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9월 20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인류는 유사 이래 신과 약속을 맺어왔으며, 이렇게 스스로 정한 약속을 종종 신의 약속이라고 생각하였다. 인간은 결코 신성의식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인간의 약속은 신이 항상 해온 신성한 약속에 따라 변했다. 신성의식은 너무 크고 신비스러우며 이성의 이해범위를 훨씬 뛰어넘어 확장되어 있으므로 인간의 윤리와 법칙은 신성의식을 결코 완벽하게 반영할 수 없다.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하지만, 신은 신비롭다. 당신이 따르도록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것은 신비롭다. 당신은 세상에 있지만, 당신의 신비로운 큰 삶은 세상 너머에 있다.
신비는 당신 삶에서 핵심이자 바탕이 되는 부분으로써 당신이 지금 느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신비는 당신 현실에서 큰 부분에 해당되며, 이 세상 너머에 있는 기원과 운명 그리고 당신 관계의 신비를 나타낸다. 또한 당신 내면의 깊은 경향, 앎의 힘이 주는 신비, 창조주가 심어 놓은 것으로 내면에서 발견되기만 기다리는 큰 지성을 나타낸다.
인간의 윤리와 약속은 변해 왔고 인간의 이해는 진화해 왔지만, 신은 인간에게 신성한 약속을 쭉 해오면서도 그 약속은 실제로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이 이해하기에 새로운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것을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 약속은 이 세상이 생기기 훨씬 전에 맺어졌고, 인간이 생기기 훨씬 전, 인류 역사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맺어졌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시간이 시작될 때, 즉 분리가 생성되고 물질우주가 시작될 때 맺어졌다. 그래서 이 약속은 인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창조의 한 부분인 우주의 수백억, 수천억의 다른 많은 종족에게도 적용된다.
약속은 당신의 본성이나 존재에 핵심이자 세상에서 당신의 목적에 바탕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간과하기가 쉽다. 신과의 약속을 인간이 만든 것은 그 당시 상황이나 역사, 사람들의 기질에 따라 달라지며, 사람들이 그들의 처지나 미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바뀐다. 그러나 신의 약속은 셀 수도 없는 많은 상황에서 모두 참이어야 하므로 인간의 약속을 훨씬 뛰어넘는다. 왜냐하면 우주에는 셀 수도 없는 많은 종족과 행성이 있고 신은 이 모든 곳에서 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주에는 수많은 종족이 있으므로 신성한 약속은 모든 생명체에게 바탕이 되며, 인류에게만 특별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다. 또한 우주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으므로 어떤 특정 종교에만 맞추어져 있지 않다.
바로 그 때문에 신의 새 계시가 매우 새롭다. 왜냐하면 새 계시는 당신에게 수많은 형태로 존재하는 삶의 파노라마를 펼쳐 보이면서 당신을 지구라는 틀 너머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진짜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를 이해하면 창조의 작은 단면만이 아니라 창조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속은 한 민족이나 한 국가와 맺은 것이 아니며, 한 종교나 한 시대에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인간의 철학이나 윤리, 이해에 묶여 있지 않으며, 훨씬 더 근원적이다. 약속은 분리된 물질현실에서 사는 모든 종족과 모든 방면에 진리여야 한다.
그래서 약속은 어떤 점에서 보면 매우 단순하지만, 약속대로 살아가는 일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신에게 정말 정직해야 하고, 분별력을 가져야 하며, 자신이나 남들의 삶을 심사숙고해야 한다.
분리에 대한 해답은 태초에 당신이 받았다. 해답을 찾는 일은 신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문제이다. 내면에 음성 중에 어떤 것을 따를 것인지는 당신의 딜레마이며, 큰 진리와 현실을 체험하도록 열망과 수용능력을 키우는 일은 당신의 몫이다.
사람들은 게을러서 단순하게 정의 내려주기를 바라고, 그들 앞에 모든 것을 펼쳐주기를 바란다. 진짜 노력을 기울이고 분별력을 길러야 자신의 본성과 여기 온 목적에 바탕이 되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심사숙고하려고 하지 않는다.
