들일 뿐이다. 사람들은 대단히 큰 경험을 하고서, “오, 세상에! 정말 큰 경험이었어! 나는 정말 큰 경험을 했어! 이것은 내 삶을 바꿀 거야!”라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 허나 이 경험은 당신 삶을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은 이 경험을 통해 당신 내면에서 일어나는 큰 변화를 알아차릴 수는 있다.
매우 강렬하거나 많은 것이 요구되는 경험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진정한 성장과 발전은 안에서 밖으로 일어나며, 개인적 마음의 통제 밖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 자신에게 공을 들이는 일이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당신이 자신에게 어떻게 공을 들일 수 있는가? 자기 목덜미를 움켜쥐고 자신을 들어 올릴 수 있는가? 손으로 자신을 들어 올릴 수 있는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당신이 이렇게 하려면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다.
자신에게 실제로 공을 들이는 일은 삶의 실제 경험과 관련하여 자기 생각과 행동을 조정하는 것이 포함된다. 일상을 벗어나서 성격을 바꾸려고 애쓰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을 것이다. 앎길은 당신에게 삶에서 물러나서 자신에게 공을 들이라고 요구하지 않으며, 더 중요해지고, 더 구별되고, 더 독특해지라고 당신에게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당신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거나 더 못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고, 당신에게 자부심을 가지라거나 교만하게 굴라고 요구하지도 않으며, 나약하거나 자신을 낮추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것들은 모두 자존심을 높이려는 시도이며, 자신에게 더 좋아 보이게 하려는 시도이다.
앎길은 당신에게 더 좋아 보일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앎길은 당신에게 앎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이리하는 과정을 통해 당신 내면의 모순과 갈등을 바로잡을 것이다. 바로 이 과정 자체가 이렇게 할 것이다. 이것은 삶이라는 산을 오르는 것이다. 산을 오르면서 당신은 불필요한 것들은 버리고, 필요한 것들과는 결합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과는 작별하고, 어떤 사람들과는 합류한다. 당신이 이리하는 것은 심심풀이로 자기 성격을 바꿔보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어딘가로 가고 있고, 그곳에 도달하려면 어떤 조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신 자신에게 공을 들이는 진짜 개인적 일이며, 이 일에는 당신이 아주 적은 양의 시간만 쓰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스스로 창조한다고 생각하므로, 개선하려면, 자신을 재창조하여 더 나은 작품, 즉 개선된 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단지 자신의 딜레마를 어둡게 만들고, 벗어나는 것을 더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 뿐이다.
앎길은 삶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을 당신에게 알려 주며, 당신이 그 일을 계속하고 꾸준히 하는 한, 중요하지 않은 일은 충족되거나 아니면 잊혀질 것이다. 신은 갈등에 개입하여 그것을 해결하지 않는다. 신은 해야 할 의미 있는 활동을 제공하며, 바로 이때 당신이 자기 가치를 회복하게 되고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 신은 모든 것을 바로잡고 당신의 틀을 재구성하려고 당신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신은 당신을 불러 어떤 일을 하게 하고 어떤 것에 응답하게 한다. 당신이 그것을 하면, 당신에게는 해결의 길이 시작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앎길이다. 처음에는 당신이 표면에서 일어나는 많은 변화를 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당신이 자신을 재창조하거나 새롭게 바꾸거나 더 매력적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을 때 그렇다. 많은 개인적 성장은 실제로 이런 것을 위한 것이다. 마치 미용 학교와 같지 않은가! 자신에게 더 좋아 보이게 하는 방법이다. 자신에게 더 좋아 보이면 어떤 가치가 있는가? 당신이 받는 인정은 일시적이고, 직면하는 문제들은 많을 것이다. 자존심에 대한 투자가 클수록, 삶의 포함에서 더 멀어지고, 평화와 성취는 당신에게서 더 멀어질 것이다. 세상에는 또 다른 고통스러운 삶이 필요하지 않으며, 통합된 삶이 필요하다. 정직한 노력을 통해 구축된 통합, 어떤 가식도 없고 보상 작용이나 정당화에 이용되지 않는 통합된 삶이 필요하다.
