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shall Vian Summers
on 11월 18, 1988
1988년 11월 18일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만약 당신이 삶에 온전히 참여한다면, 두 영역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물질계인 발현된 삶이고, 다른 하나는 깊은 경험의 영역인 삶의 신비이다. 하나는 객관적이고 다른 하나는 주관적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영역이므로 혼동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때쯤이면 당신은 물질계인, 발현된 세상을 어느 정도 안다. 그러나 심오한 경험의 세계는 잘 모른다. 그 세계는 다른 영역이다.
종교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자신이 미신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미신을 믿는다면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며, 이것은 자신을 매우 어리석어 보이게 한다. 그리고 실제로 미신을 계속 믿는다면, 당신은 자신의 삶을 낭비한다고 느낄 것이다. 종교에 실망하면 종교가 미신으로 여겨진다. 어떤 것이 종교인지 미신인지에 대한 논쟁은 당신 마음의 이성적 부분인 의식에서는 끝날 수 없다. 이 의식적 마음은 의심하기 좋아하고 어떤 것에도 매우 진지하게 참여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논쟁은 앎이라고 하는 다른 마음 상태에서 해결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을 당신의 개인적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라. 왜냐하면 개인적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도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더 큰 마음 상태로 우리는 당신을 데려가고자 한다. 그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이치에 맞지만, 일단 그 경험이 끝나면 그것을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 경험이 매우 비현실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물질계는 사물이 움직이고 상호 작용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앎의 영역은 진정한 관계의 본질, 모든 것이 어떻게 진실로 관계 맺는지에 주안점을 둔다. 이것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당신의 의미가 나오기 때문이다. 진정한 삶의 목적의식은 당신 삶의 이 신비한 부분에서 나온다. 삶을 누리려면 신비가 있어야 한다. 삶에서 성장하려면 신비가 있어야 한다. 이 말은 당신이 참여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삶의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약 진화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면, 자신이 삶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당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의 성장은 멈추기 시작한다. 당신의 안전보장은 자신의 사고 체계나 믿음보다 더 큰 어떤 것에서 와야 한다. 만약 믿음이 당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삶을 그다지 탐구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탐구하면, 당신은 의심 없이 받아들인 바로 그 관념에 도전하고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앎의 학생은 삶에서 큰 기반을 찾을 때까지 다양한 지점에서 자신의 모든 가정에 의문을 품을 것이다. 큰 기반은 변하지 않으며, 대중의 의견이나 사회적 흐름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이때, 저승에 있는 것이지만 자신이 이곳으로 가져올 수 있는 어떤 것에 앎의 학생은 접근한다. 당신이 앎을 공헌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앎에는 지속적이고 공명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앎은 사람들이 이익을 위해 어떤 것을 구축하는 것, 즉 다 쓰고 버릴 때까지 잠깐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구축하는 것과는 다르다. 당신이 앎을 전하면, 앎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계속해서 이동한다.
예수는 왜 여전히 세상에 살아 있는가? 왜냐하면 사람들이 마치 흐르는 전류처럼, 사람에서 사람으로 여전히 예수를 전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모두 영적 힘을 전달하는 통로이다. 그 힘은 자연스럽게 공명하지만, 준비가 잘 안된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을 통과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며, 어떤 면에서는 어쩔 수 없다. 무지한 사람은 진실을 어리석게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삶의 신비에 대해 의문을 품고 싶지도, 탐구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위안이 되는 가정을 품을 때만 행복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어쩌면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했을지도 모르지만, 인류의 역사가 종종 보여주었듯이, 파괴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종교는 교회가 아니며, 신학적 사고 체계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당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종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려보겠다. 종교는 심오한 경험이다. 이 경험을 통해 교회와 신학적 체계가 생겨나지만, 당신은 교회와 신학적 체계에서 신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창조주를 이해하려면 당신은 다른 마음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그저 미신이 될 믿음을 만들어 낼 뿐이다.