신의 신성한 약속이 주는 기적은 그 약속에서 발산되는 각자의 목적과 운명이다. 그래서 약속이 전 우주에 걸쳐 동일하고 일관된 것이지만, 그 표현은 셀 수 없이 많고 이해할 수도 없다. 마치 같은 땅과 현실의 바탕에서 생겨난 다양한 삶과 같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이해범주를 넘어선 것이지만, 체험 영역을 넘어선 것은 아니다. 당신 내면에 신이 창조해놓은 깊은 지성, 당신의 일부로써 신을 떠나본 적이 없고 아직도 여전히 신의 약속에 따라 살고 있는 지성, 당신이 이 지성과 결합하면 그때마다 당신은 이 약속을 체험한다.
“이 약속이 무엇인지 설명해보라.”라고 당신은 요구할지도 모른다. 신은 당신 내면에 앎을 심어 놓았으며, 이 앎은 완벽하게 안내해주는 지성이다. 신은 당신에게 깊은 양심을 주었으며, 이 양심은 바로 그 지성의 일부이다. 신은 당신을 세상에 봉사하라고 파견하였으며, 이 봉사는 특정 환경에서 특정인들과 결합하여 독특한 능력으로 특정 상황에서 하도록 되어있다.
이 모든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이 일들이 모두 어디서 일어날 것인지, 지금은 당신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삶의 끝 부분에 도달했을 때라야 뒤를 돌아보면서 당신의 주된 업무를 세상에서 했는지 못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주된 업무는 이성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며 마음 표면 아래 깊숙이 있는 지성, 즉 앎이라는 지성과 깊이 결합된 것에 바탕을 둔다. 당신은 세상에 봉사하려고 여기 왔으며, 자신의 갈등이나 딜레마, 그리고 이곳 문화나 이 특정 행성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여기 왔다. 앎은 창조물의 일부이니, 앎이 당신에게 이 일이 가능하도록 해줄 것이다.
그래서 ‘신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라거나, ‘신이 이곳으로 가라고 해서 나는 이곳으로 간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신이 이렇게 하라고 해서 이것을 한다.’라거나, ‘신이 원하기 때문에 나는 저것대신 이것을 선택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려면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현존과 안내에 따라 당신이 그 일들을 하며, 그런 결정을 내린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앎이 신의 뜻과 현존을 해석하여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피해야 할 것과 다가가야 할 것을 알려주고, 고려해보아야 할 것과 고려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이처럼 작동되는지는 마음 표면 저 밑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결코 인간의 추측으로는 알 수 없다. 생각하는 마음, 세상 마음, 즉 문화나 교육을 통해 심어지고 당신의 기질이나 환경을 통해 생성된 마음으로는 알 수 없다.
삶에서 큰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앎의 힘을 따른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앎의 힘을 따를 때, 세상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제약, 즉 관계에서 생성되는 문제들, 지구를 비롯하여 모든 행성에서 일어나는 풀릴 수 없어 보이는 난제들에서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자유를 얻기 때문이다.
우주에서는 개인의 자유가 매우 귀한 데다가 자유가 없는 다른 나라들 속에서 자유를 확립하여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니 다른 행성으로 여행할 수 있게 되면, 오늘날 인류가 안고 있는 일부 문제들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큰 공동체를 아는 데 꼭 필요한 부분이므로 인류를 위한 신의 새 계시에서 이것 또한 알려준다.
새 계시는 태곳적 약속을 말한다. 그 약속은 당신이 내면의 앎을 통해 신의 현존과 힘을 경험하고, 당신 앎과 공명하는 다른 사람의 앎을 통해 그들 안에 있는 신의 현존과 힘을 경험하는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왔으며, 이것이 여기 파견된 이유이다. 당신은 분리 속에 살고 있으니, 깨달음은 항상 상대적이다. 그러나 당신이 얼마나 앎을 따를 수 있고 얼마나 당신 삶이 앎에 의해 형성되고 인도받느냐에 따라 당신의 자각 수준이 달라지고 주요 관계들이나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다.
신은 길을 단순하게 만들었지만, 단순한 것에는 요구사항이 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으며, 선호하는 것도 타협하는 것도 없다. 그러나 이성만으로 깊은 것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이성은 깊은 것을 이해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중요도가 훨씬 떨어진 일들이나 실생활을 다루는 데 쓰는 마음의 기능이다. 이런 범위를 넘어서려면 당신은 앎과 함께해야 한다.