큰 공동체 앎길을 시작하면, 당신은 새로운 어떤 활동들을 시작한다. 앎으로 가는 계단 프로그램에서 매일 연습을 시작한다. 이것은 당신이 통제하는 연습이 아니며, 자신에게 맞추는 연습도 아니다. 이것은 당신이 다가가야 하는 연습이며, 자신을 연습에 맞추는 연습이다. 당신은 이 연습을 개선할 수는 없지만, 참여할 수는 있다. 처음에는 연습이 아주 작지만, 일관되며, 그래서 연습을 따르려면 끈기 있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처음에는 아주 적은 시간과 주의를 요구하지만, 연습이 요구하는 것은 생각나거나 연습하고 싶을 때마다 하루는 여기, 하루는 저기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일관되게 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하루를 빼먹더라도 다시 돌아와 다시 헌신한다. 당신의 연습은 성장할 것이고, 성장함에 따라 당신은 연습이 당신 삶의 발전과 보조를 맞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물론 연습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날도 있을 것이다. 심각하게 자신을 의심하거나 비하하는 날도 있겠지만, 연습하기만 하면 당신은 앎이 내면에서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그래서 당신은 삶에서 연습이라고 하는 새로운 어떤 것을 갖게 된다. 계속 연습하면, 당신은 서서히 연습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연습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면, 연습을 소중히 여기는 법도 배울 것이고, 당신의 참여는 깊어질 것이다. 당신은 어떤 영웅을 믿을 필요 없이 이리할 것이고, 어떤 창조 이야기가 없어도 이리할 것이며, 어떤 천국이나 지옥이 없어도 이리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성장해야 하고, 자신의 내적 삶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알므로 이리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에게 자신의 동기를 표현하는 다른 정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기는 오직 둘뿐임을 잊지 말라. 앎을 따르려는 동기가 있고, 좋아 보이려는 동기가 있다. 당신 주위를 둘러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서로에게뿐만 아니라 주로 자신에게 좋아 보이려고 애쓰는가? 모든 사람이 호감을 얻고 싶어 하며, 옳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그리고 독특하고 싶어 하며,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것은 필사적이고 가망 없는 추구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결코 자신을 만족시킬 만큼 충분히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앎의 학생으로 지내는 동안, 이 연습을 하는 것 외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하지만 이 연습을 따라가다 보면, 당신은 우리가 문턱이라고 부르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이 그 문턱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경우 문턱 자체를 보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당신은 문턱의 결과를 경험할 것이고, 이것은 당신의 인식과 내적 지향점이 바뀐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변화의 결과이다. 감정의 기복을 경험하는 것은 문턱이 아니다. 문턱은 인식 너머 더 깊은 수준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의 태도⋅인식⋅가치관⋅연상이 변할 때, 그 결과를 경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점진적이다. 당신이 변화를 통합하여 연습에 옮기려면 점진적이어야 한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종종 건설적이기보다 더 파괴적이다. 점진적으로 변할 때, 성공과 지속적인 가치를 얻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당신이 진보함에 따라, 당신은 새로운 수준을 경험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에게나 자신의 내적 상태에 더 민감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 민감성의 발달은 자연스럽지만, 삶에서 당신의 위치를 어느 정도 다시 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활동은 매우 거칠고 거슬리므로, 많은 경우 이 주변에 있기가 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의 새로운 행동으로 이어질 것이고, 일반적으로 당신 삶의 질을 향상해 줄 것이다. 이것들이 모두 내적 성장의 결과이며, 내적 성장은 앎길에서 당신이 연습하는 것으로 촉진된다.
길을 따라가면 문턱들이 당신을 기다린다. 당신은 문턱들을 통과할 것이고, 자신이 그 문턱들을 통과하고 있음을 모르겠지만, 그 효과와 결과를 경험하기 시작하면 그 증거는 분명할 것이다. 당신이 연습에 동화되고 이런 결과를 경험하는 데는 이삼 년이 걸린다. 물론 사람들 대부분은 앎길을 배우려는 시도를 그다지 오래 지속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몇 주 머물고, 어떤 사람은 몇 달 머물고, 어떤 사람은 불과 며칠만 머문다. 하지만 내적으로 필요한 것을 경험하고 스스로 그것을 충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들은 결국 여기로 돌아오거나 다른 어떤 것으로 돌아갈 것이다.