우리의 목적은 사람들을 진정한 경험으로 인도하고, 잘못된 결론을 내리거나 부적절하게 접근하는 등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루기가 쉽지 않다. 당신은 모든 사람과 함께 이것을 할 수는 없다. 당신은 소수 사람하고만 이것을 함께할 수 있지만, 이 소수는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으며, 이것은 공명 효과를 일으킨다.
당신이 주변에 있는 편의 시설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베풀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기와 온갖 편의 시설 등 이 모든 것을 발명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어떤 방식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감사이다.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그 감사를 경험할 수 있다면, 여기서 불행해지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매일 매 순간 조상들이 노력한 결실을 누리고 있다. 당신은 조상들이 남긴 부채도 일부 경험하고 있지만, 그 혜택은 그 부채보다 훨씬 더 크다.
그러므로 종교는 사물의 의미를 다루므로 실용적이다. 그리고 그 의미란 당신이 삶에서 하고 싶은 것과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느냐에 따라 당신의 행동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결정된다. 당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이곳에서 당신 경험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제 나는 약간의 생각이 필요한 중요한 구별을 하고자 한다. 신비와 발현된 것을 혼동하지 말라. 이 말은 당신이 물질적인 것들을 다룰 때는 물질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질적인 것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과정을 이해하라. 그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매우 분명해지지만,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그들이 얼마나 비효과적인지 믿을 수 없다. 만약 당신의 차가 고장이 나면, 그것을 영적으로 다루지 말라. 그것을 종교적인 경험으로 만들지 말라. 당신은 자동차 고장과 관련된 종교적 경험을 할 수도 있지만, 그 경험이 자동차를 고치지는 못한다. 팔이 부러졌다면 종교적 경험으로 다루지 말라. 그것은 물리적인 문제이다. 어쩌면 팔이 부러진 이유가 훨씬 더 깊을 수도 있겠지만, 치료의 관점에서 치료하라. 물리적인 것을 신비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이렇게 생각하면 물리적인 것에 없는 가치와 의미를 물리적인 것에 부여한다. 왜냐하면 신비는 훨씬 더 크며, 발현된 것들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발현된 것과 신비를 혼동할 때,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가? 그들은 놀라운 것들에 매료되어 명백한 것들을 놓친다. 그들의 상상력은 선을 넘는다. 마찬가지로 신비를 논리적인 방식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신비를 객관적으로 다루지 말라. 신비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각 영역마다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만약 당신이 신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만, 여전히 경험과는 크게 동떨어질 것이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것은 과학적 접근의 영역이 아니며, 당신은 신을 논리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신은 비논리적이다.
당신 삶에는 신비가 매우 많다. 신비가 당신의 일상적인 결정과 경험에 얼마나 관계가 많은가? 아주 많다. 따라서 구별해야 하는 중요한 것은 ‘발현된 것을 신비롭게 다루지 말고, 신비를 논리적으로 다루지 말라.’는 점이다. 이 둘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모든 것을 신비롭게 만들면, 당신은 분명한 것을 놓치고 모든 것에 대해 환상 속에서 살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나 인류 모두에게 가치 없고 위험하다.
당신의 참된 마음 상태인 앎은 일반적으로 물질적인 것들은 매우 현실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물질 너머의 것들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다룬다. 여기에는 다른 영역이나 수준에 대한 혼동이 없다.
신은 당신이 특별한 어떤 것을 경험하러 가는 곳과 같으며, 이 경험의 결과는 당신 삶의 방향과 삶의 표현에 영향을 미치고,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신은 어디에나 있다. 신은 끊임없이 베풀고 또 베푸는 한결같은 현존이다.
