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shall Vian Summers
on 2월 13, 1987
1992년
미국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관계는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본디부터 갖고 있는 것임을 당신이 인지할 때 헌신이 일어날 수 있다. 당신은 관계를 맺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관계는 전생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다. 관계는 당신이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형성된 인지에 기반을 두며, 이제 다른 사람과의 인지를 통해 회복되었다. 이 인지는 사랑의 표현과 동반자 관계의 표현인 헌신devotion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지금 함께하는 당신 목적의 표현인 진정한 헌신commitment을 불러일으킨다.
당신은 어쩌면 “의무 없이 어떻게 헌신commitment이 있을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손해보는 일 없이 어떻게 헌신devotion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매우 기본적이지만, 분명하지도 않고 쉽게 알아차릴 수도 없다. 당신들은 손해보는 일 없이 헌신한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함께 앎에 헌신하기 때문이다. 이 앎은 앎에 대한 당신의 관념이 아니며, 앎 그 자체이다. 앎은 공통의 경험이다. 당신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하고나 함께 이 공통의 경험을 할 수는 없다. 이 경험은 당신의 특정 성장 단계에서 특정인들과 함께할 때만 일어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진가를 알아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지만, 헌신은 훨씬 더 큰 참여를 의미한다. 헌신은 개인들 사이에 있는 관계의 정점이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다. 헌신은 큰 가능성을 담고 있지만, 헌신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헌신을 두려워한다. 헌신은 당신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는 것으로는 생기지 않는다. 헌신은 당신의 참 자아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발로이다. 헌신은 성공이나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언젠가는 헌신을 발견해야 한다. 자녀 양육에는 헌신이 내재하여 있지만, 헌신에는 심지어 이것보다 더 큰 역할이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식과 본질적으로 관련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부모와 자녀가 싸우는 한 가지 이유이다. 본질적인 관계는 이 세상 너머에서 이루어진다. 본질적 관계는 오직 알아볼 수만 있고, 일단 알아보면 이 관계의 목적에 당신이 헌신함으로써 본질적 관계를 떠받친다. 우리는 헌신을 바른 상태로 가져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우리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헌신은 당신이 하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것이다. 헌신은 당신이 애써 쌓으려는 미덕이 아니라,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것이다. 앎은 관념이 아니라, 당신을 움직이게 한다. 앎은 당신 삶 속에 있는 힘이다. 어떤 것이 당신을 움직이고 있다. 당신은 이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것에는 엄청난 힘이 있으므로 당신은 아마도 이것을 두려워하겠지만, 이것은 당신에게 매우 자연스럽다. 이것은 당신의 중심부에서 나오지만, 지금 당신을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 당신 삶에서 표현되는 앎이다. 앎은 때가 되면 당신을 움직이게 하여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게 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헌신을 쉽게 인지할 것이다. 당신이 헌신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어떻게 헌신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사실상 일시적인 합의만 할 수 있다. 진정한 헌신은 당신 내면에서 나온다. 당신은 자신이 헌신해야 하는 것은 그리해야 하므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까운 미래에 당신이 얻는 것의 관점에서 보면 헌신은 이치에 맞지 않다. 어쩌면 해결하기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어쩌면 일시적으로 엄청나게 불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헌신은 당신 내면에서 나오며, 당신을 움직이고 있다. 헌신은 마치 당신이 자신을 발견하고 동시에 자신을 내주는 것과 같다.
여기서 당신은 자기 내면에 있는 큰 힘에 자신의 권한을 넘겨준다. 이 큰 힘은 당신이지만, 당신보다 더 크다. 당신인 것과 당신보다 더 큰 것 사이의 모순처럼 보이는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당신의 높은 자아는 큰 개인이 아니라고 나는 말했다. 높은 자아는 시간과 공간에서 돌아가는 삶의 조직⋅모체가 되는 것의 일부이며, 우리가 영적 가족이라고 부르는 특정 집단과 연결되어 있다. 높은 자아는 큰 개인이 아니며, 초자아가 아니다. 높은 자아는 본질적으로 당신이지만, 삶과 본질적인 관계에 있는 당신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봉사하는, 분리되지 않은 당신이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이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수준에서 관계를 이해할 때, 헌신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당신은 헌신하려고 시도할 필요는 없지만, 헌신을 받아들이려면 당신의 큰 힘이 필요할 수도 있다.