당신은 삶과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당신이 자아를 실현할 수는 없다. 당신은 삶과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당신이 자신을 완전하게 할 수는 없다. 당신은 삶과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당신이 자신을 끌어올릴 수는 없다. 이것들은 삶이 당신을 위해 해야 하며, 큰 의지와 큰 힘에 해당하는 삶의 강력하고 중요한 세력들이 해야 한다. 이 세력들은 지구와 큰 공동체의 무지⋅갈등⋅폭력에 스며들어 있다. 그들은 당신을 위해 그곳에 있고, 당신은 그들을 부를 수 있고, 그들은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다.
몇 달 그 길을 따르다 보면, 모든 것이 같아 보이지만, 다른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다. 겉으로 자신을 꾸미기보다는 어떤 것이 내면에서 커지고 드러난다. 앎으로 가는 계단의 연습을 통해, 당신은 앎이 드러나는 공간을 만들고, 앎을 지향하며, 자기 마음속에 앎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당신은 앎에 대한 필요성을 서서히 인식하지, 갈등이나 도전의 시기에 단순히 확신을 얻기 위한 필요성만을 인식하지 않는다. 큰 힘은 단순히 당신의 재앙에서 당신을 구출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당신에게 제공한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제공한다.
연습을 시작하고 나서 몇 달이 지나면, 친구들은 당신을 보고 “글쎄, 내가 보기에는 변한 것이 없어 보여!”라고 말한다. 하지만 당신은 “음, 그래. 하지만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어. 나는 어떤 것을 느끼기 시작했어.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중요하다는 것은 알아.”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연습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이 앎의 출현을 허용하는 것이다. 연습은 많은 수준에서 당신을 돕는다. 연습은 당신 마음에 균형과 집중력을 낳게 하고, 당신의 일상생활에 의미 있는 일관성을 주며, 당신 내면 상태를 알게 하고, 앎과 욕망 사이의 차이를 더 잘 이해하게 한다. 그리고 당신의 관계에서나 세상을 인식하는 것에서 큰 분별력을 서서히 길러 주고, 당신 마음과 감정에서 정리할 수 있는 것이나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곳에 균형을 잡아준다. 연습은 서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이렇게 한다. 앎으로 가는 계단을 따르면서, 당신은 자신의 감정 상태에 지배받지 않는 일관성과 끈기와 내적 결단력을 기른다. 기존의 생각과 믿음 경계 너머로 나아갈 때, 당신은 새로운 생각과 경험에 마음을 열게 된다. 당신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따르면, 앎으로 가는 계단은 기존의 개념과 믿음 너머로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점에서 매우 느리다. 그들은 자신의 고착된 믿음과 생각, 특히 영적이고 고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믿음과 생각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앎계단을 이용하려고 하며, 새로운 것을 배우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강화하려고 한다. 종종 큰 공동체 앎길이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 꽤 오랫동안 이 태도를 고집할 수 있다. 앎길은 그들의 기존 믿음과 거의 관련이 없을 수도 있는 전적으로 다른 인식 상태로 그들을 여행하게 하려고 이곳에 왔다.
큰 공동체 앎길은 이상주의와 추측을 넘어 진정한 참여와 큰 확신으로 당신을 데려간다. 당신은 앎길에서 진보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훌륭한 어떤 믿음이나 생각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사실 앎길은 이것들을 유지하고 믿어야 하는 부담에서 당신을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사람들과 당신 내면에 있는 타고난 선함을 찾으려면, 당신 마음이 생각과 믿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틀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보통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앎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자신의 믿음 체계를 구축하거나 다시 구축하기 위해 온다. 앎길은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공한다. 앎길은 더 자연스러운 믿음 체계를 갖게 한다. 이 믿음 체계는 실제 경험과 관찰에 기반을 두고 확립되며, 단순히 조립된 어떤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조립된 것은 당신에게 당신 자신을 좋아 보이도록 만들거나, 세상을 좋아 보이도록 만들거나, 당신을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관습에 순응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앎길을 걷는 것은 매우 평범해 보일 수 있으며, 특히 처음에는 더 그렇다. 여기서 해야 할 대단한 일은 없다. 당신 삶에서 이루어야 할 큰 변화는 없다. 사실 당신은 자신을 변혁하려고 애쓰지 않도록 격려를 받는다. 자신을 바꾸려고 만지작거리는 것을 그만두고 당신 내면에서 진짜인 것이 드러나도록 하라. 그 진짜를 기르고 지지하라. 정원사처럼, 당신은 모든 준비 작업을 한다. 당신이 씨앗을 심으면, 씨앗이 스스로 성장한다. 그저 정원에 나가 정원을 가꾸고 관리하고 유지하면 멋진 일들이 생겨난다. 당신이 너무 많은 일을 하면 정원을 망친다. 너무 적게 일하면 정원이 방치된다.