종교는 미신인가? 종교는 사람들이 불안해서 자신을 속이는 것인가? 그들은 피난처를 찾고 있는가? 그들은 단지 자신의 삶에 의미가 없으므로 무언가를 믿고 싶어 하는가? 당신은 자신을 아무리 독실한 신자라고 여기더라도 이러한 의문들을 품을 때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럴 것이며, 그것은 괜찮다. 당신은 “신이라고! 지옥에나 가라고 해. 난 할 만큼 했고, 이제 지긋지긋해! 이제 나가서 돈이나 벌면서 똑똑하게 살 거야.”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신을 매우 사랑하여 때때로 신을 거부할 때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왜냐하면 신을 거부할 때 그 대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항상 신에게 돌아간다. 왜냐하면 신은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며, 발현된 세계는 일시적이고, 신비의 세계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 신비를 아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신비의 혜택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신비를 완전히 이해하는 능력이 있다면, 당신은 세상에 있지 않을 것이다. 당신 마음은 너무 넓고 클 것이다. 당신은 구체적인 것들을 다룰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신비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이 신비를 인식하고, 신비가 당신 삶에 자리 잡도록 허용하기를 바란다.
당신의 교사들은 당신의 온갖 선호 등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은 “나는 배우자를 만나고 싶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당신의 교사들은 이미 이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당신이 마침내 이것에 대해 무언가를 할 의향이 있거나 혹은 다른 것을 원한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 그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당신은 그 일에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할지도 모르지만, 교사들은 이미 알고 있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할 때, 초기 단계에서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들은 모든 것을 원하지만, 원하는 것을 다룰 역량이 거의 없다. “나는 신을 원해! 나는 성스러운 결혼을 원해! 나는 지금 당장, 아니면 적어도 올해 말까지는 영적 힘과 분별력을 원하고, 갈등에서 벗어나기를 원해.”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다룰 역량은 아직 커지지 않았다. 그 역량이 커지면, 일은 저절로 일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도록 자신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왜냐하면 내가 당신에게 당신이 온 곳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당신이 온 곳은 발현된 세상이 아니다. 인간이 그렇게 지능적이라면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하는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 왜 그러는가? 어쨌든 다른 동물들은 하루나 이틀 혹은 일주일이 지나면 기본적인 것을 할 만큼 움직인다. 당신은 그것을 본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훨씬 더 지능적이다. 왜 사람들은 기본적인 것을 배우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는가? 세상은 양심이 있는 존재에게 매우 부자연스러운 곳이다. 당신들은 모두 이곳에 온 방문자들이다. 이곳에 있으려면 온 곳을 잊는 것이 필요했다. 그것은 이곳에 오는 과정의 일부이다. 하지만 당신들은 분명히 방문자들이다. 당신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이곳에 있으며, 이곳을 떠난 후에도 계속 존속할 것이다. 당신은 그 점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당신이 어떤 상태로 존속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은 있지만, 존속할 것이라는 사실은 당신의 통제권 너머에 있다.
나는 당신 삶의 신비에 해당한다. 당신은 나를 꼭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경험할 수는 있으며, 나를 충분히 경험하면, 어쩌면 나를 신뢰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당신이 나를 신뢰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선하다는 것을 알고 이것을 당신 삶에서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 당신은 스스로 제공할 수 없던 모든 수준의 지원⋅도움⋅방향에 마음을 열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에게는 큰 자산이 있고, 당신 삶의 신비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세상에서 당신 삶을 안내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신비는 당신이 보고 느끼는 세상을 대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할 것이다. 그 방법은 매우 실용적이고 효과적이다.
종교를 말하고 자신이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들은 종교에서 가정한 것들을 그저 받아들였을 뿐 실제 경험은 해보지 못했다. 그들에게 종교는 자신이 추구하는 자기 위안이고, 그들은 이 가정들을 바탕으로 자아의식을 정립할 것이며, 누군가 또는 어떤 것이 이 가정들에 도전할 때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직접 경험하며 분별하는 법을 배우고 삶에 대한 자신의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앞으로 나아간다. 결국, 내가 진짜라면, 당신이 하는 많은 가정은 진짜가 아니다.
