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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shall Vian Summers
on 2월 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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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5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사람들은 신에게 많은 것을 원한다. 영감과 보호를 원하고, 이점을 원하며, 기적을 원한다. 그리고 자기 잘못이나 다른 사람들의 잘못으로 생긴 결과에서 구원을 받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신이 아무런 대가 없이 많은 것을 제공해 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자기 삶이 지시를 받거나 영향을 받거나 제지를 받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신이 자신을 위해 아주 많은 것을 해주기를 원하며, 마치 신이 개개인의 변덕스러운 욕망을 채워주는 하인 또는 심부름꾼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사람들은 신이 고통과 전쟁을 멈추어 주기를 원하지만, 사실 그들이 사는 방식이나 타인을 대하는 방식은 전쟁을 조장한다. 그들은 신이 개입하기를 원하지만, 오직 자신의 요청대로, 자신의 욕망과 지시대로만 개입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신이 실망스러워 보일 때, 그들의 믿음은 깨지거나, 불신이 커진다.

그들은 종교나 종교적 가르침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저지르는 온갖 실수에 대해 신을 탓하며,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고 신을 탓한다. 혹은 신은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곳은 신이 사람들에게 정말 자유롭게 효과적으로 신의 뜻을 전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그래서 신은 당신 내면에 깊은 지성인 앎을 심어 놓았다. 이 지성은 세상에 의해 좌우되거나 변질하지 않으며, 당신이 통제하거나 조작할 수도 없고, 자신을 위한 일종의 자원으로 이용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신과 매우 왜곡되고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맺는다. 만약 조금이라도 신을 믿는다면, 그들은 신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많은 것을 원하고 큰 기대를 한다. 그들은 신이 자신의 종교적 믿음과 종교적 이념을 입증해 주기를 원하며, 메신저나 성자가 재림한다고 그들 종교에서 말하는 예언을 신이 이루어 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자신의 반대자들, 자신이 비난하는 이들을 신이 비난하고 짓밟기를 원하고, 신이 지옥을 만들어 이러한 형벌이 영원히 집행될 수 있기를 원하며, 신이 고서에 묘사된 것처럼 되기를 원한다.

혹은 사람들은 신이 일종의 현대인과 같기를 원하거나, 노인이나 성녀와 같기를 원하거나,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존재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신들이 신의 뜻을 알며, 신의 의도를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신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되기도 하고, 당신이 원하지 않는 모든 것이 되기도 한다. 당신은 자신의 두려움과 욕망, 판단과 주장을 신에게 투사한다. 이것은 관계가 아니다. 이것은 환상이고 자기 마음의 투사이다.

신과 당신은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당신 삶에서 신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것은 매우 가치 있는 질문이지만, 당신이 그런 기대와 요구 없이 나아갈 때만, 의미 있는 질문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신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겪는 혼란과 끊임없이 저지르는 실수를 이해할 때만, 의미 있는 질문이 될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당신은 왜 이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가? 이 관계가 당신에게 무엇을 줄 것으로 기대하는가? 당신이 비밀리에 품고 있는 소원은 무엇인가? 당신은 신에게 무엇을 숨기고 싶은가? 신이 당신에 대해 또는 당신의 과거 행동에 대해 모르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오직 관계만을 맺고 싶은 열망으로 앞으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여기에 작용하는 다른 동기가 있는가?

당신의 접근 방식이 중요하며, 자신의 의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의도를 알지 못하면, 당신은 신과 관계를 맺는 본질이나 당신의 기대에서 비롯된 실망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원하거나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신은 왜 주지 않는지, 당신이 바라는 것들이나 실제로 필요한 것들이 어떻게 충족될 수 있는지, 이 문제에서 신이 당신을 어떻게 도울 것인지 등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고 느끼므로 신에게 힘을 구한다. 어쩌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힘이 없으므로, 초자연적인 것을 추구할 수도 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힘이 개입하여 자신에게 사회적 힘을 주고,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해 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당신의 접근 방식이 중요하다. 그리고 당신의 의도에 대해 명확하고 솔직해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은 신과 관계 맺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신은 접근할 수도 없거나, 존재하지도 않거나, 당신의 요청에 응답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오직 간청하거나 조종하는 사람의 자세로만 신에게 다가간다면, 신은 당신의 경험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이성이 마주하는 문제이다. 이성은 필요한 것들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만약 이성이 영악해지고 조종하려고 한다면, 어쩌면 이성은 심지어 자신의 속임수조차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정말 가슴의 문제이다. 당신을 이 관계로 이끄는 것은, 이 관계가 당신을 위해 해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는 바로 이 절실한 긴박함이다. 이것은 마치 자연스러운 끌림, 말하자면 중력과 같은 것이 당신을 이 관계로 이끈다.