앎은 정원과 같다. 당신이 앎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경험할 수 있을 때, 앎은 당신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여기에는 소망과 역량이 필요하다. 앎길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는 소망이 필요하다. 이것은 일시적인 관심이나 순간적인 충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당신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다음으로 역량의 문제가 있다. 이것은 중요한 주제이므로 이제 이것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 보겠다. 삶의 진실과 목적을 알고자 하는 진정한 소망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현재 자기 역량을 인식해야 한다. 자기 역량을 인식하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에 자신이 맡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맡아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당신은 현재 자신의 정신적⋅육체적 한계를 알 수 있다. 실제로 자기 역량이 얼마나 큰지 판단할 방법이 없는데 많은 사람이 자기 역량을 매우 큰 것으로 여긴다. 자기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려면 당신은 더 큰 규모의 일에 참여해야 한다. 일반적 활동 범위에서는 사람들이 결코 자기 역량에 도달하지 못하며, 자기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이해할 실질적 기반도 전혀 없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경계를 자의적으로 설정하고, 이 경계 안에서 일할 수 있다고 믿으며, 오직 심각한 실망과 환멸을 통해서만 자신이 옳았는지 아닌지를 알아낼 것이다.
역량을 키우는 것은 매우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이다. 이것은 인식할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난다. 이것은 연습의 결과이고, 준비의 일부이다. 당신은 엄청난 역량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역량을 길러야 한다. 실제로 기를 때까지는 사람들이 자기 역량에 한계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자기 역량에 부여한 한계가 본질적으로 순전히 감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음, 나는 이것을 가질 수 있고, 저것이 될 수도 있고, 이것을 할 수도 있어.”라고 말하지만, 아주 작은 것에 겁을 먹고 도망간다. “오, 그것은 절대 할 수 없어! 이것에는 재주가 없고, 저것은 할 수 없어.” 사실은, 당신은 자신을 부르고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어떤 것에 참여할 때까지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를 것이다. 당신은 자기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모를 것이다.
이것은 큰 공동체 앎길이다. 큰 공동체 앎길은 삶의 더 큰 영역을 설명하므로 지구 종교의 가르침이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역량을 요구한다. 큰 공동체 앎길은 어떤 세속적인 철학이나 종교보다 더 큰 객관성, 더 큰 관용, 더 큰 유연성, 더 큰 개방성, 더 큰 분별력을 요구한다. 여기서 당신 역량을 요구하는 것들이 아주 많다.
그렇다면 나아가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나아가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아주 작게 시작해서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초보자의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즉 초보자가 되는 것, 자신에게 많은 것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 자신을 과장되게 칭찬하지 않는 것, 자신에게 힘과 능력과 인식력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은 그 반대로 접근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나는 내가 믿는 이것들에 대해 확신이 없어. 이것에 대해 잘 몰라. 좀 더 주의 깊게 봐야겠다.”라고 말하며 건전하게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을 과장하는 것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넘어가,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놓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중간 입장을 취한다. 가정은 거의 하지 않고, 눈을 크게 뜨고, 내면의 경험과 연결 상태를 유지하라. 그것은 최종 답이 아니지만, 좋은 출발점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진실과 현실을 알고자 하는 소망을 기르는 동시에 당신의 역량을 키우므로 오랫동안 지속된다. 역량을 키우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당신이 몇 주나 몇 달 만에 수십 년에 걸친 세상의 조건화를 원상태로 되돌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 세상에 온 날부터 당신의 개인적 마음을 형성한 모든 것을 단시간에 뒤집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에게 말할 수 있고,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믿도록 자신을 설득할 수 있으며, 자신과 어떤 대화든 할 수 있다. 때때로 심지어 자신이 틀렸음을 아는 것들도 행하거나 믿도록 자신을 설득할 수 있다. 하지만 또 앎이 있고, 앎과 더불어 진실이 있다.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바꾸든 수용하든, 진실은 당신과 함께 있다.