당신은 신비를 통제할 수 없으므로 신비를 이용하여 세상을 도울 방법을 찾을 수 없다. 당신은 오직 자신을 신비에 노출하고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만 통제할 수 있다. 당신은 세상을 위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신비가 하도록 할 수 없다. 세상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지닌 역량에 따라 세상에 베풀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더 큰 역량과 더 풍부한 경험을 쌓으면, 세상에 더 많은 공헌을 할 것이다. 세상에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은 앎이다. 여기서 더 큰 어떤 것이 당신을 통해 그 자신을 내준다. 그것은 당신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에 따라 스스로 상황을 개선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더 큰 어떤 것이 당신을 자연스럽게 움직여 이것을 하거나 저것을 하도록 한다. 그러면 더 큰 어떤 것이 베풀어지고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달된다. 당신이 병원을 짓든, 아픈 사람에게 음식을 먹이든, 더 큰 어떤 것이 전달될 것이다. 그 흐름은 지금 당신을 통해 흐른다. 당신은 그 흐름의 목격자이다. 당신은 여전히 세상을 돕기 위해 실질적인 일을 하지만, 당신을 통해 움직이는 영적 현존이 있다. 당신은 그 흐름을 전하고 있다. 이 흐름은 매우 신비로우며, 당신이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흐름은 심오하며 당신의 물음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큰 공동체 앎길에서 사람들을 특정한 마음 상태로 데려가면 그들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이 떠맡는다. 이때 바로 그들의 핵심, 그들의 중심이 발현되기 시작한다. 준비는 이 일이 일어날 만큼 그들의 외적 삶을 충분히 자유롭게 하는 것이고, 빛이 발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맑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내적 준비와 외적 준비 모두가 필요하다.
이때 삶에서 현실적이 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외적 활동이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적 성장과 외적 성장은 관련이 있지만, 그 영향은 분명히 한쪽으로만 미친다. 발현된 것은 신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사건의 과정, 당신의 역사,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 등 발현된 것은 신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신비는 발현된 것에 영향을 미친다. 신은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세상은 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세상은 당신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므로 당신은 세상이 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당신이 자기 생각에서 신과 가까워질수록, 세상은 당신에게 영향을 덜 미치고 당신은 세상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때 공헌하는 당신의 능력은 더 향상되고, 당신은 자신의 행동을 넘어 어떤 것을 전할 수 있다. 당신은 물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깊은 사랑의 본질을 전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사랑의 본질이 다른 사람 내면에 있는 앎에 불을 붙일 수 있다. 내가 당신에게 어떤 개념을 알려주더라도 그 개념으로는 당신을 앎에 입문시킬 수 없다. 오직 내 앎의 힘만이 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온갖 것을 할 수 있지만, 오직 앎만이 불을 붙이고 전달될 수 있다. 당신은 이것을 준비해야 한다.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것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글쎄, 나는 이것은 믿지만, 저것은 믿지 않아.” 또는 “나는 이것은 진짜라고 생각하지만, 저것은 거부해.”라고 말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당신은 그저 자신이 가정한 것들을 지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무의미하다. 당신에게는 선한 마음이 있다. 당신은 이제 선한 마음을 이용하여 약간 탐구해야 한다. 탐구할 때는 결론을 내리고 싶은 유혹을 피하라. 만약 고고학적 발굴로 땅속에 묻힌 보물을 찾거나 숨겨진 도시를 찾기 위해 땅을 파고 있다면, 당신은 속단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조사를 마칠 때까지 계속 조사할 것이다.
행복한 사람들의 삶에는 항상 신비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에 항상 신이 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삶은 모험이다. 삶은 어렵지만, 경이롭기도 하다.