관계는 삶 그 자체와 같다. 당신은 실제로 삶이 무엇인지 알 때까지는 삶을 아는 척한다. 당신이 자신의 가정들을 내려놓고 다른 것을 발견할 때까지는 그 가정에 따라 행동한다. 관계에서 사람들이 시도한 것이 외로움과 고립감으로 인한 그들의 어려움을 없애지 못한 것은 꽤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어려움들은 해결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어려움들을 원상태로 돌리는 것이 신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매우 안달하지만, 중요한 것을 결정하기 전에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지금 확실히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맞는 진정한 배우자를 찾을 것인가?”라고 묻는다. 이것은 매우 흔하고 자연스러운 질문이다. “나에게 진정한 동반자들이 있는가?” 그것은 가능하지만, 먼저 당신은 더 중요한 것을 찾아야 한다. 진정한 동반자는 삶의 목적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목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원하지만, 목적은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관념만으로 만족한다. 그들은 우리의 말이 단순히 더 많은 관념으로 들린다. “지금 나는 이 교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이것은 저 교사가 말하는 것과 다르다. 나는 매우 혼란스럽다. 나는 이제 더 혼란스럽다.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목적을 먼저 찾아야 한다. 목적은 당신 내면에 내재하여 있다. 목적이 내재하여 있으니, 당신 관계에 의미와 방향이 있을 것이며, 진정한 결합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동반자를 찾으러 갈 필요가 없다. 동반자가 당신을 찾겠지만, 당신이 목적과 관련된 활동을 할 때 동반자가 당신에게 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돌아가는 삶이다. 당신은 삶과 독립된 것이 아니라, 지금 삶과 함께 일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당신의 문제는 당신의 독립이다. 독립에는 자유가 없다. 당신은 배제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어떤 자유가 있는가? 당신은 영적 가족을 잃었다. 당신은 앎을 잃었으며, 오직 소망과 두려움만이 당신을 안내할 것이다. 이것은 아주 문제가 많은 세상을 낳는다. 그렇지만 이것은 당신의 헤리티지가 아니다. 당신은 이렇게 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이렇게 외롭고 황량한 삶을 살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은 당신이 잃는다는 것을 당신은 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당신 내면에는 앎의 씨앗이 있다. 이 씨앗은 당신이 지금까지 얻고 회복한 모든 앎을 담고 있으며, 이 삶에서 당신의 특정한 부름도 담고 있다. 그리고 당신 목적에 본질적인 관계들을 인지하는 당신의 능력도 담고 있다. 이것은 선물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왕국이다.
공동체 및 동반자 관계를 찾는 열망에서, 당신은 항상 영적 가족을 찾는다.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성공을 가져오는 방식으로 찾아야 한다. 이것은 모든 세계에서 일어난다.
당신은 단지 배우기 위해서만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배움은 당신이 이곳에 온 이유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학생이 되는 것은 재미있지만, 학생들은 아직 삶과 결합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공부만 한다. 그들은 인간 삶의 주류에 진입하지 못했다. 여기서 당신의 목적은 당신의 앎을 발견하고 그 앎을 공헌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가장 간결한 정의이다. 사람들은 배운다는 미명 아래 가장 위험하고 파괴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그것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배우는 데 좋은 경험이다.” 등 이런 식으로 말한다. 그런 경험은 관계를 맺을 이유가 아니다. 당신은 진실을 받아들일 때만 거짓을 버릴 수 있다. 당신 내면에 품은 앎에 있는 것이 바로 진실이다. 앎은 당신을 통해 미묘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주기적으로 앎은 당신을 통해 극적인 방식으로 표현된다. 앎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앎은 관념 중에서 선택하지 않는다. 앎은 안다. 앎은 행동한다. 앎은 지적 생명체가 지닌 본능이다.