진실을 따르며 살고, 진실을 알고, 진실을 보는 역량을 키우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출발을 하려면, 3년이 적절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라. 3년 동안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연습하라. 당신은 기반을 구축한다. 기반은 하룻밤 사이에 구축되지 않는다. 빠르고 쉬운 방법을 원한다면, 당신은 지속될 수 없는 결과를 얻을 것이다. 견고한 것을 구축하고 싶은가, 아니면 엉성한 것을 구축하고 싶은가? 지속되는 것을 구축하고 싶은가, 아니면 그저 편리하기만 한 것을 구축하고 싶은가?
그러므로 인내심을 가지라. 앎이 저절로 성장하게 하라. 당신은 준비 작업을 한다. 이것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따르면서 각 계단을 진지하게 숙고하고, 시간을 두고 계단들을 적용하는 법과 그 적용을 해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걸리지만, 당신 내면에서 진정한 깊이와 기반을 발전시킨다. 당장 훌륭한 결과를 내야 한다면, 당신은 계속해서 책을 사거나, 프로그램을 수강하거나, 빠르고 쉬운 방법을 당신에게 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 집은 책으로 가득 찰 것이고, 당신 마음은 생각으로 가득 찰 것이다. 당신은 온갖 개념과 다양한 관점을 갖게 될 것이며, 자신이 고등 교육의 큰 여정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온갖 것이 있다고 해서 당신이 이 여행을 시작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 여행을 시작하려면, 당신은 자신이 직접 창안하지 않은 어떤 것에 자신을 바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당신 삶에서 가치 있는 것들은 시간과 지속적인 에너지가 필요했다. 당신의 소중한 관계, 자녀, 직업, 깊은 관심사는 모두 시간을 두고 발전되었고 구축된 결과물이다. 자신과 삶에 대해 온갖 터무니없는 기대 없이 차분한 마음으로 여행하는 것은 진정한 기반이 구축될 수 있게 해주는 균형 잡기의 일부이며, 그 기반은 순간적이거나 엉성한 어떤 것도 아니고, 환경에 따라 쉽게 변하는 어떤 것도 아니다.
소망을 키우고 역량을 기르는 것이 진정한 교육의 기본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당신이 통합할 수 있는 것보다 당신에게 더 많이 주지만, 당신의 역량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준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당신의 믿음에 이의를 제기하고 앎과의 관계를 육성함으로써 이렇게 한다. 앎은 당신이 생각하는 거의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모두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당신 생각의 대부분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뀔 때 당신 마음은 단순해지고, 단순해질수록, 마음은 더 강해지고 더 집중되고 더 강력해진다. 이제 당신은 더이상 아주 미친듯이 서로 경쟁하는 많은 하위 인격의 집합체가 아니다. 당신은 하나의 관점을 지닌 한 사람, 배움에 마음을 열고 삶에 대한 활력을 지닌 한 사람이 된다. 당신의 관점은 더이상 개인적 관점이라기보다는 내적인 것에 향해 있다. 당신은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바꿀 필요가 있을 때 바꿀 수 있으므로 그 생각과 믿음은 당신에게 임시방편으로써 봉사할 수 있으며, 이것은 그 생각과 믿음이 당신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봉사이다.
생각과 믿음, 직감과 연상은 삶에서 유연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성장하면서 이전에 의지한 것들이 당신에게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아이가 자라면서 옷 크기를 바꾸는 것처럼, 당신의 생각과 믿음은 맞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당신은 단순히 그 생각이나 믿음과 함께하기에는 너무 크다. 그 생각과 믿음은 당신에게 더이상 맞지 않는다. 그것은 그 생각과 믿음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며, 다른 사람에게 맞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이것은 그 생각과 믿음이 당신에게 너무 꽉 조이고 당신을 너무 압박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앎길은 자기 단련 또한 필요하며, 자기 단련은 반드시 길러야 하는 것이다. 자기 단련과 함께 자제력이 있다. 사람들은 자제력에 대해 매우 이상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자제력은 자기 부정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의 관점일 뿐이다. 사실 자제력은 매우 중요하며,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자신의 삶을 집중하려면, 다른 활동들을 줄여야 하고, 그때 당신의 중심 초점이 무엇이든 그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당신에게는 이제 낭비할 시간과 에너지가 없다. 당신의 시간과 에너지가 어떤 것에 향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단련하고 자제력을 현명하게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앎길에서 성취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열정과 욕망, 강박 충동과 욕구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자신의 깊은 현실로 들어가면서 당신은 더욱더 그것들에서 벗어나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자유와 힘과 자기 결정권을 나타낸다. 이때 당신은 자기 마음에 다시 집중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 마음이 이전의 조건화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성장하고 있으므로 생각과 믿음과 신념이 앎길에서 바뀐다.