당신은 또한 세상에서 지혜를 쌓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지혜를 배우기 위해 있다. 그 지혜는 인정 많고 자비롭지만, 매우 날카롭고 명확하며 강하고 효과적이다. 당신은 앎과 함께 태어나지만, 지혜를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어느 세상, 어느 행성에서든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그 세상에 맞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
신의 새 계시에는 <큰 공동체 지혜>가 있으며, 이 지혜는 인류 스스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에게 큰 공동체에서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해주는 대단히 진귀한 선물로서 이미 당신에게 가 있으며, 당신들이 우주의 지적 존재들을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은 이미 지구에 와서 매우 위험한 방식으로 그들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당신이 신에게 져야 할 근원적인 책임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아 앎을 어떻게 따르는지, 마음속에서 일고 있는 다른 음성에서 앎을 어떻게 분별해내는지 배우는 일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앎에 어떻게 귀 기울이는지, 주위 사람들의 의견·태도·믿음 가운데서 어떻게 앎을 찾아내는지 배우는 일이다. 그래서 앎이 당신 삶을 재구성하여 당신 내면의 깊은 정직을 삶에 표출하는 일이다. 이것은 당신 자신에게 진실함을 뜻한다. 당신의 관념·믿음·선호에 진실한 것도 아니고 당신의 마음자세나 문화적 입장에 진실한 것도 아니며, 당신의 깊은 본성에 진실한 것이다. 그 본성은 앎에 의해 표출되고 앎에 역점을 두는 것으로 표출된다.
신은 앎을 통해 분리된 자들을 구원한다. 인류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와는 매우 다른 종족들, 환경과 역사가 다르고, 믿음과 윤리가 다르며, 마음자세나 연상이 다른 수많은 다른 종족들을 구원한다. 오직 창조주의 천재성만이 이런 광범위한 구원의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당신의 절대적인 종교 관념을 모두 큰 공동체 맥락에서 완전히 상대적으로 만들 것이다. 이처럼 상대적이기 때문에 당신은 신의 뜻을 명확하게 알아볼 수 없으며, 당신 주위 모든 사람이나 모든 것에 보편적 혹은 절대적인 방식으로 신의 뜻을 적용해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이 앎 계단은 신의 새 계시 안에 포함되어 있다. 지금 세상에 전달되고 있는 새 계시는 인류가 지금까지 접한 어떤 것과도 다르며, 천년도 넘게 인류에게 전해준 어떤 것보다 더 크다. 새 계시는 많은 점에서 새로운 것이지만, 달리 보면 태곳적부터 변하지 않은 것이다.
인류와 신의 신성한 약속은 우주와 신의 신성한 약속이다. 그래서 신은 당신의 일상생활을 지나치게 염려하거나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신이 이렇게 하라고 했다. 신이 이것을 가져다주었다. 신이 그것을 제거해주었다.’라고 말할 때, 만약 그들이 정직하게 말하고 그들 체험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앎과 결합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주인은 이런 식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주의 주인은 매우 슬기롭기 때문이다. 전염병, 전쟁, 자연재해, 그 밖의 삶 속에서 겪는 재해, 분리 속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불행, 세상 마음만을 따르면서 근원과 분리된 삶에서 오는 곤경, 이 모두는 신이 한 일이 아니다.
지구 상황을 보라. 이곳은 지상낙원 같은 곳이지만, 인류는 과학기술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지구를 아주 빠르게 파멸시키고, 미래를 어둡게 하며, 자연유산을 고갈시키고 있다. 인류는 지구가 더 이상 미래에 살 수 없는 곳이 될 만큼 지구를 너무 심하게 바꾸고 있다. 우주선을 타고 우주 다른 곳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지구와 같은 거주행성은 인류보다 훨씬 더 강한 종족들이 오래전부터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신의 약속이 이 시대와 지구를 다루고, 사람들 각자가 내려야 할 결단과 선택을 다룬다. 또한 사람들이 무엇에 가치를 두고, 무엇에 열중해야 하며, 무엇에 응답해야 하는지를 다룬다. 사람들 각자가 이와 같은 일을 다룰 때, 신의 근원적인 약속이 단순히 환경이나 개인의 삶만이 아닌, 인류 전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지배력을 갖는다.
왜냐하면 인류의 미래는 국가 지도자뿐만 아니라 사람들 개개인이나 집단이 내리는 수많은 결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앎의 힘과 현존으로 결정을 내리느냐, 아니면 개인의 뜻이나 두려움, 야망으로 결정을 내리느냐 하는 것이다. 인류의 어리석음이나 실수, 비극, 충돌은 모두 그 일에 관련된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어떤 것에 영향을 받고 결정을 내렸느냐에 따라 생겨난 문제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신의 약속이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이 여기에는 이 법칙, 저기에는 저 법칙을 쓴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당신이 문화적 윤리나 국가 법률에 따라 특정 계율이나 원칙을 따라야 하거나 때로는 그럴 필요가 있기도 하지만, 이런 일은 신과 당신의 약속을 나타내는 앎과의 근본 관계를 어기지 않는 한 괜찮다.