종교는 신비해야 한다. 종교 생활을 하려면, 당신은 신비가 있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신비는 땅속의 깊은 우물, 너무 깊어서 바닥을 볼 수 없지만, 그 깊은 곳에서 중요한 것들이 나오는 우물과 같다. 당신 삶에 신비가 있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현실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다루는 합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당신이 유형의 것들을 유형의 것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여기에는 어떠한 상충도 있을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당신의 의미⋅목적⋅방향의 원천인 삶의 종교를 나타내는 당신 삶의 또 다른 부분이 있다.
당신이 현실적이 되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 당신이 일을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일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이곳은 일하는 곳이다. 이곳은 당신이 온 곳과는 다르다. 당신은 온 곳에서 한 일을 이곳에서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곳은 일하는 곳이 아니라,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일하는 곳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몸이 있고, 그래서 몸을 지시할 개인적 마음이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일하는 것이 강조된다. 당신이 더 유능할수록, 당신은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유능하기만 할 뿐 다른 것이 없다면, 당신 삶은 공허하고 황량할 것이며, 당신은 발현된 세상에서 위안을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발현된 세상이 제공하는 것은 삶의 신비가 당신에게 내주는 것에 비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신비가 당신 삶을 얼마나 많이 차지하는지 알려면, 당신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지 궁금해하기만 하면 된다. 당신은 실제로 눈앞에 있는 기계적인 것들을 제외하면, 어떤 것도 거의 알지 못한다. 그것은 괜찮다. 왜냐하면 많은 신비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신비를 알 수 있다. 당신은 어떤 것과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그것을 안다. 당신은 어떤 것에서 분리되면 그것을 이해한다. 어떤 것을 이해하면, 당신은 그것의 과정, 그것이 일하는 방식, 그것의 성장 단계, 그것이 어떻게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생각해 낼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떤 것을 안다고 할 때, 아는 이유는 당신이 그것과의 관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상호작용과 참여이다.
자신이 맺은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영향력, 상대방의 영향력, 자신의 소통방식, 자신의 성향, 두려움, 강박 충동, 강점, 약점 등을 이해한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이 맺은 관계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 10년간 분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살아온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을 알아보는 경험 때문에 결혼을 한다. 그것은 그들이 발현된 것과 신비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쎄, 내가 어떤 사람을 이렇게 깊이 알아본다면, 그 사람은 내 동반자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올바른 가정이 아닌데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가정하고 그것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거기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나중에 알게 된다.
과학자들이 삶에서 심오한 신비를 지니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신비에 깊이 젖어 있는 사람이 유능하고 효과적인 사람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세상의 것을 세상에 줄 수 있고, 신의 것을 신에게 줄 수 있다. 당신이 그 둘을 똑같이 만들려고 하지 않는 한, 문제가 없다. 그 둘을 똑같이 만들려고 하면, 온갖 모순과 딜레마가 발생한다.
세상에 고통과 괴로움이 있는 것은 신과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이 그 고통에서 당신을 돕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것은 신의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이 무정하게 들리지 않는가? 이것은 신이 무관심하다는 뜻이 아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은 신이다. 왜냐하면 신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신 안에 있는 모든 것에 해결책, 균형, 조화도 가져다준다. 그렇다면 신이 전능하며 적어도 겉보기에 그렇게 보이는데, 왜 세상에 갈등이 있는가? 신이 모든 것에 해결책을 제공한다면, 왜 이곳에 해결책이 없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신과 당신의 관계에 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삶에서 10%만 신이 있기를 바란다면, 나머지 당신 삶의 90%는 무엇인가? 만약 당신 삶에서 10%만 신이 있다면, 나머지 90%에는 다른 것이 있다. 세상에서는 신이 약 2% 정도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신은 신비롭고 심오하고 직접 경험하는 것으로서의 신이다.