서두에 나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이미 믿는 것을 강화하고 싶어서 앎길에 온다고 말했다. 그것이 그들의 동기 중 하나이며, 종종 그들의 지배적인 동기이다. 그들은 자신이 오랫동안 구축한 관점을 계속해서 구축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앎길은 그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당신은 관점을 구축하려고 앎을 이용할 수는 없으며, 앎에 다가가기 위해 관점을 이용해야 한다. 이 점에서 당신의 관점은 유연해야 하고, 바뀔 수 있어야 하며,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은 계속 배움의 중심에 있으며, 삶과 소통하는 능력을 기른다. 관점을 구축하는 데 모든 것을 이용하면, 당신은 삶에 합류하지 못하고, 삶에 대한 당신의 인식은 매우 선택적일 것이다. 당신은 그저 자기 삶에 관해 자신이 보고 싶은 것에 해당하는 것들만 보고자 할 것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혹은 자신이 요구하는 대로만 사물을 바라볼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비참하고 고립된 것인가!
앎길은 당신을 다른 방향으로 인도한다. 앎길은 당신을 이 방해물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면, 당신은 자기 관점이 여기저기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고, 자기 생각과 행동을 조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며, 이전에 소중히 간직한 신념인 특정 생각을 잠시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어떤 종류의 이상주의도 앎을 회복하는 길에 방해가 된다. 이상주의는 경험보다는 믿음을 위한 선택이고, 관계보다는 관념을 위한 선택이며, 진실보다는 자존심을 위한 선택이다. 심지어 자신과 우주에 대해 매우 고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생각 자체로는 무해해 보일 수도 있는 그들의 생각이 앎길에서는 큰 제약이 된다.
명확히 보고 생각하려면, 마음이 족쇄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음이 족쇄에서 벗어날 때, 역량이 더 커지고, 주의력이 더 커지며, 의지력을 더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다. 이 의지력으로 자신을 더 단련할 수 있고, 자제력을 적절하게 발휘할 수 있다.
앎길은 항상 높은 영적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앎길은 그 순간의 현실에 있는 것이고, 그 순간에 현존하는 것이며, 그 순간에 마음을 여는 것이고, 큰 현실과 큰 공동체를 기꺼이 배우는 것이다. 앎길은 신비와 발현, 이 둘을 혼동하지 않고 이 둘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앎길은 영성과 물질을 한데 섞는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의 영역에서 그 각각을 존중한다. 그러므로 앎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더 유능해지고, 동시에 신비를 경험하고 꿰뚫어 보는 데 더 유능해지고, 사고의 현재 경계나 수용 가능한 경계 너머를 배우는 데 더 유능해진다. 그리고 실질적인 문제에서 더 유능해지고 동시에 그들의 인식과 분별력도 더 깊어지게 된다.
앎길은 당신을 세상으로 데려가 세상에 대비해 준비시키지만, 더 큰 마음 상태로 당신을 준비시킨다. 앎길은 일종의 도피가 아니며, 당신이 삶의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지 않는다. 사실 앎길은 당신이 삶의 평범한 일상에 공헌하도록 돕기 위해 이곳에 왔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 목적을 위해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말한 것들을 경험하고 내가 말한 차이를 이해하려면, 당신 자신이 큰 여행을 시작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당신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아야 하며, 앎으로 가는 계단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고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아야 한다. 삶이라는 산을 더 높이 올라갈수록, 당신은 그 여정을 더 완벽하게 이해할 것이다. 당신은 저 아래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이해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볼 것이고, 그들의 어려움도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 자신도 전에 그 길을 여행한 적이 있으므로 그들에게 자비심을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