당신은 당신 내면에 신이 심어 놓은 깊은 지성, 앎이라고 하는 지성 안에서 신을 만난다. 종종 진짜가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환영이나 초자연적 사건이나 그와 비슷한 다른 것들을 제외하면, 당신이 신을 만나는 곳은 실제로 이곳이다.

신은 당신의 이성을 통제하거나 지휘하지 않는다. 이성은 대부분 당신의 문화, 가족, 친구들에 의해 지배된다. 이성은 세상 자체에 의해 통제되는 당신의 세상 마음이다.

하지만 당신의 깊은 마음은 세상에 의해 통제되지 않으며, 신과 연결되어 있다. 바로 이 영역에서 당신이 신과 소통하며,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고 삶에서 큰 성취로 이끌기 위해 당신 내면에 신이 준 영향들을 분별한다.

따라서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 또 생각하는 마음과 이 깊은 마음을 연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나아갈 진정한 방향을 분별하기 시작하는 길임이 분명하다. 신은 당신의 끝없는 질문에 많은 답을 주지 않을 것이고, 당신과 대화를 나누지도 않을 것이며, 하루 종일 당신과 수다를 떠는 친구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신은 당신의 일상적인 루틴과 삶의 세부적인 온갖 것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신은 방향을 정하고, 당신이 이 방향을 찾아서 따를 수 있도록 당신을 제지하고 격려한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당신을 제지하기도 하고, 그런 다음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도 한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당신이 혼자서 품을 수도 있는 환상에 이끌리지 않으므로, 여기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에게 하나의 단서이자 신호가 된다.

여기서 당신은 삶의 깊은 흐름에서 오는 신호와 단서를 읽는다. 왜냐하면 신과 당신의 관계는 대화를 나누거나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흐름, 큰 방향을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신은 앎이 당신 삶의 방향을 바꾸고 진정한 우선순위를 재정립하도록 허용하는 법을 배우며, 자신을 무엇에 내주고 무엇에 내주지 말아야 하는지, 누구와 함께 있고 누구와 함께 있지 말아야 하는지, 높은 목적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적절한 형태는 무엇인지를 당신에게 조언하도록 허용하는 법을 배운다.

여기서 당신은 경험을 통해, 즉 앎과 끊임없이 함께하고 이때 경험하는 것을 통해 앎이 당신의 이해를 형성하도록 한다. 여기서 신은 과거의 많은 관념이나 가르침도 아니고, 심지어 고대 선지자들의 예언도 아니다. 신은 당신 내면에 살아 있는 경험이다.

그래서 질문은 “어떻게 신과 함께하는가?”이다. 만약 신이 대화하지 않는다면, 또 신이 이념도 아니고 단순히 선물을 베푸는 이도 아니라면, 어떻게 신과 함께하는가?

신과 함께하려면, 당신은 앎을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 내면에 신이 심어 놓은 지성이기 때문이다. 오직 앎만이 당신이 정말로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떻게 당신 길을 찾을 수 있는지 안다. 앎은 이성의 영역과 범위 너머에 있다.

여기서 이성은 따라야 한다. 이성이 이끌 수는 없다. 하지만 이성은 삶의 특정 세부 사항을 이해하도록 당신을 돕는 일에서 매우 중요하다. 삶의 세부 사항을 이해하고, 당신 일을 관리하고,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고, 기술을 다루고, 시간을 관리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루는 일에서, 이성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성이 당신에게 진정으로 생산적이고 건설적이 되려면, 이성은 여전히 앎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당신은 심지어 신을 믿지 않아도 되고, 종교를 갖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신앙심이 깊든 깊지 않든, 특정 종교의 길을 믿든 믿지 않든, 앎과 연결될 수 있다. 이것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여기에서 성실하고 정직해야 하며, 순수한 의도가 있어야 한다. 신은 당신의 잘못된 요청, 숨겨진 의도, 부정직한 간청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영악해지고자 한다면, 오직 침묵만 있고 아무것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약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오직 침묵만 있고 아무것도 받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우주의 창조주를 속일 수 없으며, 영악한 속셈이나 교묘한 질문으로, 혹은 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덫을 놓으려 하는 것으로, 당신 내면에 신이 심어 놓은 앎을 속일 수도 없다. 당연히 당신은 자신이 정말로 진실하고 정직하다면, 이런 속임수나 조종으로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신뢰가 필요한 부분은 항상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외부의 힘이나 이해할 수 없는 신을 신뢰하거나 고대에 만들어진 일종의 의인화된 신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어떤 것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 내면에 있는 큰 힘을 따르는 것이다.