신은 당신이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일을 빼앗을 수는 없지만, 앎으로 돌아가도록 당신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다. 앎은 매우 다른 마음 상태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이 마음 상태를 이용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이 마음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이것을 분명히 하고 싶다. 당신의 개인적 생각으로는 세상을 알 수 없다. 갈등의 근원, 본질, 해결책을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앎의 학생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우므로 앎의 학생이 된다. 다른 동기는 거의 없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공부하면, 부나 사랑이나 더 큰 권력을 얻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기가 아니다. 동기는 이 모든 것 너머에 있다. 앎이 당신을 데려가므로 당신이 앎에 다가간다. 왜냐하면 더 큰 것이 당신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 큰 성향은 자기 삶을 바꾸므로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 성향을 의심하고 이 성향과 싸운다. 이 성향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이므로, 그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세상에! 만약 당신이 하는 일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면, 당신은 새로운 어떤 것도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는 항상 과거와 연관되어 있으며, 항상 과거에서 현재를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어떤 수준에서든 모든 과학적 진보와 모든 참된 진보는 어떤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간 뒤에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저 상황에서는 내가 하는 일을 모르지만, 이 상황에서는 내가 하는 일을 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당신이 저기서 하는 일을 모른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도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당신이 세상에서 성장하고 있으므로, 설명할 수 없거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삶의 큰 부분이 항상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어떤 것에 대해 거창한 결론들을 내리는가? 당신은 그냥 그 결론들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나는 마침내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이해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당신은 마침내 아주 잠깐만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이해한다.
깨달음은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계속해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주요 돌파구들이 있다. 한 돌파구는 그다음으로 이어진다. 당신이 하나를 돌파하고 나면, 이제 새로운 영역에서 초보자이다. 이것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나는 이것을 매우 즐긴다. 하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당신이 지는 현실적인 부담이 없다. 어쨌든 지금은 없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효과적이다. 만약 내가 당신을 걱정한다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절망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당신에게는 절망한 사람이 둘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자신의 보물을 찾고 삶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에 매우 관심이 있다. 당신의 보물은 당신이 베풀기 위해 여기에 가져온 것이지만, 이것을 찾으려면 당신은 신비에 기반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유능해져야 한다.
당신이 찾는 것은 답이 아니라, 발견이고 그 발견과 관련된 일종의 능력이다. 내가 와서 “당신이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생각할 때, 사람들은 게으르고 수동적이 된다. 당신이 미래에 해야 할 일을 하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신은 더 강하고 더 열려 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이 파멸할 걱정은 하지 말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인류가 한 종족이 되어 가는 과정이고, 한 종족이 되기 위해서는 인류가 끔찍한 일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류의 진화이며, 인류는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과정이 고통스럽든 아니든, 청소년은 어른이 되어야 하듯이, 인류의 진화는 멈출 수 없다. 갈등은 완화될 수 있고 많은 경우 없앨 수 있지만, 이러한 관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을 만큼 매우 큰 인식을 지닌 사람이 필요하다.
미래에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끔찍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자신의 국민 정체성, 계급 의식 등 자신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까지 포함하여 이런 온갖 구분 짓는 요소들을 내려놓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고? 세상에, 말도 안 돼!” 하지만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 구분들이 없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동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어쨌든 이 수준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 더 큰 능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또한 높은 수준의 분별력도 길러야 할 것이다. 어떤 것에 더 많이 노출될수록, 더 큰 분별력을 지녀야 하고 더 큰 교육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등이 있고 그 갈등은 계속되겠지만, 세상은 파멸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으려는 세력들이 있다. 이 세력들이 실패할 수도 있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의 운명이 인간에게만 달렸다고 생각하지 말라.
신은 항상 거기에 있다. 그렇지만 세상 삶의 영역에서는 당신에게 신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당신은 이 관계를 맺지 않을 자유가 있다. 이 관계를 맺지 않을 때, 당신은 자신의 생각 속에서 길을 잃는다. 당신은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서 살고 있다. 결국 본연의 자신이 되지 않으려면, 당신은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신을 섬기지 않으면, 당신은 다른 것을 섬겨야 한다. 당신은 어떤 것을 섬겨야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인 것이 변했다는 뜻은 아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당신이 지닐 수 있는 가장 큰 기반이지만, 당신은 그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하며, 그것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신에게 가는 문이 활짝 열린다.