우리가 지지하는 것이 바로 앎이다. 앎은 여기서 당신이 이루는 모든 성공의 중심이다. 앎은 당신의 가장 큰 열망이고 가장 큰 두려움이다. 그렇지만 앎은 발산하는 방식에서 매우 자비롭다. 당신에게 앎의 축복은 매우 분명하다. 당신이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앎이 어떻게 실수에서 당신을 보호하려고 했고 당신이 최선의 선택을 하고 바르게 적용하도록 당신을 안내했는지 당신은 깨달을 것이다. 심지어 앎은 때때로 당신의 삶을 구했다. 앎은 신비한 힘이며, 많은 사람은 앎을 자신 너머에 있는 힘으로 여긴다. “신이 와서 나를 이 끔찍한 상황에서 구해주었다!” 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은 앎이다. 만약 당신이 앎을 분별하려는 당신의 능력과 성향을 파괴한다면, 당신 삶은 끝나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의 존재는 다른 시기에 당신에게 다가가려고 할 것이다.
관계에서 결심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분명하다. 인지해야 할 것들이 있다. 당신은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알아내야 한다. 큰 자극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내용이 없는 끌림이 많다. 시시해 보이지만 그 내면에 신의 힘이 있는 다른 끌림들이 있다. 여기서 분별력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앎이 지시할 때까지는 헌신하려고 시도하지 말라. 헌신하려고 시도하면 부정직해질 것이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헌신한다고 말하겠지만, 첫 시험에서 당신은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계획을 마무리할 수 있는 일시적 동의를 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 그런데 헌신은 훨씬 더 크다.
헌신과 함께하면, 당신은 소수의 사람이 할 일을 기꺼이 할 것이고, 박수갈채를 거의 받지 않고도 기꺼이 그 일을 할 것이다. 왜 그러는가? 당신이 꼭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삶의 본질은 바로 이 “꼭 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유를 아주 매우 탐하지만, 자유는 그들에게 앎을 분별하는 기회 말고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우리가 개개인의 내면에 있는 앎을 말할 때, 우리는 이 본질적인 추진력을 말한다. 앎은 강박적이지 않으며, 두려움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앎은 깊고, 일관성이 있으며, 의논하지 않는다. 앎과 함께하면 당신은 살아 있게 된다. 이때 삶이 당신 내면에서 활발하다. 여기에서 헌신이 나온다. 당신이 헌신하는 것은 헌신하는 것이 좋아서도, 당신이 더 영적으로 보여서도, 당신이 헌신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도 아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당신과 함께 계속 행복하게 하려고 헌신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종류의 자기만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꼭 해야 하므로 헌신한다. 그것이 전부이다. 이제 설명은 부차적이다. 헌신은 전적으로 자연스럽다. 헌신하지 않는 것이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바로 여기서 인지가 실제로 시작된다.