비록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더라도, 당신이 자기 내면에 있는 앎을 찾아 따를 수 있다면, 그리고 여기에서 당신에게 필요한 인내와 분별력과 신중함을 기를 수 있다면, 당신은 신과 연결되고 신의 길을 따를 것이다.

당신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신을 찾을 수 있지만, 신은 바로 내면에 있다. 당신 내면에 신이 심어 놓은 지성은 바로 내면에 있다. 정말 정직하고 진실한 방식으로 실제로 당신을 신과 재결합시켜 줄 것은 바로 당신 내면에 있다. 그리고 신은 다른 사람들 내면에도 있다. 앎은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통해 당신에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앎은 당신의 분리를 끝내기 위해, 즉 분리의 악몽, 분리의 절망, 분리의 비현실성을 끝내기 위해 이곳에 있다. 그리고 앎은 당신을 앎 자체와 다시 연결하고, 다른 사람들과 다시 연결하고, 세상과 다시 연결함으로써 이 분리를 끝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연결할 때는 당신 주변 삶에서 정말 필요한 것들을 고려하여 당신의 진정한 선물과 공헌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할 것이다.

이것은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아니며, 참여하고 공헌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원을 짓고 엎드려 절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따르도록 당신 내면에 신이 심어 놓은 것을 당신이 따를 수 없다면, 이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단지 당신의 생각과 오만한 견해를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당신이 여기에서 만들어 낸 것이 무엇이든 그 안에는 어떤 영감도 없을 것이다. 당신 사원은 비어 있을 것이다. 영은 거기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원을 짓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로 느끼므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일에 영과 현존이 있을 것이다.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돌보고, 가장 단순하고 평범한 방식으로 지역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들에게도 영감과 현존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신이 당신에게 준 일을 함으로써 신을 알게 된다. 즉 그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함으로써, 또 그 과정에서 이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당신에게 무엇을 드러내는지를 배움으로써 신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종교적 이념과 믿음을 두고 다투면서 끊임없이 논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앎을 따른다면, 그들에게는 서로 논쟁을 벌이는 어떤 실질적 쟁점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앎은 세상에서 위대한 평화 중재자이다. 당신은 이념을 두고 전쟁을 벌일 수도 있지만, 앎은 결코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에게 많은 노력과 집중을 요구할 것이다. 이것은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쩌다가 한 번씩 하는 어떤 것도 아니다. 당신은 신과 가벼운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특정 상황에서 특정인들과 함께 특정 일을 공헌하도록 세상에 파견되었다. 당신을 세상으로 오게 한 사명은 가벼운 관계가 아니며, 단순한 우정도 아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안내나 위안이 필요할 때 가끔 신에게 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삶에 진지해지기로 결심할 때, 그리하여 자신이 정말로 중요한 어떤 것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현재의 일이 이것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할 때, 당신은 더 크고 더 성실한 의도를 가지고 이 관계에 다가올 것이다. 단순히 한 번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다가올 것이다.

이 참여는 당신의 의도를 정화하고 당신의 이해를 높여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당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신은 어떤 것을 양보하고 어떤 것을 따르며, 자신의 기량과 지성을 활용하여 진짜인 것과 가짜인 것, 좋은 것과 좋아 보이기만 하는 것을 분별하는 법을 배운다.

여기에서 당신은 자신의 의도와 가치관과 목표를 재평가하게 될 것이며, 이때 앎이 당신을 데려가고자 하는 곳으로 기꺼이 가려고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싸우고 투쟁하며 이 참여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관계는 시간을 두고 커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 관계는 매우 거대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 관계가 다른 관계의 보좌역처럼 보일 것이다. 마치 신이 먼 곳에 있는 상담사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관계는 당신의 삶과 활동에 더 기본이 되고 더 중심이 될 것이다.