심지어 발현된 것도 신비이지만, 현실성을 얻기 위해 우리는 모든 것을 종교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신비의 영향과 발현된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며, 발현된 것은 물질적인 것이므로 신비를 완전히 보여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앎이 당신을 움직여 어떤 것을 발명하게 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발명할 것이고, 그리하기 위해 물리적인 과정을 거칠 것이다. 당신이 발명할 것을 당신이 이해할 수도 있지만, 무엇이 당신을 움직여 발명하도록 했는지는 신비롭다.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움직여 어떤 일을 하게 하는 것과 그들이 행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로써 관련이 있지만,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에서 사람들을 움직여 어떤 것을 새롭게 발현되게 하여 창조하는 순수한 경험은 그들이 말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창조한 것을 통해서는 전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들이 발명한 것이 무엇이든 일시적이지만, 영속하는 어떤 것이 움직였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은 움직이고 영속하지 않으므로, 영속하는 것은 세상에 있는 어떤 것과도 구별하기가 매우 어려워 보인다.
그러면 세상에서 무엇이 한결같은가? 한결같은 것은 영향력이 있으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만,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여전히 신비의 완전한 힘을 확인해 주거나 예시하지 못한다. 신비와 함께하면 당신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행복하기 때문에 세상에 공헌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세상이 곧 파멸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어떤 것을 하려고 필사적이라면, 당신의 공헌은 폭력적일 것이다.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어느 한쪽 편을 들 것이고, 적들이 있을 것이다. 신비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신비에는 적이 없으며, 다만 기꺼이 움직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그들 주변에서 일한다. 신비는 마치 모든 틈새를 통해 들어오는 공기와 같다.
종교의 문제는 종교가 서로에게서 발현된 것이나 서로 가정한 것으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 경험에 기반을 둔 이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발현된 것에만 마음을 쓰는 사람들은 서로 경쟁하고 서로를 위협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수준의 삶은 오직 관념과만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의 관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 정체성의 전체 기반이 위협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관념과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분별없는 상태이고 많은 사람이 사는 방식이다. 만약 종교의 교리,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종교의 영향 등 종교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동 양식인 종교의 발현된 측면에서만 종교를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저 종교를 정치 세력으로서만 다룰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결국 정치적 표현이 될 것이고, 세상에 전해지는 좋은 것은 어떤 것이든 누군가가 해를 끼치는 데 이용할 것임을 나는 안다. 심지어 내가 제시하는 큰 공동체 앎길조차 많은 사람이 오용할 것임을 나는 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앎길을 전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인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세상에 전하는 일에 장애일 뿐이다. 나는 그것을 알며, 그것에 준비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것에 준비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학살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력이 행해졌는가? 당신의 이름이 그렇게 훼손된다면 어떻겠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선물을 제공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뜻인가? 장담하건대 그는 지불할 대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상충이다.
소수의 사람이 수준을 높일 수 있다면, 모두가 득을 볼 것이다. 인류는 소수의 사람이 노력한 덕택에 항상 발전해 왔다. 그들이 신비를 세상에 가져오며, 다른 모든 사람은 그 신비를 현실 세계에 가져와 이용하지만, 신비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이 성장하지 않으면 내 일이 더 어려워지기는 하지만, 성장하지 않더라도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단지 그들의 삶을 더 편하게 해주고 싶지만, 때로는 사람들과 일하는 것에서 매우 좌절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들은 효과가 없는 기존의 것을 계속 하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때로 나는 친구들과 교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 교사들은 다른 수준에서 일한다. 나는 그들의 발현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심지어 중요하지도 않다. 어쨌든 일상을 헤쳐 나가는 데 신비로운 우주론이 무슨 도움이 되었는가? 그러므로 신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신을 경험할 수는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 대부분은 신이 집에 있는 엄마처럼, 어떤 일이 잘못될 경우 곁에 있는 어떤 이가 되기를 바란다. 밖에 나가서 놀 때 당신은 엄마와 함께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만약 넘어져서 다치면, 언제든지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어 한다. 엄마는 항상 거기에 있다.