이때 사회적 양심이 아닌 내면의 깊은 양심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판단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신의 약속은 근본적으로 당신 자신에게 정직하고 당신의 깊은 본성에 진실할 것을 당신에게 요구한다.
국가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실수를 줄이기 위해 윤리와 법률을 제정하거나 적어도 이상적으로 공정제도를 만드는 것은 괜찮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지만,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개인의 깊은 양심이다.
그 양심과 결합하려면, 당신은 매우 정직해야 하고, 깊은 수준에서 참이 무엇인지 알 만큼 당신의 두려움이나 선호하는 것을 멀리 떼어놓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연습은 극소수 사람이 드문 상황에서만 했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충분히 해보지 않아서 그들에게 어렵다. 그래서 신의 새 계시에서는 <앎으로 가는 계단>을 제공하여 개개인이 내면에 있는 앎의 힘·현존과 근본 연합을 구축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절대성을 띤 믿음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앎은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똑같은 그 일을 하지 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내 믿음은 신의 뜻이다.”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신은 그 뜻을 셀 수도 없는 많은 방식으로 개개인을 통해 내면의 것을 밖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당신이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어떻게 예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부정직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서 결국 다른 사람들의 삶을 망치게 한다.
분리된 자는 앎을 통해 회복되며, 사악한 자에게는 천국이 마련되어 있다. 지옥은 지금 당신이 머문 곳, 적어도 이와 비슷한 곳이다. 당신은 더 깊은 지옥, 즉 더 깊은 분리 상태로 빠질 수 있지만, 결국 신은 모든 창조물을 불러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내면의 앎을 파괴할 수 없으며, 거기에서 달아날 수도, 자신을 격리시킬 수도 없다. 하지만 당신은 앎을 밀봉하고 부정할 수 있으며, 앎의 현존과 힘을 믿지 않을 수는 있다. 당신은 자신의 깊은 양심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지만, 그 양심을 지울 수는 없다. 그 양심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기 전에도 당신과 함께 있었고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함께 있을 것이며, 언제나 함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이곳에 있는 동안 앎과 결합하는 것이 진짜 영성이고 진정한 영적 성장이다. 어떤 종교에서도 <앎으로 가는 계단>은 할 수 있다는 점을 볼 때, 이 공부는 가장 중심이 되는 행위이고, 근간이 되는 영적 훈련이다. 신을 믿든, 신에 관한 인간의 관념을 믿든, 아니면 그런 가르침들이 말하는 것을 모방하든, 당신이 앎과 근본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면 이 모든 것들은 아무 효과가 없을 것이고, 당신은 여전히 신과 분리되어 있을 것이다. 당신은 여전히 상실·가난·실패·죽음에 대한 두려움, 신에 대한 두려움 등 온갖 두려움에 사로잡혀 당신의 관념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의 종교에 매우 독실하다고 여기는 많은 사람이 여전히 신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근원적으로 내면의 앎과 연결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앎과 근원적인 관계를 맺는 대신, 그들의 믿음이나 근본주의, 종교 경전에 몰두했다. 그래서 표적을 놓치고 잘못된 것에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 삶의 원천이자 의미인 신비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모든 것이 설명되기를 바라며, 의문을 가진 채로 살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답을 이용하려고만 한다. 그래서 자신을 두려워하고, 마음의 표면 아래로 깊이 내려가기를 두려워하며, 모든 상황에서 그들 믿음을 바꾸어 버리는 신의 약속을 두려워한다.
많은 사람이 ‘자연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그 종교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태곳적부터 맺은 가장 중요한 관계인 앎을 믿음이나 관념, 사고체계, 종교기관이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깊은 경험 대신, 믿음이 그들의 주 관심사가 되지만, 체험은 믿음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어떤 믿음보다도 훨씬 더 강하고 오래간다.