여기서 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그냥 주기보다는 해야 할 것을 당신에게 준다. 다시 말해 건설적인 활동, 당신 삶을 새롭게 해주는 것, 문제에서 벗어나게 하고 위험하거나 비생산적인 관계에 대한 당신의 집착을 끊게 하는 것을 준다.

앎은 당신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므로, 당신은 그 방향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당신 삶이 명확해지기 시작하고, 당신은 내면에 있는 큰 힘을 따를 자유를 얻을 것이다.

이것은 먹고, 자고, 기본적인 안전을 보장받으며 사는 자유를 넘어서는 큰 자유이다. 외부를 지향하기보다 내부를 지향할 수 있는 자유, 야심이나 집착이나 욕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힘과 현존을 따르는 자유이다.

신은 당신을 지배하지도, 정복하지도, 장악하지도 않으면서 당신을 안내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끌림이며, 사랑과 동질감에서 오는 끌림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신을 안다. 왜냐하면 당신은 신을 알 수만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의 산물이 아니다. 이것은 믿음보다 더 크다. 이것은 동질감이며, 심오한 경험이다.

당신은 이 경험을 아주 자주는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당신이 세상에서 공헌하면서, 세상에 계속 머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신과 당신의 연결에서 오는 황홀경을 너무 자주 경험한다면, 당신은 세상의 어려움과 도전을 다루면서 세상에 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신은 당신이 세상에 집중하고, 오늘과 내일, 또 장래에 해야 할 일에 집중한 채, 세상에 머물도록 이 경험을 제한한다. 신에게 빠지려는 것은 당신을 세상에 오게 한 바로 그 목적에 어긋날 것이다.

만약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이 필요했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조정해야 했는지, 당신의 불만이나 야심, 또 세상에서 당신을 끌어당기는 다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와 안내하기 위해 당신이 가는 길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당신이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곳에서 당신의 중요성과 존재의 가치를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신은 이곳에 와서 당신을 정복하고, 노예로 삼고, 가혹하게 지배하지 않는다. 신은 당신을 자연스럽고 불가사의하게 끌어당긴다. 당신을 다시 끌어당겨 당신 내면에 있는 앎과 다시 연결하고, 당신 삶에서 역할을 담당할 다른 사람들과 당신을 다시 연결한다. 그리고 세상을 자비와 이해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고, 분노와 보복을 이겨낼 힘을 주고,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강인함과 인내할 힘을 준다.

여기서 당신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지닌 이념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를 보고, 그들 내면에 있는 앎의 힘과 현존을 찾는다. 여기서 당신은 한 종교 지도자가 진정으로 종교적인지, 아니면 그저 일련의 관념을 믿는 사람인지 살펴본다.

여기서 당신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자기 내면과 다른 사람들 내면에 있는 앎에 응답한다. 여기서 당신은 심지어 신을 언급하지도 않으면서 세상에서 신을 대변한다.

여기서 당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큰 현실(a greater reality)을 따름으로써 큰 현실(a Greater Reality)을 실연한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을 충족시키기보다는 당신 주변 세상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들을 채워준다.

여기서 당신은 마음을 끊임없이 힘들게 하는 것들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두려움이나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상실에 대한 끔찍한 예측, 필요한 것이나 애착에서 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며, 남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사람들이 쓰고 있는 가시 면류관과 같은 것들이 아주 많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관계이다. 이것은 인위적이지 않고, 이념적이지 않으며, 정치적이지 않다. 그리고 공격적이거나 군사적이지도 않다.

신이 당신을 이끌어 행하게 하고, 베풀게 하고, 이해하게 하는 것을 통해 당신은 신을 알게 된다. 이때 당신은 세상에 머물며 세상에 집중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신을 안다.

여기서 당신은 세상에 글을 쓰는 펜촉과 같은 하나의 매개체가 된다. 여기서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나아가게 하고 돕는 사람, 인간의 탐욕과 무지로 인해 파괴되고 황폐해진 자연계를 보존하고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된다. 여기서 당신은 여론이나 정치적 신념에 좌우되지 않으며, 종교적 극단주의나 경제 원칙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제 당신에게는 큰 힘이 있으며, 내면에 깊은 연결이 있다. 그리고 당신은 여기서 서서히 신을 안다. 왜냐하면 여기서 당신의 초점은 당신에게 새로운 방향을 주는 앎에 맞추어 자기 삶을 재정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방향은 항상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고, 마침내 당신은 이제 그 방향을 발견하여 따를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되었다.