따라서 당신은 새로운 방식으로 종교를 보아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종교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말하고 싶다. 사람들이 종교에서 만들어낸 것은 종교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새로운 비전을 삶 속에 가져가고 싶다면, 당신은 사람들이 그 비전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비해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투자하는 일이 거의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그것을 해롭게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해롭게 이용한다고 해서 당신이 실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일단 선물을 받으면, 그 선물을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된다는 뜻일 뿐이다.
성취에는 두 영역이 있다. 하나는 신비에서의 성취가 있고, 다른 하나는 발현된 것에서의 성취가 있다. 신비에서의 성취는 항상 관계의 질을 향상한다. 이 성취는 항상 의사소통이나 공통의 정체성에 대한 더 큰 경험이다. 이 경험은 그 자체로 발현된 세상에서의 성취와 엄청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신비는 항상 발현된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발현된 세상에서의 성취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관계 영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을 수행한다. 당신이 어떤 것에 영감을 받을 때마다, 그 순간에 관계에 대한 더 큰 역량을 경험한다.
당신이 신비를 더이상 경험하고 싶지 않다면, 신비에 대해 정의를 내리라. 그 정의를 고수하면 문이 닫힐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신비가 아닌, 자신이 내린 정의를 경험할 것이고, 자신의 입장을 옹호할 것이며, 당신에게서 신비는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의 기반을 실제 경험이 아닌 가정에 둔다는 것이다. 앎은 항상 당신을 당신의 가정 너머로 데려가지만, 만일 당신이 자기 정체성의 기반을 가정에 둔다면, 그것은 너무 무서운 일이다.
왜 사람들은 신을 경험하고 싶어 하지 않는가? 왜 그렇게 심하게 저항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자신에 대한 관념에 이의를 제기하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과 살 수 있는가? 신은 훨씬 더 나은 어떤 것을 주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것을 포기하기를 두려워한다. 나는 당신이 차를 버리고 수도승처럼 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터무니없다! 사람들이 포기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관념이다. 그것이 진정한 포기이다! 진정한 포기는 세상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념을 포기하는 것이다. 관념은 감옥에 있는 창살이다.
관념을 포기하려면, 당신은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기꺼이 한동안 관념 없이 지낼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의 안전보장은 다른 것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당신이 무엇을 믿든, 앎이 당신의 기반이다. 당신이 믿는 것에 따라 자신의 기반을 얼마나 많이 경험할 수 있는지 결정되지만, 앎은 여전히 당신의 기반이다. 앎이 당신의 기반이라는 것을 알면, 당신은 매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새로운 정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새로운 경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일이 두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더 많이 베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하나 알려주겠다. 내가 신비에 대해 말했으므로, 당신을 신비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하는 어떤 것을 알려주겠다. ‘사실 진정한 신비는 사랑도 초월한다. 신비는 사랑보다도 더 낫다!’
우리는 끌림으로서의 신, 당신을 움직이고 당신 앎을 자극하는 힘으로서의 신에 대해 말한다. 당신 삶의 신비를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라. 신비는 살아 있는 영적 현존이다. 신비는 당신이 삶에서 인식하거나, 아니면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다. 당신이 자기 내면에 있는 신비에 다가갈 수 있도록 종교를 철학이나 정치 운동이 아닌 신비로 생각하라. 사람들은 경험할 기회를 얻고자 교회를 만든다. 신비가 있을 때, 당신은 신이 세상에 있음을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