종교에서 보여주는 것들, 즉 엄청난 조직이나 성명서, 계율, 이념, 우주관, 신학 등 이 모든 것들과 개개인의 내면에 살면서 발견되기만 기다리는 신비가 크게 다른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체계가 필요하므로 새 메시지는 윤리를 알려주고 세상에 참여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준다. 하지만 그 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열려있다. 왜냐하면 앎은 같은 목표를 얻기 위해 각기 다른 사람들하고 다른 방식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 영적가족에게 돌아가면,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당신을 쭉 지켜보던 영적가족이 당신에게 “하기로 한 일을 했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면, 당신에게는 어떤 믿음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므로 그때는 믿음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목표를 성취했는지 못했는지 그냥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여기에 판단이나 비난은 없으며, 단지 당신이 다시 해야 한다는 완전한 앎만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결국 인간의 실수를 모두 없애버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그런 생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인간의 실수는 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니, 그 실수는 만든 자가 없애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내면에 앎의 힘과 현존이 없다면, 이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오직 앎만이 악을 극복할 수 있다. 오직 앎만이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서조차 당신을 안내할 수 있다. 오직 앎만이 누구와 함께 있어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고 모든 상황에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오직 앎만이 겉보기에 좋은 것과 진짜 좋은 것의 차이를 알려줄 수 있다.
이것이 신의 약속이다. 참으로 신비롭고 강력하지만, 글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앎은 모든 사람, 모든 상황, 모든 환경에서 일한다. 이것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이것을 서술한 새로운 신학을 만들기는 어렵다. 그러니 그 대신 종교는 윤리적이고 실용적인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즉, 기본적인 영적 훈련인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받아들여 사람들에게 해보도록 독려하고, 이 시대에 맞는 지혜를 제시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이성의 영역 너머에 있는 앎과 결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성자가 학자와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학자는 해석하지만, 그렇다고 체험까지 깊은 것은 아니다. 학자는 잘해야 지금까지 세상에 있는 지혜를 긁어모아 현재 세상 상황에 대입해보는 것이고, 잘못하면 이념만을 가지고 인류를 평가하는 사람이 된다.
따라야 할 중요한 것들과 따르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신의 새 메시지 안에 적혀 있다. 이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대부분의 사람이나 상황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것들이고, 매우 신뢰할 만한 것이지만, 당신은 여전히 앎과 깊이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만약 앎을 제쳐두고 새 메시지를 따르려 한다면, 당신은 아주 드물게 조금씩 받는 경우를 빼고는 신의 은총과 힘, 현존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신은 약속에서, 당신은 분리될 수 있지만 오직 일시적이며 시간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고, 여전히 창조의 일부이며, 결국에는 되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이 약속은 인류의 종교단체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며, 앎과 깊은 결합에 인류와 똑같은 문제를 가진 우주 다른 종족들의 단체에서 말하는 것과도 매우 다르다.
우주에는 깨달은 종족이 존재하지 않는다. 깨달은 종족이라면 이런 현실 수준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물질현실에서는 모두가 분리 문제를 다루고 있다. 현명한 이들이 있고 때로는 현명한 국가 지도자들도 있기는 하지만, 모두 똑같은 근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변하는 물질현실에서 생존과 안전보장뿐만 아니라, 자신은 내면에서 무엇을 따르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 내면에서 무엇을 따르며 이 모두가 전체적으로 무엇을 따를 것인가 하는 근본 문제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앎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어떤 해결책들을 따르는 일에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하게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옳은 일을 하는 데 희생할 것이고, 의미 있는 일을 하기로 결정할 것이며, 베짱이처럼 그 순간만을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투자할 것이다.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있겠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적어질 것이고, 과거를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기반을 다질 것이며, 지구자원을 탕진하는 것이 아니라 보전하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구는 인류가 가진 모든 것이고, 인류 후손들이 현재 인류가 보전한 것에 의존해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자원을 탕진하고 나서 그 자원을 얻기 위해 우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지구와 같은 곳은 희귀할 뿐만 아니라, 혹시 찾았다 하더라도 이미 다른 종족들이 보호하고 있거나 탐내고 있다.
이것을 이해함으로써 인류가 청소년처럼 파괴적이고 막무가내인 종족에서 벗어나 다음 성장과정으로 들어간다. 지구자원을 보호하여 큰 공동체 개입에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인류는 전쟁을 멈출 것이고, 현재 상황을 완전히 달리 이해할 것이다. 게다가 인류에게 정말 옳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데 동기부여해주는 것도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이것은 개개인에게 영향을 주는, 앎의 힘과 현존, 모든 생명체와 신의 약속에 모두 바탕을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