이때 당신은 자기 주변 어디에나 존재하고, 매우 많은 사람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유혹과 속임수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다. 이때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을 놓고 자기 내면에서 벌이는 끔찍한 투쟁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 큰 자유이다. 그리고 이것을 대체하는 것이 앎의 힘과 현존이다.

여기서 당신은 신의 메신저들의 큰 도전과 큰 공헌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당신은 삶이란 사람들 대부분이 믿거나 고수하는 것과는 정말 다른 것임을 알게 된다.

이때 당신은 천국을 예비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 자기 자신, 세상과 맺는 진정한 관계의 맥락 안에서 자기 삶을 재정립할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깊은 관계의 상태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이나 자신과 성공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면, 당신은 이 상태에 들어갈 수 없다. 당신이 이곳에서 심지어 한 사람과도 성공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데, 어떻게 완전한 관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당신은 여기서 세상이 어떻게 훈련의 장이 되고 준비의 장이 되는지 알게 된다. 이것은 단지 이 시대와 이곳에 공헌하는 것이나 영감을 받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감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 너머에 있는 큰 삶을 대비해 당신이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심판의 날이 없다. 당신이 큰 삶으로 나아갈 준비가 됐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다. 준비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자신의 편견과 속박을 극복할 능력을 길러 앎을 경험하고 따르는 자유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이 수준의 삶에서 계속 일해야 할 것이다.

신은 당신의 이념에는 관심이 없다. 신은 독선에는 관심이 없다. 신은 유일한 복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신은 오직 일련의 원칙만을 기반으로 인류를 통제하고 다스리는 법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신은 개인의 힘과 부를 내세우는 데는 관심이 없다. 신은 미모나 매력이나 영악함에는 감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은 정직하고 성실한 것에 응답하고, 진정으로 필요한 것들을 표현하는 것에 응답한다. 그리고 개개인이 이 큰 관계를 진정으로 구할 때, 또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하기보다는 따를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앎이 개개인의 내면에서 활성화된다.

이것은 금욕 생활이나 수도원 생활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런 역할은 단지 매우 드물고 독특한 이들에게만 부여되기 때문이다. 신의 계획은 세상에서 살면서 서로 돕고 세상 자체를 돌보는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

버려야 할 잘못 배운 것이 매우 많다. 당신의 진보는 이전에 당신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세상에 대한 당신의 인식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 것들을 내려놓고 제거하고 옆으로 제쳐두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신은 당신이 더 큰 방향을 따르고, 삶에서 더 큰 지혜와 분별력을 얻을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신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이때 당신은 신이 당신을 파견하여 하게 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가장 깊고 자연스러운 성향을 따를 것이며, 혼에 필요한 것을 채울 것이다.

당신은 열렬한 영적 수행을 통해서도,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라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을 통해서도 신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는 신을 아는 것은 당신을 삶이나 세상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맺는 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길이고, 진정한 길이며, 모든 위대한 성자들이 강조한 길이다. 그리고 가슴의 길이고, 앎의 길이다.

종교에서 의례와 기적, 화려한 행사를 제거하면, 무엇이 남는가? 당신에게는 앎을 따를지 말지, 앎이 전해야 하는 것을 전할지 말지, 신의 자연스러운 끌림을 따를지, 아니면 세상의 온갖 다른 끌림을 따를지에 대한 개인적 선택이 있다.

앎은 당신이 이러한 다른 끌림을 얼마나 포기해야 하는지를 당신에게 알려줄 것이다. 하지만 앎은 당신에게서 친목의 기쁨, 훌륭한 음식, 자연 체험, 예술 감상 등 세상에서 사는 단순한 즐거움을 빼앗지 않을 것이다. 앎은 이런 것들을 당신에게 주면서 기뻐한다. 하지만 파괴적인 것이나 혼란스럽게 하는 것, 당신을 기만하는 것에서는 멀어지게 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므로, 신을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본연의 당신은 신이 세상에 파견한 공헌자이다. 하지만 이것을 알려면, 당신은 당신 내면에 신이 심어 놓은 지성을 따라야 한다. 오직 지성만이 길을 알고, 오직 지성만이 진짜인 것과 가짜인 것, 당신에게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분별하도록 당신을 도와줄 수 있다.

오직 앎만이 남들을 비난하는 것에서 당신을 벗어나게 해주고, 당신에게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주며, 당신이 이곳에 와서 따르고 공헌해야 하는 진정한 방향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할 것이다.