내가 말한 것처럼, 당신이 이런 경험을 할 때까지, 경솔하게 헌신하지 말라. 학생이 되라. 헌신적일 때, 사람들은 어떤 일에 자신의 삶을 내준다. 그렇게 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희생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헌신의 특성은 매우 독특하다. 당신은 헌신이 표현되는 것을 자주 보지 못할 것이다. 헌신이 있는 곳에는 관찰자들 사이에 큰 불안감이 있을 것이고 큰 영감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다음 단계를 밟을 수 있으려면 헌신은 필수이다. 그때 당신은 영적 가족과 함께할 것이고, 당신의 헌신은 당신이 다음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 세상은 당신이 궁극적인 현실에 합류하는 곳이 아니라, 당신이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 영적 성장에서 높은 경지에 도달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당신은 이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당신은 한쪽으로 치워야 하는 것을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세계에서 끝마칠 수 있는 사람들은 매우 단순한 삶을 산다. 그들은 내면이 단순하다. 그들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담하고 용감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자비로운 단순함이 있다. 그들은 이제 세상에 봉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어떤 것도 가져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봉사하려는 자신의 열망과 봉사하여 얻은 자양분으로 이 세상에 봉사하는 교사들과 연결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앎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이 세상에 봉사하는 이들을 감독하는 불가시 존재들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삶은 당신이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완벽한 성격도, 완벽한 몸도 없다. 이것들은 일시적이다. 삶은 이런 완벽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이런 완벽을 요구하지 말라. 그것은 매우 몰인정한 일일 것이다. 당신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당신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행동과 습관을 조정해야 하겠지만, 당신에게서 발산되기 시작하는 진정한 능력을 수용하기 위해서만 조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 변화는 자부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용함을 위한 것이다. 당신은 단지 앎을 더 깊이 경험하고 앎에 맞는 표현을 찾기 위해서만 자기 삶에서 변해야 한다. 변화는 그처럼 간단하다. 변화에 대한 거창한 팡파르는 없다. 파괴적인 것들은 파괴적이므로 포기한다. 이제는 좋고 나쁜 문제가 아니라, 방해가 아닌 도움을 선택하는 문제이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이 삶 속으로 들어간다. 이때 당신은 가시 영역과 불가시 영역 모두에서 당신에게 봉사하며 돌아가는 삶을 보기 시작한다. 당신은 자신과 함께 있는 영적 현존을 느끼기 시작하고, 현존을 분별하기 시작한다. 당신 삶은 아직 정의되지 않았지만, 움직이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당신의 삶이 앎에 봉사하면서 순조롭게 진행될 때까지는 당신이 삶의 부름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전에 자신의 부름을 경험하는 경우는 드물다. 삶의 부름을 받아들이려면 당신은 완전히 준비된 상태여야 한다.
사람들은 “글쎄, 당신이 말하는 이 헌신이란 무엇인가? 헌신하면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나는 이제 그저 봉사자인 것 같다.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가?”라고 말한다. 이득이 있다. 큰 이득이 있다. 자아의식, 방향 감각, 다른 사람들과의 진정한 연합, 안녕감, 삶의 연속성 등 이것들이 당신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아닌가? 여기서 이 모든 것이 당신 행복에 기본적이지 않은가? 삶은 당신에게 제공하기로 한 것을 제공할 것이고, 당신은 앎을 발견하면 삶에 주기로 한 것을 줄 것이다. 이것을 하는 데는 평생이 걸릴 것이다. 빠르고 쉬운 길은 없지만, 시간을 절약하는 직접적인 방법들은 있다. 그러므로 헌신은 당신이 받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헌신은 삶과 당신의 본질적인 관계를 말하고, 이 관계가 분리의 관념을 완전히 끝내기 때문이다.
앎은 세상에서 가장 신비하면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세상은 앎에 무지하므로 앎을 입증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앎은 고향에서 당신이 가져온 유일한 현실이며, 당신이 가져갈 유일한 현실이 될 것이다. 앎은 당신 내면에 있는 빛이다.
이 삶에서 당신에게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진정한 관계, 진정한 공동체, 진정한 목적, 진정한 부름을 위한 것이다. 이것들이 당신에게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다.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든, 무엇을 하려고 하든,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든, 당신에게는 이것들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이것들을 없앨 수 없다. 이것들은 당신의 중심이다. 이 필요한 것들에 응답할 수 있는 수단을 받아들였을 때,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것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위치에 있을 것이다. 앎이 앎에 불을 붙인다. 앎이 당신 내면에서 더 분명해지면, 앎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을 붙일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